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일어나 근동 지역에서 최초로 대규모 제국을 이루었던 국가. 아시리아는 히브리어로 '아슈르' (一㎨)인데, 본래 티그리스 강 중류에 있던 도시 이름이었다. 이 도시의 수호신 이름도 '아슈르' 라고 불렸는데, 이것으로 보아 신의 이름이 도시 이름이 되었고 훗날 이 도시를 중심으로 건설된 제국의 이름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역 사] 기원과 초기 시대 : 기원전 3000년 초 셈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메소포타미아 북쪽 티그리스 강 주변에 정착하였고, 기원전 2500년경에는 몇 개의 도시 국가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기원전 2000년대 초기에는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아시리아 상인들은 소아시아의 중요한 교역 단지인 카니시(Kanish)를 중심으로 무역 활동을 하였으며, 아슈르에서 카니시까지 먼 대상로를 당나귀에 짐을 싣고 가서 정기적으로 교역을 하였다. 아나톨리아(Anatolia, 현재의 터키)의 광산에서 캐낸 광물과 카니시에서 가공한 금속 상품으로 150년 이상 교역 활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무역 활동은 7,000개가 넘는 토판 문서를 통하여 밝혀졌다. 기원전 1800년경 북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도시를 통합하여 아시리아 국가로 만든 인물은 샴시아다드 1세(Shamsi-Adad 1,기원전 1813~1781)였고, 통치 말년에는 도시 국가 바빌론을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국을 이룩한 함무라비 왕(기원전 1792~1750)과 세력 다툼을 할 정도로 강국이 되었다. 기원전 20세기 이후에는 많은 북쪽 아시리아인들이 바빌론에 와서 전통적인 바빌로니아의 문화를 배워 갔으며, 기원전 16세기 초 바빌로니아가 패망하고 남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이방 민족이 들어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동안 아시리아는 왕통을 굳게 세우고 제국으로 도약하는 발돋움을 충실히 하였다.
중기 시대 : 아시리아의 전성기는 기원전 14세기 아슈르 우발리트 1세(Ashur-ubaliit 1,기원전 1363~1328)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아시리아는 미타니 왕국의 오랜 지배로부터 벗어나 다시 독립하고 미타니 왕국의 동쪽 지역을 점령한 것을 기점으로, 옛날의 아카드 왕국이나 바빌로니아보다도 훨씬 더 공격적으로 거대한 제국에 대한 이념을 추구하였다.
기원전 13세기에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 지역을 침공하고 지중해 연안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전통적으로 아시리아 왕들은 매년 새 영토를 정복하기 위하여, 또 자신들의 통치 아래 있는 도시들로부터 공물(貢物)을 거두어 들이기 위하여 출정하였는데, 이때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우세한 세력인 아시리아 왕들은 근동 전 지역에 그들의 혹독한 정책에 대한 기억도 남기게 되었다. 어떤 도시를 공격할 때 그들은 잘 훈련된 무자비한 용사였고, 정복한 다음에는 엄한 감독관이 되었다. 정복하려는 도시들이 쉽게 항복하지 않거나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도시의 전 인구를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移住)시키고, 그곳에 다른 도시의 다른 종족들을 정착시키는 방법도 그들의 독특한 정책 중 하나였다. 이러한 대규모 이주 정책은 살마네세르 1세(Shalmaneser I 기원전 1273~1244) 때부터 사용되었는데, 특히 기원전 650년 아시리아인들이 지중해 연안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상당 부분을 지배할 때 몇몇 도시들에서 행한 대이주(大移住) 정책은 큰 효과를 보았다. 또 아시리아의 왕들은 종종 자신들의 원정에 대한 긴 정복 서사시를 남겼다. 성서에도 기록이 전해지듯 신아시리아 시대에 아슈르와 니느웨는 잘 알려진 도시였다(창세 10, 11 : 요나서). 아슈르는 기원전 610년경 아시리아 제국이 망할 때까지 북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 도시였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20세기부터 700여 년 동안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대외적 · 대내적 안정을 어느 정도 유지하여 제국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 왕의 통치가 끝날 때마다 제국은 붕괴될 위험이 많았고 점령 지역도 잃었는데, 이때마다 아시리아의 새 왕은 종속 도시의 왕들이 다른 세력들과 합세하기 이전에 다시 정복하여야만 했다. 더욱이 아시리아 본국에서도 끊임없는 알력과 갖은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재정복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투쿨티 니누르타 1서(Tumukutin-Ninuta 1,기원전 1243~1207)는 기원전 1200년경 바빌로니아를 정복하여 수도 바빌론을 파괴하고 약탈하였다. 