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회 우위설

公議會優位說

〔라〕Conciliarismus · 〔영〕Concilia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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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선출된 마르티노 5세의 행렬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선출된 마르티노 5세의 행렬


공의회의 결정에 교황이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 14세기에 형성되어 15세기에 이른바 개혁 공의회에서 적용 · 실천되기에 이른다. 공의회 우위설은 일반적으로 14세기, 파도바의 마르실리오(Masilius da Padova, +1342) 와 오캄(William von Ockham, +1349)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기본 사상은 이미 12~13세기의 교 회법 학자들(Huguccio, Joannes Teutonicus 등)에게서도 나타난 다. 즉, 사태가 긴급할 때 공의회를 통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법이론(法理論)이 이미 제시되었다. 구체적으 로 만일 교황이 정신병에 걸리거나 이단에 떨어지면 이 미 그는 교황이 될 수 없으므로 공의회가 그 사실을 심 의하고 확인하여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그런데 13~14 세기 교황의 중앙 집권의 강화, 교회와 국가 간의 계속 되는 충돌은 이 사상을 더욱 성장시키는 원인으로 작용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를, 프랑스 왕 필립 4세의 지지자들은 교 황 보니파시오 8세를, 황제 바이에른의 루드비히는 교황 요한 22세를 각기 공의회에 상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본연의 공의회 우위설은 마르실리오에서 비롯되었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공의회에 대한 교황의 원리적인 종속설이 정식으로 제창되었기 때문이다. 마르실리오는 그의 《평화의 수호자》(Defensor Pacis, 1326)란 논쟁서에서 이렇게 교황직을 공격하며 공의회의 우위설을 주장하였다. "교황의 수위권은 하느님으로부 터 오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최고 권력은 신자단에 있 다. 이 신자단은 공의회를 통해 대표된다. 그러므로 공 의회는 교회의 최고 대표 기관이다." 이러한 마르실리오 의 주장은 오캄에게 이어져 더욱 과격해졌다. 그리고 15 세기 초에는 그것을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중대한 시도 가 있었다. 교회를 2명의 교황으로 분열시킨 서구 대이 교(1378~1417)가 바로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양측 교황의 자진 사퇴 또는 상호 타협의 기대가 수포 로 돌아가자, 이제 공의회를 통한 해결 방안만이 남게 되 었다. 그러므로 이 방안이 널리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 다. 실제로 추기경들은 피사(Pisa)에서 공의회를 소집하 고, 1409년 두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는 동시에 알렉산 델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는데 그는 다음해 사망하 였고, 요한 23세가 곧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두 교황이 공의회의 폐위 결정에 응하지 않자 오히려 교황 이 3명이 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새 교 황 요한 23세는 1414년 공의회를 콘스탄츠로 소집하였 다. 그는 여기서 자기가 유일 ·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 될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공의회는 3명의 교황을 모 두 퇴진시키지 않는 한 교회 일치의 회복이 어려울 것으 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상황이 그에게 불리해지자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해산시키려는 의도에서 콘스탄츠 를 몰래 빠져 나갔다. 이제 공의회는 해산할 것인가 아니 면 교황 없는 공의회를 계속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되 었다. 이때 파리 대학의 제르송(Joa. Gerson)은 연설을 통 해 공의회의 속개를 종용하였다. 공의회는 계속하기로 결정되었으나 그것을 법적으로 뒷받침할 법령을 의결해 야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헥 상타>(Haec Sancta, 1415)라는 교령이다. 이 교령은 비록 교황이 없을지라도 공의회가 합법적임을, 따라서 공의회의 결정에 교황까지 도 복종해야 함을 선언하였다. 이 교령이 마르실리오의 주장대로 공의회에 대한 교황의 원칙적인 예속을 의미하 였는가에 대해 그 후 많은 논란이 있었다. 물론 그것을 급진적으로, 이단적으로 이해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보수적으로, 다시 말해서 교회 의 일치를 회복하기 위한 비상 수단이라는 전통적인 뜻 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이 신조로 정의된 것 은 아니었다. 그런데 공의회는 이어 교회 개혁 문제를 심 의하고 5개의 개혁령을 공포하였는데, 그중에 <프레구엔 스>(Frequens, 1417)란 교령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교황 을 개혁령에 구속시켜 그 실시를 보증케 하고, 나아가서 교황을 영속적으로 공의회에 예속시키고자 교황에게 공 의회를 정기적으로 10년마다 소집하도록 의무 지웠다는 점에서 역시 급진적이었다. 이 교령의 의미 역시 급진파 냐 보수파냐에 따라서 그 이해가 크게 달랐을 것이다. 그 러나 절대 다수는 먼저 교령의 경우처럼 보수적인 뜻으 로 이해하였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급진파가 아무리 소수였을지라도 그들의 영향은 계속되었고, 특히 그들은 교황이 공의회를 제때에 소집하지 않으면 교황을 공격하 고, 나아가서 교황을 공의회에 상소하겠다고 위협하였기 때문에 교황들은 그때마다 교황을 공의회에 상소하는 것 을 금지시켜야 했다. 마침내 에우제니오 4세는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10 년이 좀 지난 1431년 공의회를 바젤로 소집하였다. 여 기서 교황은 공의회주의자들과 대립하게 됨으로써 교황 직은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교황은 공의회를 페라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급진파들은 비록 극소수였 지만 계속 바젤에 남아 공의회 우위설을 신조로 선언하 는 한편 펠릭스 5세를 대립 교황으로 세우고 대항하였 다. 그러나 펠릭스 5세는 곧 자진 사퇴하였다. 이렇게 급 진파들의 독주는 끝났으나 그 사상과 이론은 오래 지속 되어 그 후의 국가주의적 갈리아주의(Gallicanimus)와 페 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us)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데 공의회 우위설이 다시 살아나 공의회에 상소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공포는 교황들로 하여금 공의회를 기피케 하고, 마침내는 16세기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 교회 개혁을 위한 공의회를 적시에 열지 못하게 한 중대 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 수위권 ; 에피스코팔리즘) ※ 참고문헌  Konziliarismus, 《LThK》 Bd. 6/ L.M. Orsy, 《NCE》 4/ A. Rismoldi, 《DSR》, Roma, 1966/ 아우구스트 프란츤 저, 최석우 역, 《敎 會史》, 분도출판사, 1982, pp. 257~272.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