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노 수도회

修道會

〔라〕Ordo Fratrum Sancti Augustim(O.S.S.A.) · 〔영〕Order of Brothers of Saint Augu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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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 대통합이 이루어졌던 '백성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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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 대통합이 이루어졌던 '백성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노(Augusinius, 354~430)를 자신들의 사부로 여기고, 그의 영성과 수도 규칙서 정신에 따라 생활하던 수도자들과 은수자들이 통합하여 설립한 수도회. 총본부는 로마에 있으며, 한국 지부는 인천시 중구 전동 9-56번지에 있다.
[역 사] 성인의 시대 : 388년 가을에 고향 타가스테(Tagaste)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한 아우구스티노는, 391년 히포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주교관 옆에 사제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 생활을 병행하였다. 그 후 히포에 여성들의 수도원이 건립되면서 아우구스티노의 수도 생활은 남자 평신도 · 여자 평신도 · 수도자와 성직자 등 세 가지 형태를 띠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노의 이상(理想)은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주교로 서품된 몇몇 수도자들은 이와 같은 수도 생활을 또 다른 지역 교회로 전파하였다. 그래서 5세기 아프리카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영성을 따르는 수도원들의 수는 대략 35개에 이르렀다. 430~570년 사이에 그들의 생활 방식은 반달족의 박해를 피하여 유럽으로 피신한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유럽에도 전파되었다. 440년경 카르타고의 귀드불트데오(Quodvultdeus)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처에 수도원을 설립하였고, 502년 풀젠시오(Fulgntius Ruspensis, 4621468~527/533)는 사르디니아 지방에 진출하였다. 또 570년경 도나투스와 70명의 수도자들이 스페인 남부 지방으로 진출하였으며, 어떤 수도자들은 프랑스에도 진출하였다.
소통합(minor union) 시기 : 아우구스티노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회를 창설한 것은 아니지만,그의 영성과 수도 규칙서의 정신에 따라 유럽 각지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지내던 소규모의 은수자 공동체가 통합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13세기 유럽 사회는 대변혁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사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당시 아우구스티노가 저술한 수도 규칙서는 시골에서 기도와 참회를 하며 살던 수천 명의 은수자들에게 영적 지침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43년 12월 16일 교황 인노천시오 4세(1243~1254)는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의 여러 은수 공동체들이 아우구스티노의 생활 양식과 규칙을 따르는 단일 수도회로 합병할 것을 요구하는 <인참비트 노비스>(Incumbit novis)와 <프래센시움 보비스>(Prae-sentium vobis)라는 칙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이듬해 3월 은수자들이 안니발디(R. Annibaldi) 추기경 주재로 로마에서 첫 회의를 개최한 뒤 합병함으로써,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 합병은 은수자들 스스로의 바람인 동시에, 11세기 말 이후 교회 내에서 활기 넘치는 은수 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의 결정에 따른 노력의 일부였다. 당시의 은수 운동은 주로 평신도들이 주도하였는데,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종교적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엄격한 청빈 생활과 기도, 그리고 순회 설교 등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글은 몰랐지만 설교와 참회의 삶이 당시의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복자 요한(John Bonus, ?~1249)이 그 좋은 예로, 한때 그의 평복 은수 공동체는 이탈리아 도처와 알프스 너머에까지 퍼졌다.
교황은 토스카나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은수자들에게 그들 스스로 수도원 원장을 선출하고 조직을 정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후 그들은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은수자' (Fratres Eremitae Ordinis Sancti Augustini)로 알려졌다. 초대 총장으로 마태오가 선출되었으며, 그들은 매년 총장을 선출했다. 1250년 비코 피사노의 카비나(Cavina di Vico Pisano)에서 개최되었던 회의의 문서에 의하면 수도회 소속 수도원이 61개였다고 하며, 1255년경에는 영국 · 스페인 · 프랑스 · 독일에까지 진출하였다.
