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노, 캔터베리의 (?~604/605)

〔라〕Augustinus Cantuari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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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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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

성인. 영국 캔터베리 대교구의 초대 대주교. '영국의 사도' 로 칭송받는 베네딕도회 소속 선교사. 축일은 5월 27일. 앵글로 색슨족을 복음화하려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의 뜻에 따라 선교 사명을 받고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캔터베리 대교구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선교 활동에 관해서는 5권으로 된 베다(Beda Venerabilis, 672/673~735)의 《영국 교회사》(Histo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 7317732)와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아우구스티노에게 보낸 답신이 수록된 《회신집》(Libellus responsionum)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상황] 영국은 2세기 말에 복음이 전해져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고, 314년에 개최된 아를 교회 회의에 요크 · 런던 · 링컨의 주교들이 참석할 정도였다. 그러나 407년에 로마군이 철수하자 신자들은 스코틀랜드 원주민의 후손인 픽트족과 영국을 침략한 게르만족인 앵글족 · 색슨족 · 주트족에 의해 서부 지역 및 대륙으로 내쫓겼다. 더욱이 450년에는 머시아 · 동(東)앵글리아 · 노섬브리아 · 에식스 · 서식스 · 웨식스 · 켄트 등 일곱 왕국이 건설되면서 이들 이교도들에 의하여 당시까지 영국에 형성되어 있던 모든 교회 조직들이 파괴되고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에서 추방당하였다. 결국 영국은 그리스도교가 사라져 다시 선교를 시작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한편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이 되기 전 로마의 노예 시장을 지나는 도중 잘생긴 금발의 노예 청년들을 보고 어디서 왔는지 물었고, 그들이 앵글족이라고 대답하자 "당신들은 앵글족(Angl)이 아니라 바로 천사들(Angeli)이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때 그는 그들이 이교도라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에게 선교할 결심을 하고 당시의 교황 펠라지오 2세(579~590)에게 앵글족 선교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교황이 된 후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이때 교황은 현지인 선교사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길 원하였지만, 그럴 경우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기에 로마의 철리오(Coelio) 언덕에 있는 베네딕도회 성 안드레아 수도원 원장이었던 아우구스티노를 영국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생애 및 활동] 595년 이전까지 아우구스티노의 생애, 즉 그의 가문이나 청소년 시절 혹은 교육 과정 등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단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메사나(Messana)의 주교 펠릭스(Felx)의 제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 친분이 있었고, 철리오의 베네딕도회 수도승이었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595년에 아우구스티노는 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교황으로부터 앵글로 색슨족을 복음화시키라는 사명을 받고 40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영국으로 가는 도중 갈리아의 레랭 · 마르세유 · 아를 · 리용 · 오통 등을 지나면서 많은 역경을 만났지만, 오통에서는 교황과 친분이 두텁던 지아그리오(Siagrius) 주교로부터 환대를 받기도 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도움으로 통역자를 대동한 이들 일행이 영국 켄트(Kent) 왕국의 해안가 새너트(Thanet) 섬에 도착한 것은 597년 봄이었다. 베다는 아우구스티노가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주교로 승품되었다고 하는데, 아를의 대주교에 의해 주교 수품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도착 당시 영국에는 이미 라틴계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아일랜드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교회와 로마 교회의 관습에 많은 차이가 있어 함께 선교 활동을 할 수 없었으며, 분열된 왕국간의 전쟁으로 선교가 더욱 어려웠다. 이에 아우구스티노는 켄트의 수도 캔터베리에 주교좌를 정하고 활동하였다.
영국 교회의 재건 : 여러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있던 영국은 같은 종족끼리 연합체를 형성하고 그 연합 왕국의 대표로 캔트 왕국의 왕 에텔베르토(Ehelbetus, 560~616)를 뽑았는데, 그는 갈리아 출신으로 신자인 베르타(Bertha) 공주와 혼인한 상태였다. 에텔베르토 왕은 선교사들에게 무척 호의적이었으며, 다른 지방에서 온 이들에게는 캔터베리의 옛 성당인 '성 마르티노 성당' 에 숙소를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설교까지도 허락해 주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설교와 활동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그의 설교와 모범을 보고 에텔베르토 왕은 597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으며, 그가 제정한 법도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지도를 받았고, 교황은 회신을 보내어 현실에 대한 감각과 현명한 대처로 사도직을 잘 수행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교황은 가능한 한 영국에 설립되어 있는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종교 관습에서 연결점을 찾고 그것들을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내용으로 완성하도록 권고하였다(MGHEp. Ⅱ, 1899, 331).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교황의 뜻에 따라 이교 신전을 그대로 둔 채 단지 우상만을 없앴으며,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 이교 예식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고, 기혼인 성직자들을 자신의 교구에 받아들였다.
