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교회 학자. 증거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축일은 5월 2일.
〔생 애〕 295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알렉산데르(Alexander, +328) 총대주교로부터 강경품을 받았으며, 318년경에 부제품을 받은 뒤 알렉산데르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아리우스주의 논쟁이 발생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325년에는 알렉산데르 주교를 수행하여 제1차 니체아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그는 그 당시 부제였기 때문에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발언을 하지 못하고 뒤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티오(Eustathius, +337?)와 당시 45세였던 안치라의 마르첼로(Marcellus, +375) 등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던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주교직 수행과 유배 : 328년 4월 17일 알렉산데르 주교가 사망한 뒤 후임자로 아타나시오가 내정되자(소조메노, 《교회사》 Ⅱ, 17), 멜레티우스 이단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이에 아타나시오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 해 6월 8일 비공식적으로 급히 아타나시오를 주교좌에 올렸다. 그러나 이로 인해 상당한 잡음이 생겨났으며 심지어 반대파들은 그를 비합법적인 주교로 여겼다(《콘스탄틴 대제에게 보낸 해명》 6, 4). 그렇지만 콘스탄틴 대제(306~337)는 아타나시오의 주교 축성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유배지에서 불러온 아리우스(Arius, 256?~336)를 공동체에 받아들이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아타나시오는 대제의 청을 거절하고 자신의 권위를 구축하였으며, 멜레티우스 이단과 아리우스주의자들을 굴복시킴으로써 자신의 교구를 지켜 나갔다. 그러자 이집트 밖에 있던 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아타나시오가 타락하였으며 반역죄를 저질렀고, 멜레티우스 이단자인 아르세니우스(Arsenius Hypselis) 주교를 살해하였다고 고발하였다. 그러나 아르세니우스 주교를 살해의 위험에서 구해 낸 사람은 사실 아타나시오였다.
① 제1차 유배 : 아타나시오는 334년 가이사리아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 소환되었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자 멜레티우스파와 에우세비오파들이 이듬해 티로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아타나시오를 비난하고 파문하였다. 이와 더불어 콘스탄틴 대제의 사절은 마레오티(Marreotis)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 즉 이집트에서 로마로 옥수수를 공급하는 것을 아타나시오가 협박하여 중단시켰다고 대제에게 보고했다. 이에 콘스탄틴 대제는 같은 해 11월 7일 아타나시오를 트리어(Trier)로 추방하였다.
② 제2차 유배 :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틴 대제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누스 2세(337~340)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아타나시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새 황제는 이듬해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의 직위를 다시 복권시키고, 티로 교회 회의에서 받았던 단죄를 무효화시켰다. 그러나 이 같은 일련의 조치에 반대하여, 동로마에서는 에우세비오파들이 339년에 안티오키아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아리우스주의자인 가빠도기아의 그레고리우스(+345)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임명하고, 알렉산드리아 당국의 지지를 받아 아타나시오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아타나시오는 그 해 3월 18일 다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주교들을 위한 회칙》 3).
로마로 간 아타나시오는 교황 율리오 1세(337~352)의 환대를 받았으며, 이곳에 머무르면서 로마 교회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교황은 그의 문제를 조사하기 위하여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으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Nicomediae, +342)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341년에 교황은 아타나시오와 추방당한 아타나시오의 동료 마르철루스에게 호의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한편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는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에서 아타나시오와 마르첼루스를 단죄하고, 아리우스주의의 오류를 반대하면서 평화를 목적으로 새로운 신앙 고백문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342~343년에 사르디카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양측 모두 아타나시오와 마르첼루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고집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양측은 제각기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서로를 단죄하였다.
