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영〕Republic of Ireland

글자 크기
8
유럽에서 가장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의회 민주주의 국가로, 공식 명칭은 아일랜드 공화국. 북쪽 · 서쪽 · 남쪽은 대서양, 동쪽은 아일랜드 해와 세인트 조지 해협과 연해 있는 섬나라로, 동북쪽에는 영국이 있다. 면적은 70,285k㎡이고, 인구는 3,644,000명(1997)이며, 수도는 더블린(Dublin)이다. 역사적으로 켈트족 · 스칸디나비아인 · 노르만인 · 잉글랜드인 · 스코틀랜드인 등의 침략을 받아 혼합 인종을 이루고 있지만, 오늘날 인종적 · 민족적 구별은 거의 없다. 국교는 없으나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이고, 소수의 프로테스탄트와 유대교 신자들이 있다. 섬 전체는 32개의 주(州)로 이루어져 있는데, 1922년의 내전으로 남쪽의 26개 주는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 북동쪽의 6개 주는 북아일랜드(Notherm Ireland)가 되었다. 그리고 남쪽은 1937년부터 에이레(Eire)로 불리다가 194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아일랜드 공화국이 되었고,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속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수도원 활동 : 아일랜드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5세기경 파트리치오(Paricius, 390~461?)에 의해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아일랜드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 왕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파트리치오가 이들의 이교적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의식을 조화시킴으로써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정착될 수 있었다. 그 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회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는데, 수도원은 교회의 중심 역할뿐만 아니라 학문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때 아일랜드 수도자들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거쳐 프랑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그리고 멀리 이탈리아에까지 해외 선교를 하였다. 한편 6~8세기에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은 필사본의 중심지였는데, 화려하게 장식된 당시의 성서 필사본들(Book of Dur-IOW, 650 ; Book of Kells, 800)이 현재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 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당시 수도자들이 발휘한 예술적 정교함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르만 정복 시기 : 12세기 초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아일랜드 교회는 황폐해져 갔다. 새로 세워지는 교회는 없었으며, 수도자들의 열정은 점차 식어 갔고, 남아 있던 수도원들마저도 세속화되었다. 특히 이 시기 아일랜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전통적으로 지켜 오던 사항들을 위반하는 행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성직자들이 처첩을 거느리는 행위였다. 이에 도덕적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로마의 관심이 아일랜드 교회에 집중되었고, 이것은 당시 교황들의 일련의 그리스도교 개혁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아일랜드에서는 이 시기에 캐셜(Cashel), 라스브리제일(Rathoreasi), 켈스(Kells, 현재는 Ceamammus Mor)에서 각각 교회 회의가 개최되어 로마 교회의 보편법을 따를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나라 전역을 주교가 관할하는 체제로 바꿈으로써 그 동안 지배적이었던 아일랜드 수도원의 우월한 지위를 종식시키고자 하였는데, 특히 켈스 교회 회의를 통해 마련된 구조는 지금과 유사한 것이 많아서 현재의 4개 대교구 지역인 아마(Armagh) 더블린, 캐셜, 튜암(Tuam)도 이때 생긴 것이었다.
한편 당시 유럽 본토에서는 개혁적 분위기로 인하여 시토회 ·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 도미니코 수도회 · 작은 형제회 등 새로운 수도회들이 창설되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아마의 대주교 말라키아(Malachinas, 1094~1148)는 1142년 로마로 가는 도중 베르나르도(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를 찾아가 시토회 수도자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후 라우스(Louth)에 시토회가 세워졌지만, 다시 일기 시작한 종교적 열정은 기근과 흑사병 등의 확산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 종교 개혁의 영향 : 아일랜드 교회는 시련은 대륙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 때문이 아니라 영국의 종교적 상황 변화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튜더 왕조의 왕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아일랜드 종교 개혁에 관심을 집중했던 왕은 헨리 8세(Henry Ⅶ 1509~1547)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 1558~1603)였다. 1534년 '영국 교회의 수장' 이 된 헨리 8세는 1536년에 '아일랜드 교회의 수장이 되면서 아일랜드의 많은 수도원들을 폐쇄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국 왕실의 힘이 미치고 있던 더블린 주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보다 적극적인 개혁은 아일랜드를 직접 통치했던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와서 이루어졌는데, 아일랜드 전역에 걸쳐 종교 개혁을 확대하면서 1570~1603년 사이에만 100여 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옥사하였다. 처형은 1580년대 초에 극에 달하였는데, 1579~1584년에는 46명이 처형되었다.
45년 간의 엘리자베스 통치 기간을 지난 후 아일랜드에 남은 주교는 거의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주교좌는 주교 없이 운영되었다. 또 처형 기간 동안 아일랜드에 남아있던 가톨릭 성직자들이 보여 준 용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고, 훗날 아일랜드에 가톨릭이 강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영국의 가톨릭 탄압 : 17세기 초 대륙에서 일어난 가톨릭 개혁 정책의 영향을 받은 탁발 수도자들과 예수회가 입국하여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톨릭 교회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615년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0.F.M.Cap.) , 1625년에는 가르멜회가 들어왔고, 이와 더불어 이전의 옛 수도원들이 재건되고, 새 수도회들도 아일랜드 내에서 기초를 다져 갔다. 한편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식민화는 1595년에 아일랜드의 가톨릭 세력가인 오닐(0 Neill)과 오도넬(0 Donnell) 가(家)가 일으킨 반란으로 앞당겨지기 시작하여 1609년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이 식민화 정책은 주로 얼스터(Jster) 섬의 북동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1641년에 그곳에 살고 있던 수천 명의 영국인을 아일랜드인들이 학살한 사건이 일어나자, 처벌 작업의 선두에 선 크롬웰(O. Cromwell, 1599~1658)은 가톨릭 신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였다. 당시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토지를 지킬 수 있었던 곳은 가장 황폐한 지역인 코노트(Conmaugh)뿐이었다. 다른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살해하지 않는다거나 의회군에 대항해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 보장되어야만 아일랜드에 남을 수 있었다. 의회군과 싸운 이들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학살한 사건에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가톨릭 성직자는 모두 해외로 추방되었다.
