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KαKÓν, лоνnpóv · [라]malum · [영]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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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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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문제이다.

선(善)의 대당(對當) 개념. "있어야 할 선의 결여"인 점에서 선의 결성(缺性) 개념이며, 선과 악 사이에 "도덕 적 중립"과 같은 중간 개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선 의 반대 개념이다. 악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문제로서, 종교 · 철학 · 신학 · 윤리 등 여러 분야에서 오 랫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면서도 항상 새롭 게 제기되는 "가장 난해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I . 어원 및 개념
'나쁘다' · '악하다' 를 뜻하는 히브리어 형용사 '라' (רַע)와 동사 '라아' (רָעַע)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왜냐하 면 셈족의 다른 언어들에서는 이 히브리어 어근(רעע)에 상응하는 어근이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 안에서 의 용례를 통해 히브리어 어근(רעע)과 그것의 파생어가 지닌 여러 가지 의미를 규명해 낼 수 있다. 곧 이 단어는 형용사로 쓰일 경우 "나쁜 · 불쾌한 · 불만족스러운 · 마 음에 들지 않는 · 슬픈 · 불행한 · 불친절한 · 해로운 · 괴
로운 · 고통스러운 · 힘든 · 사악한 · 윤리적으로 악한" 등 의 뜻이다. 동사로 쓰일 경우에는 "나쁘다 악하다 · 해 롭다 · 사악하다" (단순 능동형), "고통을 겪다 · 고생하 다 · 해를 입다" (단순 재귀형), "해를 입히다 · 고통을 가하 다 · 괴롭히다 · 나쁘게 행동하다 · 사악하게 행동하다· 악을 행하다"(사역 능동형)라는 뜻이다. 이처럼 이 히브리 어 개념 '악' 은 "좋지 않은 것" 또는 "부정적인 것"의 다 양한 모습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자연적 악과 윤리적 악 을 모두 의미한다. 따라서 '악' 은 이사야서 45장 7절에 서 드러나듯 '살롬' (שָׁלוֹם, 행복 · 평화)의 '대당 개념' 으 로서 불행 곧 "물리적 악을 표상하기도 하고, 사무엘 상 24장 12절에서처럼 '패샤' (פשע, 배반)나 '하타' (חטא, 죄짓다)와 결합되어 "윤리적 악을 표상하기도 한다. 이 처럼 서로 전혀 다른 두 가지 범주 및 표상은 '라' 가 윤 리적 악 자체가 아니라 삶 또는 생명과의 연관성을 나타 내는 '관계 개념' 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하나로 합쳐져 있다. 사실 신명기 30장 15절에 따르면 '토브' (טוֹב, 선) 가 '생명' 과 동일시되는 데 반하여 '라' 는 '죽음' 과 동 일시된다(미가 3, 15).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 선이 생명 에 이익을 주는 것을 나타내는 개념이라면, 악은 생명에 해를 주는 것을 나타내는 개념인 것이다.
히브리어 형용사 '라' 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형용사는 '카코스' (κακός)와 '포네로스' (πονηρός)이다. 구약성서 에 사용된 히브리어 '라' 는 70인역에서 주로 이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들로 옮겨졌다. 그런데 고전 그리스어에서 '카코스' 는 대당 개념인 '아가토스' (ἀγαθός, 좋은 · 선한) 와 대비되어,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나 쁨"을 뜻하였다. 곧 '카콘' (κακόν, 나쁨)은 본디 "무능" 또는 "약(弱)함"을 뜻하며 윤리적 의미 이상의 뜻을 지
닌 것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주 된 뜻을 지니게 되었다. 첫째 "하찮은 · 쓸모 없는 · 무능 한 · 종류가 빈약한" 둘째 "윤리적으로 악한 · 사악한" , 셋째 "약한" , 넷째 "불행한 · 나쁜 · 몰락한" 등이다.
그리고 "나쁘다" 를 뜻하는 형용사 '포네로스' 는, "수 고하다 · 일하다 · 고생하다 · 고통을 겪다 · 근심하다" 라 는 의미의 동사 '포네오' (πονέω)와 "일 · 수고 · 고통· 괴로움"을 뜻하는 명사 '포노스' (πόνος)에서 파생된 단 어이다. 이 단어들의 뿌리가 되는 동사는 "수고하다 · 일 하다 · 궁핍하다" 를 뜻하는 '페노마이' (πένομαι)이다. 그 리고 이 동사 '페노마이' 로부터 파생된 단어들이 '페니 아 (πενία, 가난)와 "가난한 · 궁핍한" 이라는 의미의 페 네스 (πένης) · '페니크로스' (πένιχρος)이다. 따라서 형 용사 '포네로스' 는 어원적으로 "근심으로 괴로워하는· 슬픈 · 불행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이 단어 는 수동적 의미로는 "고생하는 · 고통이 가득한 · 동정받 을 정도로 불운한 · 비참한" 을 뜻하지만, 능동적 의미로 는 "나쁜 · 재해를 일으키는 ·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 으로 위험스러운" 을 뜻한다. 이러한 능동적 의미로부터 발전하여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 윤리적으로 악 한"이라는 윤리적 개념이 이루어졌다.
