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노, 히포의 (354~430)

〔라〕Augustimus Hippom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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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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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

성인. 히포(Hiipo)의 주교. 교회 학자. 서방 교회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 '은총론의 박사' (Doctor Gratiae)라고도 불린다. 축일은 8월 28일.
알타너(B. Altaner)는 아우구스티노를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위대한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테르툴리아노의 창조적 정열, 오리제네스의 영적 풍부함, 치프리아노의 교회적 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논리를 플라톤의 높은 이상주의와 사변에 결합시켰다. 그리고 라틴인의 실용적 감각을 그리스인의 영적 유연성에 일치시켰다. 그는 교부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며, 전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실로 방대한 양의 저서들을 남겼으며, 자아 인식에서 시작하여 존재 · 진리 · 사랑 · 하느님 인식의 가능성 · 인간 본성 · 영원성 · 시간 · 자유 · 악 · 섭리 · 역사 · 행복 · 정의 · 평화 등 철학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 전반을 주제로 다루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철학자 · 신학자 · 신비가 · 시인 · 설교가 · 논박가 · 저술가 · 목자 · 수도자라는 호칭이 모두 적용될 수 있다.
I . 교부학에서의 아우구스티노
[생 애] 출생에서 개종 전까지(354~386) :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 누미디아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 현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에서 어머니 성녀 모니카(Momica, 332~387)와 이교도인 아버지 파트리치우스(Paricics) 사이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적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고향 타가스테와 인근 마다우라에서 교육을 받았다. 16세 때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하였으나, 이듬해 로마니아누스라는 은인의 도움으로 카르타고에서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동거녀와의 사이에 아데오다투스(Adeodatus)라는 아들을 낳았다. 공부를 마친 뒤에는 타가스테 · 카르타고 · 로마 · 밀라노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타가스테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그는 치체로(M.T. Cicero, 기원전 106~43)의 《우정론》(Horensius)을 읽으면서 지혜의 이상에 매료되었는데, 이는 끊임없이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 마침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는 그의 긴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성서에서 그 문학 유형과 하느님을 의인화하는 방식에 실망하고만 아우구스티노는, 마니교(Mamichaeisims)의 강의를 듣고 존재 문제 특히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9년 간 마니교 신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마니교에 심취하였지만, 마니교의 지도자 파우스트와 대담한 후 실망한 나머지 여러 철학 저서들을 탐독하였으나, 결국 회의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는 384년 가을부터 밀라노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회개에서 사제 수품까지(386~391) : 아우구스티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세 가지 요인은 암브로시오(339~397) 주교와의 만남, 신플라톤 철학, 바오로 서간에의 매료 등이었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강론을 듣고 그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암브로시오의 강의를 통하여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은유적 또는 영적으로 해설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후에 암브로시오에 이어 밀라노의 주교가 된 심플리치아노는 그에게 신플라톤 철학의 창시자인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의 누구스 (VODS, 이성) 개념으로 요한 복음 1장에 나오는 '로고스' 의 개념을 설명해 주었다. 이를 통하여 그는 영원한 '로고스-하느님' 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심플리치아노는 그에게 바오로 서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읽어 보기를 권했다. 바오로 서간을 읽고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달은 아우구스티노는, 어느 날 한 친구로부터 안토니오 성인(251~356)과 여러 은수자들의 엄격한 수도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벅찬 감동에 느끼고 정원으로 달려갔는데, "집어서 읽어라" (Tolle, lege) 하고 반복해서 외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 성서를 들어 펼쳐 읽어 본 것이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이때 그는 "모든 의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확신의 광명"(고백록) 8, 12, 19)이 그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그리고 386년 8월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밀라노 근교 카시치아룸(Cassiciacum)에 있는 친구의 농장으로 가서 기도와 명상 생활을 하였다. 이듬해 사순 시기를 앞두고 밀라노로 돌아온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가 지도하는 예비 신자 교리반에 등록을 하고 그 해 4월 13일 부활 성야에 세례를받았다. 고향으로 돌아가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로마의 오스티아에서 배를 기다리는 사이, 병든 어머니 모니카가 9일 후인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지낸 뒤 10개월 간 로마의 수도원들을 방문하였다. 388년 가을 타가스테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391년에는 수도 공동체를 친구 알리피오에게 맡기고 히포로 가서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사제 생활(391~395) : 아우구스티노는 수도자들의 전통에 따라 수도원에 살면서 일체의 교사직을 맡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히포의 주교 발레리오(Valenius)가 교구 안에 사제들이 부족함을 호소하는 강론을 듣고 있던 중, 그를 알아본 신자들에 의해 억지로 주교에게 이끌려가 사제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주교의 청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주교관 옆에 사제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허락을 얻어냈다. 당시 주로 주교가 강론을 하던 아프리카 교회의 전통과는 달리 발레리오 주교는 사제인 아우구스티노에게 자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강론하는 임무를 맡겼고, 강론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적 재능은 이내 드러났다. 연로한 발레리오 주교는 건강이 악화되자, 아우구스티노가 다른 교구의 주교로 선출될 것을 염려하여 395년 그를 자신의 보좌 주교로 삼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카르타고의 아우렐리오 대주교에게 청하였다. 그 해 여름 주교품을 받은 아우구스티노는 발레리오 주교가 이듬해 사망하자 교구장이 되었다.
히포 주교로서의 활동(396~430) : 아우구스티노는 히포의 주교로서 35년 간 사목하는 동안 엄청난 일들을 수행하였다. 그는 교구장이 된 직후 방문객들을 쉽게 맞이 할 수 있도록 주교관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교구 사목에 관련된 방문객들이 몰려들어 명상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더구나 각종 주교 회의에 의장직을 맡고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여러 이단 논쟁에 관여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동료 주교들을 방문하는 등 많은 여행을 하여야 했다. 교구장 재직 동안 40~50차례 여행을 하였는데, 며칠 동안의 여행도 있었지만 때로는 4~5개월의 여행도 많았다. 이처럼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엄청난 저술을 하였으며, 72세가 되던 426년에는 사제 헤라클리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목의 상당 부분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가 끝까지 일을 계속하였으므로, 헤라클리오는 그가 죽은 뒤에야 주교로 서품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노는 426~427년에 《재론고》(Retracta-tiones)를 쓰면서 자신의 저서들을 모두 재검토하고 수정또는 보완했다.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 공격하던 430년아우구스티노는 《율리아누스 반박서》(Contra Juliani respon-sionem opus imperfectum, 427~430)를 다 끝내지 못한 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단과의 논쟁]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히포 교구의 사목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아프리카 교회와 서방 교회, 더 나아가 세계 교회 차원에서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것은 다음 네 가지 이단 논쟁을 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마니교 논박 : 아우구스티노는 사제 시절부터 399년까지 마니교를 논박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자신이 한때 빠졌던 마니교의 오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논박할 수 있었다. 더욱이 398년 12월 7일 히포의 성당에서 마니교 지도자 펠릭스와 벌인 토론을 통하여 펠릭스를 승복시키고 개종하게 만들었다. 또 그는 마니교와 유사한 오류를 퍼뜨리는 프리실리아누스주의(Priscililamismus)와 마르치온 이단을 논박하는 저서들을 저술하였다.
