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의미로는 13세기 말부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가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의 철학과 신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켜 온 것을 뜻하며, 넓은 의미로는 아우구스티노의 지적 전통이 하나의 사상 체계로서 오늘날까지 교회와 사회 안에 미치고 있는 영향 전체를 말한다. 아우구스티노는 서양 사상에 깊고 광범위하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사상이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방 교회 문화에 대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우구스티노주의는 상당히 광범위하다.
[아우구스티노 사후부터 13세기까지] 반(半) 펠라지우스주의자인 마르세유의 수도승들은 아우구스티노의 은총과 예정에 관한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였다. 그래서 프로스펠(Proser Aquitanus, 390~436)은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중에 그들이 부인하거나 망각한 점들을 지적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제시했다. 풀젠시오(Fulgen-tius Ruspensis, 462/468~527/533) 역시 아우구스티노의 삼위 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통해 설명하고 그를 변호하였는데, 아우구스티노의 학설을 간략하면서도 정확하게 제시하였기 때문에 중세 때에 그는 '아우구스티노 축소판(Augustinus breviatus)이라고도 불렸다. 풀젠시오는 아우구스티노의 《교리 요강, 신앙과 희망과 사랑》(Enchiidion ad Laurentium seu de fide, spe, caritate, 423)을 토대로 신앙에 관한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또한 은총과 예정에 관한 아우구스티노의 학설이 제2차 오랑주 교회 회의(529)의 결정문에 삽입되고 교황 보니파시오 2세(530~532)의 인가를 얻어내는 데 크게 기여한 아를의 체사리오(Caesarius Arelatensis, 470?~542) 주교는 목자로서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모범을 본받으려고 하였으며, 특히 강론들에서 자주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교황 레오 1세(440~461)도 아우구스티노의 강론들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적 주제들뿐만 아니라 특히 은총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카시오도로(Cassiodomus, +580)는 아우구스티노의 《시편 상해》(Enarationess in Psalmos, 392~416)를 토대로 《시편 총괄》(Complexio in psalmos)을 저술하였고,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ana)에서 영향을 받아 교회 학교들의 교육 과정을 상세히 제시한 《제도집)(Instrutiones)을 저술했다. 그리고 이 《제도집》은 알쿠이노(Alcuimus, 732/735~804)와 라바노(Rabanus Maurus, 776~856)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보에시우스(AMTT.S. Boethius, 470/475?~524)는 삼위 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는 윤리와 사목적 주제들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9세기 카롤링거 왕조의 부흥기에 알쿠이노는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영향을 받아 인간의 예술 활동과 성령의 은사들을 연결시키는 교육의 모범을 제시했다. 안셀모(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 , 베르나르도(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 생 빅톨 학파의 위고(Hugo, 1096?~1141)와 리카르도(Richardus, +1173), , 베드로 롬바르두스(Petus Lombardus, 1095~1160) 같은 12세기의 사상가들 역시 아우구스티노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안셀모는 신앙과 이성의 긴밀한 관계(fides quae-rens intellectum) · 하느님의 개념(quo nihil majus cogitaripotest) · 구원론(Cur Deus homo) · 기도론 등의 기본 소재를 아우구스티노의 저서들에서 찾았으며, 베르나르도 역시 은총과 자유 의지 · 하느님께 대한 사랑(De diligendo Deo) · 수덕론 · 신비 신학 등의 기본 소재들을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찾았다. 《아우구스티노 규칙서》(Regula St. Augustini)를 지키던 생 빅톨 수도원은 하나의 학파를 이루며 학문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위고와 리카르도가 대표적인 학자였다.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영감을 받아 위고는 그리스도교 신비들 특히 이성과 신앙과 교회론에 관한 종합적인 체계를 세웠고, 리카르도는 《삼위 일체론》과 신비 신학의 본질과 관상 생활의 분류에 관한 저서들을 저술하였다. 또 베드로 롬바르두스의 <명제집>(Libri Sententiarum) 가운데 10분의 9는 아우구스티노의 저서에서 따온 것들이다. 훗날 이 명제집을 교과서처럼 사용한 스콜라 학자들은 이에 대한 주석서를 많이 편찬하였다.
