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리나리우스, 라오디체아의 Apollinarius Laodicensis (315?~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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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체아의 주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영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참된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친 이단자.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단죄를 받았는데, 그의 주장을 따르는 이들에 의해 '아폴리나리우스주의' (Apollinarianismus)의 주창자가 되었다.
〔생 애〕 아폴리나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리투스(Berytus)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시리아 지방의 라오디체아에 정착하여 문법을 가르치던 그의 아버지와 이름이 똑같다. 아버지 아폴리나리우스는 라오디체아에서 결혼하여 315년경에 그를 낳았고, 이들 부자(父子)는 335년 이전에 교직을 맡았다고 한다. 또 테오도투스가 라오디체아의 주교로 재임할 당시 아버지는 공동체의 장로였고 아들은 강경품자였다. 이들은 소피스트인 에피파니우스의 강연을 들었다고 해서 테오도투스 주교에게 견책을 받았고, 346년에는 제2차 유배를 끝내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던 아타나시오(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가 이들의 집에 머물렀다. 테오도투스의 후계자이자 라오디체아의 아리우스파 주교인 제오르지우스(Georgius, 342~360)는 이들 부자가 니체아 신앙 고백을 충실히 따를 뿐만 아니라 이 고백의 대표적 변론자인 아타나시오와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파문하였는데, 이들이 아타나시오와 긴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간접적인 증언이 전해 오고 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제자이자 베리투스의 주교였던 티모테우스는 아타나시오와 아폴리나리우스 사이에 오간 많은 서신들을 기초로 삼아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를 썼다. 아폴리나리우스는 트무이스의 세라피온(?~362?)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아타나시오가 쓴 편지 <고린토의 주교 에픽테투스에게> (Ad Epictetum episcopum Corinthi)를 간직하고 있었다.
라오디체아의 주교 제오르지우스가 359년에 개최된 셀레우치아(Seleucia) 교회 회의에서 반(半) 아리우스(유사 본질)파의 고백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면직되었는지 또 360년에 사망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당시 유사파의 지도적 인물인 가이사리아의 아카치우스(340-365?)가 360년에 펠라지우스를 라오디체아의 새 주교로 임명하자, 니체아파는 아폴리나리우스를 360/361년에 주교로 서임하였다. 그러나 아폴리나리우스의 주된 활동 무대는 안티오키아였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329/330-389/390)에 따르면 그는 이미 352년경부터 안티오키아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안티오키아에는 이른바 멜레시우스(Meletius, +381) 분열에 휘말려 아리우스파, 유사 본질파, 니체아파 등 세 명의 주교가 있었다. 가이사리아의 아카치우스는 멜레시우스의 신학적 견해가 자기와 같다고 생각하여 360년에 그를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천거하였으나, 반 아리우스파이자 유사 본질파임이 드러나 서임된 지 한 달 만에 추방당하였다. 그리고 그 주교좌에는 황제가 비호하던 유사파 인물이자 아리우스의 친구인 에우조이우스(Euzoius, 360/361~375)가 선출 되었다. 멜레시우스는 율리아누스 황제 때인 362년에 안티오키아로 돌아왔지만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티우스(Eustathius)에게 소급하는 구(舊) 니체아파 공동체의 : 저항을 받았다. 아타나시오와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는 362년 <안티오키아인들에게 보내는 교의 서한>(Tomus ad Antiochenos)에서 에우스타티우스의 공동체 지도자인 바울리노(362~383)와 멜레시우스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루치페로(Luciferus, +370/371?)가 성급하게 바울리노를 주교로 서임하였다. 따라서 안티오키아에는 세 명의 주교, 곧 유사파의 에우조이우스, 반 아리우스파의 멜레시우스, 니체아파의 바울리노가 있게 되었다.
훗날 단죄된 아폴리나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은, 그가 안티오키아의 수도자 몇 명을 파견한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362)와 새로 등극한 황제 요비아누스(363-364)가 요구하여 보낸 신앙 고백에서 유래한다. 대 바실리오(329~379)처럼 오랫동안 아타나시오와 로마에 자신의 교회 정책을 촉진시켰던 아폴리나리우스는, 자신의 지지자이자 멜레시우스 공동체 출신의 장로인 비탈리스(Vitalis)를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서임하고, 교황 다마소 1세(366~384)에게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다마소 1세 교황이 376년 여름에 쓴 것으로 여겨지는 편지에 보면, 바울리노만 합법적인 주교로 설명되어 있다. 그렇지만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오가 중재를 시도하기 위하여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주교는 비탈리스였다. 예로니모(347?~419/420)는 377년 안티오키아에서 아폴리나리우스의 강연을 들었다.