도나투스주의 논박 : 아우구스티노가 사제로 서품되었을 당시 아프리카 교회는 도나투스주의 이단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다. 히포에서 도나투스주의자들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보다 더 많았으며, 신자들의 많은 헌금으로 재정적으로도 넉넉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교리상의 문제에 민족주의적 감정을 가미시켜 폭력을 휘두르는 등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켰으므로, 공권력의 개입 문제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397년까지 아우구스티노는 이들을 회유하여 정통 교회로 돌아오도록 노력하면서 공권력의 개입에 반대하였으나, 이들의 폭력이 심해지자 400년부터는 공권력의 개입을 정당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405년과 417년에는 공권력의 개입을 호소하기까지 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저술 활동뿐만 아니라 강론과 공개 토론회를 통하여 정통 교리를 확인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411년 286명의 가톨릭 주교와 279명의 도나투스주의자 주교들이 카르타고에 모여 벌인 공개 토론회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도나투스주의 논쟁은 420년에야 해결되었다.
펠라지우스주의 논박 : 아우구스티노는 41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은총론 · 자유 의지론 · 예정론에 관련된 펠라지우스주의(Pelgimmisms)와 반(半) 펠라지우스주의(Semi-Pelagianisimus) 이단 논쟁에 개입하였는데, 이에 대한 신학적 업적 때문에 그는 '은총론의 박사' 라는 명칭을 얻었다. 영국 출신의 수도자 펠라지우스(354?-418?)는 410년에 로마에서 히포로 와 이듬해 겨울까지 머물렀는데, 이때 아우구스티노는 여행 중이었다. 펠라지우스는 팔레스티나에서 자기 주장을 퍼뜨리기 위해 곧 카르타고를 떠났다. 그리고 411년 7~8월 카르타고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펠라지우스의 제자인 철레스티우스가 단죄를 받았다. 그런데 펠라지우스가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의 지지를 얻자 아우구스티노는 그에게 대항하고 있던 예로니모(343~420)를 지원하기 위하여 415년 오로시오(Orosius)를 예루살렘으로 보냈고, 팔레스티나의 디오스폴리스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펠라지우스의 주장이 인정을 받자 오로시오는 이듬해 이 사실을 카르타고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개최된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는 411년의 단죄를 재확인하면서 인노천시오 1세 교황(402~417)에게 펠라지우스와 철레스티우스의 오류들을 낱낱이 지적한 뒤, 이에 대한 로마 교회의 공식적인 단죄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서간 175) . 교황은 417년 1월 27일 두 이단자의 파문을 승인하였다(서간 181~183).
그런데 인노천시오 1세 교황의 뒤를 이은 조시모 교황(417~418)은 펠라지우스와 헬레스티우스의 신앙 고백을 듣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아프리카 주교들은 카르타고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교황에게 선임 교황 인노천시오 1세의 결정을 견지해 줄 것을 탄원하였으며, 418년 5월 1일 카르타고에서 또다시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펠라지우스 주장에 대한 단죄를 재천명하였다. 한편 로마에서 펠라지우스 지지자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자 교황은 이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 철레스티우스를 불렀지만 도망쳐 버렸다. 이에 조시모 교황은 선임 교황의 조치와 아프리카 교회 회의의 결정을 재확인하는 회칙 <트락토리아>(Tactaom)a)를 발표하였고, 이로써 펠라지우스주의 이단에 관한 로마 교회와 아프리카 교회 사이의 혼선은 정리되었다. 그렇지만 펠라지우스주의는 이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으므로, 아우구스티노는 추방된 펠라지우스주의자로서 이단의 우두머리 역할을 한 율리아누스와 421년부터 10여년 간 더 논쟁을 벌어야 했다.
한편 아우구스티노는 교회 내의 여러 수도자들로부터 그의 은총론이 수덕적 노력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반발을 사자, 425년부터 이 문제에 개입하여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17세기의 신학자들이 '반(半) 펠라지우스주의' 라고 부른 이 논쟁의 핵심은, 인간이 처음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은총의 결과이냐 아니면 인간 자유 의지의 행위이냐 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답변하기 위하여 여러 저서들을 썼다.
아리우스주의 논박 : 아우구스티노는 생애 마지막 10년 간을 아리우스주의 논쟁에 개입하면서 보냈다. 이에 앞서 그는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에 대해 자주 강론하였으며, 그의 신학 저서들 중 최고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삼위 일체론》(De Trinitate)을 20여 년(399~420)에 걸쳐 저술하였다. 그가 이 저서를 쓸 때 구체적으로 어떤 아리우스파의 위험을 겨냥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프리카 교회 안에서 '반(半) 아리우스주의' 이단자들이 도나투스주의자들과 연대를 모색하였던 것은 확실하다(서간44, 6). 아우구스티노는 418년에 아리우스주의자가 쓴 저서를 받고 이에 반박하는 《아리우스주의 강론 반박》(Contra sermonem Arianorum)을 저술하였고, 427년에는 아리우스주의자 주교인 막시미누스를 대항해 《막시미누스 논박》(Contra Maximinum haereticum)을 저술한 데 이어 그와 공개 토론을 하면서 논박한 내용을 같은 해 <막시미누스와의 토론》(Collatio cum Maximino Arianorum epis-copo)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저 서] 아우구스티노는 오리제네스(2~254)에게 필적할 만큼 많은 저서를 남겼다. 《아우구스티노 전기》(VitaSancti Augustini, 431~439)를 쓴 포시디오(Posidius)는 그의 저서명으로 1,030개를 열거하였는데(PL 46, 5-22) , 이는 당시 히포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을 열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아우구스티노가 자신의 저서 《재론고》에서 427년까지 저술한 93개의 저서 목록을 열거한(2, 67) 것은 엄청난 양의 강론들과 서간들을 제외한 것이다. 분야별로 중요한 저서들만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서전적 저서 : <고백록>(Confessiones, 397-401)에서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얻기까지 자신의 종교적 발전과 하나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심도 있게 묘사하였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후대에 가장 많이 읽혀진 이 《고백록》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고백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찬양하고 있기 때문에 님 기림' 의 성격을 띠고 있다. 첫째 부분(제1~9권)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개종과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까지 과거를 회상한 자서전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둘째 부분(제10~13권)은 저술 당시의 자신과 하느님께 대해 신학적 · 철학적 명상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재론고》는 자신의 각 저서들이 쓰여지게 된 동기와 배경을 명시하고 때로는 보완 · 수정하면서 자신에 대한 영적 성찰을하고 있다. 그래서 <재론고>를 <고백록》의 속편이라고들 한다.
