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바 벤 요셉 Akiva ben Joseph(5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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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분류 원칙과 성서 해석 방법을 수립한 율법학자. 할라카(הֲלָכָה)를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할라카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성서 시대 이후 최초로 기록된 유대교 법전인 미슈나(מִשְׁגָה)의 기초를 세웠다.
〔생 애〕 50년경 유대 지방의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예루살렘의 갑부인 칼바 샤부아(Kalba Savu'a)의 양을 치던 목동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이름이 요셉이었기 때문에, 그는 "요셉의 아들 아키바" 라는 의미에서 '아키바 벤 요셉' 이라고 불렸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목동들을 천시하였는데, '암 하아레츠'(עַם הָאָרֶץ)인 목동들 역시 율법학자들을 미워하였다. 이러한 적대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내가 암하아레츠였을 때 나는 말하기를 '누가 내게 율법학자들을 넘겨준다면 나는 당나귀가 물어뜯듯이 그를 물어뜯겠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키바의 제자들이 물어 보기를 '개가 물어뜯듯이 하면 어떨까요? 하였다. 아키바는 대답하기를 당나귀가 물어뜯으면 뼈를 부러뜨리지만 개가 물어뜯으면 뼈를 다치지 않아요' 라고 했습니다"(《바빌론 탈무드》, <페사힘> 49b).
율법 공부 : 아키바는 서른이 넘어 글자를 깨치고 율법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인집 딸인 라헬의 도움이 컸다. 그녀는 무식하지만 총기가 있는 아키바에게 반해서 율법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것이다. 이에 관하여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칼바 샤부아의 딸 라헬이 보니 아키바는 점잖고 의젓하였다. 라헬이 아키바에게 '나하고 결혼하면 당신은 율법학자에게가서 공부할 수 있소? 라고 묻자 아키바는 '그렇게 하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라헬은 아키바와 몰래 결혼한 후 아키바를 공부하러 떠나 보냈다. 라헬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딸을 내쫓으면서 딸에게는 유산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였다. 요빠 남동쪽 15km 지점에 있는 릿다(Lydda) 율법 학당에서 12년을 지낸 아키바는, 마침내 1만 2,000명이나 되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노인이 자기 아내에게 '언제까지 생과부 생활을 할 셈인가? 하고 묻는 것을 들었다. 이에 그 아내는 '제 뜻대로라면 주인이 아직도 열두 해는 더 배우셔야지요' 라고 하였다. 이에 아키바는 '허락을 받았으니 행동으로 옮겨야지' 하면서 물러가서 12년을 더 율법 학당에 머물렀다. 그리고 나서 2만 4,000명이나 되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알아보고 마중 나갔다. 이웃들이 '빌려서라도 다른 좋은 옷을 입으시지요'하고 타이르자, 라헬이 대답하기를 '의인은 제 짐승의 혼을 알아봅니다' (잠언 12, 10)라고 하였다. 라헬은 아키바를 마주 대하자마자 땅에 엎드려 아키바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제자들이 라헬을 밀어내자 아키바는 '그대로 두어라. 내 지식과 너희들의 지식은 다 이 부인의 것이 다' 라고 하였다"(《바빌론 탈무드》, <크투보트> 62b~63a ; <느다림> 50a). 실제로 아키바는 12년 동안 율법 공부를 하였는데, 위의 후기 전설에는 그의 공부 기간이 두 배인 24년이라고 하였다.
아키바는 70~80년경 야브네(Yabne)에서 유대교를 재건한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의 제자인 엘리에제르 벤 히카르누스(Eliezer ben Hycarnus, 1세기 말~2세기 초)와 여호수아 벤 하나니아(Joshua ben Hananiah, 1~2세기)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특히 게제르 북쪽에 있는 김조(Gimzo) 출신의 율법학자 나훔(Nahum, 1세기 후반~2세기 초)에게서 축자 영감설(逐字靈感說)에 따라 성서의 글자 한 자 한 자의 뜻을 새기는 주석 방법을 배웠다. 아키바는 요빠 동남쪽 8km 지점에 있는 베네 베라크(Bene Berak)에 율법 학당을 세우고 후학들을 배출하였는데, 그중 아키바의 율법 분류 방법을 미슈나 편찬자인 유다 하나시(Judah ha-Nasi, 135~217)에게 전해 준 메이르(Meir, 2세기경), 미슈나를 보충한 구전 전승 모음집인 토세프타(Tosefta) 편찬에 기여한 느헤미아(Nehemiah, 2세기 중반) 등이 손꼽힌다.
