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회 이후의 한국 교회

公議會以後 - 韓國敎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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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신부는 3배 이상, 수녀는 4배 이상 증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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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신부는 3배 이상, 수녀는 4배 이상 증가되었다.


〔목적과 문제 제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한국 가톨릭 교회의 모습을 대략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이 항 목의 목적이다. 한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 날 무렵부터 양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 고, 교회의 모습도 전에 비하여 현저하게 변하였다. 교회 의 성장이 공의회의 결과라고만 말하기는 어려워도, 한 국 교회 모습의 변화는 상당한 정도로 공의회의 결과라 고 말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 한국 교 회에 공식적으로 미치고 제도적 변화가 도입된 것은 공 의회가 끝난 뒤 몇 년 후부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으 나, 편의상 1965년부터 1992년 말까지의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도록 한다. 〔관 점〕 한국 교회는 틀림없이 한국 사회 안에서 존재 했고 그 안에서 자라고 발전한 교회이기에, 교회의 모습 형성에 있어서 역사적 현실의 영향을 무시해서는 안된 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왜 어떤 구체적 모습을 갖는지를 정확하게 따지자면 공의회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역사 적 현실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이 글에서는 한국 교회의 모습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 측면이 공의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말해 두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교회 모습의 정확한 원인 을 밝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의회를 통해서 한국 가톨릭 교회의 모습을 점검하는 경우에, 한국 사회 외부 에 존재하는 가톨릭적 세계 질서와 그 변화를 근거로 삼 아 한국 교회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톨릭 적 세계 질서를 원인으로, 한국 교회를 그 결과로 보는 시각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을 취한다 하 더라도 역사적 현실의 영향력을 무시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모두 지적하지는 못하더라 도 한국 교회의 일부 모습은 공의회보다는 역사 현실에 서 그 원인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주요 변화 지표〕 공의회 이후 한국 교회는 공의회의 결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동시에 엄청난 변화를 경험한 사회 안에서 발전하고 성장하였으며 그 모습이 형성되었다. 한국의 인구는 1966년에 2,900만 명에서 1993년에는 4,300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급속한 산업 화로 비농업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 와중에 수많은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주함에 따라 1966년 한국 인구의 47%만이 도시에 거주했으나 1993년에는 80% 정도가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다. 공의회가 끝날 무렵에는 한국 인 거의 누구나 가난을 경험했고 생활의 격차도 비교적 적었지만 1993년에는 개인 평균 소득이 상승하여 한국 은 경제 중진국으로 변모했으며 동시에 재산과 소득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1990년도의 조사를 보면 전체 인구 가운데 노동 계층은 35%, 중산층은 대략 40%의 규모로 크게 확장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에 한국인은 아 마도 정통성이 부족한 정권이 펼치는 역사상 최대의 정 치적 격동과 폭압 정치를 경험했다. 1961년 5· 16 쿠데 타를 통해서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1972년에 시작 된 유신 체제와 1980년대의 5~6공화국의 독재 정치로 이어지던 고통스럽고 암울한 시대가 1993년 2월에 비로 소 끝났으며 문민 정부가 들어섰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 은 교회의 모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고 보아야 한다. 인구의 증가, 비농업 인구의 증 가, 도시인의 팽창, 국민 소득의 증가, 소득 격차의 확 대, 노동 계층과 중산층의 팽창, 20여 년 간 계속된 폭압 정치 등과 같은 역사 현실은 한국 교회의 모습을 설명할 때 결코 무시 못할 중대한 요인들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는 한국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공의회는 당시의 세계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발견하였기 때문 에, 다방면의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했고 그 방향 을 제시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공의회가 제시한 변화 와 개혁을 수용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한국 교 회의 수용적 자세는 다른 몇몇 나라의 경우보다 더욱 적 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극적 수용 자세는 교황청 에 대한 거부적 역사 전통의 부재나 대부분 신자의 짧은 신앙 경력 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공의회가 반성 하였던 문제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공의회는 우선 교회의 공식 기도인 전례 안에서 여러 가지문제점을 발 견했다. 