바실리오는 편지에서 당시에 일어난 주교 서임을 암시하였지만(<편지> 258, 3), 편지 263번을 쓰기 전까지는 아폴리나리우스를 단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교황 다마소 1세에게 보낸 편지(263번)에서 세바스티아의 에우스타티우스(Eustathius)와 바울리노와 함께 그를 파문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아폴리나리우스에 대한 공개적인 결별은 비탈리스의 주교 서임과 연관된 듯하다. 그 후 377년의 로마 교회 회의와 379년의 안티오키아 교회 회 의, 그리고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폴리나리우스에 대한 단죄가 잇달았지만 이러한 단죄가 아폴리나리우스 공동체의 확산을 막지는 못하였다. 테오도시우스 칙령(법전, 16, 5. 6)에도 아폴리나리우스파는 거론되지 않았다. 또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규정 제1조에서 아폴리나리우스파를 언급하였지만 그의 그리스도론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대신 379년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의 서간과 다마소 서간의 발췌문을 실었는데, 이를 서명한 주교 가운데 한 명인 베리투스의 디모테우스는 아폴리나리우스파였다. 382년 로마에서 회의를 연 주교들은 아폴리나리우스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에서 명백하게 단죄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교회 회의를 정당화하였다. 예로니모는 아폴리나리우스가 이 교회 회의에서 신앙 고백서를 제출하였다고 한다. 더구나 아폴리나리우스파는 379년 안티오키아에서, 아마도 382년에는 나치안츠에서 대립 교회 회의를 열고 이 시기에 나치안츠의 주교도 임명하였다. 387년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넥타리우스(381~397)에게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이 지닌 위험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의 작품을 비난하면서 황제가 아폴리나리우스파에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였다. 한편 382년 예루살렘에서 아폴리나리우스의 교설을 처음 접한 니사의 그레고리오(335?~395?)는, 니사로 돌아간 뒤 그의 작품을 논박하였다. 388년에는 아폴리나리우스파에 대한 법률이 공포되었지만 비탈리스는 주교좌를 잃지 않았다. 안티오키아의 아폴리나리우스파 공동체는 425년에 전통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와 일치되었던 것으로 보아, '킬리키아에서 페니치아' 까지 아폴리나리우스파와 공동체가 전파되었다는 교회사가 소조메노(S.H. Sozo-menus, 380?~?)의 기술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이후 독자적인 아폴리나리우스파는 거의 모습을 감추었으며, 5세기 중엽부터는 에우티케스(378-454)의 학설과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us) 이단과 동일시되었다.
〔작 품〕 예로니모는 아폴리나리우스가 성서 주석 작품(집회서 · 이사야서 · 호세아서 · 말라기서 · 시편 · 마태오 복음서 · 고린토 전서 · 갈라디아서 · 에페소서)을 저술하였다고 증언하였으나, 이 성서 주석서들은 단편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욥기와 예레미야서의 일부 단편만 성서 주석서 모음집 목록에 언급될 뿐이며, 아폴리나리우스의 성서 주석 방법에 대한 연구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남아 있는 신학서와 편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헌은 가이사리아의 바실리오에게 360/361년에 보낸 편지(362번)와 363년에 보낸 편지(364번) 두 통 및 그가 382년 이전에 집필한 <인간의 모상에 따른 신적 육화에 대한 논증>(Απόδειξις περὶ τῆς θείας παρκώσεως τῆς καθ' ὁμοίωσιν ἀνθρώπου)의 단편적 내용들을 언급한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아폴리나리우스파 논박》(Adversus Apolli-naristas)이다.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예로니모가 말한 30권으로 된 《포르피리우스 논박》(Adversus Porphyrem)이라는 작품 중 제26권은 포르피리우스의 다니엘서 비판을 다룬 것이고, 제2권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190~265?)의 유심론을 논박한 것이다. 그 밖에 배교가 율리아누스를 논박한 《진리에 관하여》(De Veritate ; 소조메노, <교회사> 5, 18, 6 참조)와 《에우노미우스 논박》(Adver-sus Eunomistas ; 예로니모, 《유명 인사록》 120) 등이 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작품 가운데 온전하게 또는 단편으로만 남아 있는 신학 작품들의 전승사는 매우 복잡하다. 5세기에 아폴리나리우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다섯 편의 작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치로의 테오도레투스뿐이었다. 그의 친저성이 밝혀진 것은 아폴리나리우스 제자들이 사이가 나빠졌을 때 서로 상대방을 논박하기 위하여 스승의 작품 내용을 인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527~565) 때 그의 작품에 대한 친저성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전승을 바탕으로 하여 보면 《일치에 관하여》(De Unione), 《요비아누스에게
보낸 편지》(Ad Jovianum), 아마 363년에 제출된 것으로 여겨지는 <신앙 고백서>, 이집트에서 디오체사레아로 추방된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 디오니시우스에게 보낸 편지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이다. 그 외에는 단편으로만 남아 있거나 아직까지도 친저성이 완전히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다. 최근에도 몇몇 작품들이 아폴리나리우스의 작품으로 증명되었다.