③ 제3차 유배 : 345년 6월 25일 가빠도기아의 그레고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하자 후임 주교를 임명하려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의 형제 콘스탄스(337~350)의 조언을 받아들여 아타나시오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많은 망설임 끝에 결국 황제의 뜻을 수락한 그는 346년 10월 21일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는데, 그 후 그가 356년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지낸 기간을 '황금의 10년' 이라고 말한다. 이때 아타나시오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왕성한 저술 및 사목 활동을 펼쳤다. 한편 아리우스주의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350년에 동로마와 서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어 동방 교회의 공
식적인 관점을 자신의 관점과 일치시키려고 하자, 아타나시오의 위치는 다시 불안해졌다. 이어 아를 교회 회의(353)와 밀라노 교회 회의(355)에서 서방 주교들에 의해 단죄되었고, 압력이 점차 증가하다가 마침내 356년 2월 8일 성 테오나스(Theonas) 성당에서 체포 직전까지 몰렸다(《탈출에 대한 해명》 24 ; 《수도자들에게 보낸 아리우스주의의 역사》 81). 체포 위험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아타나시오는 이집트의 사막 수도자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하 여, 자신의 행동과 입장을 변호하고 해명하기 위한 글들을 많이 저술하였다. 그 후 동방 교회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361년 11월 3일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망으로 후임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361~363)에 의해 추방이 철회되어 아타나시오는 이듬해 2월 21일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그 당시 안티오키아에서는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바울리노(Paulinus) 사제가 이끄는 무리들과 멜레시우스(Meletius) 주교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멜레시우스는 대 바실리오(Basilnus Magnus, 329~379) 성인과 다른 유명한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유배에서 풀려 나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아타나시오는 즉시 교회 회의(362)를 소집하여 이 사건을 다루었다.
이 교회 회의에서는 <안티오키아인들에게 보낸 교의서한>(Tomus ad Antiochenos)을 통하여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선동적인 '사르디카 교회 회의 신경' (symbolus sanctae synodi Sardici)에 반대하면서 '우시아' (οὐσία)와 '히포스타시스' (ὑπόστασις)라는 용어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삼위 일체 안에 한 본질(우시아)이 있다는 주장으로, 사르디카 신경과는 달리 삼위 일체 안에 '세 위격들'이 있다는 고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아타나시오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 바실리오와 그의 동료들과 '반(反)아리우스주의자들' 에게는 이 표현이 중요한 것이었다. 이 교의 서한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바울리노의 가르침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아타나시오가 이에 대해 침묵하였던 주제였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교회를 다시 일치시키고 화해시키려던 아타나시오의 시도는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아타나시오의 친구인 루치페로(Luciferus, +370/371?)가 바울리노를 니체아파의 주교(362~383)로 서임하였기 때문이었다.
④ 제4차 유배 : 아타나시오의 신앙 고백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그는 또 다시 362년 10월 24일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야만 하였다. 떠나면서 그는 "단지 구름이 많이 끼었을 뿐이다. 구름은 금방 사라질 것이다"(소크라테스, <교회사> Ⅲ, 14, 1)라는 말을 남겼다. 이듬해 6월 26일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군대와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하자 요비아누스(363-364)가 후임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니체아 공의회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아타나시오의 친구였으므로 364년 2월 아타나시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요비아누스의 통치 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⑤ 제5차 유배 : 요비아누스 황제의 후임자로 이번에는 아리우스주의에 상당히 우호적인 발렌스 (364~378)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시민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가 아타나시오에게 내렸던 추방 칙령을 다시 인정하였다. 그래서 아타나시오는 365년 10월 5일 또다시 알렉산드리아를 떠났으나, 이듬해 2월 1일의 황제 칙령으로 알렉산드리아로 다시 돌아왔다. 그 후 더 이상 추방의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된 아타나시오는, 그와 안티오키아의 주교를 화해시키고자한 대 바실리오의 노력으로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여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가 일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치는 아타나시오의 오랜 친구 마르첼루스를 단죄한 대가였다. 이때 그는 자신의 친구를 단죄하는 것에 반대하였었다. 373년 5월 2/3일 사망하였다.
〔저술 활동〕 아타나시오의 저서들은 대부분 그가 글을 쓸 때 발생한 사건들과 글을 쓰는 목적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가 저술한 저서 총 목록은 게라르드(M.Geerard)와 테츠(M. Tetz)에 의해 작성되었는데(《CPG》 Ⅱ,pp. 12~60 : 《TRE》 4, pp. 344~349), 주요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이교도 반박론》(Oratio contra gentes)과 그 후속 작품 《말씀의 육화론》(De incarnatione Verbi, 318)은 흔히 두 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저서로 간주되고 있다. 매우 독창적이고 박력 있는 작품 《말씀의 육화론》은 《이교도 반박론》이 완성된 후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저술된 것으로 첫 작품과 관점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주로 호교론적 전통과 플라톤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우상 숭배와 다신론을 반박한 《이교도 반박론》은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돌보면서 자기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한 반면에, 《말씀의 육화론》은 인간의 나약성을 강조하고 육화한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주도권을 강조하였다.