이때 토판은 물론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둑(Mardk)의 신상(神像)까지 아슈르로 옮겼는데, 이는 바빌로니아가 아시리아 왕에게 전적으로 종속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전쟁에 대한 서사시에는 이 일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불화가 있었던 그의 아들이 왕인 아버지를 거슬러 수도 아슈르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아슈르 동쪽 티그리스 강 건너편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투쿨티 니누르타 항구" 라는 새 수도를 세웠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바로 이 수도에 왕을 가둔 다음 도시 전체를 태워 없애 버렸다. 그 결과 아시리아 제국을 세우려 했던 투쿨티 니누르타 왕의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후대에까지 널리 알려져 그에 관한 이야기를 성서와 그리스 문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스는 니므롯을 낳았는데, 그가 세상의 첫 장사였다. 그는 주님 앞에도 알려진 용맹한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니므롯처럼 주님 앞에도 알려진 용맹한 사냥꾼 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의 왕국은 시날 지방의 바벨과 에렉과 아깟과 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아시 리아로 가서 니느웨와 르호봇-이르와 갈라를 세우고···" (창세 10, 8-11). 니므롯은 투쿨티 니누르타를 줄여 부른 니누르타의 히브리어식 음역이다. 그리스 전설에 의하면 니노스 왕은 새 수도를 세워 니노스 도시라고 불렀고, 그 왕은 이 도시에서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니노스가 바로 투쿨티 니누르타이며 니므롯을 가리킨다.
투쿨티 니누르타 1세가 빼앗아 간 마르둑 신상은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있어 물질적 피해뿐만 아니라 정신적 유린을 의미하였다. 오랫동안 명성을 날리던 도시 바빌론이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고 그들의 수호신인 마르둑이 그들을 버린데다가 아시리아의 수호신 아슈르보다 정치적 · 군사적으로 열등함을 입증한 사실은 더욱더 처참한 것이었다. 더욱이 신년 축제 행사 때 마르둑 자리에 아슈르로 대치된 신전에서 바빌로니아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가 순례객들에게 낭독되었는데, 이 서사시는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둑의 권능을 높이 찬양하고 바빌론이 세상의 중심임을 천명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바빌로니아 고유의 창조 시를 도용하고, 심지어 마르둑의 이름을 지우고 아슈르의 이름으로 대치했던 아시리아인들을 바빌로니아인들이 혐오했던 것은 당연하였다.
아시리아 제국과 성서의 이스라엘 : 기원전 13~12세기에 이민족의 침입으로 아시리아는 아슈르 주변만을 통치하는 왕국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4세기에 차지했던 지역들을 다시 정복한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Tiglath-pileser I 기원전 1115~1077)는 수도를 아슈르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한 니느웨로 옮겼다. 그 후 아시리아는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역의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성서에서 아시리아 제국이 가장 크게 부각된 사건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과정에서였다. 그 당시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의 최강국이었고, 시리아 · 팔레스티나 지역에 아시리아의 종속국이 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었다. 아시리아의 세력이 고대 근동 세계 전체로 팽창되는 시대는 9세기 초였으며, 아시리아 문헌에도 북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임금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기원전 854/853년 이스라엘 왕 아합(기원전 875~853)은 아시리아의 왕 샬만네세르 3세(기원전 858~824)에 대항하는 시리아 · 이스라엘 연합군에 가담하여 카르카르 전투에 참전해 아시리아의 침략을 물리쳤으나, 841년에 이스라엘 왕 예후(기원전 841~814)는 살만네세르 3세에게 조공을 바쳤다. 유다 왕 요아스(기원전 835~796)는 그의 말년인 798년에 조공을 바쳤고, 이스라엘 왕 므나헴(기원전 746~737)은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기원전 747~727)에게 조공을 바쳤다. 734/733년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시리아의 중심 도시인 다마스커스를 함락했을 때, 유다왕 아하즈는 다마스커스로 가서 아시리아 왕에게 경배하고 그들의 종교 예식을 본떠 예루살렘에서도 아시리아 신들에게 예배함으로써 그들에게 아부하는 정책을 폈다.