철학 저서 : 아우구스티노는 개종 이후부터 사제 서품을 받기 전까지(386~391) 카시치아룸 · 밀라노 · 로마 · 타가스테에서 철학적인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한 저서들을 대화 형식으로 저술했다. 《아카데미아학파 논박》(Contra Academocos) · 《행복한 생활》(De beata vita) · 《질서론》(Deordine) · 《독백》(Soliloquia)은 카시치아줌에서 저술한 것이고, 《영혼의 불멸》(De immortalitate animae)은 밀라노에서, 《영혼의 위대함》(De quantitate animae)은 로마에서, 《교사론》(De magistro, 389)과 《음악론》(De musica, 388~391)은 타가스테에서 저술하였다.
호교론적 저서 : 《신국론》(De ciavitate Dei, 413~426)은 인간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한 방대한 역사 신학서로, 고대 그리스도교 호교론서들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전반부(제1~10권)에서는 지상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교의 우상 숭배들에 대하여 거론하였고, 후반부(제11~22권)에서는 하느님의 나라(civitas Dei)와 지상 왕국(civitas terrena) 사이, 신앙과 불신앙 사이,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싸움을 거론하였다. 이 밖에 《신앙의 유익함》(De utilitate credendi, 391), 《불가견 사물의 신앙》(De fide rerum invisibilium, 399), 《악마의 점술》(Dedivinatione daemonum, 406~408) 등이 있다.
교의 신학적 저서 : 교의 신학 분야에서 최고 걸작인 《삼위 일체론》은 삼위 일체에 관한 교부 시대의 신학을 총괄하고 완성시킨 작품으로, 이후 교회의 삼위 일체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1~4권에서는 삼위 일체에 관한 성서적 논거를 제시하였고, 제5~7권에서는 사변 신학적 관점에서 삼위 일체론의 정식(定式)을 설명하였으며, 제8권에서는 하느님에 관한 신비 신학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제9~14권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삼위 일체의 모상을 찾았으며, 제15권에서는 앞의 내용들을 요약하고 보완하였다. 특히 삼위 일체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 심리학적 설명, 성령의 위격적 특성, 삼위 일체의 신비와 은총의 삶 사이의 연결 등은 아우구스티노의 고유한 신학들이다. 이외에 《교리 요강, 신앙과 희망과 사랑》(Enchiridion ad Laurentium, seu de fide, spe, caritate, 423), 《신앙과 신경》(De fide et symbolo, 393), 《83 명제 자유 토론집》(De diversis quaestionibus 83, 388~396), 《심플리치아누스 자유 토론집》(De diversis quaestionibus ad Simplicianum, 397), 《신앙과 행위》(De fide et operibus, 413), 《기혼자의 간통》(De adulterinis conjugiis, 420), 《죽은 이를 위한 배려》(De cura gerenda pro mortuis, 424) 등이 있다.
논쟁적 저서 : 《이단론》(De haeresibus ad Quodvultdeum, 428)에서 아우구스티노는 교회 안에 문제가 되는 88개의 이단들을 소개하면서 각기 간략하게 논박하였다.
① 마니교 반박 저서 : 이 반박서들의 주된 주제는 선과 악의 기원 문제, 구약과 신약이 같은 한 하느님의 업 적이라는 점, 그리스도의 참된 육화 등이다. 이에 속하는 저서들은 《가톨릭 교회의 습속과 마니교도들의 습속》 (De moribus ecclesiae catholicae et de moribus manichaeorum, 388), 《자유 의지론》(De libero arbitrio, 388/391~395), 《마니교 논박 창세기론》(De Genesi contra manicheos, 389), 《참된 종교>(De vera religione, 390), 《두 영혼》(De duabus anima-bus, 392), , (포르투나투스 논박》(Contra Fortunatum manicha-eum disputatio, 392), 《아디만투스 논박》(Contra Adimantum manichaeum, 392) , 《마니교 기조 서간 반박》(Contra epis-tulam manichaei quam vocant fundamenti, 396) 33권으로 된 《파우스트 논박》(Contra Faustum manichaeum, 397~400) , 《선의 본질》(De natura boni, 399) , 《세군디누스 논박》(Con-tra Secundinum manichaeum, 399) 등이다. 한편 《프리실리아누스주의와 오리제네스주의 논박》(Conta Priscillianistaset Origenistas ad Orosium, 415)은 마니교 주장과 비슷한 프리실리아누스주의를 논박한 것이고, 《율법과 예언서 반대자 논박》(Contra adversarium legis et prophetarum, 420)은 마르치온 이단을 반박한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마니교 반박과 비슷하다.
② 도나투스주의 반박 저서 : 이 반박서들에서 아우구스티노는 교회와 성사에 관한 가르침을 심도 있게 전개 하였는데, 이에 속하는 저서 17개 중 중요한 것은 다음의 8개이다. 《도나투스파 논박 시》(Psalmus contra partem Donati, 394) , 《파르메니아누스 서간 논박》(Conta epistulam Parmeniani, 400), 《세례론》(De baptismo contra Donatistas, 400), 《페틸리아누스 서간 논박》(Contra litteras Petiliani, 399~402), 《크레스코니우스 논박》(Conta Cresconium gram-maticum, 405), <교회 일치》(De unitate ecclesiae, 405), 《도나투스파와 공개 토론집》(Breviculus collationis cum Donatistis, 411~412), 《가우덴시우스 논박》(Contra Gaudentium Donatis-tarum episcopum, 425) .
③ 펠라지우스주의 반박 저서 : 이 반박서들의 주된 주제는 인간 본성, 원죄와 유아 세례, 의화와 은총 문제등이며, 여기에 속하는 저서들로는 <죄인의 응보와 용서, 그리고 유아의 세례》(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et de baptismo parvulorum ad Marcellinum, 412), 《영과 문자》 (De spiritu et littera, 412), 《신약성서의 은총론》(De gratia Novi Testamenti, 412), 《자연과 은총》(De natura et gratia, 415), <의화의 완성》(De perfectione justitiae hominis, 415), 펠라지우스 논쟁》(De gestis Pelagii, 417), 《그리스도의 은총과 원죄》(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418), 《결혼과 정욕》(De nuptiis et concupiscentia, 419~420), 《영혼의 기원》(De anima et ejus origine, 420), 《펠라지우스파 두 서간 반박》(Contra duas epistulas Pelagianorum ad Bonifatium, 421), 《율리아누스 논박》(Contra Julianum haeresis Pelagia-nae, 421), 《미완성 율리아누스 반박서》 등이 있다.
한편 교회 안에서도 은총론과 예정론에 관한 이견들이 있었으므로, 아우스티노는 이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은총과 자유 의지》(De gratia et libero arbitrio, 426~427) , 《훈계와 은총》(De correptione et gratia, 427), 《성도들의 예정》(De praedestinatione sanctorum ad Prosperum, 428), 《항구함의 은사》(De dono preseverantiae ad Prosperum, 428) 등을 썼다.