《부활절 서간들》(Festae epistulae)은 주교들이 자신의 교구에서 부활절의 날짜를 선포하기 위하여 편지를 쓴 관습에서 비롯되었는데, 329년에 쓰여진 아타나시오의 편지와 373년에 쓰여진 편지의 사본 중 일부가 남아 있다. 한편 《주교들을 위한 회칙》(Epistula Encyclica, Epistula ad episcopos, 339)에는 그가 339년에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야만 했던 이유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아타나시오의 가장 중요한 교의론적 저서인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박》(Orationes contra arianos)은 세 작품으로 이루어졌는데, 아리우스주의의 교의를 요약한 첫번째와 두 번째 작품에서 아타나시오는 당시 유행하던 아리우스주의의 몇 가지를 논박한 뒤 중요 성서 구절들에 대한 아리우스주의적 주석을 단죄하였다. 세 번째 작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제한성을 다루면서, 말씀은 아버지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의지에서 나왔다는 아리우스주의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는 말씀은 본성적으로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에 의해 태어나고 그분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니체아 신경의 중요한 용어인 '동일 본성' (ὁμοούσιος)이라는 말은 단 한 번만 사용하였다( I , 9). 《니체아 공의회 칙령에 대한 서간》(Epistula de decretis Nicaenae synodi, 350~351)에서 '동일 본성'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던 그는 이후에도 계속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니체아 공의회 칙령에 대한 서 간》보다 분량이 짧은 《디오니시오의 의견》(De sententia Dionysii)에서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lexandrianus, 190~265?)를 자신들의 선구자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아타나시오를 더 곤경에 처하게 했던 상황과 그가 겪은 '제3차 유배' 에 대한 내용이 그 다음에 쓰여진 일련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이집트와 리비아 주교들에게 보낸 서간》(Epistula ad episcopos Aegypti et Libyae, 356?)은 아리우스파 교회의 정책과 교의를 반박한 내용이다. 그리고 강론 형식의 《콘스탄시우스 황제에게 보낸 해명》(Apologia ad imperatorem Constantium)에서 황제에게 자신의 문제를 공평하게 처리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353년경에 시작되어 357년에 끝났던 반역죄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비난을 반박하고 자신이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한 배경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또한 <탈출에 대한 해명》(Apologia de fuga Sua, 357)에서는 자신의 행동을 아주 자세하게 변론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반박하는 호교론》(Apologia contra arianos, Apologia secunda, 357)에는 티로에서 행해진 토론들을 엮은 아타나시오의 사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331~347년의 사건들을 보완해 주는 많은 문서들뿐만 아니라 그 당시 있었던 토론 배경과 결과들도 실려 있다. 《수도자들에게 보낸 아리우스주의의 역사》(Historia arianorum ad monachos, 358)는 335년부터 358년까지 있었던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기간에 그는 중요한 교의 저서 두 권을 썼는데, 《세라피온에게 보낸 서간들》(Epistulae ad Serapionem)과 《아리미눔 시노드와 셀레우치아 시노드에 대한 서간》(Epi-stula de synodis Arimini in Italia et Seleuciae in Isauria Celebratis)이 그것이다. 전자에서 아타나시오는 성령의 완전한 신 성을 옹호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양측에 화해 문구로 강요되었던 아리 우스주의적 표현인 '호모에안스'(homoeans)를 단죄하면서 '반(半) 아리우스파' 혹은 호모우시우스파' 들에게 니체아 신경을 받아들이라고 호소하였다. 359년에 쓰여진 이 저서는 361년에 개정되었으며, 362년에는 《안티오키아인들에게 보낸 교의 서한》을 썼다.