1688년 명예 혁명 이후 아일랜드 내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지나치게 독립적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자, 영국은 주로 그들로 구성되어 있던 아일랜드 의회의 권한을 다른 식민지 수준으로 제한하고, 이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가톨릭을 차별화하는 법조문이 아일랜드 의회에서 통과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가톨릭 신자들에게 일련의 형법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정부가 위그노에게 가한 제한들과 맞먹는 것이었다. 수사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모두 추방되었고, 교구 성직자를 교구 당 한 명으로 제한한 뒤 영국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하였다.
가톨릭의 재건 : 18세기 내내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불리한 입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704년 15%였던 가톨릭의 토지 소유율은 18세기 말에는 약 8%로 떨어졌고, 4,000명 가량의 상류 계급 가톨릭 신자들이 이때 영국 국교회를 받아들였다. 이런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에서도 태도 변화가 있었는데, 가톨릭 신자들의 왕에 대한 충성을 담은 호소문을 하노버 왕실에 은밀하게 전달하였고, 조지 3세(George Ⅲ, 1760~1820)가 등극한 후에는 더블린의 성직자들이 왕실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인지 1770년에는 전체적으로는 아니었지만 형법의 일부가 철회되었고, 1790년대부터는 가톨릭의 구제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부터 1840년대 말까지는 이러한 형법 아래에서도 가문을 유지하고 있던 케리(Kery) 주 출신의 변호사 오코늘(D. 0 Connell, 1775~1847)이 전개한 가톨릭 해방 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29년 그가 가톨릭의 거의 모든 제약 조건을 해지(解止)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가톨릭 신자들도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이 기세를 몰아 1801년에 단행되었던 영국과 아일랜드의 연합령(Act of Union)을 철회하는 운동을 벌였는데, 이 운동은 1845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또 아일랜드인으로서 처음으로 추기경이 된 더블린 대주교 컬른(P. Cullen, 1803~1878)의 개혁적 노력으로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50년에 교구 회의를 개최하여 아일랜드 교회가 로마의 교회 체제를 본따도록 촉구한 그는, 아일랜드 전역에 성당을 건축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고, 가톨릭 교육을 고무하는 차원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컬른은 개혁적이고 급진적인 성격이었으나 독립을 지향하던 '아일랜드 독립당 에는 반대하여 성직자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한편 1844년에 아일랜드 국교회의 해체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국민 협회' (National Association)를 창설한 적이 있던 그는, 이탈리아의 가리발디(G. Garibaldi, 1807~1882)에 대항하여 교황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1859년에 아일랜드단(hishBrigade)을 창설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는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회가 중세 이래로 교황청과 가장 친밀한 연대감을 갖던 시기였다. 부활 봉기(Ester Rising, 1916)와 아일랜드 내전(1922)을 겪으면서 가톨릭은 더욱 견고해졌으며, 1938년에는 아일랜드 국민 대다수의 종교로 인정을 받았다.
[현 황] 인구의 95%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많은 사제 수도자들이 교육을 맡고 있으며, 특히 수녀들은 간호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 경제적 문제에 대해 교회의 입장과 가르침을 전달함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해외 선교 활동에도 상당히 적극적이어서 1916년에 설립된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80여 개 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1933년부터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6년 현재 가톨릭 신자는 4,541,000명이며, 대교구 4, 교구 22, 본당 1,297개에 추기경 1, 대주교 9, 주교 40, 사제 5,881(교구 소속 3,473, 수도회 소속 2,408), 종신 부제 4, 수사 1,054, 수녀 9,656명이 있다. (→ 골롬반 외방선교회 ; 오코늘 ; 파트리치오)

※ 참고문헌  R.D. Edwards, 7, PP. 613~6271 McArt · MacKenna · Campbell eds., Irish Almanac & Yearbook of Facts : 1998, Derry, ArtCam Publishing Ltd., 1997/ 2000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24/ Robert Welch ed., The Oxford Com-panion to Irish Literature, Oxford, Clarendon Press, 1996/ J.E. Doherty · D.J. Hickey, A Chronology of Irish History since 1500, Dublin, Gill and MacMillan, 1989/ D.L. Hickey · J.E. Doherty,A Dictionary ofIrish History 1800~1900, Dublin, Gill and MacMillan, 2nd ed., 1980/ Ruth Ducley Edwards, An Atlas of Irish History, London, Methuen & Co. Ltd., 1973/Peter Harbison, Guide to National and Historic Momuments of Ireland, Dublin, Gill and MacMillan, 3rd ed., 1992. [申惠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