교회의 운영에 있어서 지나친 중앙 집권성과 하 위 성직자의 참여 부족뿐만 아니라 평신도의 수동성과 참여 배제가 중대한 결함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교 의 분열과 다른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냉담 한 태도가 비복음적이라는 인식도 인정하였다.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우월감과 경멸 적 태도가 문제 되었다. 서구 문화 우월주의에 가톨릭 교회의 장기적 동조 자세와 아울러 비서구 문화에 대한 경시 태도도 반성의 대상이었다. 불의한 사회 현실에 대 한 교회의 무관심뿐 아니라, 불의와 인권 침해를 자행하 던 권력과의 일부 교회의 유착이 깊은 반성을 자아냈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의 선교 열의 부족과 봉사 자세의 부 족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교회의 급속한 성장 : 이 시기에 한국 교회의 가장 뚜 렷한 모습은 양적 성장이다. 일본이나 대만의 교회에 비 하여 가장 다른 모습은 한국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였고 따라서 활력을 지닌다는 것이었다. 1965년과 1992년의 교세에 여러 가지 측면을 비교하면 성장의 모습이 뚜렷 하게 드러난다. 신자는 67만 명에서 307만 명으로 약 5 배, 본당은 313개에서 918개로 약 3배, 교구는 10개에 서 15개로 증가했다. 주교는 10명에서 20명으로 두 배, 신부는 624명에서 2,036명으로 3배 이상, 수사는 108 명에서 366명으로 3배 이상, 수녀는 1,361명에서 6,139명으로 4배 이상, 대신학생은 435명에서 1,489명 으로 3배 이상 증가하였다. 같은 기간에 외국인 주교는 4명에서 3명으로, 외국인 신부는 278명에서 209명으 로, 외국인 수사는 34명에서 19명으로 감소한 반면, 외 국인 수녀는 183명에서 209명으로 약간 증가했다. 성직 자와 남녀 수도자 중에서 외국인의 비율이 현저하게 감 소했으니, 이것은 교회의 인적 자원 면에서 토착화와 자 립성의 확대를 의미한다. 남자 수도회가 14개에서 33개 로, 수녀회가 23개에서 84개로 증가한 것도 교회 성장 의 한 측면을 나타낸다. 우리가 다루는 27년의 기간 동 안 신자 증가 비율에는 굴곡이 뚜렷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이것은 교회의 성장이 역사 현실과 밀접한 함수 관계를 맺고 있으며 현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증거이다. 1965~1974년의 신자 신장률이 3~4%를 유 지하다가 1980년까지는 대략 5%로 약간 증가한 후, 1981년부터 1985년 사이에는 8%로 크게 증가했다. 그 리고 그 이후에는 3~4% 선으로 신장률이 둔화되었다. 다행히 최근에 성인 입교자의 둔화 현상을 중대한 문제 로 파악하고 선교 노력을 증대하고 있으나 더욱 노력해 야 한다. 1970년대 초기부터 미국을 비롯하여 외국에 한국인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고 사제가 파견되기 시작했 다. 대외 무역이 증대되고 이민이 늘어나면서 외국에 형 성된 신자 공동체나 신자의 수효도 빠르게 증가했다. 신 자수는 1991년도에 46,000명이었는데 1992년에는 88,000명으로 거의 두 배로 증가했고 49개 국가에 본당 은 98개였다. 1991년도에 109개이던 공소는 이듬해 128개로 늘고, 교포 사목에 종사하는 사제수는 95명에 서 111명으로 증가했다. 신자수의 급격한 증가 원인을 공의회에서 찾기보다는 한국의 역사 현실에서 찾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 같다. 그것은 한국을 포함한 몇몇 나라의 특수한 현상 때문이 다. 많은 사람들은 그 성장의 원인에 큰 관심을 가졌고 소수의 학자들은 그 원인을 발견하려고 시도했으나 현재 까지 만족스러운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확실한 발견이 제시된 것도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급격한 경제 성장과 그에 동반하는 빈부 격차, 독재 정치나 북한과의 대치 상황 등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불안, 그리고 도시화 로 인한 공동체의 파괴에서 비롯되는 공동체 추구 심리 가 무시 못할 요인이라고 보았다. 이런 것들 외에도, 서 구 세력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지 않아서 서구 문화와 세력에 대한 배척 감정이 생산되지 않았다는 것과 반대 로 한국 전쟁의 경험으로 생산된 서구 세력에 대한 막연 한 호감이 중요한 요인일 것이고 남한, 북한, 중국 등 극 소수의 나라에서만 발견되는 무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거대한 인구 집단의 존재도 중대한 요인이다. 한국 인구 의 거의 절반이 무종교인이라고 주장하며 성인 입교자의 대부분이 그 집단에서 배출된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 다. 그리고 무종교인의 집단이 없어지기 전에 입교자를 늘이기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수도자와 사제 지망자의 증가는 빠르게 성장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과 열성적이고 활발한 교회의 한 가지 필연 적 측면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빠르게 성장하 고 열성적인 교회는 많은 수도자와 사제 지망자를 배출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신자수가 감소하거나 침체 된 교회는 필연적으로 수도자와 사제 지망자의 수를 감 소시킨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교회 성장이 지속되고 열 성적인 모습이 유지되는 한, 성소 지망자의 증가도 계속 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학생과 수도자의 증가는 아마도 한국 교회의 적극적 성소 계발 노력의 결과로 보 인다. 1978년에 서울 소신학교가 폐교되면서 대구대교 구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예비 성소자 모임을 시작하여 좋은 성과를 올렸다. 전에는 사제 지망자와 수도 생활 지망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개인적으로 권고하는 소 극적 행동이 전부였다. 대구대교구의 실험이 전국적 화 제가 되자 모든 교구들은 성소국을 신설하고 예비 신학 생 모임을 도입하여 신학생은 증가했다. 이것을 보고 수 도회들도 저마다 성소자 모임을 시작했다. 