대통합(grand union) 시기 : 1256년 3월 9일 교황 알렉산데르 4세(1254~1261)는 칙서 <리체트 에클레시애 카톨리채>(Licet Ecclesiae Catholicae)를 통하여 《아우구스티노 규칙서》(Reglala St. Augustin)를 사용하는 요한 은수자들(Hermits of John Bonus)과 브레티노 은수자들(Hemmis of Brettino), 《베네딕도 규칙서》(Reglala Sancti Benedict)를 사용하는 성 굴리엘모 은수자들(Hemmis of St. William)과 몬테 파발레 은수자들(Hermis ofMonte Favale), 그리고 토스카나의 은수자들에게 하나의 소명과 《아우구스티노 규칙서》를 준수하라며 통합시켰다. 대통합은 안니발디 추기경의 주재로 각 은수회의 대표들이 로마에 있는 "백성들의 성모 마리아" (Santa Maria del Popolo) 성당에 모여 이루어졌다. 이때 요한 은수자회의 원장 랜프랭크(Lanfranc Septala of Milan, +1264)가 이탈리아,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을 포함한 베넬룩스 3국 지역,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헝가리, 보헤미아, 영국 등의 수도원 180개로 구성된 수도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수도 생활에 대한 교회 개혁의 중대한 진보였던 이 대통합을 통하여 교황은 작은 신앙 단체의 과도한 수적 증가로 인한 혼란을 종결하고, 유럽의 신흥 도시들에서의 설교와 사목에 그들의 영성적인 힘을 얻고자 하였다. 결국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회원들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회원들과 함께 탁발 수도자로서의 위치를 얻게 되었으며, 가르멜회 회원들도 그 뒤를 이었다. 통합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영성적 근원은 두 가지 토대로 성립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내적 탐구와 공동체 생활 안에서 수도 생활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한 '성 아우구스티노 라는 인물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가 사도적 형제회가 되도록 한 탁발 운동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탁발 수도회의 출현과 성장은 교구 성직자들과의 마찰과 오해를 야기하였는데, 주된 원인은 교황청이 탁발 수도회를 주교의 관할권에서 면제시켰기 때문이었다. 주교와 수도자들과의 이러한 마찰은 마침내 제2차 리용 공의회(1274)에서 충돌하여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의회 결정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새로운 수도회의 창립을 금하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금지령을 인준하며,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에 생겼으며 교회의 인준을 받지 못한 탁발 수도회는 그 설립을 금하며,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에 생겼으며 교회의 인준을 받은 탁발수도회는 현재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만 지원자를 받을 수 없고 새로운 지부를 개설할 수 없다." 이 결정은 사실상 수도회의 자연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와 가르멜회는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 상태로 남아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으나, 활동에는 제약이 많았다. 그 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적용되었던 "다른 지시 사항이 있을 때까지" 라는 문구는 1298년 5월 5일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의 <테노레쿠유스담 콘스티투시오니스)(Tenore Cujusdam Constitu-tionis)에 의해 무효화되었고, 이때부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는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1327년 1월 20일에 교황 요한 22세(1316~1334)가 파비아(Pavia)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무덤 옆 건물을 수도회에 넘겨줌으로써, 아우구스티노와 특별한 유대를 지닌 수도회로 인정을 받았다.
회헌 변경 : 1244년 소통합에 참여한 은수자들은 이전의 회헌을 서로 보충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256년 대통합 때 그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최근의 것이었던 토스카나 은수자들의 회헌으로 새 회헌을 만듦으로써, 공식으로 인정된 회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275년, 1284년, 1287년 등 세 차례 개정 작업을 거쳐 1290년 독일 레겐스부르크(Rermshoug)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오시모의 글레멘스(BI. Clement of Osimo)와 타라노의 아우구스티노(BI. Augustine ofTarano)가 발의한 새로운 회헌이 의결되었다. 이것이 현존하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가장 오래된 회헌이며, 그 이전의 회헌들은 분실되거나 훼손되어 기록으로만 자취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회헌의 중요성은 수도회 창립 초기의 삶을 가장 잘 알려 주고 있다는 데 있다. 한편 벨리니(Pieto Bellini는 이 회헌을 친교의 삶, 영성적 삶과 관련된 공동체 생활, 수도회의 수락(受諾) 절차,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재화의 관리, 관구, 공동체의 사무(事務), 학습, 수도회 행정, 상벌 규정, 수도회 총회 규정 등 10개 주제에 총 51개항목으로 분류하였다.