④ 아리우스주의 반박 저서 : 이에 관한 저서들은 《아리우스주의 강론 반박》, 《막시미누스와의 토론》, 《막시미누스 논박》 등이다.
성서 주석서 : 성서 주석 일반에 관한 저서인 《그리스 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은 396~397년에 대부분 저술하였으나 끝낸 것은 426년이었다. 4권으로 된 이 저서에서 그는 그리스도적 교육 프로그램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교와 고대 문화 사이의 종합을 모색하였다.
① 구약성서 주석서 : 창세기에 관심을 가졌던 아우구스티노는 3개의 창세기 주석서를 남겼는데, 389년 타가스테에서 저술한 《마니교 논박 창세기론》에서는 창세기 1~3장을 은유적 방법으로 주석하였다. 393년에 창세기를 다시 문자적 방법으로 주석했으나, 1장 26절까지만 했기 때문에 이를 《미완성 창세기 축자 해석》(De Genesiad litteram liber immperfectus)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가 다시 창세기 1~3장을 문자적으로 주석한, 12권으로 된 《창세기 축자 해석》(De Genesi ad litteram, 401~415)이 역작으로 꼽힌다. 모세 오경에 여호수아기와 판관기를 합쳐 설명한 《구약 7경 강해》(Locutioness in Heptateuchum)에서는 언어적으로 어려운 구절들을 해설하였고, 《구약 7경 발췌 토론집>(Questiones in Heptateuchum, 419~420)에서는 내용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을 해설하였다. 아우구스티노의 저서들 중 가장 방대한 것은 시편을 모두 주석한 《시편상해》(Enarationess in Psalmos, 392~416)로, 이전의 교부들이 한 시편 주석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역사적 · 문자적 주석 방법보다는 신학적 · 영적 주석 방법으로 해설하였으며, 철학에서부터 일반 교의 신학 · 영성 신학 · 신비 신학 등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가르침을 모두 포괄하였다.
② 신약성서 주석서 : 복음서들 간에 서로 모순되는 부분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반박하기 위해 저술한<복음사가들의 일치》(De consensu Evangelistarum, 400)에서, 그는 복음사가들의 권위와 복음서들의 역사성과 조화를 주장하였다. 이외에 《복음서 발췌 주해》(Quastioness evangeliorm, 400) , 《마태오 복음 17개 항 토론집》(Quaes-tiones septemdecim in Evangelium secundum Matthaeum, 419), 《산상 설교》(De sermone Domini in Monte, 393~394) 등이 있다. 124개의 강의로 구성된 방대한 저서인 《요한 복음 강해》(Tractatus in Joannis evangelium, 406~418)는 사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신학 · 철학 · 영성의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요한 서간 강해》(Tractatus in Epistulam Joannis)는 413~418년에 행한 10개의 강의를 엮은 것으로, 특히 사랑의 가르침에 대해 역설한 것이다. 《로마서 자유 명제 해설》(Expositio quarundam proposi-tionum ex Epistula ad Romanos)과 《로마서 서두 해설》(Epistulae ad Romanos inchoata expositio) 및 《갈라디아서 해설》(Expositio epistulae Galatas) 등은 모두 394년경에 저술되었다.
윤리 사목적 저서 : 395년에 저술한 《거짓말》(De men-dacio)에 미흡한 면이 있어 420년경 같은 주제로 저술한 것이 《거짓말을 거슬러》(Contra mendacium)이고, 《그리스도인의 투쟁》(De agone christiano, 396)에서는 신자들이 악마의 유혹과 죄를 이겨내기 위해서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모범을 예시하면서 윤리적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입문자 교리 교육》(De catechizandis rudibus, 400)은 예비 신자 교육서이다.이 밖에 《절제론》(De continentia, 395), <결혼의 유익함》(De bono conjugali, 401), 《거룩한 동정 생활》(De sancta virginitate, 401), 《과부 신분의 유익함》(De bono viduitatis, 414), 《인내론》(De patientia, 415), 《성서 선집》(Speculum de Scriptura sacra, 427) 등이 있다.
수도 생활 저서 : 《아우구스티노 규칙서》(Regula ad servum Dei, 400)는 서방 교회에서 라틴어로 쓰여진 첫 번째 수도 규칙서이다. 또 수도 생활에서 기도 생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육체 노동의 필요성을 강조한 《수도자의 노동》(De opere monachorum, 401)에서는 "기도하고 일하라" '(Oraetabbora)의 신학적 기초를 제시하였다.
강론 : 대부분의 성서 주석서들이 강론으로 되어 있지만, 이외에도 아우구스티노는 주교로 재직한 43년 동안 수많은 강론을 하였다. 미뉴(J.P. Migne, 1800~1875)의 《라틴 교부 선집》(PL 38~39)에 그의 363개 강론들이 성서 · 전례 시기 · 성인들 및 기타 주제들로 분류되어 있다. 이 가운데 32개는 친저성에 의문이 있다. 1930년에 모린(G. Morin)이 미뉴의 선집에 수록되지 않은 138개의 강론을 더 출간함으로써 아우구스티노의 강론은 500여개에 이르고 있다.
