공의회
公議會
〔라〕Concilium · 〔영〕Coun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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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가 열리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입장하는 주교(교부)들의 행렬.
신앙, 윤리, 규범 등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주교들 의 회합. 콘칠리움(Concilinum)이란 용어는 교회 밖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주교 들의 회합, 그러한 회합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지칭한다. 시노두스(συνοδς)도 세계 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 를 말할 때 함께 사용된다. 〔종 류〕 교회사에서 보면 한때 혼합 공의회(Concilin mixti)가 있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 성직자들 (주교)과 평신도들(왕, 공작, 후작, 백작 등)이 한자리에 모 여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도 다루었으므로 이같이 불렸다(톨레도 공의회와 프랑크족의 대다수 공의회 들). 동방과 서방에서 자주 공의회들이 열렸는데, 이를 일반 공의회(Concilium generale)라고 하였다. 현행 교회법 에는 지역 공의회인 관구 공의회(Provincila)와 전국 공 의회(Plenarum), 그리고 세계 공의회(Oecumenicum)등 세 가지 공의회가 있다. 관구 공의회 : 관구장(Metropolita)의 주재 하에 각 교 구의 주교들이 모여 갖는 회합이다(교회법 440조, 442조) . 현재의 교회 구역을 로마 제국 시대의 구역과 혼동해서 는 안되지만, 지역상으로 볼 때 현재의 국가 단위와 같 다고 할 수 있다. 전국 공의회 : 여러 관구의 주교들이 모여 회합을 갖 는 것으로, 사도좌의 승인을 받아 개최한다(439조, 441 조). 예를 들면, 1852~1884년에 있었던 미국의 볼티모 어 공의회는 미국 내의 사목 활동 조정을 위해 3회에 걸 쳐 개최되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1931년 조선 교구 설 정 100주년을 기념하며 처음으로 전국 공의회가 개최되 었다. 세계 공의회 : 전세계의 가톨릭 주교들(총대주교, 수좌 주교, 대주교, 아직 성성되지 않은 지역의 주교까지 포함)이 모 여 회합을 갖는 것으로, 여기에는 그 밖의 성직자들(추기 경, 수도원장, 각 분야의 전문 고위 성직자, 총장, 성직자가 없는 수도회의 장상들)도 참여한다. 또한 명의 주교(titulari)들도도 초빙되어 심의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초빙된 신학 자나 법학자들은 자문권만 행사한다. 투표권은 개인별로 행사한다. 세계 공의회는 교황만이 소집할 수 있으며, 교회법상 교황이 의장이 되어 진행 순서를 정하고 의제 들을 설정한다. 그러나 공의회 의장의 동의가 있으면 의 제들을 참가자들의 투표로 결정할 수도 있다. 세계 공의 회는 전세계 교회에 대하여 최고의 권한을 갖는다. 공의 회의 결정 사항들(decreti)이 실제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교황의 비준과 공표가 있어야 한다. 교황의 결정에 반대 하여 공의회에 상소할 수는 없다(446조) .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교구 대의원 회의나, 대부분의 국가에서 의장 주교나 추기경 또는 교황 대사나 교황 사 절들의 주재하에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는 주교 회의는 공의회의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실제로 교구 대의원 회 의는 한 교구의 주교와 성직자들이 모이는 회합으로서, 토의 결정을 하는 회합이 아니라, 주교에게 의견을 제 시하는 회합이다. 여기에서는 주교만이 법을 정할 수 있 다. 주교 회의 역시 공동 관심사에 관하여 단순히 의견 을 개진하는 회합으로서, 사실상 법적인 효력을 갖지 못 하며, 토의 내용 역시 공의회의 결정과는 달리 구성원들 을 법적으로 구속하지 못한다. 〔지역 공의회의 역사〕 교회 역사상 최초로 열린 공의 회는 49~50년에 율법 문제에 관하여 열렸던 예루살렘 사도 회의였다. 여기서는 예식의 준수 의무와 모세 율법 에 따른 구체적인 규범들을 문제로 다루었고, 특히 이방 인 개종자들에 대한 할례의 의무를 논하였다(사도 15, 135 : 갈라 2, 1-10). 이 공의회는 현재 교회법으로 엄밀히 따지면 공의회로 보기 힘들다. 이후 2세기 중엽까지는 로마 제국 내에서 발생하는 이단들이나 파스카 축일의 일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교들이 많은 노력을 하였 지만 공의회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지역 공의회가 자주 개최되어 하 나의 관례가 되었다. 이단자들이 집전한 세례의 유효성 문제, 박해 때문에 배교한 신자들의 문제, 이단 · 사설들 에 대한 단죄 문제, 박해 때문에 배교한 주교들이나 부 당한 주교들의 파면 문제 등이 다루어졌다. 264년과 268년에 안티오키아에서 열렸던 두 차례의 공의회는, 이 지역 주교들에 관한 문제로서 사모사타의 바울로의 이단설과, 그의 부당한 생활을 문제로 다루었다. 소아시 아,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지에서 80여 명의 주 교들이 참석하였다. 여기서 4세기 동방 지역 공의회들의 모형을 볼 수 있다. 