이러한 적극 적 성소 계발 노력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신자 구성과 교회의 활동 : 가톨릭 교회가 성별이나 사회 계층과 같은 변수의 관점에서 어떤 사람들로 구성 되었는지 고찰하는 것은 교회의 모습을 아는 데 필요하 다. 신자 증가 면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더욱 증가했다는 증거가 있다. 1985년도 전국 인구 조사에는 남성이 절 반에 약간 미치지 못하여 여성보다 약간 적은 것으로 집 계되었다. 교세 통계로는 여성 신자에 대한 남성 신자의 비율이 1970년에 56.6 : 43.5, 1980년에는 57.8 : 42.2였다가 1992년도에는 60.1 : 39.9가 되었다. 남성 의 비율이 워낙 적었는데 계속 감소하였으니 교회의 여 성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전체 신자의 연령별 분포는 한 번도 조사한 적이 없으나 20세 이상에 대하여는 몇 번 조사한 결과들이 있다. 1971년도의 분포와 1989년 도의 분포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1989년도에는 20대가 21.7%, 30대가 29.4%, 40대가 25.1%, 50대가 15%, 60대 이상이 8.8%로 나타났다. 1985년도의 전국적 인구 조사에서 20대 인구는 36.2%, 30대는 24.8%, 40대는 18.6%, 50대는 12.9%, 60대 이상은 7.5%이다. 이 둘을 비교하면 가톨릭 신자는 20 대 젊은 층은 크게 적고, 40대는 상당히 많은 셈이다. 30대와 40대의 사람들이 특히 많이 입교하는 것 같다. 20세 이상의 교육 수준을 보면, 가톨릭 신자의 교육 수 준이 전국민의 그것보다 현저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난 다. 1989년도에 신자의 4.4%가 무학자, 14.2%가 국졸 자, 16.6%가 중졸자, 37.5%는 고졸자, 27.3%는 대졸 자인데 반하여, 1985년도 인구 조사에는 전국민의 11.8%가 무학자이고, 24.2%는 국졸자, 20%는 중졸 자, 29%는 고졸자, 15%는 대졸자로 나타났다. 직업을 비교해 보면, 가톨릭 신자는 판매직, 농어업 자, 숙련공이나 비숙련공은 적은 반면 전문직, 관리직 , 기술 및 사무직자는 월등히 많다. 노동 계층에는 신자가 적고 중간 계층에 많다. 1989년도의 신자 56%는 전문 직, 관리직, 기술직 및 사무직, 17%는 판매직, 14%는 농업 및 어업에 종사했고, 12.4%가 숙련공이나 비숙련 공이었다. 1987년도 노동 연감에는 전국민의 19%가 전 문직, 관리직, 기술직 및 사무직에 25.9%는 판매직, 21.7%는 농업 및 어업, 33.4%는 숙련공 내지 비숙련공 이었다. 신자의 절대 다수는 농촌보다는 도시에 거주하 기 때문에 농촌에는 신자 비율이 현저하게 낮은 편이다. 1970년도에는 신자의 23.3%가 대도시, 27.7%가 중소 도시, 49%가 농어촌에 거주했으나, 89년에는 대도시 신자비율이 농어촌 비율보다 훨씬 높아졌다. 1989년에 신자의 84.8%가 도시에 거주했고, 15.2%만이 농촌에 살았던 반면, 1985년도에는 전국민의 65.4%가 도시민 이었고 34.6%는 농어촌민이었다. 주택 소유 현황을 고찰해 보면, 1971년도와 1989년 도의 자료를 비교하고 주택 소유 비율이 다른 도시와 농 촌을 분리해서 비교해 보아도, 가톨릭 신자의 주택 소유 비율은 전국민의 그것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 한 교회의 모습은 사도 시대의 교회 모습과 비교하거나, 해방 당시까지 계속되던 한국 교회의 모습과 비교해 보 아도 현저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이른바 학력이 낮거나 재산이 적은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교회가 된 것 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교회가 아니라 없는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는 교회가 된 것 같 다. 이 기간에 교회는 양적인 성장을 경험했지만, 하류 층보다는 중산층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 다. 가톨릭 교회의 모습을 좀더 상세히 알기 위해서는 1965년도와 1992년도의 현황을 비교하면서 몇 가지 활 동도 고찰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병원은 31개에서 28개로 감소했으나 교회 병원들은 대형화하였다. 대신 에 시약소도 22개에서 17개로 감소했다. 그러나 전에 없던 5개의 결핵 요양원을 새로 세웠다. 보육원은 26개 에서 11개로 대폭 감소했는데 반하여 양로원은 8개에서 51개로 대폭 증가했다. 한편으로 나환자 정착 마을은 13개에서 26개로 증가했다. 전에 없던 8개의 부랑인 수 용소가 세워져서 4천여 명의 부랑인을 돌보는 한편, 9개 의 장애자 학교는 1, 226명의 장애자를 교육했다. 한국 의 경제 사정이 호전되면서 전반적으로 빈곤한 사람과 장애자의 복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교회도 아 직 부족하지만 복지 활동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나타난 것처럼 복지 기관이 증가했을 뿐 아니라, 본당마 다 예산의 일부를 사용하는 복지 활동을 펴고 있다. 거 의 모든 교구가 사회 복지국을 설치하여 어려운 사람들 과 장애자들을 돌보고 있다. 그러나 본당과 교구 예산의 10%를 나누어 줄 것을 권장하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않 는 것이 문제이다. 1965년도부터 1992년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직업 학교는 13개에서 5개, 국민학교는 11개 에서 6개, 중학교는 32개에서 25개로 감소했다. 반면에 고등학교는 30개에서 36개로, 대학교는 5개에서 9개로 증가했다. 공의회 이후에 한국의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한국 교회도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 했으며 1993년도에는 주교 회의 사회 복지위원회가 주 축이 되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10억 원 이상을 모금하여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지속적인 활동은 아니지만, 이 기간에 있던 대규모 집회 들도 공의회 이후 교회의 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81 년에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행사,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행사, 1989년에는 제44 차 세계 성체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대회들은 한국 교회의 조직력을 보여 주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200주 년 행사는 12개의 의안을 만들어서 반성과 방향 설정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들은 또한 대규모 집회가 엄청난 자 금을 사용하면서도 교회의 영구적 변화에는 크게 효과를 내지 못한 한계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한국 교회의 사회 참여 : 공의회 이후의 한국 교회의 특징은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위한 사회 참여라고 말해 야 한다. 