서간 : 《라틴 교부 선집》(PL 33)에는 270개의 아우구스티노 서간들이 시대별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53개는 아우구스티노가 받은 것이다. 서간 1~30번은 회개에서 주교 서품까지, 31~123번은 주교 서품에서 411년까지, 124~231번은 411년에서 사망까지이며, 232~270번은 연대 미상의 서간들이다. 그 후 6개의 서간이 더 발견되어 출간되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서간들은 역사 · 철학 · 신학 · 성서 주석 · 영성 · 사목 등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의 인격을 잘 대변하고 역사적 상황을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사 상] 이성과 신앙 :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은 방법론적 차원에서 '이성' (ratio)과 '신앙' 이라는 두 용어 안에 모아진다. 19세 때 마니교의 선전에 현혹되어 두 개념에 잘못된 인식을 가졌던 그는 이성의 이름으로 신앙을 배척하였으나, 가톨릭 교회로 돌아온 후 이성과 신앙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진리에 이르는 방법에는 신앙의 권위' (auctoritas)와 '이성' 이라는 두 길이 있다. 그는 믿지 않고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깨닫기 위해서 믿어라"(Crede ut intelligas)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깨닫는 것은 믿음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 원칙과 방법론을 역설하기 위하여 《신앙의 유익함》을 저술하였다. 다시 말해 신앙은 철학자를 포함해 모든 이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사실 신앙은 치유하는 약(《고백록》 6, 4, 6)이며, 방어하는 보루(서간 118, 32)이고, 날기 위해 깃을 접어 두는 등지(강론 51, 5. 6)이며,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근본적인 진리를 신속하고 쉽게 깨닫게 하는 지름길(서간 102, 28)이다. 한편 그는 이성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게는 "믿기 위해 깨달아라"(ntellinge ut credas)라고 말한다. 이성적인 사고 없이는 올바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믿어야 할지 먼저 생각하지 않고서 그냥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성도들의 예정》 2. 5). 이성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그는 신앙과 이성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믿기 위해 깨달아라, 깨닫기 위해 믿어라"(강론 43, 7 ; 서간 120, 3 : 《삼위 일체론》 1, 1, 1)라고 표현했다. 여기에 근거하여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1033~1109)는 "나는 깨닫기 위해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라고 하였고, 이것은 스콜라 신학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삼위 일체론 : 아우구스티노는 삼위 일체론 신학의 전통적인 주류를 따르면서 서방 교회 안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특히 그의 《삼위 일체론》은 이에 대한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의 믿음이기 때문에 나의 믿음이 된다" (《삼위 일체론》 1, 4, 7)라는 신앙 고백으로 시작한 이 책에서 그는, 삼위 일체 교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삼위일체론》 1, 5, 8)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서를 탐구하였다. 그는 먼저 삼위의 일치와 서로 구별되는 특성들을 탐구하면서(《삼위 일체론》 1~4권) 삼위의 위계적 차등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리스 교부들이 주로 삼위의 위격들을 고찰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는 하느님의 본질에서 출발하였는데, 하나의 신적 본성을 지닌 삼위는 하느님의 내적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들의 결과를 통해 서로 구별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삶의 과정들을 인간의 심리학적 방법을 통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성자의 나심을 성부의 생각의 행위로 설명하였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신 성령은 그들 서로의 사랑에서 나온 위격으로 설명하였다. 한편 세상의 창조와 인간에게 발현하심 등과 같이 외적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모든 활동은 하나의 신적 본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삼위 모두에게 공통된다고 하였다(《삼위 일체론》 2, 17, 32). 또한 삼위의 동등함과 구별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삼위의 각 위격은 다른 위격에 관련된 관계들 외에는 모든 것을 지니고 계신다. 사실 성부께서 성자를 지니고 계시지만, 성부께서 성자가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신국론》 11, 10, 1). "성부이심과 성자이심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본성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호칭들은 본성의 등급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등급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삼위 일체론》 5, 5, 6). 관계의 가르침 외에도 아우구스티노가 삼위 일체 신비를 알아듣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두 가지는 성령 신학과 삼위의 심리학적 설명이다. 성령은 유일한 기원인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는데(《삼위 일체론》 5, 14, 15), 주로 성부에게서 발한다. 왜냐하면 "신성의 근원이신" 성부는 성자에게 성령을 발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사랑처럼 발하기 때문에 낳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론 : 아우구스티노는 개종 전날에야 '로고스'의 육화에 관한 교리를 깨닫고(《고백록) 7, 19, 25), 그 후 이를 열렬하고 항구히 고백하고 변호하였다. 그의 학설은 교부들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따랐지만, "두 본성 안에 한 위격"이라는 정식을 분명히 하였으며(강론 294, 9),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느님이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 이시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온갖 이단들을 맹렬히 논박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에페소 공의회(431)와 칼체돈 공의회(451)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있으며, 둘이 하나의 위격을 이루어 한 그리스도가 된다고 가르쳤다(강론 130, 3 ; 《요한 복음 강해》 78, 3). 즉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은 서로 혼합되거나 변형되는 일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삼위 일체론》 1, 7, 14 ; 《훈계와 은총》 11, 30). 예수는 인간 본성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양자가 아니라 친아들이었다(강론 183, 5 : 《세군디누스 논박》 5). 그리스도의 한 위격안에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있다는 데서 소위 '신-인속성 교환' (神人屬性交換, communicatio idiomatum)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이 태어나셨다" "하느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하느님이 죽으셨다"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다.
원죄론 : 아우구스티노는 아담의 죄의 결과로 모든 이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다는 원죄론을 발전시킨 첫 번째 신학자였다. 원죄는 '죄' 이며 동시에 '죄의 벌' 이다 (《미완성 창세기 축자 해석》 1, 47). 그는 원죄론의 근거를 로마서 5장 12절에서 찾았다. "한 사람을 통해(per unum hominem)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그 안에서(inqo)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뚫고 들어왔습니다." 그는 이를 라틴어본 성서를 토대로 해설하였는데, 여기에서 한 사람' 은 아담을 말하며, 그 안에서' 는 앞에 나온 선행사 '아담 '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원죄를 통하여 인류는 '멸망할 무리' 또는 '단죄된 무리' 가 된 것이다(《신국론》 21, 12). 원죄는 육신의 정욕을 통하여 대대로 전수되므로, 실상 아이들은 부모의 정욕의 협력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원죄가 없는 것은 부모의 육체 관계에 의해 세상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결혼과 정욕》 1, 24, 27). 육체의 정욕은 원죄의 본질에 속한다. 이것은 죄이며 동시에 죄의 벌이다(《율리아누스논박》 5, 3, 8). 정욕을 죄라고 하는 것은 단지 표현상의 문제이다. 정욕은 원죄에 의해 야기되었는데, 정욕이 의지를 압도하면 인간을 죄로 유인한다는 것이다(《결혼과 정욕》 1, 23, 15). 인간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원죄의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영적 일치를 이루지 못하지만, 이것은 세례를 통하여 없어진다고 하였다(《결혼과 정욕》 1, 25, 28) .
구원론 : 아우구스티노의 구원론은 중재자(mediator)인 그리스도, 구원자(redemptor)인 그리스도, 사제이며 동시에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종합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며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강론 47, 12, 21). 사실 진정한 중재가 이루어지려면 서로 연결시켜야 할 양편을 함께 지녀야 하는데, 의롭고 불멸하는 하느님과 불의하고 죽어야 할 인간 사이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처럼 의로운 분이면서도 다른 인간들처럼 죽어야 할 분이다(《고백록) 10, 42, 67). 그러므로 신 (神)-인(人)인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중재자가 된다. 둘째,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기 때문에 구원자가 된다. 그리스도가 육화한 첫째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과 죄의 어두움에 묶여 있는 인류를 살게 하고 해방하고 구원하고 비추기 위해 인간이 되었으므로, 생명과 구원과 해방과 비추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죄인의 응보와 용서》 1, 26, 39). 셋째, 그리스도는 사제이며 동시에 제사이기 때문에 구세주이다.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는 기름으로 도유된 사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실 때, 즉 인간 본성이 마리아의 모태에서 그 말씀과 하나의 위격을 형성하기 위해 결합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기름으로 도유된 사제이시다"(《삼위 일체론》 15, 25, 46). 그런데 그리스도는 사제뿐만 아니라 제사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리스도는 성부께 가장 참되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완전한 제사를 바쳤고, 이를 통하여 "우리를 악마의 권세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를 씻어 주고 없애 주고 소멸시켜 주었다"(《삼위 일체론》 4, 13, 16-14. 19)는 것이다.