아시리아 왕 살만네세르 5세(기원전 726~722)가 3년 동안 포위 · 공격하였지만 공략에 실패한 사마리아를 새로 등극한 사르곤 2세(기원전 722~705)가 왕이 된 그 해에 정복함으로써, 북이스라엘 왕국은 멸망하였다. 기원전 720년에는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아시리아로 집단 이주되고, 사마리아에는 이민족이 투입되었다. 또 기원전 716년에 사르곤 2세는 이집트 원정 길에 시리아를 지나갔으며, 이집트 삼각주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여 아시리아의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였는데, 아시리아의 최고신 아슈르의 깃발을 휘날리며 전차 부대를 앞세우고 행군하는 아시리아의 수십만 대군의 위용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고 한다.
북이스라엘을 아시리아의 속주로 만든 사르곤 2세는 히즈키야의 통치 14년인 기원전 713년에 유다 왕국을 침공하여 여러 성읍들을 점령하였다. 이에 대한 성서의 기록(2열왕 18, 13)에는 당시 아시리아의 왕을 산헤립이라고 언급하였지만 실제로는 사르곤 2세였다. 당시 불레셋의 여러 성읍들이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고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자 사르곤 2세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원정 길에 올랐던 것이다. 사르곤의 실록에는 "아슈도드의 군주 아주리는 더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을 것을 음모하여 이웃 나라에 사는 왕들에게 아시리아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찬 서한들을 보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르곤 2세가 라기스(Lachish)를 점령하고 있을 때, 히즈키야는 그에게 전갈을 보내 자기의 잘못을 사과하며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2열왕 18, 13-16). 히즈키야도 그들의 음모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아시리아 왕의 용서를 구한 것이었다.
705년 사르곤 2세가 북방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의 셋째 아들 산헤립(Sennachenb, 기원전 705/704~681)이 왕이 되었는데, 산헤립의 실록에 따르면 이 혼란기에 근동의 모든 도시 국가는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고 연례적인 공물 상납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한때 강대국으로 아시리아에 버금갔으나 아시리아의 통치를 받고 있던 바빌로니아의 왕 메로다크 발라단(MMaractach-Balao)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로다크 발라단은 사절단을 히즈키야에게 보내, 시리아 ·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반란을 주도해 줄 것을 도모하고 자신이 아시리아를 치러 갈 것임을 시사하였다. 바빌로니아 왕의 숨은 의도는 만일 시리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산헤립은 분명히 서쪽으로 군사 원정을 갈 것이고, 그 틈에 바빌로니아 왕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침공하려던 술책이었다. 이러한 내막을 알았는지 산헤립은 서쪽에서 산발적인 폭동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군대를 이끌고 바빌론으로 대거 원정길에 올랐다. 이것이 산헤립의 즉위 첫해인 704년에 생긴 일이다. 산헤립이 바빌로니아의 연합군을 격퇴하자 메로다크 발라단은 유프라테스 강 하류 삼각주 숲 속으로 피신하였고, 바빌로니아의 성곽 도시 75개와 작은 마을 420개가 점령되었으며, 20만 8,000명이 아시리아로 끌려갔다. 산헤립은 아시리아의 고관들을 바빌로니아의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원정 길을 서쪽으로 돌렸다.