601년에는 로마로부터 선교사가 증원된 데 이어 전례 용품 및 서적 등을 지원받았으며, 로마에 있던 성인 유해도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갈리아 주교로부터 독립된 대교구를 설립하도록 대주교로 승품되어 '팔리움' (pallium)을 받았으며, 로마 통치 시대의 옛 행정 구역을 따라 각각 12개의 관할 교구를 지닌 두 개의 관구를 설립하라는 교황의 지시를 받았다. 이에 가장 문명화되고 그리스도교화된 캔터베리에 대주교좌를 설정하고 초대 대주교가 된 그는, 그곳에 최초의 주교좌 성당을 세우고 도시 외곽에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 을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베네딕도회 수도원이다. 이어 캔터베리 대주교좌 관할의 로체스터(Rochester) 교구를 설정하고 유스토(Justus, +627)를 주교로 임명하였으며, 에텔베르토 왕의 도움을 받아 런던에도 교구를 설립하여 멜리토(Mellius, +604)를 주교로 임명하고 동부 색슨족들을 복음화하고자 하였다.
켈트 교회와의 일치 시도 및 좌절 : 아우구스티노와 라틴계 선교사들은 앵글로 색슨족을 선교하는 데 있어 켄트 주교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캔트 주교들은 자신들의 정복자인 앵글로 색슨족을 경멸한 나머지 그들의 개종을 원하지 않았고, 또 아일랜드 수도자들에 의해 복음화된 그들이 켈트 지방의 관습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라틴계와 켈트계는 종족과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전례상의 전통까지 달라서 서로 다른 교회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미사를 드리는 양식도 많이 달랐지만 특히 세례 양식과 수도자의 머리 모양, 그리고 부활 대축일 날짜 등도 문제가 되었다. 이렇듯 켈트 교회가 자신들의 전통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로마 전례를 수용시키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켈트 수도자들의 근거지는 북쪽 지방의 아이오나(Iona) 수도원이었다. 당시 라틴계 선교 책임자가 아우구스티노였다면, 켈트 교회의 선교 책임자는 이 수도원의 수도자로 린디스판(Lindsame)의 초대 주교인 성 아이다노(Aidamus, +651)였다. 603년 에텔베르토 왕의 협조로 아우구스티노는 로마 전례와 교리에 차이를 보였던 켈트 교회의 주교들과 일치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일치 노력과 열정은 그가 사망한 뒤 결실을 맺었다. 후임자로 라우렌시오(Laurentius, +619)를 선임한 아우구스티노는 604/605년 5월 26일 사망하여 캔터베리의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에 묻혔다.
[영향과 공경] 불가능해 보였던 앵글로 색슨족에 대한 선교를 최초로 시도하여 가능하게 만든 아우구스티노의 노력은, 그가 사망한 뒤에도 계속 이어져 624/633년에는 웨식스와 노섬브리아가 복음화되었다. 또한 노섬브리아의 에두아르도(Eduardus, +633) 왕을 계승한 오스왈도(Oswaldus, +642) 왕은 아일랜드 선교사들을 증원하여 선교를 활성화시켰는데, 이로 인하여 발생한 아일랜드 선교사와 로마 선교사들 간의 불화는 664년 횟비(Whiby) 교회 회의에서 로마 전례를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해결되었다. 이로써 전 앵글로 색슨족의 그리스도교화가 완성되었다. 680~690년에 서식스가 그리스도교화되었고, 앵글로 색슨 교회는 7세기 말 테오도로(Theodous, 602?~690)가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된 후 그리스도교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테오도로는 영국의 교회 전체를 관장한 최초의 대주교였다. 아일랜드인의 열성적인 신심과 로마 정신의 결합은 영국 교회 안에서 놀라운 성과로 나타났는데, 이와 같은 전성기는 11세기까지 지속되었다.
747년에 개최된 클로베쇼(Clovesho) 교회 회의에서 성인 호칭 기도문에 아우구스티노가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 다음에 오도록 결정함에 따라, 영국에서는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 축일을 기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50년에는 영국을 복음화한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고, 1882년 이후부터는 로마 전례력에 삽입되었다. → 그레고리오 1세 ; 에두아르도 ; 에텔베르토 ; 영국 ; 오스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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