은총론 : 아우구스티노는 펠라지우스주의를 논박하면서 은총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따라서 그의 은총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쟁의 본질과 여기에 사용된 용어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는 펠라지우스주의자가 주장한 사물의 선성 · 인간의 자유 의지 · 율법의 유익함 · 선행의 보상 등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부인한 구원 · 은총 · 그리스도적 자유 · 구원의 무상적 선물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논박의 필요에 따라 펠라지우스주의가 거부하는 것들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니교의 교설과 펠라지우스주의 사이의 상반된 주장들을 종합하고 조화를 꾀하였다. 사실 교회는 서로 극히 반대되는 펠라지우스주의의 오류들과 마니교의 오류들 사이를 지나는 '진리의 중도(中道)' (veritatis medium)를 고수하려 하였다(《거룩한 동정 생활》 19 ; 《펠라지우스주의》 두 서간 논박 2, 1, 1-2. 4). 그는 펠라지우스주의를 거슬러 원죄의 존재를 옹호하였지만, 마니교를 거슬러서는 모든 사물의 선성을 역설하였다. 또 그는 세례를 통하여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쳤지만, 인간이 무죄할 수 있다(impeccantia)고 하는 펠라지우스주의의 주장을 거부하면서 완전한 의화는 이 지상에서 실현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점과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인간이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하시는 선택의 필요성과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점들이 많아서 후대에 그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여 교회 안에 물의를 일으킨 적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은총론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단편적이 아니라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예정론 : 아우구스티노는 은총의 무상성을 옹호하다보니 예정론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예정은 하느님의 예지(豫知)이며, 하느님께서 은사들을 베푸시려 하는 준비이다. 구원받은 모든 이가 이 은사들을 통해 구원받은 것이 분명하다"((항구함의 은사》 19, 35)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가르침들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았고, 당시의 반 펠라지우스주의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예정론주의로 잘못 해설하였는데,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저서들을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주제는 어느 것보다 어렵고 모호한 면이 많으며, 여기에는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즉, 선택된 이들에게 거저 베푸시는 하느님의 편애와 모든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노의 예정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원칙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정하시지만 죄악만은 다스리시는 분"(고백록》 1, 10, 16)이라는 보편적인 원칙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단죄하실 수는 있지만, 죄악의 원인이 되실 수는 없다(서간 194, 6, 30). 둘째, 그는 예정과 예지를 구별하였는데, 죄는 하느님께서 미리 내다보시는 예지의 대상은 되지만, 미리 그렇게 정해 둔 예정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영혼의 기원》 1, 7. 7 : 《성도들의 예정》 10, 19). 셋째,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죄 없는 이를 벌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선하시고 의로운 분이시다. 선하시기 때문에 공덕이 없는 이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또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잘못이 없는 어떤 이도 단죄하실 수 없다"(《율리아누스 논박》 3, 18, 36). 넷째,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제일 잘 입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인데(《삼위 일체론》 4, 1, 2), 그분은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을 포함해 모든 이를 위해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시고, 모든 이가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결국 여러 시대에 있었던 예정론자들은 이러한 구원의 보편성을 부인하였지만, 교회는 이를 고수해 왔다.
교회론 : 아우구스티노는 마니교와 도나투스주의를 논박하면서 교회의 본질에 관한 신학을 심화시켰는데, 마니교 논박에서는 교회의 역사성과 믿을 만한 종교라는 이유를 설파하였고, 도나투스주의 논박에서는 친교와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설파하였다. 사실 그가 교회를 복합적이고 신비적인 실재라고 정의하였기 때문에 그의 교회론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는 교회를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적인 실재, 교계적이면서도 영적인 실재, 가시적이면서도 비가시적인 실재로 설명하였다. 또 그는 교회를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신자들의 공동체, 또는 아벨로부터 종말까지 세상 안에서 순례하는 의인들의 공동체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교회의 개념을 복합적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그 개념을 때로는 구별하고 때로는 일치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교회가 사도들 위에 세워진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개념에서 교회의 일치 · 보편성 · 사도성 · 거룩함(聖性)을 역설하였다. 예컨대 도나투스주의 교회는 보편되고 하나이며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교회가 아니므로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자가 자신의 구원을 잃게 되는 것은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기" (salus extra ecclesiam non est) 때문이다(《세례론> 4, 17, 24). 일치의 사도요 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노는 교회가 믿음과 성사와 사랑의 친교로 가득 차 있을 때 일치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하였다. 이 세 가지 친교는 이단과 이교(離敎)와 죄에 반대된다. 이단자는 단순히 믿음에 오류를 범하는 자가 아니라(서간 43, 1), "자기에게 제시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이며"(《세례론》 16, 23), 교회가 제시한 '신앙의 규범' 을 거부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 신앙의 규범은 세례의 신경(信經),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공의회들(서간 54, 1), 그리고 "사도좌들 중에서 수위권을 늘 지니고 있는 베드로의 사도좌" (서간 43, 7) 안에 잘 나타나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참된 교회임을 확인하기 위하여(서간 53, 2), 또는 교리상의 문제들을 권위 있게 해결하기 위해 베드로의 사도좌인 로마 교회의 결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펠라지우스주의 논박 문제로 조시모 교황의 답장을 받은 다음 행한 강론에서, "(펠라지우스 이단의) 문제에 관한 두 개의 교회 회의 결정문을 사도좌에 보냈고, 이에 대한 답장도 이미 받았습니다. 이 문제는 종결되었으니(causa finitaest) 마침내 오류가 끝나기를 바랍니다" 라고 역설하였다(강론 131, 10, 10). 이 말에서 훗날 로마 교회의 권위적인 태도를 빈정대어 말할 때 "로마가 말했으니, 논의는 끝났다" (Roma locuta, causa finita)라고 하는 유명한 표현이 나왔다.
성사론 : 아우구스티노는 성사들의 본질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 외에도 논쟁적인 필요와 사목적 이유로 세례성사 · 고해성사 · 성체성사 · 혼인성사 등 각 성사에 관한 가르침을 폭 넓게 제시하였다. 다른 분야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아우구스티노가 발전시키고 옹호한 교의의 다양한 측면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① 세례성사 : 세례성사에 관한 신학은 7권으로 된 《세례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어린이의 세례는 "비록 사도들의 전승은 아니지만, 결코 무시하지 말고 반드시 믿어야 할 (교회의) 관습"이라고 역설하였으며(《창세기 축자 해석> 10, 23, 39), 예수의 오른편에 매달렸던 죄인이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루가 복음 23장 43절에 근거하여 절박한 상황에서 하는 '원의의 세례' (bap-tisma desiderii)에도 죄를 사하는 능력을 부여하였다(《세례론》 4, 22, 29). 미신자라도 그리스도 때문에 순교하면 '피의 세례' , 즉 혈세(血洗)를 받아 구원된다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 있지만, 아우구스티노는 도나투스주의자들처럼 교회 밖에서 한 순교는 아무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하였다. 고린토 전서 13장 3절의 내용처럼 그런 순교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세례론) 4, 17, 24).