〔그리스도론〕 삼위 일체의 하느님과 인간이 되신 하느님에 관한 고백은 4~5세기에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아들의 신성에 관한 삼위 일체의 신학적 문제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론 문제를 제기하였다.
교의사적 의미에서 아폴리나리우스가 주장한 그리스도론의 특징적 정식은 '육화된 하나의 본성'(μία φύσις σεσαρκωμένη)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 또는 이성이 육체를 취하며, 육화된 그리스도 안에 인간적 이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376-444)와 그리스도 단성설자들은 본성의 일치란 의미에서 위격의 일체에 관한 아폴리나리우스의 견해를 받아들였으나, 그가 가르친 그리스도 안에 인간의 불완전성은 거부하였다. 학자에 따라 그의 그리스도론 기원이 매우 다르게 평가되었는데, 일부는 그리스도의 가변성에 관한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그리고 다른 일부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두 본성론을 논박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가 주장한 그리스도론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니체아 공의회(325) , 특히 362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 이후 삼위 일체 신학에 뒤따르는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삼위 일체의 제2위인 하느님의 아들과 인간의 아들, 곧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하며, 이러한 일치가 신성과 인성으로 분리되지 않고 이루어지는가?"하는 것이었다. 삼위 일체의 제2위인 그리스도와 육화된 인간의 아들의 동일성에 관한 본질이 남아 있는 전승을 통하여 이어졌다. 아폴리나리우스는 디오체사리아로 추방된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브라함 이전의 하느님 아들은 아브라함 이후의 하느님 아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한 독생자이며, 인간적 완전함이 아니라 신적 완전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하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과 고백의 공동체성을 유지하나 이와 달리 생각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과 공동체성을 유지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하여 로고스의 신성을 변론하였으며, 더 나아가 두 가지 경향의 그리스도론,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엄격히 구분하는 분리 그리스도론과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영적인 은총을 통하여 아들로 받아들였다는 양자설적 그리스도론과 논쟁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과 다르고 은총으로써 아들로 받아들여졌다고 어떤 사람이 가르친다면, 가톨릭 교회는 그를 파문한다. 따라서 두 아들, 곧 하느님에게 태어난 본래의 하느님 아들과 마리아에게 태어난 인간이 있다고··· 어떤 사람이 가르친다면 가톨릭 교회는 그를 파문한다" (《요비아누스에게 보낸 편지》 3).
아폴리나리우스는 육화된 그리스도의 일치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을 본질(οὐσία)과 본성(φύσις)과 구분되지 않는 개념 즉 '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또는 '프로소폰 (πρόσωπον)으로 논증하였다. 여기에서 '프로소폰' 은 자립적 존재 또는 자립체(subsistieren)를 뜻하였다. 하느님과 인간은 서로 다른 이성으로 구분되고, 이성에 각각의 자립성이 있기 때문에, 육화된 사람은 인간적 이성을 지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두 종류의 이성 곧 신적 이성과 인간적 이성이 있다고 가르친다면, 이는 그리스도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글자를 새겨 넣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신적 이성과 인간적 이성이 저마다 스스로를 이끈다면, 각각의 이성은 그 존재의 고유한 지향에 따라 움직인다. 이 때문에 지향이 서로 다른 동일한 주체 안에 두 주체가 뒤섞여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각의 이성은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로서 본성에 따라 의지를 실행하기 때문이다"(단편 150). 이성 자체는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이다. 신적 이성은 자기 자신과 일치하며 따라서 변하지 않지만, 인간적 이성은 변하며 따라서 다른 것의 영향을 쉽게 받는다(단편 150). 곧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의 활동 원리와 주도 원리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이 인성을, 곧 신적 로고스가 인간의 영혼 또는 이성적 부분인 정신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추론하였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를 육체를 취한 하느님 또는 정신으로 불렀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이러한 활동적 일치에서 결정적인 그리스도론적 진술, 곧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때까지 그리스도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명제를 이끌어 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느님 로고스의 육체가 된 하나의 본성" (μία φύσις τοῦ Θεοῦ Λόγου σεσαρκωμένη), 하나의 본질, 하나의 위포스타시스, 하나의 프로소폰으로 묘사하였다. 여기에서 신적 로고스는 하나의 영역에서 본성의 일치 · 실체의 일치 · 위격의 일치를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구원론적 관심사가 있다. 곧 구원은 하느님과 인간이 실제로 하나이고, 육화된 사람이 죄와 두 의지의 갈등이 없을 경우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단편 151). 이로써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일치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를 제시하였다. 그리 스도와 하느님의 '동일 본질' (ὁμοούσιος)을 삼위 일체적 사상을 넘어 그리스도론으로 발전시킨 점에서, 그는 니체아 신앙 고백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인간의 본질과 육화의 신비를 극단적으로 축소하였다. 즉 육화된 그리스도 안에 인간적 이성을 배제함으로써 그의 신학은 이단에 빠지게 되었다.