억압과 인권 침해가 자행되던 일제 시대의 교 회가 침묵하거나 권력과 협력하였던 모습과 비교할 때 에, 사회 참여는 공의회의 중요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 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에 거의 유사한 정치적 · 사회 적 · 경제적 상황에 놓여 있던 대만 천주교회가 권력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것과 비교해서 생 각할 때에, 공의회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 교회의 사회 참여를 설명하는 유일한 요인이라고 보는 것은 단순한 관점이다. 일제 시대의 한국 교회나 대만 교회와 비교할 때에, 공의회 이후의 한국 교회는 사회 참여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구조적 요인을 가지고 있 었다. 젊은 층의 성직자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성직자 들은 거의 토착화되었다. 교회 구성원들은 다른 교회 신 자나 비신자와 민족적 계층적 동질성을 가졌기 때문에 협력이 용이했음은 물론 경쟁 관계가 조성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집권층과 상호 의존적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이 사회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상의 유리한 구조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공의회가 없었더라면 교회의 사회 참여가 가능했을까 하고 질문해 볼 때에, 공의회의 중요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과 <평신도 교령> 은 특히 사회 참여를 위한 신학적 당위성과 방법을 제시 해 주었다. 그 결과로 한국 교회 안에는 1960년대 후반 부터 사회 참여에 대한 신학적 이론과 동기가 형성되었 다. 사회 참여는 1967년에 가톨릭 노동청년회가 깊이 개입했던 강화도 심도 직물 사건에 관한 한국 주교단의 공동 성명(1968.2.9)으로 시작되었고, 1970년 10월 5일 원주 문화 방송 사건으로 인한 원주교구의 부정 부패 규 탄 시위와 주교단의 공동 교서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 자" 뿐 아니라, 1974년 7월 10일 지학순 주교의 구속으 로 발단된 시국 기도회를 통해서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자극받은 신부들은 1974 년 9월 24일 원주 원동 성당에서 "정의 구현 전국 사제 단"을 결성했다. 그 이후에 교회의 사회 참여가 여러 가 지 모양으로 진행되었으며 교구에 따라서 그 적극성의 정도에 차이가 보였으나 1970년대에는 유신 헌법 철폐 를 요구하는 기도회가 전국에서 개최되었다. 신부와 신 자들이 구속되고 전화를 도청하거나 정보과 형사들이 신 부들을 미행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1980년대에도 교 회의 인권 투쟁과 민주화 요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 며, 1987년도에 4 · 13 호헌 조치의 부당성을 표명하던 사제들의 전국적 단식 기도,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 박 종철 군 고문 치사 조작 사건 폭로, 명동 성당으로 피신 한 학생들의 보호 등의 활동은 6월 항쟁과 더불어 마침 내 6공 정권으로 하여금 6 · 29 선언을 하게 하는 데 크 게 기여했다. 사회 참여는 그 타당성을 국민들이 받아들 이면서 성인 입교자 증가의 배경이 되었다. 앞에서 우리 는 교회의 빠른 성장과 그 원인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지난 20년 간의 성인 영세자의 추세를 분석해 보면, 사 회 참여는 교회 성장의 분명한 요인이었다. 사회 참여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교구보다 열심히 했던 교구에서 성 인 영세자가 더 증가했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보아도 성인 영세자는 사회 참여가 절정를 이루었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에 걸쳐서 크게 증가했다가 그 후에는 감소 현상을 보였다. 이러한 사회 참여는 사제들 사이에 약간의 공개적인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다. 1970 년대 후반에 노년층 사제들로 구성된 '구국 사제단' 이 형성되고 반대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공의회가 사 회 참여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여기서도 드러 났다. 사회 참여에 반대한 사제들은 공의회 이전에 교육 받은 사제들이었고 적극적인 사제들은 공의회 세대였다. 교회의 사회 참여에 관하여 고찰할 때에 가톨릭 노동청 년회, 가톨릭 노동 사목 전국협의회, 한국 가톨릭 농민 회, 천주교 도시빈민회 등의 활동을 간과할 수 없다. 남북 통일을 위한 노력도 교회의 사회 참여의 일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남북 분단은 진정한 평화를 가로막 는 모순이고, 민족 자주의 중대한 결여를 상징하기 때문 이다. 나아가서 분단은 남한과 북한에서 사회 구조의 비 인간화와 억압의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통일 노력은 민족의 동질성 회복, 정의와 평화, 인권 회 복과 복지 사회 건설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최근까지 민족 통일에 많은 관심 을 쏟지 못했고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1972년 8 월 15일 김수환 추기경은 7 · 4 남북 공동 성명과 8 · 3 긴급 조치에 관한 메시지에서, 이 성명이 남북한 집권자 들의 정권 연장을 위한 술수가 아닌지 묻고는, 7 · 4 남 북 공동 성명은 남북한간에 진지한 대화의 실마리가 되 고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조국 평화 통일의 디딤돌이 되 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표시했다. 