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信仰告白

〔라〕Confessio Augustana · 〔영〕Augsburg Confession · 〔독〕Augsburger Conf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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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에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제출하는 루터 지지자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에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제출하는 루터 지지자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개최된 제국 의회에서 루터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견해와 입장을 밝히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1519~1556)에게 독일어와 라틴어로 작성하여 1530년 6월 25일 제출한 신조. 7명의 제후들과 2명의 자유 도시 대표들이 서명하였다.
[역사적 배경] 1525년 7월 19일 독일 중부와 북부의 가톨릭 제후들은 농민 전쟁(Bauernkineg)에 반대하며 이 전쟁의 근원인 루터교를 근절하기로 합의하는 데사우(Dessau) 동맹을 맺었다. 이에 루터파 제후들도 이듬해 2월 27일 작센 주에 있는 토르가우(Tagau)에서 동맹을 결성하였는데, 당시의 국제적인 정치 상황은 루터파에게 유리하였다. 한편 황제 카알 5세가 1526년 제1차 슈파이어(Speyer) 제국 의회를 통해서 루터와 그 지지자들에게 국가적 처벌을 내리기로 한 보름스 칙령(1521.5.8)의 실행을 거절하자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는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는 "황제의 훈령에 입각하여 종교 개혁이 실시되어서는 안되지만 모든 대의원은 보름스 칙령에 관해서 일반적 또는 국가적 공의회가 개최될 때까지 하느님과 황제 앞에 책임을 질 수 있게 행동하여야 한다" 고 결정하였다. 교황은 이 결정에 반발하여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1494~1547)와 베네치아 · 밀라노 등과 함께 코낙 동맹(Cognac, 1526. 3. 22)을 맺었다. 코낙 동맹은 보름스 칙령을 고려하여 "제후들은 하느님과 황제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처신하여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 의회의 가톨릭 제후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더 확장될 수 없음을 느낀 반면, 루터파들은 적어도 트리엔트 공의회가 소집될 때까지는 자신들의 교회 조직을 더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헤센과 작센 지방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회 제도를 제정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미사와 성사를 금지하고 성당의 신부를 루터교 목사로 대치하였다. 결국 1529년 4월 19일 제2차 슈파이어 제국 의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가톨릭 제후들과 신학자들은 일치 단결하여 보름스 칙령을 철저하게 준수할 것을 견지하였다. 이로 인해 새로운 신앙이 정치적 혼란 없이 사라질 수 없는 지역들에서는 그들의 어떤 세력 확장도 공의회가 개최될 때까지는 저지되었으며, 가톨릭을 반대하는 어떤 설교도 할 수 없었고,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도 방해받지 않았다. 그러나 6명의 제후들과 14개의 남부 독일 도시 대표들 은 이러한 결정에 항의와 반발을 하였고, 이때부터 가톨릭에 반대하는 모든 종파들은 프로테스탄트 라고 불리게 되었다.