수도회의 성인과 학자 :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시성된 성 니콜라오(St. Nicholas Tolentini, 1245~1305)는 '고행자' · '기도의 사람' · '영혼의 지치지 않는 목자' 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사망하자 곧 그에 대한 기억이 대중적인 신심으로 발전하였다. 성녀 리타(St. Rita Cassae, 1381~1457)는 아내요 어머니이자 과부였으며, 관상 수녀회 수녀였다. 그래서 '불가능의 성녀' (Saint of the Impossible)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녀는 1900년에 시성되었으며, 완덕의 길을 향했던 그녀의 모습은 교회의 가장 순백한 보석들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또 성녀 글라라(St. Clare in Monte Falco, 1268~1308)는 소녀였을 때 그녀의 언니 조안(Joan)이 설립한 참회 공동체에 입회하였으며, 1290년에 이 공동체가 공식 수도회로 되면서 수도 생활의 기초로 《아우구스티노 규칙서》를 받아들였다. 글라라는 개인적으로 경험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힘을 얻었던 중세의 주목받는 신비가였다.
성 토마스(St. Thomas a Villanova, 1486~1555)는 수 차례 주교직을 제의받았으나 청빈을 지키기 위하여 거절하다가 왕의 끊임없는 요구에 결국 주교직을 수락하였으며, 1545년에는 발렌시아(Valenaia)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열성적인 사목으로 '거지 주교 또는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로 불렸으며, 학문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많은 학교를 세웠다. 수도회의 초기 총장이었던 오시모의 글레멘스와 타라노의 아우구스티노, 독일 출신인 고타의 하르트문도(Hatmumuus of Gotha)와 레겐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Fiedrich of Regens-burg), 헝가리 출신인 판노니아의 비토(Vitus ofPannonia)는 복자품을 받았다. 그리고 카시아의 피다티(B1. Fidati of Cascia)는 그 시대에 많은 영향을 준 영성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비록 검소한 삶에 전념하였지만 분열을 조장하는 그 시대의 과도한 청빈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서는 멘델(G.I.Mendel, 1822~1884)이 체크의 브린(Brinn) 수도원에서 유전 법칙을 발견하였다.
종교 개혁 시대 : 독일의 아우구스티노 엄률 수도회(Observantine Congregation) 회원이었던 루터(M. Luther, 1483~1546)는, 1505년 에르푸르트(Etut)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여 150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517년 10월 31일 대사에 관한 <95개조 명제>를 발표한 뒤 가톨릭을 떠났는데, 이것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결국 종교 개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이후의 역사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엄청난 단절을 가져왔다. 다른 수도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떠났고, 수도회의 재산은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인 도시들에 몰수되었다. 작센(Sachsen)의 수도 공동체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바바리아 · 레노-스와비아(Rheno-Swabia) . 괄른 관구는 매우 쇠퇴했다. 또 나틴(J. Nathin)의 노력으로 에르푸르트의 수도원처럼 한동안 수도자들이 남아 있는 곳도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 보헤미아 · 모라비아의 수도원 등의 수도자들은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1523년에는 벨기에 안트웨르펜(Amtwwerpn)의 모든 수도원들이 루터교로 전향을 하였는데, 이때 회원인 보스(Hendrick Vos)와 반 에센(Jan van Essen)이 이를 거부하다가 브뤼셀의 광장에서 화형당하였고, 헨트(Ghent)에서는 벨기에인 수도자 대닐스(Clays Daneels)와 반 딕케(Joos van Dijcke)가 가톨릭 신앙을 지키다가 화형당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전쟁(1562~1598) 중 로셀(LaRochelle)에서 19명, 님(Nimes)에서 2명, 몽펠리에(Momcepelliler)에서 10명, 아르테츠(Arthez)에서 8명의 회원들이 순교하였다. 헝가리의 관구들은 터키에 정복되었을 때 모두 폐쇄되었다.