한국 천주교 창립 200 주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민족 통일에 관한 관심이 고 조되었기 때문에, 준비위원회는 1982년 12월에 북한 선 교분과를 설치했고, 200주년 기념 행사가 끝난 이후 1985년 가을에 한국 주교 회의는 그것을 주교 회의 산 하 북한 선교위원회로 승격시켰다. 1988년 봄에 북한 선교위원회는 통일사목연구소를 개설하고 5월 21일에 연구소 창립 기념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와 같은 교회의 미온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통일 운 동에 교회가 참여하기를 바라는 신자들의 바람은 1980 년대에 들어와서 뚜렷하게 증가했다. 1982년에는 신자 의 50% 정도만이 통일 운동이 교회의 바람직한 활동이 라고 보았으나, 1987년에는 교회의 그러한 활동을 지지 하는 신자가 68.8%로 증가했다. 1989년에는 한국 교회 가 민족 통일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신자들이 85.5% 로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러한 것은 민족 통일에 대한 기대, 민족 통일에 대한 자신감과 교회의 중대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신자들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 문제는 절실한 것이면서도 다루기 어려운 문제였고 교회에 상처를 안겨 주고 말았다. 1989년에 교회는 가 톨릭 신자 서경원 의원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으로 진통 을 겪어야 했다. 방북 이후에 서경원을 만나 준 김수환 추기경이 시련을 맞게 되었다. 임수경을 보호하려는 문 규현 신부의 방북은 교회 안에 첨예한 갈등을 야기하고 말았다.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은 그의 방북을 추인했는 데 반하여, 대부분의 국민이나 신자들은 이것에 비판적 이었고, 주교 회의와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비판적이 고 유감의 뜻을 표시한 담화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주 교 회의는 1992년 가을 정기 총회에서 통일 후에 반드 시 필요할 통일 기금을 교구별로 마련하되, 교구 예산의 3% 정도를 매년 비축하기로 결의하였다. 최근에는 광복 절을 기해서 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인간띠 만들기 범국민 운동에, 가톨릭 교회는 북 한 선교위원회를 중심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토착화와 전례 개혁 : 교회의 토착화와 전례 개혁은 공의회의 매우 중요한 과제였고 둘은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이지만, 교회의 토착화는 전례 개혁보다도 더 넓은 영 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 토착화는 교회의 전문 인력, 교 회 재정, 교회의 공식 기도인 전례 그리고 신학과도 깊 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충분한 것은 아니더라 도, 지난 27년 동안 한국 교회는 인력과 재정 자립도를 상당히 키워 왔고 최근에는 약간의 인력과 자금 수출을 시작했다. 이것은 교회의 커다란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 다. 현재 주교들과 신부들의 토착화가 완결된 것은 아니 지만 공의회 이후에 외국인 선교사가 상당히 감소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교세 통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같은 기간에 규모가 크고 역사가 비교적 오래 된 수도회 의 장상들도 대부분 한국인으로 교체되었다. 한국 교회 는 성직자와 수도자의 완전 자급을 목표로 삼아야 하고 성직자와 수도자의 수출까지 지향해야 한다. 공의회 직 후만 해도 한국 교회는 가난해서 외국 재정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신학교, 수많은 성당, 수도원, 사제관도 외국 기금으로 세웠다. 1980년대 이후로 교회의 재정 자립도 는 현저하게 높아졌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는 외국 교 회가 한국 교회를 지원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 작했고 동시에 외국 원조를 받지 말자는 의식도 국내에 서 강해졌다. 그렇지만 아직도 외국 의존이 완전히 없어 진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최근에는 한국 교회가 교황 청 재정에 상당한 지원금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아주 최근의 일이지만 외국 교회를 돕는 지원금을 보내기 시 작했다. 공의회 이후 한국 교회에 도입된 한 가지 중대한 변화 는 전례의 개혁이었다. 공의회의 <전례 헌장>은 전례 개 혁에 있어서 전면적 개혁, 신자의 능동적 참여, 토착화, 품위 있고 단순하며 의미가 명백하고 반복 없는 예식 그 리고 공동체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개혁된 형태의 미사 양식이나 성사 양식은 한국 교회가 만든 것이 아니라 교 황청이 직접 공급했다. 토착화의 구상과 제안권 정도가 한국 주교 회의에 위임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례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토착화할 것인지는 한국 교회에 맡겨진 것이다. 그런데 전례의 토착화는 다시 예식의 토착화만 이 아니라 성가와 성당 건축의 토착화를 포함한다. 전례 개혁이 몰고 왔던 눈에 띠는 변화 몇 가지는 다음과 같 다. 성당 앞 벽에 붙어 있던 제대는 사제와 신자들 가운 데로 옮겨졌으며, 제단과 신자석을 가로막던 난간은 없 어졌을 뿐 아니라 난간에 꿇어서 혀로 받던 영성체식은 서서 손바닥으로 받는 식으로 변했다. 밤 12시부터 지켜 야 하던 공심재는 성체를 영하기 전 한 시간으로 변하여 영성체가 훨씬 용이해졌다. 라틴어로 집전되던 미사와 칠성사는 모두 우리말로 집전되게 되었다. 한국 주교단 은 1971년에 전례에 세 가지 토착화를 도입하기로 결정 하고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하나는 존경의 표시로 무 릎을 끓는 대신에 깊이 숙여 절하는 것이고, 둘째는 제 대와 성서에 친구하는 대신에 머리숙여 절하는 것이며, 셋째는 평화의 인사를 위해서 어떤 동작보다는 절하면서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주교단은 다른 비서구 국가의 주교단에 비하면 토착화에 소극적이었다. 예식의 토착화를 제외하 고 성가와 성당 건축의 토착화는 주교단이 결의할 문제 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서서히 진행된다. 