같은 유형의 공의회인 카르타고 공 의회는 255~256년에 성 치프리아노 주교의 주재하에 세례 논쟁을 다룬, 아프리카의 지역 공의회였다. 4세기 초부터는 지역 공의회의 소집이 정규화되었다. 니체아 공의회의 제5 규정은, 새 규범을 정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가능한 한 통일된 관습을 제정하려 한 것으 로서, 매년 사순절과 가을에 각 지역의 주교들이 관구 주교를 중심으로 모여 특별히 규범 문제들을 다루는 것 을 상례화하였다.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서방의 첫 공의회는 314년의 아를르(Arles) 공의회로서, 도나투스 주의(Donatism: 배교자나 이단자가 베풀었던 성사들은 무효이 므로 다시 성사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 분쟁을 해결하기 위 해 개최하였다. 이 공의회는 밀라노의 관용령(313)이 나 온 다음해에 개최되었고 콘스탄틴 황제가 소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를르 공의회에서 니체아 세계 공의회가 열리기까지는 그 기간이 매우 짧았다. 그리스도의 신성 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곧 새로운 종교적 분쟁 을 일으켰다. 콘스탄틴 황제는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 여 325년에 전 교회의 주교들을 니체아에 소집했다. 〔세계 공의회의 역사〕 가톨릭에서는 21번의 공식적인 세계 공의회가 있었다.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학문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들 공의회 를 전체적으로 인정하는 교황의 법적인 선언은 없었다. 로마에서 갈라진 동방 교회는 초기의 7개 공의회만 세계 공의회로 인정한다(여기에 692년의 트룰로스 공의회도 첨가 한다). 성공회는 초기의 4개 공의회만을 인정한다. 가톨 릭에서도 초기의 4개 공의회를 특별히 중요시한다. 이들 공의회는 삼위 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기본 교의들 이 신조로 선포되었고, 이러한 신앙 고백들은 가톨릭 신 앙의 기초가 되었다. 세계 공의회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공의회 : 제1차 니체아(325), 제1차 콘스탄티노 플(381), 에페소(431), 칼체돈(451), 제2차 콘스탄티노플 (553), 제3차 콘스탄티노플(680), 제2차 니체아(787), 제4 차 콘스탄티노플(869) 공의회들이다. 이 공의회들은 모 두 황제들이 소집한 공의회들로서, 황제들은 식견이 부 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를 주재하였고 때로는 그들 의 주장까지 강요하였다. 이 공의회들은 정치적인 면들 과 매우 관련이 깊었다. 교황들은 여기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으나, 제1,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교황 대리인 이 참석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황 사절들이 참석하였다. 적어도 칼체돈 공의회 이후부터는 교황 사 절들이 주교는 아니라도 교황을 대리하여 공의회를 주재 하였고 참석자들 대다수가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었다. 다루어진 안건들은 주로 신앙 문제로서, 특히 삼위 일체 교의와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의들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로의 수도 이전(330), 서로마 제국의 멸망 (476), 게르만 민족들의 출현(5~6세기), 이슬람의 침입 (7~8세기), 교황과 비잔틴 간의 정치적 알력, 칼 대제의 대관식(800) 등 정치적인 사건들이 동서 교회를 서서히 분열시키면서 마침내 1054년 동서 교회를 완전히 분열 시켰다. 중세기의 공의회 :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7회의 공 의회들 모두가 서방에서 열렸으며, 참석자들 또한 거의 서구인들이었다. 제2차 리용 공의회는 그리스와 라틴 교 회 간의 일치를 다루었기에 예외적이다. 라테란 공의회 에는 동방의 주교들도 참석하였으나, 십자군에 의해 설 립된 국가의 주교들로서 모두 라틴 예식을 따르는 지역 주교들이었다. 초기의 마지막 공의회와 이 시기의 첫 공 의회 사이에는 253년이라는 기간이 필요하였다. 이 시 기의 공의회로는 로마에서 열렸던 4회의 라테란 공의회 (1차 1123, 2차 1139, 3차 1179, 4차 1215) 이외에 두 번의 리용 공의회(1차 1245, 2차 1274)와 비엔느(Vienne) 공의 회(1311)가 있다. 이들 공의회는 추기경들의 비호를 받으 며 교황들이 직접 주재하였다. 중세기의 세계 공의회들은 교황 선출, 이단 논쟁, 성 직 서임권 논쟁, 황제나 기타 국가 원수들과 교황 간의 쟁투(속권과 성권의 논쟁), 동서 교회의 일치, 십자군 운 동, 동방의 라틴 제국, 기사 수도회와 십자군이 설립한 국가들, 신자들의 의무, 주교와 참사 위원들의 임무, 평 화와 전쟁 등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특히 강직한 교황들 은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은 참가자들의 범위가 획기적으로 확대되었 다는 점이다. 주교들 이외에 1059년부터 교황을 선출하 게 된 추기경들, 자체적으로 지역 주교들의 관할권을 벗 어나게 된 여러 수도회의 대표로서 수도 원장들, 당시 교회 개혁을 주도하던 수도원 장상들, 주교좌의 참사 위 원들과 탁발 수도회의 총장들, 또한 그리스도교 국가의 정치 권력자들과 영주들도 참석하였다. 