〔신앙 고백서의 작성 과정] 카알 5세는 터키인들에 대항할 군사 행동에서 연합 전선을 펴고, 국내의 종교적 분열을 종결 짓기 위하여 의회 소집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1530년 4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의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그 해 1월 20일부터 계획을 세우고, 제국 내 여러 자유 도시의 제후들과 대표들을 초청하면서 의견과 생각과 주장이 묵살되는 일이 없도록 종교적인 여러 가지 상이점에 관하여 논의함으로써 분열을 지양하고 연합을 이루기를 희망하였다. 황제의 초청을 받은 독일 작센 주의 선제후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자신의 관할 지역 내 교회의 신조와 종교 행사 등에 관한 평가를 부탁하였다. 사실 1529년 7월 26일부터 9월 14일까지 '슈바바흐 조항' (Schwabach Articol)이라고 알려진 교리 해설문이 루터(M. Luther, 1483~1546)와 멜란히톤(P. Melanchthon, 1497~1560) 등에 의하여 준비되어 그 해 10월에 제출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더 필요한 것은 그 후 작센 지방 내 교회에서 변경된 점들에 대한 추가 항목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에 대한 추가 부분이 비텐베르크 신학자들(루터, 멜란히톤, 부겐하겐)에 의하여 준비되어 1530년 3월 27일 토르가우 집회에서 작센의 선제후에게 제출하여 인준을 받았다 이것을 보통 '토르가우 조항' (Torgau Articoli이라고 부르는데, 이 원본은 1830년 바이말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슈바바흐 조항과 토르가우 조항과 마르부르크(Matimg)에서의 15개 조항을 기초로 황제에게 제출할 수 있는 문서를 준비하되, 작센 지방뿐만 아니라 모든 루터교를 위한 공동 신조가 될 수 있는 신앙 고백문을 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앞서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 에크(J. Eck, 1486~1543)가 '404 논제' 를 집필하면서 개혁자들을 기소한 것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게 된 배경에는 루터파 신자들을 다른 반(反) 로마 가톨릭 교회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한편, 가톨릭 교회와의 유사점을 강조할 필요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문서의 어조는 대체로 우호적이며 온건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들이 멜란히톤에 의하여 준비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서' 의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내용적으로 보면 슈바바흐 조항이 첫 부분의 핵심이 되었고, 토르가우 조항이 둘째 부분의 주요 내용을 이루었다. 루터는 당시 파문 당한 상태여서 의회에 나올 수 없었으므로, 코부르크(Coburg) 성에서 서신을 통하여 자문하였다. 따라서 이 신앙 고백서는 루터 자신이 직접 쓰지는 않았으나 신학적으로 루터의 입장을 대변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멜란 히톤은 1530년 6월 25일 황제에게 이 신앙 고백서를 정식으로 봉정하기 직전까지 교정과 수정을 계속하였으며 7명의 제후들과 2명의 자유 도시의 대표들에 의한 서명으로 비로소 하나의 공적인 신앙 고백서가 되었다. 따라서 거의 모든 루터교 신자들이 소중히 여기고 있는 이 신앙 고백서는 루터교의 신앙 고백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 용]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서는 객관적인 보편성, 신앙에 의한 의인으로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강조, 자유의 소중성, 초대 그리스도교 정신의 계승 등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내용은 서문 외에 2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1~21조)에는 루터교의 교리에 관한 주요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곧 하느님(1조), 인간(2조, 18~19조), 참회(3조, 21조), 의인(義認, 4조), 은총의 수단(5조), 새로운 복종(6조, 20조), 교회(7~8조), 성사 (9~13조), 일반 사제직(14조), 인간이 세운 전례(15조) 정부(16조), 최후의 심판(17조)에 관한 교리이다. 이 내용들은 루터교가 성서와 가톨릭 교회에서 조금도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기본적인 교의를 재강조하고자 한 내용들이다. 제2부(22~28조)에는 빵과 포도주를 통한 성찬 전례, 사제의 결혼, 개인 미사의 폐지, 인간이 세운 전통, 수도 허원(許願), 주교의 권위 등의 문제가 담겨 있다. 이 내용들은 신앙 실천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교황을 비롯한 제국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신앙 고백서처럼 프로 테스탄트의 입장을 간단 명료하게 설명해 주는 글이 없으므로, 루터교뿐만 아니라 많은 프로테스탄트의 각 교파들에서 존중되고 있고 오늘날 가톨릭 신학자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끌고 있다. 멜란히톤은 신앙 고백서 끝에 이런 말을 하였다. "이 신조는 가톨릭 교리의 전체 안에 존재한다. 보는 바와 같이 제가 아는 한 거기에는 성서나 가톨릭 교회에 위반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진행 과정] 1530년 6월 25일 신앙 고백서를 낭독할 시간이 되었을 때, 선제후 · 귀족 · 제후 · 성직자 · 자유 도시의 대표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과 관련이 있는 수백 명의 청중이 실내외에 가득 찼다. 황제 카알 5세 좌우에 작센 공과 페르디난트 1세가 좌정한 오후 4시가 되자 라틴어와 독일어로 된 신앙 고백서를 가져왔다. 황제는 라틴문의 낭독을 요구하였으나 작센 공은 "저희들은 지금 독일 영토 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독일문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하였다. 이 청이 수락되어 독일문이 작센 지역의 고문 베엘 박사에 의하여 낭독되었으나, 황제는 이를 바로 접수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튿날 멜란히톤은 아우크스부르크에 체재하던 교황 사절 캄페조(L. Campeggio, 1472~1539)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교황직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 교회와 하등의 다른 신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예식에서 사소한 차이가 일치를 방해할지언정 교회가 우리를 단죄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와 로마 교회에 충실할 것입니다." 이렇게 화해적인 자세는 재일치를 위한 좋은 토대처럼 보였고, 황제 자신도 비타협적인 교황파가 아니라 마음에서는 개방적인 인문주의자였으므로 희망을 가졌다.