독립 전쟁 참여와 순교 : 로마 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가 예루살렘을 로마-그리스식 도시로 재건하기로 하고 성전 터에 제우스 신전을 짓기로 하자, 132년 유대인들은 바르 코크바(Bar Kokhba, ?~135)의 지휘 아래 제2차 유대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평소부터 로마인들을 미워하고 유대의 독립을 갈망해 온 아키바는 바르코크바를 '메시아' 로 선포하고 독립 운동을 격려하였다. 그래서 "시메온 벤 코시바" (שִׁמְעוֹן בֶּן כּוֹסְבָא) 라는 그의 이름이 '별의 아들' 이라는 의미를 지닌 바르 코크바로 바뀌었다(《예루살렘 탈무드》, <타아니트> 4, 8, 68d). 독립 전쟁은 이스라엘 민족의 호응을 얻어 성공하는 듯하였으나, 로마군에 밀려 결국 실패하였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처 바티르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아키바는 독립 운동을 부추긴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아키바는 로마군 형리들로부터 쇠꼬챙이로 살점을 훑어 내리는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그 시간이 유대인들이 유일신 신앙 고백문을 외우는 시간이어서 아키바는 기쁜 마음으로 신앙 고백문인 "이스라엘아 들어라”(שְׁמַע יִשְׂרָאֵל)를 바쳤다. 그러자 로마 총독 루푸스(Tunius Rufus)가 놀라서 물었다. "당신은 마술사인가? 아니면 무엄하게도 로마 형벌에 반항하는 것인가?" 이에 아키바는 "저는 한평생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라는 신앙 고백문을 외웠습니다. 저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목숨 을 다하여, 곧 목숨을 바쳐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문하곤 했습니다. 이제 목숨을 바쳐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어찌 기쁘게 신앙 고백문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면서 신앙 고백문을 외웠다. 그리고 "주님 우리의 하느님은 주님 한 분이시다" 라는 신앙 고백문의 마지막 어구를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예루살렘 탈무드》, <브라코트> 2, 4a : 《바빌론 탈무드》, <브라코트> 61b). 그의 유해는 티베리아 뒷산의 갈릴래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묻혔다.
〔사 상〕아키바는 성격적으로 자애로운 율법학자였으며, 개인적으로는 겸손한 삶을 살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율법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하였지만, 사형 제도에는 반대하였다. 또 일상 생활에서 여자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속박에서 풀려 난 것도 그 시대 여자들의 훌륭한 덕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열성적인 유대인들처럼 그 역시 이방인들과 이단자들을 몹시 싫어하였다. "이방인들이나 작은 짐승을 키우는 목동들은 웅덩이에서 꺼내지도 말고 웅덩이에 처넣지도 말라. 그들의 물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단자들과 배교자들과 밀고자들은 웅덩이에다 처넣고 꺼내지 말라"(토세프타 바바 메시아 2, 33). 이는 아키바의 성격이 모질어서가 아니라 철저한 율법학자였기 때문에 이방인, 특히 이단자들을 두고 이런 극언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단자들 중에는 당시에 그 수효가 늘어나던 '나자렛인들' 즉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85년경 야브네에서 만들어져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기도할 때 바친 "18조 기도문"의 제12조는 '이단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문 으로, 여기에는 이단자들 앞에 나자렛인들이 명시되어 있다. '나자렛인들과 이단자들을 당장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그들을 지우시어 의인들과 함께 적혀 있지 않게 하소서. 무엄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느님, 찬양받으소서"(《바빌론 탈무드》, <브라코트> 28b).
〔업 적〕 유대 신학계에서 아키바가 세운 공적은 세 가지이다. 첫째, 수백 년 동안 구전으로만 전해 오던 많은 율법들을 주제별로 분류하였다. 그의 분류 방법은 율법학자 메이르를 거쳐 유다 하나시에게 전해져 200년경 갈릴래아 지방 우샤(Usha)에서 6부 63편 520장으로 된 미슈나가 편찬되었다. 둘째, 율법학자들이 구전으로 전한 율법 하나하나를 성서 구절로 뒷받침함으로써 구전 율법의 권위를 성서의 율법만큼 높였다. 이를 위하여 성서 한 자 한 자에 하느님의 영감이 담겨져 있다는 축자 영감설에 따라 그 글자 안에 담긴 하느님의 심오한 뜻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셋째, 축자 영감설과 관련하여 성서를 그리스어로 새로이 번역하였다. 당시에 통용되던 그리스어역 성서는 70인역이었는데, 아키바의 입장에서이 성서는 의역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까닭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아퀼라(Aquila)를 시켜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직역한 성서를 펴낸 것이 "아퀼라 역본" 이다. 이 성서는 7세기까지 유대인들의 공식 그리스어 성서로 인정을 받았으며, 오리제네스(?~254)와 예로니모(343~420) 역시 이 성서를 사용하였다. (→미드라시 ; 바르 코크바 ; 토세프타 ; 할라카)
※ 참고문헌  H. Freedman · E. Davis, 《EJ》 2, pp. 488-492/ P. Benoit, Rabbi Aqiba ben Joseph, Sage et Héros du Judaism, Revue Biblique 65, 1947, pp. 54~89/ L. Finkelstein, Akiba Scholar, Saint and Martyer, New York, Atheneum, 1981/P. Schaefer, Rabbi Aqiva and Bar Kokhba, Appro-aches to Ancient Judaism, vol. 2, W.S. Green ed., Chico CA., Scholars Press, 1980, pp. 113~130.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