문예 부흥기의 공의회 : 15~16세기에 열렸던 콘스탄 츠(1414), 피렌체(1438~1445), 제5차 라테란(1512~1517),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전 시 기와 이 시기의 첫 공의회 사이에는 교회 역사상 두 중 대한 사건이 있었다. 첫째, 교황들이 당연히 거주했어야 할 로마를 떠나 아비농에 체류한 사건과 둘째, 서구의 가톨릭이 세 파로 갈라진 서구의 대이교가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 사건은 교회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성직계의 퇴보와 교황청의 퇴락으로 이어졌 으며, 문예 부흥기의 소산인 개인주의적인 향락 정신을 낳게 했다. 개인주의와 때맞추어 추진되지 못했던 쇄신, 당시 교계에 대한 경멸, 이상적인 초기 교회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교회의 모습, 교황청의 재정주의(fiscalism)에 대한 반발 등은 특히 아비뇽 시대에 심하게 나타났고, 결국에는 가톨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독일과 루 터의 반발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리 하여 종교의 통일성과 서구 문화의 통일성이 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공의회들은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과 긴밀하 게 연관되어 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서구의 대이교와 명시적으로 관련된 것이었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루터의 개혁에 대한 가톨릭의 답변이었다. 그리스도교 세계, 특 히 동방을 위협하던 터키의 세력 역시 공의회와 관련이 깊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였던 요한 8세는 피렌 체 공의회에서 동서 교회의 일치를 받아들였으나(1439), 불행하게도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인들의 손에 함락됨으로써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사례는 1274년의 리용 2차 공의회에서도 이미 일어났었다. 이 시기 공의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큰 비중을 지 니지 못했던 제5차 라테란 공의회와, 보완적인 성격의 피렌체 공의회를 제외한 모든 공의회들이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개최되었다. ② 중세기의 공의회와는 달 리 교황의 주도권이 현격하게 감소되었다. 이는 특히 교 황의 권위를 감소시킨 서구 대이교에 따른 결과였다. ③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국가별 투표권이 채택되었는데, 이 는 아주 예리한 문제로서 국가주의적 분할 세력이 지배 적이었기 때문이다. 공의회의 주요 안건들은 머리와 지 체의 개혁(reformation in capite et membris)이었다. 교황과 공의회의 관계에 있어서 공의회가 교황 위에 군림한다는 소위 공의회 우위설(conciliarisimus)이 명백하게 나타난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근대의 공의회 : 전 시대의 마지막 공의회인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근대의 첫 공의회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까지는 306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야 했다. 이 기 간 동안에도 중대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① 종교 전 쟁, ② 프로테스탄트, 특히 칼뱅파의 보급, ③ 영국 교회 와 가톨릭 교회의 분, ④ 합리주의에 입각한 계몽주의의 점진적인 확산으로 초자연의 부정, 교회와 국가의 완전 분리,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 속화 현상, ⑤ 아메리카와 프랑스의 혁명, 유럽에서 전세계로 확산된 민주주의, ⑥ 신성 로마 제국의 완전 소멸(1806)과 이상으로 여겼던 중 세 그리스도교 개념의 소멸 등이다. 교회가 봉건 사회나 절대 국가 체제와 밀접히 결합한 때가 과거에는 있었으 나, 이제는 완전히 분리, 해체되었다. 독일 지역 의 주교-영주들과 프랑스의 궁정 주교들이 사라 지게 되었고, 또한 때때로 교회에 많은 부담을 안겨 주었던 절대 군주들의 보호권도 거의 사라 졌다. 트리엔트 공의회에 이은 가톨릭의 개혁과 주교들의 사목 활성화로 그리스도교의 생활과 규범이 정착되어, 교회의 내적 생활도 활발해졌다. 대부분의 가톨릭 주교들과 신자들은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단결하게 되었다. 모든 이들의 의식 혁신으로 가톨릭은 초국가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는 참석한 교부들의 숫자나 지역으로 볼 때 교회가 눈에 뜨일 만큼 보편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또한 국가간의 장벽을 허물고 모든 민족들의 문 화를 인정하고 모든 지역 국가들을 초월함으로 써, 세계성을 띤 공의회임이 드러났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무류권에 대한 교의적 선언으로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다. 