아시리아 실록에 의하면 산헤립이 701년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은 세 번째 원정 때였다고 한다. 산헤립이 시리아 · 팔레스티나 쪽으로 진군할 당시 히즈키야는 이집트와 공동 전선을 형성했으나, 산헤립이 유다 왕국의 성곽도시 라기스를 공격할 때 이집트는 정작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라기스를 점령하고 부관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자신의 전갈을 히즈키야에게 전한(2열왕 18장) 산헤립은, 그 후 아시리아 군대를 대거 예루살렘으로 보내 도성을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종용하였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히즈키야를 공략했던 이 전투를 기록한 산헤립의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나(산헤립)의 멍에에 굴복하지 않은 유대인 히즈키야 때문에, 나는 경사로 공법과 투석포와 보병진군과 참호와 파성퇴와 사다리 공격으로 그의 견고한 성곽 46개와 그 주변의 수많은 작은 마을들을 포위하고 정복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전리품으로 모든 계층의 남녀 20만 150명과 말 · 노새 · 나귀 · 낙타 · 소 · 양 등을 얻었다. 나는 그(히즈키야) 자신을 그의 수도 예루살렘에 새장의 새처럼 가두었다. 나는 정찰 부대로 그를 포위하고 누구도 그의 도성을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내 주권의 영광의 두려움이 그 히즈키야를 엄습하였다. 그의 수도 예루살렘을 강화하기 위해 데려온 용사들과 정예병들은 싸우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갇힌 히즈키야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함락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그 전쟁에 대한 결과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또 산헤립이 왜 철군했는지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그러나 산헤립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돌아간 후 히즈키야는 니느웨로 많은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한편 성서에 의하면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아침에 성밖을 내다보니 수많은 아시리아 군인들이 쓰러져 있었고 아시리아 군대는 온데간데없었다고 하면서, 이는 야훼의 천사가 그들을 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2열왕 19, 35). 산헤립은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살해되었다(2열왕 19, 37).
이후 에사르하돈(Exataddon, 기원전 680~669)과 아슈르바니팔(Ashuthanipal, 기원전 668~630)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에티오피아까지도 정복하였다. 하지만 아슈르바니팔은 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자신의 형제를 죽여야 했는데, 이는 아시리아 제국의 속성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들은 고대 근동 역사상 다른 어느 제국보다도 군사력이 우수하였고, 이 군사력에 의존하여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슈르바니팔이 죽자 치열한 왕위 계승 분쟁과 지나친 토벌 정책으로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기원전 626년 바빌로니아가 독립한 뒤 여러 국가가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고, 기원전 614년에는 아슈르가 메대인들에게 점령된 데 이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도 메대인들과 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임금은 하란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항전하였으나, 609년 이집트 느고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메대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에게 패배함으로써 기원전 10세기경 고대 근동에서 가장 큰 제국이었던 아시리아 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종교와 신] 아시리아 지식인들은 바빌론에서 많은 지적(知的) 문화를 배워 아시리아 문화를 창출하였다. 최고신 아슈르를 살펴보면, 표의 문자로 '아슈' 는 혼자' · '홀로' · '하나' 라는 뜻이다. 아시리아의 현자(賢者)들은 아시리아 국가가 고대 근동의 패권자가 되려는 희망과 그 결과를 보면서 제국의 수호신 이름을 고대 바빌로니아의 전통과는 색다르게 풀이하였다. 바빌로니아의 최고신은 전통적으로 하늘신 '안' (An)이며 그는 숫자 '60' 으로도 표기되었다. 아슈르를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최고신으로 부상시키는 과업을 짊어졌던 아시리아 현자들은 아슈르의 음절 표기에 '하나' 또는 '혼자' 라는 표의 문자가 포함된 것에 착안하였다. 즉 설형 문자로 숫자 60은 1로도 표기되었는데, 아시리아 현자들은 이 점에 근거하여 60으로 표상되는 최고신이 아슈르에게는 '하나 로 이미 그 이름에 점지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때부터 아시리아인들은 세상의 최고신은 하나 즉 첫째이며 '홀로'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메소포타미아 ; 바빌론 ; 사르곤 ; 산헤립)
※ 참고문헌 W.W. Hallo · W.K. Simpson, The Ancient Near East, A History, Harcourt Pub., 2nded., 1998. [曹哲秀]
아시리아
〔히〕אשור · 〔라 · 영〕Assy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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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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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네세르 3세에게 공물을 바치는 장면이 묘사된 검은 오벨리스크(왼쪽)와 그의 궁전 청동문 부조, 그리고 아시리아의 설형 문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