성가의 토착화 는 한국 고유의 가락 혹은 음률이 사용되는 성가를 도입 하고 사용하는 것이지, 가사만을 우리말로 바꾸는 것은 아직도 토착화로 보기는 어렵다. 성가의 토착화는 별로 진전되지 않다가 1980년대 후반에 국악 미사곡이 만들 져서 애창되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우리 신자들이 서양 음악에 익숙해 있고 오히려 우리 가락에 대하여는 소원 감을 느끼는 것이 성가의 토착화를 지연시키는 요인이기 도 한 것 같다. 성당 건축의 한 전문가는 우리 교회에서 1960년대 이 후로 성당의 토착화가 시도되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 서 전통 양식과 고딕 양식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이다. 성당 건축의 토착화가 너무 미미하다고 전문가들 의 비판도 매우 신랄하다. 성당 건축의 토착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전문 건축가들의 견해가 일치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어떤 건축가는 옛날 건축을 단순 히 모방한 것이 토착화된 성당이 아니고 토착화된 성당 은 현대식이어야 하는 동시에 지역, 자연, 인적 환경에 적합하게 설계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착화는 인력이나 재정, 혹은 전례에서만이 아니라 신학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학의 토착화는 그 정도가 다른 영역에 비하여 가장 미미한 상 태에 있다. 1971년, 1982년, 1987년도의 신자 의식 조 사에서도 토착화에 관한 관심이 매우 높다는 것이 나타 났지만, 그것도 신학보다는 전례의 토착화만을 의미한 다. 신학의 토착화에 관한 말도 없다가 1980년대에 들 어와서 신학의 토착화가 논의된 것만도 다행이다. 어떤 학자는 공동 번역 성서에서 천주교에서 사용되던 용어인 "천주"나 프로테스탄트교에서 사용하는 "하나님" 대신 에 "하느님"을 사용한 것은 신학의 중요한 토착화라고 했다. 1987년 3월 26일에는 주교단 전원과 교회 지도자 200여 명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강당에서 "한국 천주 교회의 토착화 전망"이란 주제를 가지고 심포지엄을 개 최하였다. 그 이후에 토착화에 대한 주제 발표와 토의가 매 달 진행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구체적인 결과를 내지 는 못했지만 높은 관심을 보여 준다. 교회 권한의 분산과 공동체 건설 : 공의회는 교회를 우 선적으로 하느님 백성이라고 규정하면서 과거 교회의 지 나친 권력 집중화 현상을 문제시하였고 동시에 세계 교 회의 운영에서 주교들의 참여, 교구와 본당의 운영에서 사제,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의 참여를 강력하게 권장했 다. 공의회는 또한 전례의 성직자 독점을 지양하고자 했 고 평신도의 적극적 능동적 참여를 매우 강조했다. 이것 은 바로 교회 권한의 분산과 공동체 건설을 지향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공의회는 그리스도교들간 의 일치와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중요한 과제로 정했다. 한국 교회는 공의회의 이러한 과제를 실천하려고 노력했 고 따라서 교회는 변화된 모습을 갖게되었다. 우선 한국 의 전국 교회의 차원에서는 한국 주교 회의가 강화되었 다. 1964년부터 주교 회의는 연 1회의 정기 총회를 2회 로 늘려서 교회의 문제를 공동으로 결정하였다. 1980년 대에는 실무자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총대리 회의가 발족하여 여러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규합하여 상정하였 다. 거의 같은 시기에 전국 교구들의 국장 회의가 발족 하여 그들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회의들은 독단 주의를 방지하고 권력 행사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지며 전국적인 협동과 아울러 공동체 정신을 증진시키는 것이 었다. 각 교구에도 권한 분산과 의견 규합을 위한 기구 들이 신설되었다. 공의회 이전에는 주교가 신부들의 의 견을 수렴하는 기구로서 '참사회' 하나만 있었다. 10명 의 회원들은 모두 교구장의 임명을 받고 특히 인사 행정 에 관하여 의견을 개진했으나, 여기에는 신부들이 직선 한 대표들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공의회 이후로는 참사 회의 회원 절반 이상은 반드시 직선된 대표로 구성되어 야 한다. 인사 행정을 제외한 제반 교구 문제에 관한 자문 기구 로 1970년대에는 '사제 평의회' 가 설치되었다. 사제 평 의회는 신부들이 선출한 지구장 신부들과 교구청 신부들 로 구성된다. 모든 신부들의 의견을 규합하기 위하여 교 구에는 여러 개의 지구가 조직되고 지구장은 신부들의 의견을 들어 사제 평의회에 제출한다. 이 외에도 각 교 구는 적어도 일년에 한 번씩 '사제 총회' 를 통해서 의견 을 규합한다. 공의회의 지시에 따라서 교구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대표로 구성되는 '교구 사목 협의회' 가 설치되어야 하지만, 아직 설치되지 않은 교구도 있는 것 같고 설치된 협의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교구도 있다. 그 외에도 교구에는 본당의 대표들로 구성된 '평 신도 사도직 협의회' 가 조직되어 의견 수렴에 기여한다. 본당의 차원에서도 권한을 분산하고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전에는 본당 신부가 신자 회 장과 신자들의 의견을 비공식적으로 수렴하는 수가 있었 으나 의견 수렴을 위한 공식 기구는 없었다. 그러나 공 의회의 요구 때문에, 본당에는 여러 가지 분과를 거느린 '사목 협의회' 가 1970년대에 설치되었다. 초기에는 협 의회의 설립 때문에 사제와 신자 사이에 약간의 갈등도 발생했으나 이제는 이 기구가 완전히 정착하여 본당 운 영에 깊이 참여한다. 그러나 교회의 발전, 평신도의 열 성과 사기 진작을 위해서 평신도의 참여가 필수적이나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제들이 있는 것이 유감이다. 인구의 도시 집중이 심해지는 동시에 신자수가 증가하 고 도시 본당의 규모가 커지면서 익명성의 증대와 공동 체성의 결핍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친밀성의 유 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5천 명을 넘어서는 본당들이 무 수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전에 있던 40~50세대 단위 의 반 조직은 익명성을 줄이고 공동체성을 제고하는 데 무력하다는 인식이 커졌다. 