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5년 9월 25일 신성 로마 제국 의회에서 국법으로 가톨릭 신앙뿐만 아니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까지도 인정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알 5세(1519~1556) - 당시 대표자는 황제의 아우인 페르디난트 1세(1503~1564)-와 루터교 사이의 조약. 이 조약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actum Westphalise) 때까지 효력이 지속되었다. 1552년 가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카알 5세는 독일을 떠나 있었고 제국은 페르디난트 1세에게 맡겨졌는데, 페르디난트 1세는 제국 내 종교의 일치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보다는 다른 방법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는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되 그 장소에 본인이 참석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의회의 전개 과정] 1555년 2월 5일 개최된 제국 의회에 참석자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황제는 "비록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의 참된 가톨릭 종교를 공격하고 해를 입히거나, 약하게 하고 악화시키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대를 표명하였다. 작센의 선제후 모리츠가 1553년에 사망함으로써 당시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자는 없는 상태였지만, 그들은 무조건적이고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평화를 보장하도록 확고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중에서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직접 참석한 사람은 비텐베르크의 공작뿐이었다. 협정서는 제후들의 변호인들과 직업 법률가 혹은 외교관들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서로간의 평화에 대한 열망이 타협을 통하여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참석자 모두에게 있었다. 그렇지만 효과적인 종교적 평화가 확실하게 무르익기에는 시기적으로 이른 때였다. 프로테스탄트측이 그리스도교의 계몽적 측면을 강조하였다면, 가톨릭 제후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 해 9월 14일 스트라스부르크의 주민들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관용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죄가 된다며 도시 내 소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관용에 반대하였다. 오직 아우크스부르크의 교구장 오토 추기경만이 비록 실현 가능성이 없지만 일관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가톨릭 교회의 단일성이 단절되는 것은 허락될 수 없으며, 제국 의회에서 그와 같은 결정을 부여할 권한도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교황 율리오 3세(1550~1555)가 사망하자 오토 추기경은 교황 선출에 참여하기 위하여 교황 대사 모로 네 추기경과 함께 제국 의회를 떠났고, 교황청에서는 이 제국 의회의 첫 회기에 델피노(Delfino)를 교황 대사로 임명하여 참석시켰다. 그리고 후에 일시적으로 리포마니(Lippomani)가 대표자로 참석하였으나, 결정적인 협상이있던 마지막 시기에는 아무도 참석시키지 않았다.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는 참석한 제후들과 그들의 법률 고문들이 신앙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데 주된 관심사가 없었기 때문에 신학에 관한 의제들을 많이 다루지는 않았다. 따라서 교의적이고 전례에 관한 협상은 없었다. 단지 제국 내의 여러 제후국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 종교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주 관심사였다.
또 다른 어려운 문제는 재산에 관한 것으로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관할하는 지역에서의 교회 재산권을 그 지역 주교들이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양쪽에 모두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를 표명했다. 반면에 '성직자 유보 조건' (riservatum ecclesiasticum) 문제는 프로테스탄트인들이 동의하지 않았지만 왕과는 일치를 보았다.
[조약의 내용] 1555년 9월 25일 제국 의회의 결정 내용으로 '아우크부스크부크 강화 조약' 이 공포되었다. 독일을 불화와 파괴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시도들이 있은 후에, 이 조약을 통해 제국 내 제후국에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한 누구도 황제로부터 혹은 한 영주로부터 공격받을 수 없도록 하였다(3항) 그리고 신앙 고백에 동조한 영주들도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는 지역에 어떤 종류의 해도 가하지 못하게 되었다(4항) 그리고 신앙 고백의 선택은 제국의 각 제후국 단위로 가능하였으며 개인적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5항). 즉 이 선택은 "한 통치자가 있는 곳에 한 종교가 있다" (Ubi unus dominus, ibi una sit religio)라는 원리에 따라 제후국의 통치자에 의해서 선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권은 루터교에만 주어졌으며 츠빙글리파 · 칼뱅파 · 재세례파 등은 제외되었다(11항). 이들이 국법상 동등한 권리를 얻은 것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였다. 그리고 만일 성직자령(영주 교구, 영주 대수도원)의 현직 주교나 아빠스가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갈 경우에는 '성직자 유보 조건' 에 따랐다. 즉 자기 자신은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갈 수 있으나 그의 교회 직무와 권한은 내놓아야 하며, 참사위원회로 하여금 가톨릭 후계자를 자유롭게 선거하도록 하였다.