영국에서는 1534년 11월 13일 수장령(首長令)이 공포되었는데, 캔터베리의 수도자들은 이 법령에 동의하였으나 스톤(St. John Stone)은 이를 거부하다가 1539년에 처형되었다. 35개의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이 왕실에 몰수되면서 영국에서 수도원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일랜드에서도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신앙을 증거하며 죽음을 택하였다. 당시 11명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순교자들 중 1649년 크롬웰 정권하에서 처형당한 타페(Peter Taaffe)와 조단(Fulgentius Jordan)의 시복이 그들이 순교한 지 얼마 안되어 제안되었고, 부활 성야 미사가 거행되려 할 때 붙잡혀 1654년 클론멜(Clonme)에서 교수형을 당한 티리(WiliamTiny)는 1992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나머지 수도자들은 숨어서 살거나 유럽 대륙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그 후 1656년에 몇몇 수도자들이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의 중재로 메룰라나(Menthana)의 산 마태오(San Matteo)에 거주하면서 로마의 아일랜드 아우구스티노회 수도 공동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가장 오래 전에 설립된 더블린을 비롯하여 던가르반(Dungavan)과 드로이다(Drogheda)의 수도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수도원들이 폐쇄되었다. 회원들은 영국의 영향을 덜 받는 골웨이(Galway) · 밸리하우니스(Balyhamimis) · 던모어(Dun-more)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이들은 훗날 재설립된 수도회의 씨앗이 되었다.
쇄신과 선교 시대 : 16세기에 시작된 신대륙 탐험과 함께 교회도 신대륙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회원들도 일찍부터 라틴 아메리카 · 아프리카 · 아시아 등지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1533년 3월 3일 스페인의 카스티야(Casiila) 관구에서 멕시코로 파견된 7명의 수도자들은 그곳에 정착하여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복음 전파를 위하여 노력하였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밀과 옥수수 등의 재배법을 전수하였다. 1551년에는 스페인에서 14명의 수도자들이 리마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다시 페루(현볼리비아 지역)로 진출하였다. 그러던 중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결국 1568년에 회원인 오르티스(Diego Ortiz)가 순교함으로써 페루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573년에는 페루에서 에과도르로 진출하여 1586년에 산 미구엘(SanMiguel) 관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575년에는 지금의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에 진출하여 은총의 모후 관구(Province ofOur Lady of Grace)를 설립하였고, 1608년에 쿠바, 1610년에는 과테말라 등으로 진출함으로써 멕시코에 처음 파견된 지 90여 년 만에 라틴 아메리카 전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한편 1564년에 멕시코를 출발한 선박이 이듬해 필리핀의 세부(Cebu)에 닻을 내렸고, 1603년에는 일본 규수(九州)에서 우스키에 공동체를 설립하였으며, 1572년에는 인도로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네덜란드 선교가 이루어졌는데, 벨기에에서 종교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지역이었던 네덜란드 지방으로 수도자들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많은 노력 끝에 1607년에 안트웨르펜 수도원을 되찾게 되었고, 현재는 네덜란드 관구로 성장하였다.