한편 10~12세기 교회 안에서는 성직 매매로 서품된 이들의 성사 유효성 문제, 재서품의 합법성 문제, 교권과 세속 권력 사이의 갈등에서 나온 정치 신학에 관한 논쟁들이 일어났다. 서품 문제에 있어 정통 교리 옹호자들은 아우구스티노가 도나투스주의를 논박한 저서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13세기의 신학자들은 성사들의 유효성이 집전자의 신앙이나 윤리 생활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아우구스티노의 학설을 점차 받아들여 성사 신 학의 기본 노선으로 정착시켰다. 또한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De civitate Dei)은 교회의 권한과 세속 권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진정시키고 새로운 그리스도교 사회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중세 스콜라학과 아우구스티노주의] 아우구스티노 사상이 13세기까지 서방 세계에 미친 영향은 주로 신학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아우구스티노의 신학 사상은 그리스도교화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데, 13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은 점차 부각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리스도교의 많은 계시 진리와 양립할 수 없다는 데 놀라움과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영향을 받은 신학 요소들 외에도 철학 개념들을 사용하여 아우구스티노적 종합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로 작은 형제회와 도 미니코회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것이 '중세 아우구스티노주의' 또는 '스콜라학적 아우구스티노주의' 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우구스티노 사상의 종합은 당시 신학의 거장이었던 보나벤투라(Bonaventua, 1217?~1274)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 신학에 있어서는 둘 다 아우구스티노를 충실히 따랐지만, 철학에 있어서 보나벤투라는 아우구스티노의 학설을 따르고 변호한 반면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주로 따르면서 아우구스티노의 철학에서 부분적으로 조명설 · 인식론 등을 받아들였다.
한편 아우구스티노 학파는 1287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총회에서 에지디오(Aegidius Romanus, +1316)의 주도로 작성된 결정문이 전 회원들에게 회람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였던 에지디오는 "우리의 지성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De gradibus formarum 2, 6)는 입장 아래, 아우구스티노주의에만 의존하지 않고 토마스주의와 조화를 꾀하려 하였다. 이 학파의 의지주의(voluntais-mus)적인 경향은 비테르보의 야고보(Jacobus a Viterbo, +1308), 안코나의 아우구스티노(Augusinus Triumphus, 1241/1243~1328), 울비노의 바르톨로메오(Bartolomonaicus von Ulbino, +1350), 스트라스부르의 토마스(Thomas de Strasbourg, 1275~1357), 리미니의 그레고리오(Gregorius Rimini, 1300~1357)로 이어지며 발전되었다. 특히 리미니의 그레고리오는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을 당시의 언어로 잘 표현하여 '14세기 아우구스티노주의의 진정한 저술가 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 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는 세리판도(G. Seripando, 1493~1563), 파도바의 크리스토포르(Christophor, 1500~1569), 테라모의 요한 바르바(Johan-nes Barba, +1564), 코임브라의 가스파르(Gaspar, 1512~ 1584), , 포르투갈의 수아레스(J. Suarez, +1572) 등 4명의 주교와 2명의 수도회 총장이 신학자 50여 명의지원을 받으면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 참석하여 종교 개혁자들이 제기한 원죄와 의화와 은총 문제의 논의에 깊이 관여하였다.
특히 이 공의회에서 큰 역할을 한 세리판도의 원죄와 의화에 관한 주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욕정' (concupiscenia)을 어떻게 표현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욕정은 하느님의 법에 반대되는 저급한 욕구들의 총체이며, 따라서 욕정은 하느님이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욕정' 에 대한 이러한 그의 개념은 의화에 관한 개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세례성사 자체는 의화를 위해 충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합쳐져야 한다. 그런데 욕정은 세례받은 사람 안에 남아 있으며, 원죄의 벌로써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법을 완전하게 준수하는 데 실제적인 방해가 되어 죄스런 상태로 계속 남아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신학자들은 의화에 관한 공의회 문헌에서, 세례가 죄의 특성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 세례받은 사람 안에서 죄스런 '묵은 인간' 이 제거된다는 것, 세례성사로써 "새로 태어난 사람 안에 어떤 가증스러운 것도 찾아볼 수 없다는 등의 표현들을 삭제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공의회에서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의 학설은 훗날 은총론 문제들을 다시 검토하는 데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근대와 현대의 아우구스티노주의)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17~18세기에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과의 논쟁, 그리고 얀센주의 신학자들과의 논쟁이 고조되었다. 이로 인하여 아우구스티노 학파 안에는 은총론 신학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가바르디(F. Gavardi, 1640~1715), 호르만세더(A. Hormannseder,+1740), 스트라포렐리(N. Straforelli, 아르페(Agostina Arpe, +1704), 시크롭스키(B. Sichrowski, +1737), 만소(P.Manso, +1736) 등으로 이어지는 신학자들이 은총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괄목할 만한 신학자는 노리스(H. Noris, 1631~1704), 벨렐리(F. Bellelli, 1675~1742), 베르티(L. Berti, 1696~1766)였다. 