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9 ~1376년 교황이 교황청과 함께 프랑스 남부의 아비농(Avignon)에 체류한 시대의 교황들을 일컫는 용어.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유배에 비유되어 당시부터 근래까지 일반적으로 '아비농 유배' (Captivitas Avenionensis)라고 불려 왔으나, 지금은 사실 그대로의 표현인 '아비농 교황' 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아비용 체류의 원인] 교황이 아비농에 체류하게 된 간접적인 원인은 그 당시 교황권에 대한 프랑스 왕권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강해진 데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4세(1285~1314)와 성직자 과세 문제로 대립한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가 국왕을 파문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한 채 사망한 데 있었다. 후임 교황 베네딕도 11세(1303~1304)는 이 대립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교황이 사망한 뒤 추기경들간의 대립으로 약 11개월 동안 교황좌가 공석이었다가, 1305년 6월 보르도(Bordeaux)의 대주교인 프랑스인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교황 글레멘스 5세(1305~1314)인데, 그는 처음에 로마로 갈 생각이었으나 이탈리아의 불안한 정세로 포기하고, 그 해 11월 15일 필리프 4세가 참석한 가운데 리용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 교황은 계속 프랑스에 머무르다가 결국 1309년에 아비농에 정착하였다. 그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무엇보다도 필리프 4세로 하여금 보니파시오 8세 교황에 대한 사후(死後) 재판 요구를 단념하게 하려는 희망에서였다. 그러나 그를 계승한 6명의 교황들도 계속 아비농에 머무르게 되면서 향후 약 70년에 걸친 아비농 교황 시대가 시작되었다.
교황 글레멘스 5세는 그의 처음 기대와는 달리,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하여 취해진 파문을 비롯한 모든 조치를 철회하라는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요구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재판하기 위한 공의회를 프랑스에서 개최하라는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더욱이 프랑스에서 열린 비엔(Vienne) 공의회(131~1312)에서 필리프 4세는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산 문제까지 심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312년 교황과 국왕의 사절들 사이에 이루어진 비밀 협상에서 타협이 이루어져, 교황이 이 수도 회의 해산에 동의하는 대신 국왕은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재판을 포기함으로써 필리프 4세와의 대립은 일단 해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로마 귀환은 또 다른 이유에서 계속 지연되었다.
1314년 4월 20일 교황 글레멘스 5세가 사망한 후 2년 4개월의 공석 끝에 선출된 요한 22세(1316~1334)는 교황청을 이탈리아의 교황령인 볼로냐(Bologna)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소요 때문에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어 후임 교황 베네딕도 12세(1334~1342)에 의해 아비농에 교황궁의 건축이 시작되어 다음 교황 글레멘스 6세(1342~1352) 때 완성되었는데, 이 호화스러운 교황궁과 거대한 교황청사는 교황들에게 이탈리아에서보다도 더 큰 안전성을 제공해 주었다. 또 교황 인노천시오 6세(1352~1362) 때까지 교황령의 소요 상태가 계속 수습되지 않아, 로마로의 귀환은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이러한 이유들이 처음에 일시적으로 생각되었던 아비농의 체류를 예상 외로 오래 끌게 하였다. 물론 13세기에도 로마와 이탈리아의 정치적 불안으로 교황의 로마 밖 체류는 비일비재했었으나 그것은 단기간이었고, 로마와 이탈리아 밖에서의 장기간 체류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로마 귀환의 실현] 그 사이 일련의 외적 상황들이 로마 귀환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프랑스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포함한 여러 가지 문제로 프랑스와 영국 간에 벌어진 백년 전쟁(1339~1453)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은 악화되었다. 반면 이 전쟁에 참가한 용병(傭兵)들의 횡포로 아비농은 더 이상 교황에게 충분한 보호와 안전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의 교황령들은 이 무렵 스페인 추기경 알보르노스(G.AC. de Albornoz, 1310?~1367)의 노력으로 정치적인 안정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정치적 · 군사적 수완으로 1353년 이래 교황령 내의 소요를 진정시킴으로써 교황의 로마 귀환을 촉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교황 우르바노 5세(1362~1370)는 프랑스 궁정과 일부 프랑스 추기경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367년 4월 아비농을 떠나, 이듬해 10월 로마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교황이 아비농을 떠나던 해에 알보르노스가 사망하고 말아 교황령의 정세가 다시 불안해졌고, 이에 교황은 체류 3년 만인 1370년 9월 아비농으로 다시 돌아와 이곳에서 사망했다. 후임 교황인 그레고리오 11세(1370~1378)는 교황령의 전쟁으로 로마 귀환 계획이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의 권고 등에 힘입어 전쟁이 끝난 후인 1376년 9월 아비농을 출발하여 이듬해 1월 17일 로마로 돌아왔다. 