20세기의 수도회 : 20세기 들어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서는 선교 지역을 더욱 확대하였다. 중국에는 1879년 필리핀 관구에 의해 이미 수도원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1925년에 이곳으로 진출한 아우구스티노 수녀회와 협력하여 학교와 고아원 등을 설립하고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공식적인 선교는 종결되었지만, 몇몇 수도자들은 지하 교회에서 비공식적인 선교를 계속 수행하였다. 이 밖에도 라틴 아메리카와 북아프리카 지방 선교를 활성화하여 그 동안 진출하지 못하였던 아르헨티나 · 튀니지 · 나이지리아 · 콩고 · 자이레 · 탄자니아 · 케냐 · 인도네시아 등에서 기존에 있던 관구들을 더욱 확장하거나 새로운 관구를 설립하여 독립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영 성] "한마음 한뜻" Anima Una et Cor Unum)으로 대표되는 수도회의 영성은, 먼저 자기 자신과의 일치, 이웃과의 일치, 형제들과의 일치,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수도회 회원의 정신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의 정신과 은수적인 전통에서 유래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영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내향성(內向性, interiority) :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영성은 산란한 마음으로 인한 혼란과 불안을 떨쳐 버리고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노는 "러 자신으로 돌아가라. 진리가 인간 내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네 마음이 변덕스럽다고 생각되면, 너 자신을 넘어서············· 원천이신 하느님께로 다다르라" 고 하였다. 여기에서 기도와 관상이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도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니, 오, 주여,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의 맘은 쉼이 없나이다"(《고백록> 1, 1).
공동체 : "우리의 제일의 사도직은 공동체 생활입니다"라고 회원들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공동체가 형제애의 정신과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특징 지어짐을 의미한다. 이 말은 이웃에 대한 사도적 봉사와 사랑의 봉사의 중요성을 격감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봉사의 기초를 보다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이는 회헌의 다음 구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노회 공동체는 개개인의 개성을 잃게 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서로간의 충실함과 신뢰, 성실함과 상호 이해를 돕고 유지하도록 하는 우정의 산물이므로 오히려 개성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우정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함께 모이도록 한다." 이러한 영성을 달리 표현한다면 "다양성 안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 : 예수 그리스도는 수도 생활의 궁극적인 모범이며 삶의 표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적 형제애로 공동체를 이룰 때 하느님 안에서 생활하는 공동체 생활을 함께 누리게 된다. "여럿인 우리가 단 하나의 마음을 가질 때, 그분은 우리를 그런 일치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강론 103, 3, 4).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의 모든 점, 특히 겸손과 봉사의 모습을 닮으라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무시켰다.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어 지라" 고 권고한 아우구스티노의 말은 형제 자매들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봉사 :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는 설립 초기부터 교회의 필요에 응해 왔다. 아우구스티노 자신도 연구와 성찰하는 개인 시간에 큰 가치를 두었으나, 활동과 교육 등 사도직 요구가 있을 때에는 결코 피하지 않았다. 그는 편지에서 "교회의 필요에 응하기보다 자신의 평화로운 여가 시간을 더 좋아하면 안된다. 만일 생명을 준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없다면, 생명의 근원을 발견할 길이 없을 것이다" 라고 언급하였다.
성모 신심 : 아우구스티노 수도회가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면서 사용한 호칭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15세기 때의 "은총의 성모"(orlatyofGame)이다. 어떤 이들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기뻐하소서, 은총을 입은 이여·"라고 건넨 말에서부터 성모의 호칭을 인용하였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오래된 호칭은 "도움의 성모"(Our Lady of Help)인데 "영원한 도움의 성모" (Our Lady of Per-petual Help)로 잘 알려져 있다. "위로의 성모" (Our Lady of Consolation)라는 호칭은 볼로냐에 있던 동일한 이름의 평신도 단체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위로의 성모>라는 성화는 성녀 모니카가 아들인 아우구스티노를 위하여 기도하던 중 성모 마리아가 그녀를 위로하면서 현재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회원들이 착용하는 가죽 허리띠를 주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전세계의 모든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성화 <착한 의견의 성모>(0ur Lady of Good Council)는 성당 보수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 발견에 대한 전설이 생겨나기도 했다. 비잔틴풍인 이 성화는 알바니아의 슈코더르(Shko-der)에서 여러 곳으로 전파되어 착한 의견의 성모에 대한 신심으로 발전되었다.