또한 가톨릭 영주들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려면 자신의 신하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의무를 가지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만 개종이 가능하고 자신의 직위는 잃게 되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가 이미 프로테스탄트가 된 영주 성직자들에게 한하여 자신들의 영토를 계속 점유할 것을 '페르디난트의 비밀 포고 (Declaratio Ferdinandea)를 통하여 보증하자 가톨릭은 이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제후국의 경계 지역에서 가톨릭의 교구 관할권은 결정적인 종교간의 합의가 있을 때까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8항). 제국의 기사들도 이러한 모든 결정에 즉시 승복하고 평화 조약에 따라야 했다(13항). .만일 제국의 직할 도시에서 두 종파가 혼합되어 존속해왔다면 각파의 동등권은 존중되며, 신앙 · 전례 · 재산은 그대로 지속되어야 한다(14항)고 하였다.
[조약의 결과] 비록 임시적이지만 공의회나 다른 종교적 권위를 통해서 더 나은 해결책이나 일치를 다시 모색할 때까지 종교간의 평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평화 조약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으며, 독일의 분열이 고정되고 이로써 영속적인 종교간의 평화가 지속되는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간 평등의 원리는 관용과 양심의 자유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국왕은 자신의 국가와 신하들의 종교는 이단과 관련된 중세적 정의의 실현을 포기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일치된 근대 국가적 개념이 나타나면서 신앙 고백의 결속은 본질적으로 더욱더 강화되는 역할을 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지역에서 주교의 관할권이 없어짐으로써 국가 교회로 전환되었고, 지역 영주가 주교좌를 관할하게 되어 영적으로 교회의 고유한 모습을 상실하였으며, 주교 직무는 영주의 법률가들에 의해 행해졌다. 종교의 정치화와 신앙 고백의 획일화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양측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또 서로를 점점 더 알지 못하게 되었고, 논쟁점들은 왜곡되어 실행되었다. 강화 조약의 애매한 점들은 자주 분쟁의 요소가 되었으며, 특히 프로테스탄트인들은 가톨릭 성직자들 소유의 재산을 보장하는 '성직자 유보 조건' 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후에 개최된 여러 제국 의회에서 이 유보 조건을 폐지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주교직과 참사회직의 국유화는 1555년 이후 독일의 북부와 중부에서 이루어졌는데, 작센 · 마이센(Meissen) · 나음부르크(Naumbug) · 브레멘(Bremen) · 뤼베크(Liibek) · 슈베린(Schwerin) ·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등이 대표적인 도시들이었다. 이미 프로테스탄트가 된 영주 성직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페르디난트 비밀 포고' 는 사실 어떤 법적 효과를 지니지는 못하였지만, 초기의 가톨릭 주교들을 괴롭히다가 시간이 갈수록 불확실하게 되었다. 또 제국의 적지 않은 도시에서 가톨릭 신앙 고백을 한 소수의 후견인들에 대한 처우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일치 문제를 다룰 때까지 '잠정적인 규정(Intem)' 에 따르는 데 동조한 단체들이 이러한 처사에 새롭게 반대하였으며, 가톨릭 신앙만이 유일하고 참된 것이라는 사실이 포기됨과 함께 제국 사상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로써 독일 제국은 단순한 지역적 연방 국가 체제로 축소되었고, 이와 함께 1556년 9월 12일 카알 5세는 황제위에서 물러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태도는 원칙적으로 두 종교가 양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율리오 3세 교황 시기에 독일 문제에 대하여 개입했다면 독일 전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 후 바오로 4세 교황(1555~1559) 때 합스부르크가의 정치적 이산(離散)은 종교적인 분열로 인해 제국이 갈라진 것보다도 더 큰 중요성을 차지하였다.
교황 바오로 4세 시기에는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에 반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후에 페르디난트 1세와 조약에 공헌한 이들에게 가한 불평과 비판은 줄어들었으며, 이 조약에 반대하는 공식적인 발표나 법적 거부권이 행사되지 않음으로써 독일에서 가톨릭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페르디난트 1세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가문들은 한동안 장래의 손실과 또 다른 무장 투쟁을 방지하는 것 이상의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한 참된 해결책은 400년이 지난 후 교황 비오 12세(1939~1958)가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제국과 교회의 공동 재산은 이제 독일 내의 국경선들을 가르는 데 있어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가 되기에 가톨릭 영주들측으로부터 종교적 협약의 서명이 정당하게 확인되어야 한다." (→ 슈말칼덴 동맹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 참고문헌 A. Franzen, Kleine Kirchengesstiche(최최석우 역, <교회사》, 신학 총서 22, 분도출판사, 6판, 1982)/ Hubert Jedin, Storia della Chiesa Ⅵ , Milano, Jaca Book, 2nd ed., 1993. [全壽洪]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
講和條約
〔라〕Pax Augustana · 〔영〕Peace of Augsburg · 〔독〕Augsburger Religionsfiede
글자 크기
8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