중남미의 기초 공동체에 대 한 정보가 들어오면서 익명성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던 서울에서부터 1980년대 초에 10~15세대로 구성되는 소규모의 반 조직을 만드는 움직임이 전국으로 전파되었 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반 조 직의 중요성이 인정되긴 해도, 반장의 양성이나 반 회의 의 내실화를 위한 노력은 크게 부족하다. "2000년대의 복음화"라는 주제 하에 서울대교구를 비롯하여 기초 공 동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고조되고 우리 현실에 적합 한 기초 공동체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경주되는 것은 다 행이다. 내실 있는 반 조직에 교회의 장래가 달려 있다. 권한 분산과 공동체 건설 노력은 전례, 특히 미사 안에 도입되었다. 전에는 미사 복사, 헌금 모금자, 성가대를 제외하면 평신도의 역할이 없고 수동적 참여가 전부였 다. 공의회의 전례 개혁은 미사 중에 남녀 평신도 해설 자, 성서 독서자, 제물 봉헌자를 도입했다. 한국 교회는 1984년부터 수녀와 남성 평신도에게 성체 분배권을 허 용했다. 기혼자 종신 부제직을 도입한 나라도 많지만 한 국에는 아직 없다. 여성이 한국 신자의 60%를 구성하고 있어도 여성의 교회 권력 참여는 일반 사회의 정도를 따 르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중요한 자리에서는 배제되고 있다. 여성은 성체 분배권도 받지 못하고 1985년도 조사에는 극소수 여성이 본당 사목 협의회장을 맡고 상당수는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구역장이나 반장직은 여성 이 담당한다. 무거운 직책이나 제대에서 가까운 직책에 서 여성의 참여는 현저하게 적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여 성 사제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국 교회 안에는 프로테스탄트와 타종교에 대한 개방 적 자세가 자라났다. 한국의 풍토 때문에 진지하고 장기 적인 대화와 일치 운동을 가진 것은 아니나, 프로테스탄 트와의 협력으로 공동 번역 성서를 내는 데 성공했다. 스님이나 목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 경우도 종종 발 생했다. 천주교 성직자와 신자들은 프로테스탄트인들과 함께 인권 운동과 정의 실현에 협력하기를 주저하지 않 았다. 공의회 이후에 교회는 매년 1월에 교회 일치 주간 을 두어 기도하고 일치와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성 당에서는 타종교에 대한 비난과 공박의 발언을 전연 들 을 수 없다. 1982년 의식 조사에서 2,515명 신자의 76%가 프로테스탄트와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고 대답하고, 77%가 불교와의 대화에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고 응답했다. 흥미롭게도 신자들은 프로테스탄트보 다는 불교에 대하여 훨씬 강한 호감을 가지며 그 차이는 현저하다. 종교 교육과 영성 수련 : 공의회는 신자들의 종교 교 육과 영성 수련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했다. 성서, 교 리, 교회 규칙 등에 대한 많은 상식을 갖는 신자들이 많 아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영성이란 개인의 가장 깊은 곳에 담겨진 내적 상태이고 인간의 행동를 좌우하는 중 요한 요인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적 신념, 행 동 방식, 일련의 태도와 가치관을 굳게 가진다는 것은 교회 내실화의 필수적 조건이다. 신자들의 성서와 교리 에 대한 상식이 전보다 많아졌는지, 혹은 영성 수련이 더욱 진전했는지에 대하여 자신있게 말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공의회 전에 지배적이었던 것이 지나친 개인주의 적 영성이었다면 그 후에는 사회적 영성이 어느 정도로 첨가되었다. 전에는 기도, 종교적 의무 완수, 개인적 덕 행의 추구가 가장 중요한 것이고 사회 개선이나 정의 실 현 같은 것은 신앙심, 종교 생활 그리고 영성과는 무관 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의식 조사의 결과들이 보여 주듯이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인권 회 복이나 정의를 위한 사회 참여가 종교 생활이나 영성의 일부라고 보는 경향이 성장했다. 공의회는 많은 한국 신자들의 영성의 내용을 변화시켰 다. 공의회 이후로 입교 예비자를 위한 교육 방법에 변 화가 있었다. 전에는 교리 강좌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 고, 360여 개의 문답으로 구성된 교리책을 경우에 따라 서는 뜻도 모르면서 암기하여 구술 시험을 통과해야 세 례성사를 받았다. 암기할 것이 많아서 천주교회에 다닐 수 없다는 평가도 있었다. 대개 공의회 이후로 암기식 교리 교육은 강좌식 교육으로 대치되었으며, 예비자 교 육 기간은 일주일에 2~3시간의 강의를 전제하여 6개월 이 적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세례 준비의 확인을 위한 사제의 면담이 있지만, 강좌식 교육으로 예비자들이 정 말로 충분하게 교육되는지 항상 의문이 제기되었다. 단 기간의 강좌식 교리 교육은 세례자들을 양산한다는 비판 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냉담자 가 증가한다는 문제 의식이 교회 내에 퍼지면서 교육 기 간을 1년으로 연장해야 한다는 방침이 정해지고 많은 본 당이 이를 실천한다. 주일학교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그것의 부실함은 신자 어린이와 청소년이 교 회 상식에 무식하고 그리스도교적 영성이 없는 신자나 냉담자로 자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교사의 수와 자질 부족, 교실 부족, 출석률의 저조는 큰 문제이다. 치열한 입시 준비로 중학생, 특히 고등학생의 출석 저조는 심각 하다. 다행히 각 교구는 교사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아 직도 크게 부족하지만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본당들은 교실 마련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다. 공의회 이후로 한국에는 신자들의 교리 교육과 영성 수련에 도움을 주는 운동체들이 여럿 도입되었다. 이러 한 운동체들은 아무래도 일부의 신자들만을 끌어들이는 한계를 가지긴 하지만 교회의 중요한 활력소가 되고 있 다. 이들은 회원들에게 선교와 봉사 정신 및 방법을 길 러주는 데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50년 대에 도입된 레지오 마리애(마리아의 군단) 운동은 한국 교회 안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레지오 마리애는 교구마다 수만에서 수십만의 회원을 거느리는 가장 충실 하고 꾸준한 활동체로 성장했다. 