[한국 진출] 1983년 로마 본부에서는 인천교구장 맥노튼(W.J. McNaughton, 羅吉模) 주교로부터 한국 진출 요청을 받고 회의를 열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아시아 진출은 이미 400여 년 전부터 필리핀 · 일본 · 중국 등을 통하여 이루어졌지만, 한국에서의 요청은 처음이었다. 이 회의에 따라 호주 관구와 영국-스코틀랜드 관구에서 이듬해 인천교구를 방문하였을 때 맥노튼 주교는 빠르게 성장하는 교구 내의 본당 사목과 함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활동을 거듭 요청하였다. 이에 1985년 9월 각 관구에서 2명씩의 신부가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수도회의 한국 활동이 시작되었고,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명, 필리핀 관구에서 2명의 신부가 더 파견되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990년부터는 일반 수사와 성직수사의 양성을 위해 한국인들을 받아들였는데, 2000년 현재 3명이 종신 서원을 하였고, 그중 1명은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국에서의 활동 15년 동안, 수도회의 사제와 수사들은 본당 사목 · 피정 지도 · 영성 상담 · 병원 사목 · 인천과 서울의 가톨릭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서의 강의 등을 통하여 다양한 사도적 활동을 수행하였다. 또 장애인을 위한 사목과 함께, 결손 가정의 학생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는 그룹 홈(Group Home)을 운영하고 있다. 진출 초기인 1987년에는 서울 뚝섬에서 양성 공동체와 수련소를 운영하였으나, 1994년 인천 전동에 수도원을 건립하면서 본원을 인천에 둔 수도회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 강화도에 신학원을 건립하여 인천 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공동체로 사용하고 있으며, 2000년에는 그룹 홈 "너랑 나랑" 을 개원하여 청소년 사도직에도 참여하고 있다. 또 평신도들에게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풍부하고 깊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기 위해 몇몇 평신도 단체를 설립하였으며, 1992년에는 재속 아우구스티노회를 결성하였다. (-) 아우구스티노, 히포의 ; 《아우구스티노 규칙서》)
※ 참고문헌  A. Zumkeller, O.S.A., Augustine's Rule, Villanova, Augustinian Press, 1987/ T.J. Van Bavel, O.S.A., The Rule of Saint Augus-tine, London, Darton, Longman & Todd, 1984/ B. Rano, O.S.A., The Orde ofSaint Augustine, Roma, Coop. Art. Nuova Grafica, 1975/ -, Augus-tinian Origins, Charism and Spirituality, Villanova, Augustinian Press, 1994/ Rule and Constitutions of the Order of Saint Augustine, Villanova, Augustinian Press, 1991/ Augustinian Heritage, vol. 36, No. 1, Villanova, Augustinian Heritage, 1990/ The Augusitinins(1244~1994), Roma, Pubbli-cazioni Agostiniane, 1995/ Catalogus Ordinis Sancti Augustini, Romae, 2000/ Theodore Tack, O.S.A., IfAugustine were Alive, New York, Alba House, 1988(황종렬 역, 《아우구스띠누스가 살아 있다면》, 성바오로출판사, 1993)/ 이석우 《아우구스티누스), 민음사, 1995/ 한국 수도자 장상 연합회 양성위원회 편, 《오늘의 수도자들》, 분도출판사, 1983/ 《가톨릭 사전》1 아우구스티노, 최민순 역, 《고백록》, 바오로 딸, 1999/ A. Franzen, 최석우 역, 《교회사》, 신학 총서 22, 분도출판사, 1988/ A. Zumkeller 주석, 이형우 역, 《아우구스티누 규칙서》, 분도출판사, 1997. [Brian Buckl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