이들의 주장은 이전 아우구스티노 학파의 기본 노선을 따랐기 때문에, 이들이 '새로운' 학파를 따로 세웠다고 할 수는 없다. 실상 그들의 학설은 아우구스티노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과 얀센주의 신학자들이 은총론에 관한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 것을 반박하였으며, 시대적 요청에 맞추어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데 주력하였다.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에 관한 연구는 20세기에 와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매년 엄청난 양의 저서와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한편 철학적인 관점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은 19~20세기에 베르그송(H.L. Bergson, 1859~1941), 셀러(M.Scheler, 1874~1928) , 라벨(L. Lavelle, 1883~1951), 시아카(M.F. Sciacca, 1908~ 一 ) 카를리니(A. Carlini, 1878~1959) , 키에르케고르(S.A. Kierkegaard, 1813~1855) , 야스퍼스(Kan Jaspers, 1883~1969) 등 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베르그송은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의식적으로 부인하였지만 그의 주된 사상은 아우구스티노의 것과 유사한 점이 많다. 20세기의 어느 철학자보다도 아우구스티노로부터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셀러는, 아우구스티노를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진정한 창설자이자 유일한 대표자로 보면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다른 사상가들은 기존의 그리스 철학 형태에 그리스도교적 색채를 덧씌운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에 대한 셀러의 개인적 해석과 후반기에 나타나는 범신론적인 경향은 그가 자신을 아우구스티노주의자라고 공언한 데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또한 라벨의 영적 철학의 일부는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특히 아우구스티노의 초기 저서인 《질서론》(De ordine)과 <독백>(Solloquiia)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방식대로 자신의 철학 전체를 "참여의 변증법" 으로 구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보존하고자 늘 유의하였던 반면에, 라벨은 그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표현은 그것을 범신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탈리아 '영적 철학' 의 대표적인 인물인 시아카는 아우구스티노의 신적 조명설을 자신의 형이상학에 핵심 문제로 삼았으며, 인간의 영적 본질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탈리아 영적 철학자에 속하는 카를리니는 더 많이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그에 의하면 인간 인격의 본성과 운명은 철학의 핵심 과제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내적 성찰과 내면화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현대 철학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인 실존 철학은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영향을 받은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발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저서 대부분을 갖고 있었으며, 인간 실존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이성보다는 신앙에 의존하는 "실존의 변증"을 사용한 저술가로 아우구스티노를 꼽았다. 그에 의하면 이성의 종교와 신앙의 종교 사이의 싸움, 그리고 결국에 신앙의 승리로 이어지는 과정이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Confessiones)과 《신국론》에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고백록>에는 아우구스티노 자신의 과정이, 《신국론》에는 인류 전체의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고 하였다.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 · 마르셀(G. Marcel, 1889~1973) · 사르트르(J.-P. Sartre, 1905~1980) 등의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실존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사상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아우구스티노 사상에 실제로 의존하였는데, 예컨대 그가 한 개인의 인격적 실존과 하느님을 포함하여 실재 자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깨닫기 위해서 믿어라"(Crede ut intelligas)라고 말한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 아우구스티노, 히포의 ; 실존 철학)
※ 참고문헌 E. Portali, (DTC) 1, pp. 2501~2561/ F. Cayré, The Great Augustinism, 《TheolDig》 2, 1954, pp. 169~173/ S. Agostino e le grandi correnti della filosofia contemporamea, Atti del Congresso Ital. di Filos. agostiniana, Roma, 1954/ F. Thonnard, Saint Augustin et les grands courants de la philosophie contemporaine, Revue des Etude Augustiemess I 1, 1955, pp. 69~80/ H.I. Marrou, Saint Augustin et l'augustinisme, Paris, 1955/ H. de Lubac, Augustinisme et théologie modeme, Paris, 1963. [李瀅禹]
아우구스티노주의
主義
〔라〕Augusininianismus · 〔영〕Augustin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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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는 서양 사상에 깊고 광범위하며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