회원들은 환자 방문과 같은 봉사뿐 아니라 선교에도 열성적인 일꾼이다. 그리 고 스페인에서 발족하였지만 필리핀을 통해서 1967년에 들어온 꾸르실료(단기 교육 과정)는 그 명칭에 걸맞게 단 기간에 남녀 지도급 신자들의 신앙심과 열성을 높여주고 있다. 꾸르실리스따들은 교회의 요소요소에서 열성적으 로 봉사한다. 1974년에 미국에서 도입된 성령 운동도 많은 신자의 열성을 강화하고 종교 생활에 기쁨을 제공 한다. 이 운동은 성령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우월 감을 갖는 신자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신자에게는 좋은 결과를 생산한다. 1970년대 후반에 스 페인에서 미국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M. E.(부부 대화)운 동은 대화의 필요성과 방법을 교육시킴으로써 부부간의 친밀한 관계를 증진하여 가정의 행복을 돋구어주며 동시 에 그리스도교적 태도와 가치관을 심어 준다. 또한, 젊 은 부부들의 신앙 생활을 크게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외에도 1970년대 초반부터 몇몇 신부와 영원한 도 움의 성모회 수녀들이 출발시킨 성서 모임은 한국 교회 안에 크게 부족했던 성서 교육을 위하여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소집단 연구와 종합 연수를 통한 방법은 수 많은 신자에게 성서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같은 기 간에 가톨릭계 출판사가 늘었고 출판되는 책의 종류와 부수도 크게 증가했다. 주간지, 월간지, 격월간지, 계간 지와 같은 정기 간행물도 크게 다양해졌다. 1992년 말 에는 5개의 출판사가 발행하는 수많은 책들, 33개의 주 간지, 38개의 월간지, 16개의 계간지들이 신자들의 교 리 교육과 영성 수련에 도움을 주고 있다. 공의회 전에 는 성직자의 생활에서 엄격한 규율, 철저한 검약, 간단 없는 기도를 대단히 강조했다. 이런 것이 공의회의 개방 적 분위기와 1970년대의 사회 참여로 인하여 등한시되 거나 무너진 듯한 경향이 나타났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정말로 심도 있는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철저한 개인 생 활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깊은 영성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따라서 1980년대 중반에는 성직자의 영성 강화는 물론 신학생의 영성 수련 강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냐시오식 30일 피정이 호감을 사기도 했다. 수도회를 중심으로 영성을 다루는 잡지가 등장하고 영성 연구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평 가〕 지난 27년 동안에 한국 교회는 크게 성장했으 며 많이 변했다. 그 활동이 매우 다양해졌으며 새로운 경험도 가지게 되었다. 현재 한국의 다른 종교들이 너무 나 많은 결함을 노출하고 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는 상대적으로 비신자들에게도 좋은 감정을 주고 있다. 성 직자들은 과분한 신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문제는 많이 있기에 우리의 모습을 겸허하게 반성하고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 에서 자신을 가차없이 비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 참고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65~1992년 한국 천주교 회 교세 통계》/ 홍두승, <중산층의 성장과 사회 변동>, 한국사회학 회 · 한국정치학회 편, 《한국의 국가와 시민 사회》, 1992, 한울, pp. 255~276/ 서강대학교 사회문제연구소, <한국 가톨릭 종교사회 조사 보고서 제Ⅱ부>, 1971/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위원 회, <사회 조사 보고서>, 1985/ 노길명 · 오경환, <가톨릭 신자의 종 교 의식과 신앙 생활>, 가톨릭출판사, 1988/ 왈벗 빌만, 정 한교 옮김, 볼 눈이 있는 사람》, 분도출판사, 1992/ 윤여덕 · 오경환 · 박문수, 《한국 가톨릭 교회와 소외층, 그리고 사회 운동》, 빛고을출판사, 1990/ 오경환,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성 찰과 전망>, 한국종교 사회연구소 편, 《한국 종교의 성 찰과 전망》, pp. 141~166/ 최종철, <한 국 기독교 교회들의 정치적 태도, 1972~1990>, 《경제와 사회》 가을 호, 1992, pp. 205~225 ; 같은 저자, <해방 이후 한국과 대만에서 기독 교 교회의 정치화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 한국사회사연구회, 《현 대 한국의 종교와 사회》, 문학과 지성사, 1992, pp. 171~194/ 오경환, <교회의 목적과 예언자직의 중요성>, <사목> 179호, 1993, pp. 14~35/ 한용희, 《한국 가톨릭 인권 운동사》, 분도출판사, 1984/ 함세웅, <1970년대 가톨릭 사회 정의 구현 활동과 평가>, 《가톨릭 사회과학 연구》 제3집, 1984, pp. 35~421 윤민구, <전례의 토착화>, <사목> 114 호, 1987, Pp. 49~581 노길명, <70년대의 종교 성장과 앞으로의 전망>, 《한국 사회 어디로 가고있나?》, 한국사회학회, 1983, pp. 85~110/ 오 경환, <도시 본당의 구조적 결함과 그 개선 방안>, <사목> 77호, 1981, pp. 61~721 장안숙, <한국 가톨릭 성가의 역사적 변천에 관한 연구>, 《한국 교회사 논문집》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pp. 503~534/ 김정 신, <한국 천주교회 성당 건축의 변천에 관한 연구>, 《한국 교회사 논문집》 1, 1982, pp. 649~676/ 심상태, <한국 교회의 토착화의 전망>, 《한국교회와 신학》, 성바오로출판사, 1988, pp. 153~198/ 이찬우, 《교 회공동체와 사목 직 무》, 가톨릭대학 출판부, 1991/ 최덕기, <(반모 임)교회상을 지 향하는 교회 론적 접근>, 《신 학과 사상》 9호, 1993, pp. 26~58/ 박기주, <2000년대의 복음화와 소공동체>, 《신학과 사상》 9 호, 1993, pp. 99~110/ 조규철, <현대 한국 천주교회와 꾸르실료 운 동>, 《한국 교회사 논문집》 Ⅱ, pp. 939~1044/ 이인복, <현대 한국 천주 교회와 성령 쇄신 운동>, 《한국 교회사 논문집》 Ⅱ, 한국교회사연구 소, 1985, pp. 1067~ 1092. 〔吳庚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