이로써 교황의 로마 귀환이 최종적으로 실현되어 아비농의 교황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평 가] '아비농 유배' 라는 호칭이 가리키고 있듯이, 아비농 교황 시대는 동 시대인들인 이탈리아의 학자 페트라르카(F. Petrarca, 1304~1374)와 시에나의 가타리나 등으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았다. 또 그 후의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일반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중요한 고문서들의 계속된 간행과 연구에 힘입어 현대의 역사가들은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렸는데, 그 주요한 평가의 변화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교황이 완전히 프랑스 왕권에 종속되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의존 관계는 부정할 수 없고, 더구나 교황 글레멘스 5세의 경우 필리프 4세의 압력에 굴복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그 밖의 교황들은 거의 전 시기에 걸쳐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었고, 로마 귀환 문제까지도 자유로이 결정하고 실행하였다. 두 번째로, 아비농의 교황들은 유럽에 평화를 재건하고, 새 십자군으로 성지를 다시 탈환하고, 교황령을 구하는 것 등 대외 활동에서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단 퇴치 · 수도회 개혁 · 대외 선교 등 대내적인 교회 활동에 있어서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어야 한다. 페르시아와 인도까지의 선교, 특히 중국에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을 파견하여 북경에 성당을 건립하고 1307년에 북경대교구까지 설정한 것은, 아비농 교황들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아비용 시기의 일곱 교황들은 거의 모두가, 개인적으로는 경건한 삶을 살았던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는데, 그중 우르바노 5세가 가장 덕이 높은 교황이었다. 또 베네딕도 12세, 인노천시오6세, 우르바노 5세 등 3명의 교황은 교회 개혁과 수도회 개혁을 진지하게 추진한 개혁적인 교황들이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말하면 이 시대가 교회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쁜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교회와 교황권에 손해를 입힌 것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 세력의 우세로 인하여 교황좌의 보편적 의의가 상실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수(稅收) 확보를 위한 새 제도들이 교황청에 대한 악평에 본질적으로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그 당시는 교황들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추기경, 나아가 교황청의 고관들도 대부분이 프랑스인들이었다. 아비농 내의 이러한 프랑스적 요소의 절대적 우세는, 결국 독일과 영국과의 적대 관계까지 초래하여 교황좌의 초국가적이고 보편적인 권위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또한 세수 확보를 위한 새 제도들은, 수입이 점차 감소되는 데 대한 대안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물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 이행하던 당시 상황에의 적응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수입을 증대시키고자 끊임없이 고안해 낸 새 수단과 규모와 방법은 무엇보다도 불안과 위기를 조성하였다. 관면, 특권, 은사에 대한 수수료, 교황의 성직 서임에 대한 부과금, 교황에게 유보된 주교나 수도원장 서임에 따른 부과금, 팔리움에 대한 대주교들의 지불금, 수익이나 성직자의 유산에서 교황청에 납부해야 했던 교회록 헌납금 또는 성직자 유산 계승 납부금, 여전히 요구되었던 십자군세와 봉토세 외에도 종류가 많았다. 이러한 금전들이 교황청이 임명한 징수인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징수되었고, 미수금을 징수하기 위해 징계와 파문의 위협까지 가함으로써 교황청에 대한 신자들의 격분은 점점 증대되었다.
아비농 교황 시대의 결과로 교황권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교황 인노천시오 3세 시대에 교황권이 누렸던 신뢰를 동요시키고 중대한 위기를 야기시켜, 다음 사건 즉 서구 대이교에 합류함으로써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V 아비용 유배 ; → 로마 ; 보니파시오 8세 : 비엔 공의회 ; 서구 대이교 ; 성전 기사 수도회 ; 요한 22세)
※ 참고문헌 St. Baluze . G. Mollat, Vitae paparum Avenionensium, Bde. 4, Paris, 1916~1928/ J.B. Villiger, 《LThK》 1, 1957, pp. 1151~1 153/L. Vones, (LThK) 1, 2000, PP. 1317~1319/ G. Mollat, Les papes d'Avignon, Paris, 1949" -, The Popes at Avigmon. 1305~1378, trans. by J. Love, London, 1963/ A. Franzen, 최석우 역, 《교회사》, 신학 총서 22, 분도출판사, 3판, 1988, pp. 255~259/ 上智學院 新力 卜 ソ ソ 7 大事典 편찬위원회 편, 新力 卜 ソ ソ 7 大事典》 Ⅰ,東京, 研究社, 1996, pp. 29~31. [崔奭祐]
아비농 교황들
- 敎皇 -
〔라〕Papatus Avenionensis · 〔영〕Avignon Pap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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