그가 수도 생활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집트의 은수자 성 안토니오(Antonius, 251~356)의 생애를 그리스어로 저술한 《안토니오의 생애》(Vita Antonii)는 수도원의 발전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이상적인 일대기이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 수도원 운동을 처음으로 소개한 이 책은 수도원 운동을 크게 확산시키고 발전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비록 아타나시오의 저술이 365년 이후부터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중요한 교의적인 서간들은 이때 쓰여졌다. 주목할 만한 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주장하는 <고린토의 주교 에픽테투스에게>(Ad Epictetum episcopum Corinthi)와 <아델피우스 주교에게>(Ad Adelphium epis-copum)이다. 그리고 교회 회의에 보낸 <아프로스에 보내는 서간>(Epistula ad Afros, 370?)에서는 니체아 신경을 아리미눔 신경으로 대체하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새로운 시도에 반대하고, 아리우스주의자인 아욱센시우스(Auxentius, +374)가 밀라노의 주교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신학 사상〕 다른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아타나시오도 그리스어 성서에서 커다란 영감을 받았으며, 그리스 교부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이냐시오(Ignatius Antiochenus, 35?~110?),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2세기), 오리제네스(Origenes Alexandriae, 185?~254)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론 : 아타나시오의 신론에는 플라톤 사상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 전통이 들어 있다. 그는 신인 동형론(神人同型論)과 다신론을 부정하고, 하느님을 "비물질적, 무형의”(αὐλός, ἀσώματος : 《니체아 공의회 칙령에 대한 서간》 10)와 같은 부정의 용어로 설명하였으며, "영원한, 불변의" (ἄΐδιος, ἄτρεπτος, ἀναλλοίωτος :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박》 I , 35~36), 특성이나 우연이 없는 "편재의, 완전하게 단순한 실재" (《니체아 공의회 칙령에 대한 서간》 22 : 《아프로스에 보낸 서간》 8) 같은 용어로 설명하였다. 그는 또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는 분(《이교도 반박론》 2, 35. 40), 인간 사고의 모든 범주를 초월하시는 분으로 설명하였다(《이교도 반박론》 22 : 《니체아 공의회 칙령에 대한 서간》 22) .
아타나시오에 의하면,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παντοράτωρ)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분의 로고스를 통해서 세상 안에서 활동하시며(《말씀의 육화론》 41), 시간 안에서 그분의 행위는 그분의 의지에서 나오며(《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박》 I , 29), 육화 행위도 그 분의 의지에서 나온다(《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박》 II, 65 ; 《부활절 서간들》 1, 10)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적인 자비와(《이교도 반박론》 41 ; 《말씀의 육화론》 3)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자비(φιλανθρωπία)를 강조하면서, 인간이 지닌 특성들 특히 자기 존엄에 관계된 특성들을 강조하였다(《'말씀의 육화론》 10, 13).
삼위 일체론 : 그의 삼위 일체론에 따르면, 성부는 로고스를 영원으로부터 창조할 때 성부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였다(잠언 8, 25)고 한다. 성령에 대한 내용은 《이교도 반박론》과 《말씀의 육화론》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찬가에 별도로 분리되어 나오고 있다. 로고스는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이며 하느님 자신의 존재에 속한다. 로고스는 종속적인 능력이라는 아리우스의 로고스 개념에 반대하면서, 아타나시오는 자신의 교의를 발전시켰다. 아타나시오는 《니체아 공의회 칙령에 대한 서간》에서 성자와 성부의 일치를 표현하기 위해서 니체아 공의회의 용어로 '동일 본질' 이라는 의미의 '호모오우시오스' (ὁμοούσιος)의 사용을 강조하였는데, '호모오우시오스 의 의미는 그가 사용한 '빛' 과 '광채' 라는 비유를 통하여 잘 드러난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성자가 성부 자신은 아니지만, 성부의 독특한 표현이다.
성령론 : 이는 《세라피온에게 보낸 서간들》에 잘 나타나 있다. 성령은 성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박》 Ⅲ, 24), 성자에 의해서 교회에 주어진 것이다. 성령은 성서 안에서 말씀하고,성인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리하여 "성부는 성령 안에서 말씀을 통해서 모든 것을 행하신다"(《세라피온에게 보낸 서간들》 I, 28).