② 성체성사 : 아우구스티노는 성체 안에 주님의 실체적 현존을 역설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당신 몸의 표시로 주면서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였으므로(《아디만투스 논박》 12, 3), 성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혈은 그분의 피인 것이다(서간 98, 9). 그는 새 영세자들을 위한 강론에서 "여러분이 제단 위에 있는 빵을 보지만, 그 빵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축성되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또 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축성되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피가 됩니다"(강론 227, 1)라고 하였다. 매일 바쳐지는 교회의 성사적 제사 안에서 예수는 제관이면서 동시에 제물이 된다는 것이다(《신국론) 10, 20). 그래서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바친 희생 제사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것이다(《시편 상해》 21 : 강론 2, 27).
③ 고해성사 : 죄 사함은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다. 교회만이 죄 사함의 원리인 성령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속죄는 세례에 앞서 이루어지는 속죄 · 경미한 죄들에 대한 속죄 · 중한 죄들에 대한 속죄 등 세 가지가 있는데, 처음 두 가지 속죄는 모든 이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세 번째 속죄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상적인 삶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신앙과 신경》 7, 15, 16 ; 강론 252, 3, 80).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불가피하게 저지른 잘못들(강론 9, 11, 18 ; <교리 요강》 78, 21)과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과 같이 덜 중대한 죄들(강론 98, 5 ; 82, 3, 5)은 소죄의 부류에 속한다. 이런 죄들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바치고, 단식과 자선을 하고(강론 17, 5 : 131, 7), 형제적 교정을 겸손되이 받아들여야 한다(《신앙과 행위》 26, 48). 한편 파문을 받은 중대한 죄들에 대해서는 매우 혹독한 속죄를 하여야 한다(《신앙과 행위> 26, 48). 파문을 받은 다음에 하는 혹독한 속죄만이 교회적 · 성사적 성격을 띠며, 당시 교회의 관례에 따라 일생에 한 번만 할 수 있었다. 공개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중대한 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파문을 받고 이에 상응한 참회도 공개적으로 하여야 하며, 화해도 공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공개되지 않은 죄는 참회 절차도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강론 82, 7, 10 ; 351, 4, 9). 아우구스티노 시대에는 개별 고해성사 제도가 없었다.
종말론 : 은총 · 교회 · 역사에 관한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은 궁극적으로는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종말론은 이에 대한 방향과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신국론》 제19~22권이 종말론에 해당하며, 이 주제에 대한 그의 몇 가지 학설은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초기에 자신이 받아들였던 소위 천년 왕국설을 요한 묵시록 20장 1-5절을 은유적으로 해설하면서 배격하였다(《신국론) 20, 7 : 강론 259, 2). 이 성서 구절은 영적 부활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내용인데, 하느님 나라는 지상에 있는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 그는 플라톤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육신 부활을 역설하였는데, 부활한 육신은 더 이상 썩지 않지만 참된 육신이라는 것이다(《신국론) 22, 1-28). 그리고 영원한 벌에 대해 누차 언급하면서(《신국론>21 : 《신앙과 행위> 14, 21), 이에 관한 성서의 말씀들이 단순히 위협을 주기 위한 말이 아니므로 진실된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신국론> 21, 24, 4). 또 모든이가 윤회적 정화를 거쳐 결국에는 모두 구원받게 된다고 말한 오리제네스의 '우주적 복원' (apocatastasis) 이론을 교회가 단죄한 것은 올바른 결정이라고 하였다(《신국론> 21, 17). 끝으로 연옥(purgatonium)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언급한 뒤(《교리 요강》 69 : 《신국론》 21, 13), 이것은 교부들이 전해 주었고 보편 교회가 고수하는 가르침이라고하면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지상에 있는 신자들의 희생과 선행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강론 172, 2). 1 《고백록》 ; 도나투스주의 : 모니카 ; 《신국론》 ; 《아우구스티노 규칙서》 ;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 펠라지우스주의)
※ 참고문헌  T. Van Bavel, Répertoire bibliographie de St. Augustin 1950~1960, Steenbrugge, 1963/ Augustinus, 최민순 역, 성염 역주, 《고백록》, 성바오로출판사, 1965/ -, 성염 역주, 《그리스도교 교양》, 교부 문헌 총서 2, 분도출판사, 1989/ - 《참된 종교》, 교부 문헌총서 3, 분도출판사, 1989/ -, 성염 역주, 《자유 의지론》, 교부 문헌 총서 10, 분도출판사, 1998/ A. Zumkeller 주석, 이형우 역,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 분도출판사, 1990/ C. Cremona, 성염 역,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명상록》, 성 바오로출판사, 1990. [李瀅禹]
II . 철학에서의 아우구스티노
아우구스티노의 철학 사상은 주로 그의 행복론과 진리론, 즉 진리 자체인 신(神)에 대한 인식에 접근해 간 그의 사유를 통하여 설명될 수 있다.