황제는 양측의 신학자들로 구성된 2개의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양편의 대변인은 멜란히톤과 에크였다. 가톨릭측에서는 에크 · 파베르(J. Faber, 1478~1541) · 코흐레우스(J. Cochliaus, 1479~1552)에 의해 작성되고, 8월 3일에 채택된 '아우크부스크부크 신조의 반박서' (Confutatio Con-fessionis Augustanae)가 협상의 토대로 결정되었다. 양측은 서로 양보함으로써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치와 최대한의 타협, 자신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였는데, 누구보다도 황제가 그것을 원하였다. 마침내 5개 조항 즉 평신도의 성혈 배령(聖血拜領) 사제의 결혼, 수도자의 서원, 그 동안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약탈한 교회 재산의 반환, 미사 성제의 희생적 성격만이 논점으로 남았다. 처음 4개 조항은 교회 규율에 관한 것이고, 마지막 조항만이 신앙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들을 접한 교황 글레멘스 7세는 당시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인 가예타노(Cajetanus da Thiene, 1480~1547) 추기경에게 조언을 청하였고, 추기경은 평신도의 성혈 배령과 사제의 결혼 문제는 규율에 불과하고 신앙 문제가 아니므로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으나 그 결정은 다음 공의회에서 해야 한다고 답변하였다. 프로테스탄트측은 이 두 문제를 가톨릭이 양보한다면 재일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30년 뒤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다루어졌고, 결국 평신도의 성혈 배령만이 허용되었다.
[결 과]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서를 중심으로 한 의회의 결의는 상호간의 일치를 실현시키지 못 하였다. 사실 멜란히톤은 이 신조에서 자유 의지, 미사에서의 성체의 본체 변화, 의화(義化), 수위권의 신적 설정(마태 16, 18), 성인 공경, 대사 문제와 같은 중대한 교리상의 대립을 생략하였다. 뿐만 아니라 토의 과정에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조가 루터의 견해와도 일치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의회의 결과 1531년 4월 15일까지 미결정된 차이점에 대해 가톨릭 교리에 동의하라는 요구를 받은 프로테스탄트 의원들은 이에 다시 항의하였다. 그리고 의회에서 낭독이 끝난 후 두 개의 신앙 고백서 원본이 궁정 비서관에게 전하여졌고, 곧 이어 마인츠 선제후에게 전하여졌다가 황제에게 봉정되었다. 황제는 독일문을 마인츠 선제후에게 돌려주고 라틴문은 브뤼셀 황실 문고에 보관하였으나 두 개의 원본은 모두 분실되었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이듬해 5월 라틴문의 사본과 자신의 독일문을 참고하여 《신앙 고백의 변증서》를 비텐베르크에서 출판하였으며, 1540년에는 칼뱅파 사람들을 위하여 <개정 신조》(改正信條, Variata)로 알려진 수정판을 작성하였다. 이 신조가 그 후 루터교 내에서 신앙 고백의 핵심이 되었다. 1- 루터, 마르틴 ; 멜란히톤, 필립 ;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
※ 참고문헌  A. Fliche · V. Martin, Storia della Chiesa, vol. 16, trad. italiana, Roma, Edotrice S.A.I.E., 2nd ed., 1980/ A. Franzen, Kleine Kirchengesschiche(최최석우 역, 《교회사》, 신학 총서 22, 분도출판사, 6판, 1982). [全壽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