〔영 향〕 아폴리나리우스의 제자들은 그가 사망한 뒤 세 파로 분열되었다. 아폴리나리우스가 안티오키아 주교로 서임한 비탈리스와 베리투스의 주교 티모테우스는 모(母)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승된 단편에 따르면 티모테우스는 육화된 로고스가 신적이고 아버지와 '동일 본질' 임을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비우스 주교는 티모테우스파에 속하였지만, 육화된 사람의 살[肉]은 '하느님 아버지' 가 아니라 '하느님 로고스 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명백히 진술하였다.
폴레몬(Polemon)은 극단적 분파의 지도자로 티모테우스가 가빠도기아 사람들의 권위에 굴복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육화된 로고스에 관하여 "사람들은 두 본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로고스가 인간적 이성과 변할 수 있는 의지의 자리를 차지하면, 의지의 일치와 행위의 일치는 보장되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율리아누스와 트라치아(Thracia) 지방 베뢰아(Beroea) 출신인 에우노 미우스가 폴레몬과 견해를 같이한 이들이었다. 발렌티누스는 폴레몬과 티모테우스의 상반된 입장에 어떤 상이성이 없다고 하였는데, 티모테우스를 논박하는 작품에서 논증하였듯이 그에게 있어서 이 두 사람은 아폴리나리우스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다. 육화된 사람의 육체는 어깨에 걸쳐 입는 옷이나 외투가 아니라 우리 인간과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위격과 본성 내지 본질을 구분하면서, 일치는 본질이 아니라 위격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의 학설은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그리스도 단성설자들 중 특히 마북(Mabbug)의 필록세누스(Philoxenus, +523), 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538)에게 영향을 미쳤으나 그의 이름으로 전해진 내용은 아니었다. 치릴로와 단성설자들은 기적자 그레고리오(213~270?) , 교황 율리오 1세(337~352),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로마의 펠릭스 등과 같이 전통 신앙을 고백한 신학자들이 언급되어 있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작품들을 자신들의 그리스도론을 변론하는 방패로 삼았다. 치릴로는 네스토리우스 논쟁을 준비할 때 그의 작품에 이러한 인명 위조를 사용하였다. 그는 <신앙에 관하여 황후들에게 보내는 변론>(Oratio ad Augustas de fide)에서 아타나시오의 이름으로 전해진 아폴리나리우스의 저서 《육화론》(De Incarna-tione)을 인용하였고, 이 작품으로 '하느님을 낳으신 분'과 육화된 하나의 본성과 같은 표현을 논증하였으며, 아폴리나리우스파의 신앙 고백과 다르지 않은 비탈리스의 신앙 고백도 여기에 기록하였다. 간접적 증언에 따르면 치릴로는 우리에게 알려진 대부분의 위조 작품을 이용하였는데, 그는 이를 진본으로 생각하였었다. 이러한 증언들은 에우티케스, 엘루루스(Aeluus) 마북의 필록세누스, 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에게로 계속 전해졌다. 더구나 치릴로는 '하느님 로고스의 육체가 된 하나의 본성'에 관하여 이 정식이 아타나시오에게서 유래한다고 확신하였다. 치릴로의 신학적 반대자 네스토리우스는 신성을 수난에 예속한 '자연적 일치' 때문에 치릴로의 그리스도론이 아폴리나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 및 본성의 일치에 관한 명제로 이후 2세기 동안 그리스도론 논의를 촉진하였다. (→ 그리스도 단성설 ; 그리스도론 ; 아리우스주의)
※ 참고문헌  H.R. Drobner, Lehrbuch der Patrologie, Freiburg · Basel · Wien, 1994/ K.S. Frank, Lehrbuch der Geschichte derAlten Kirche, Paderborn, 1995/ E. Mühlenberg, 《TRE》3, pp. 362~371.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