그리스도론 :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세 가지 영역에서 활동한다고 하였다(《말씀의 육화론》 17). 즉 말씀은 영원으로부터 성부와 일치되어 있고, 말씀은 로고스로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다스리며, 정해진 때가 되자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과 일치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은 보편적이지만, 그분은 한 인간의 몸을 취하여(《말씀의 육화론》 9, 17, 42) 인간의 몸을 거룩하게 하고, 그 몸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며, 자신의 몸을 희생 제사에 내어 놓았다. 아타나시오는 그리스도가 지닌 인간의 몸 혹은 육신을 강조함으로써, 열등한 인간 본성인 몸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주의자들은 단지 이성적인 영혼만이 살아남는다고 생각하였다. 말씀이 인간의 영혼을 취하였음을 고의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던 아타나시오는, 의식의 경험을 '육신' 의 특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신과 플라톤주의자들의 견해 차이를 부분적으로 줄여 나갔다(《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박》 Ⅲ, 37, 38, 57). 그는 또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능력과 경험을 항상 물리적인 용어로 설명하였는데, 이 같은 설명은 그리스도가 겪은 육체적인 고통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지만, 그리스도가 지닌 인간적인 '신앙' II , 6)과 '복종' ( I , 37. 38)과 '두려움' (Ⅲ, 54)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지 말씀이 그분의 몸에서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아타나시오는 동정녀를 순수하고 결함이 없는 "영원한 동정녀" II 70)로 묘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는 기적이고, "지혜가 그 집을 지었다" 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분의 탄생은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이라고 하였다(《말씀의 육화론》 17 ; <고린토의 주교 에픽테투스에게> 5).
아타나시오는 그리스도의 업적을 설명하기 위하여 광범위한 사상을 이용하였으며, 로고스를 교육자와 인류의 교화자로 간주하는 에우세비오의 신학을 종종 인용하였다(《이교도 반박론》 43, 5 ; 《말씀의 육화론》 52, 3). 아타나시오의 독특한 사상은 로고스가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것과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제 인간을 다시 창조한다는 사상이다. 그는 육화 자체가 구원의 행위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말씀이 자신을 우리 몸, 즉 우리 육신에 결합시켜 우리 몸을 성화시키고 치유하고, 몸을 통해서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기적을 통해서 마귀를 물리침으로써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보여 주었으며,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의 뒤를 따라서 그렇게 하고 있다. 아타나시오는 그리스도가 행한 덕행에 대한 예들을 간간이 언급하였다(《부활절 서간들》 2. 5). 아타나시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고, '우리' 를 구원하였으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였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그분에 대한 우리의 불명예를 몸소 짊어지어 자신의 몸을 버리고 지옥으로 내려갔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파괴하고 마귀의 세력을 없앴으며, 우리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로써 우리는 불멸에 대한 보증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분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이 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말씀의 육화론》 54 ;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박》 3, 24-25). 여기에서 '우리' 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느냐가 항상 불분명하다. 어떤 구절에서는 구원받아야 할 인간 전체를 의미하지만, 아타나시오는 주로 그리스도인을 '우리'로 생각하며 성령을 우리 구원의 중재자로 언급하였다.
〔평가와 의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아타나시오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부터 명실공히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 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반(反)아리우스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스 철학의 논리와 이성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론을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하였던 아리우스주의의 위험한 사조에 대항하여 신앙과 성서의 가르침을 앞세우며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수호하였다. 그는 이성과 철학을 신학과 신앙의 길잡이로 생각하였고, 신앙과 전통의 우위성을 강조하였다. 즉 신학자로서 아타나시오는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에 굳건한 뿌리를 두고 있었다.
탁월한 재능과 강하고 날카로운 성격을 지닌 그는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사리 분별력이 뛰어났으며 신념이 강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동로마 황제의 보호를 받았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니체아 공의회의 신경에 반대하면서 아타나시오를 끊임없이 괴롭혀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하게 하였다. 17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으나, 그는 불굴의 투지와 믿음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일생 동안 지켜 나갔다. 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교회의 정통 신앙과 니체아 공의회의 신경을 수호하기 위하여 일생을 투신한 정열적인 불굴의 신학자요 사목자였다. 이 같은 활약을 통해서 그는, 교회사 안에서 어려웠던 논쟁의 시기에 정통 신앙과 니체아 공의회의 신경을 수호한 가장 뛰어난 지도자가 되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강조하여 후대 그리스도론과 삼위 일체론의 완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 니체아 공의회 ; 니체아 신경 ; 아리우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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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오, 알렉산드리아의 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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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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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성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