[행복론]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사람들은 행복을 찾는데 이는 곧 그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기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거론한 행복의 문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무엇을 욕구하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소유하고 차지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차지하려는 것이 상실의 불안을 주어서는 안되므로 행복하기 위해 찾는 추구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연히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는 것, 즉 인간과 필연적인 관계를 지닌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 무상한 이 세상에는 그러한 것이 없다. 오직 신만이 영원한 존재로서 불변 · 불멸하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므로, 우리 자신의 존재와도 필연적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만일 신을 차지하고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는 진정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그렇다면 신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를 밝히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노는 먼저 신을 추구한다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우선 그것은 밖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의 문제는 대상 면에서의 고찰에서 주체 면으로 전환된다. 여기에서 행복이란 우선 '마음의 충족된 상태'로 간주된다. 이 충족된 상태란 지혜로써 아는 것이나, 그 지혜란 절도를 아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신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이 같은 지혜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바른 절도를 가짐으로써 스스로의 참된 충족, 곧 진실된 참을 보유하는 동시에 진리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신을 소유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을 구한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노는 또 하나의 철학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즉 "행복의 불가결한 조건이 진리라면, 그 진리의 인식은 어디까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진리론] 아우구스티노의 저서 《아카데미아 학파 논박》(Contra Academocos)에서 회의론(懷疑論)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을 볼 수 있는데, 그에게 있어서 아카데미아 학파의 주장은 자가 당착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들이 '무릇 진리의 인식은 불가능하다' 고 주장하지만 최소한 그 주장만은 참이어야 하며, 또 진리는 일반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니 우리는 '진리 같은 것' 에 만족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도 옳지 않다. 도대체 참된 것이 없이 어떻게 참 같은 것이 있겠는가? 진리를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리 같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이렇듯 그는 회의론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 의식의 사실, 나 자신의 자각의 확실성을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노가 주장한 것은 진리를 밖에서 구하는 자는 결코 확실한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밖으로 향하는 눈을 안으로 돌릴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게 되는가?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거기에는 아무리 회의를 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존재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도 없고 또 의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확실한 한 의심하는 나 자신의 존재도 역시 확실한 것이다. 가령 내가 누구한테 속고 있어, 그 인식이 오류라 할지라도 나는 그릇된 인식을 하는 자이고 속아넘어가고 있는 자이다. 그릇되기 위해서나 또는 속아넘어가기 위해서도 그런 내가 존재하고 있어야만 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자는 그르칠 일도, 속는 일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분명한 '스스로의 의식' 차원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인식의 세계로 발을 내디렸다.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는 동시에 나는 살고 있다. 생활하는 동시에 나는 의심한다. 의심하는 동시에 나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와 생명과 인식은 나의 사유와 더불어 자의식(自意識)의 사실로서 파악되는 의심할 여지없는 자각적인 분명함이다. 이처럼 분명하고 확실한 의식의 사실에서 자의식을 토대로 자기 존재 인식의 필연성을 이끌어 낸 그는, 더 나아가서 이 인식의 조건을 분석함으로써 진리의 존재의 필연성을,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신 존재의 필연성을 밝혀 나갔다. 그에게 있어서 신 존재의 증명은 인식론의 전개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실상 의식에 있어서 내적 경험(반성이나 성찰)의 인식은 직접적인 분명함을 찾는다. 이것이 바로 인식의 표지라고 할 진정한 확실성이다. 따라서 이 확실성은 곧 외적 경험(감각이나 지각)의 확실성의 기본이 되고 표준이 된다. 이 확실성이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동시에 진리의 존재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무엇이 참이다' 라는 것은 이미 진리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 참이다' 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우리의 인식 여하에 관계없이 그 자신이 진리의 밑받침이 되어서 참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객관적 실재(實在)가 인간 인식의 대상이 되어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 파악되어 말로 표시될 때 그 인식은 참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진리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스스로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객관적 존재의 참을 의심하는 자, 따라서 진리 자체를 의심하는자라 할지라도 역시 자기 속에 있는 참다운 것의 존재, 따라서 여기에 있어서 나타내 보이려는 진리의 현시를 부정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노의 논리에 따르면, 사람은 무엇인가를 의심하고 있는 한 진리를 의심할 수 없다. 진리를 인식함에 있어서 감각적인 것은 다만 밖에서안을 향하여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기회나 계기라는 의미밖에 없다면, 이성(理性)은 인식의 내용을 외계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인간의 내면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학적 인식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를테면 논리학이나 수학, 미학이나 윤리학에서 말하는 진리란 누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무에게나 마찬가지로 파악되는, 달리 말해서 공통적인 면에서 보편적인 동시에 불변적인 것이다. 그러면 "이런 불변한 보편성의 근원은 무엇이며, 그런 보편성을 갖는 학적 진리들의 소재(所在)는 어디이며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또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학적인 진리란 여러 가지 학(學)들의 기본 개념이나 근본 원리(原理)를 말함인데, 그런 것들이 서로 내용은 다르면서도 어째서 같은 말 즉 진리라는 말로 동일하게 일컬어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각자 다른 오관(五官)으로 감각 작용을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학문을 하고 이성적 인식의 결과를 학적 진리라고 일컫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이성이 곧 그 진리 인식의 원인이나 주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혹은 감각의 세계인 외계의 차원이 다른 세계, 즉 우리의 마음도 초월하는 그런 세계에서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 이성적으로 조명(照明, ilumimatio)되어서 드러나는 것일까? 여기에 진리의 유래적(由來的) 소재(所在), 또는 이성적 인식의 근거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노는 학적 진리를 어떤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적으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마음(anima, 영혼)이 보편적이고 불변하기에 영원할 수밖에 없는 진리를 자기 속에서 스스로 생산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불합리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마음이 이성적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이 그 영원하고 불변한 보편적인 학적 진리의 소재가 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영원한 학적인 진리의 소재는 어디이며 여러학들의 진리들을 '진리' 라고 하는 근원적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그에 의하면 감각은 가변적(可變的)인 사물의 지식이지만, 이성적 인식의 대상은 불변하다는 것이다.
이 불변한 여러 '진리들' (veritates) 속에는 하나의 '진리' (veritas) 자체가 시사되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각각 다른 학적인 분야의 여러 근본 원리들이 모두 다 '진리' 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들이 그것에 포함되어 있고, 그것에 의해서 진리들이 바로 '참다운 진리' 라고 말하여질 수 있는 그 '진리 자체' 는 여러 진리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초월하는 것처럼 모든 진리들을 초월한다. 따라서 그런 '진리 자체' 는 본래 특정한 어느 누구의 소유가 아니고, 무릇 이성적인 것을 진리로서 인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암시하며 그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이로써 일반적으로 사람이 진리를 인식할 때는 이 '진리 자체' 가 빛에 '조명' 되어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빛 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것으로서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인 동시에, 진리를 인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인식이 성립되기 위한 조건을 세 가지로 생각하였다. 그는 극히 자연스러운 견지에서 아주 적절한 유비(類比)로써 이성적 · 학적 인식을 파고 들어 갔다. 감각적인 세계를 비추는 빛은 태양의 빛이다. 이 경우에 보여지는 사물은 분명히 우리 자신이나 또는 우리의 시각(視覺)과는 별개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성적 인식에 있어서도 각 사람의 마음에 의해서 이성적으로 인식되는 진리들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이나 또는 우리의 마음과는 별개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식론에서는 인식을 '주관과 객관의 관계' 로 정의 내리는데, 아우구스티노는 그 관계를 빛의 조명으로 강조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연계의 앎 즉 감각적인 외적 지식이 성립되는 것은 '태양의 빛' 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적 인식인 학적 진리를 인식하는 데에는 태양의 빛과 같은 것이 필수적인 조건으로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노는 후자의 경우 빛을 발하는 태양을 '학문의 태양' 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였으며, 그 태양의 빛으로 비쳐 주는 조명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적 · 학적 인식이 보편적으로 공통되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때 조명하는 빛 자체' 는 '진리 자체' 에 해당되는 유일한 참으로 존재하는 신 곧 하느님이다. (→ 아우구스티노주의)
※ 참고문헌  E. Nebreda, C.M.F. Bibliographia Augustiniana, Roma, 1928/ É. Gilson, Introduction a l'étude de Saint Augustin, Paris, 1931/ J. Hessen, Augustins Metaplysik der Erkenmtmis, Berlin & Bonn, 1931/ Ch. Boyer, L'idée de vérité dans la philosophie de Saint Augustin, Paris, 1921/Augustinus, 金孝臣 역, 《幸福된 生活에 관하여》, 京鄉文庫, 가톨릭 青年社, 1960/ 一, 金孝臣 역, 《獨白》, 京鄉文庫, 가톨릭 青年社, 1960/-, 崔旼順 역, 《고백록》, 성바오로서원, 1965. [金奎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