그로 인해 공의회 자체가 거부 되기도 하였으나, 가톨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다 룬 것으로서, 규범과 조직력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 요성을 갖는다. 교황의 무류권 선언이 거의 1세기 후에 열린 요한 23세의 새로운 공의회 소집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새롭고 중대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정치 사회 측면에 서는 계층간의 갈등으로 인한 사회 문제, 1917년의 러 시아 혁명, 제1, 2차 세계대전, 종족과 이념에 따른 전체 주의,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의 독립 등이다. 과 학 영역에서는 상호 교류와 정보 전달을 쉽고도 빠르게 해주는 발명품들이 생겨나고, 원자력의 이용과 우주 비 행도 가능하게 되었다. 종교 생활 영역에서도 새로운 변 화가 일어났다. 예를 들면 주교와 추기경들을 포함하여 선교 지역에서 현지인 성직자들이 나왔고, 세계의 복음 화에 참여하는 평신도 사도직, 추기경단과 로마 교황청 의 국제화, 교회의 재일치 운동, 교황 속권의 종말 등이 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1965)의 계획 수립과 진행에 큰 영향을 끼쳤고 또한 앞으 로의 공의회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조건과 의의〕 세계 공의회란 전체 교회의 모든 주교 들이나 대부분의 주교들이 모인다고 성립하는 것이 아니 며, 더구나 모든 지역 교회의 대표들이 참석한다고 붙여 지는 이름도 아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제1차 바티칸 공 의회만이 세계 공의회일 것이다. 또한 세계성이란 교황 이 공의회를 소집한다는 데서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실 상 세계 공의회란 시초에는 다만 일반 공의회(concilin generali)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 플 공의회는 동방의 일반 공의회로 소집되었다. 반면에 세계 공의회로 소집되었지만 그렇게 인정받지 못한 449 년의 에페소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도 있다. 교황의 뜻을 처음으로 반대하여 소집된 세계 공의회도 있었다. 제2차 콘스탄티노플(553)과 콘스탄츠 공의회가 그 단적인 예이 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 공의회의 성격을 다음과 같 이 규정할 수 있다. ① 공의회의 참여 문제에 있어서 원 칙적으로 전체 주교들이 참여한다. ② 전체 교회를 대변 한다는 의식이 있다. ③ 공의회의 결정 사항과 특히 교 회를 대표하는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최종 판단에 있어 교황의 비준은 결정적인 요소이다. 세계 공의회는 전세계 가톨릭 주교들이 참여하는 회의 로서, 적절하지는 않지만 현대 의회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공의회의 참가 임원들, 특히 주교들은 백성들이 선출한 대표들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교황이 복음 선포와 직분 수행을 위 해 파견한 사람들이다. 공의회의 진행과 토의 내용에 있 어 교황은 최고의 권한을 행사한다. 그 내용은 교황이 승인하는 한에서만 그 효력을 발생한다. 교황은 토의 내 용 가운데 어떤 것은 삭제, 수정할 수도 있다. 공의회는 다수나 소수의 비례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현대 의 의회와 다르다. 특히 신앙 문제에서 관례상 공의회는 만장 일치를 추구한다. 때문에 여러 의견과 신학파들간 의 대립이 있을 경우에는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고 보 아 선언을 유보하며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현대의 의회 와 또 다른 점은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의의 내용은 수정 될 수 없다는 점이다(irreformabilis). 공의회는 전체 교회 의 영구적인 동의를 요구하는 신앙의 진리를 다루기 때 문이다. 도덕과 교회의 규범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들은 모든 신자가 지켜야 하는 의무가 되며, 모든 신자에 대 해 구속력을 갖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에 반영되는 것이 다. 그러므로 세계 공의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가시적인 일치와 생명력을 나타내는 성 대한 선언이다. 교회는 교계와 교황의 최고 지도 하에 교의적인 선언을 내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르침 없이 제시한다는 인식과 교회의 규범적인 조치를 통해 최고의 사목권을 행사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 시노드 ; 주교 대의원 회의 ; ⇦ 보편 공의회) ※ 참고문헌 《교회법전》/ H. Jedin, Breve storia dei concili, brescia : Herder-Morcellianana, 6 ed. 1983/ A. Rimoldi, Concilio, Dizionario storico religioso, Roma : Editrice Studium, 1966/ Acta et Decreta Primi Concilü Regionalis Coreani 1931, Hong Kong, 1932. 〔金學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