한자 '악' (惡)의 소전(小篆) 자형은 '아' (亞)자와 '심' (心)자로 되어 있는데, '아' 는 등이 굽은 사람의 모 습을 본뜬 글자로 흉하다는 뜻이고, '심' 은 마음을 뜻한 다. 결국 '악' 이라는 글자는 등이 흉하게 굽은 것과 같이 마음이 비뚤어진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에 따르면 "선은 욕구하고 바랄 만한 것" (可欲之謂善, 《孟子》, <盡心章句下>)인 데 반해, '악' (惡, 나쁠 '악' )은 '싫은 것' (惡, 싫어할 '오')이다. 맹자는 사람이면 본성상 누구나 바라는 것 곧 '선' 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삶' 을 제시하였고, 누구나 싫어하는 것 곧 '악' 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죽음' 을 제시하였다. "삶은 나도 또한 바라는 것이고··· 나도 또한 싫어하는 것이다"(生我所欲···死办列所惡, 《孟子》, 〈告子章句上〉). 이처럼 유가 사상에서도 '선' 은 '생명' 과 연관되고 '악' 은 '죽음' 과 연관된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맹자의 선악 관은 구약성서의 선악 개념과도 일맥 상통한다.
II . 성서에서의 악
구약성서에서 '악' 은 "해로움 · 재앙 · 불행"과 같이 자연의 영역에서 경험하는 유쾌하지 않은 "부정적인 것" 을 뜻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 차원에서의 악행도 뜻한다. 형용사 '라' · '라아' 는 나쁜 물(2열왕 2. 19), 나쁜 무화 과(예레 24, 2), 악성 궤양(신명 28, 35 : 욥기 2, 7)과 같이 사물과 인체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악한 사 람과 악한 행동에도 적용된다(창세 6, 5 8, 21 ; 신명 13, 6 ; 시편 5, 5). 마찬가지로 명사화된 '라아' 역시 구체적 인 불행 및 재앙(1열왕 14, 10 ; 2열왕 21, 12 ; 아모 3, 6) 과 윤리적 ·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악함(창세 6, 5 : 이사 57, 1 : 전도 8, 6)에 적용된다. 그런가 하면 형용사
'라' · '라아' 는 판단과 결정의 범주로도 사용된다. 즉 히브리어에서 어떤 일이 "누구의 눈에 나쁘다"는 정형은 그 일이 "누구의 판단에 있어 나쁘다" 는 의미이다. 그리 고 '나쁘다' 는 동사의 사역 능동형은 "(행동을) 나쁘게 하다"(1열왕 14, 9 ; 미가 3, 4)를 뜻하지만, 흔히 '행동' 을 나타내는 보충어 없이 단순히 "악하게 행동하다 · 해 를 끼치다" 또는 "누구에게 악을 행하다 · 누구를 괴롭히 다"(창세 19, 9 ; 민수 16, 15 : 예레 25, 6 ; 시편 105, 15)를 뜻한다. 신약성서에서 히브리어 '라' · '라아' 에 상응하 는 그리스어로는 주로 '카코스' 와 '포네로스' 가 쓰인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윤리적 개념으로서의 "카코스"는 중요성에 있어서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죄)와 '포네로 스' 에 미치지 못한다.
〔구약성서〕 판단과 결정의 범주로서의 악 : '토브' 와 는 대조적으로(시편 73, 1 ; 145, 9 ; 애가 3, 25), '나쁘 다' 는 뜻의 형용사 '라' 를 사용하여 "어떤 일은 누구에 게 나쁘다" 라고 한 말은 구약성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 표현은 지혜 문학에는 전혀 없고 다른 곳에서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2사무 19, 8). 물론 동사 형태로 나올 수 는 있지만(2사무 20, 6 ; 느헤 13, 8), 그럴 경우에는 처음 부터 강조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로운 것을 묻고 그 반 대되는 해로운 것을 묻지 않는 일은 지혜의 차원에서 본 질적인 것이다(아모 5, 14).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비교할 때 쓰이는 전치사 '···보다 더' (מן)도, 지혜 적 의미에서 무언가 좋은 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거나 좋 은 것들을 비교하는 데에 사용될 뿐(잠언 16, 19 : 25, 7 ; 전도 6, 9 ; 7. 2) 나쁜 것들을 비교하는 데에는 사용되지 않는다(2사무 19, 8은 예외적인 경우임). 결국 구약성서에 따르면, 하나의 사실이 다른 사실보다 더 나쁘고 더욱 마 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어떤 사람이 다 른 사람보다 더 악하게 행동한다" (2사무 20, 6 ; 1열왕 16, 25 ; 예레 7, 26 : 16, 12) 또는 "누군가가 어떤 한 사람을 다른 한 사람보다 더 나쁘게 다룬다" (창세 19, 9)고 말하 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에서 어떤 것의 본질에 대 한 판단 및 결정이 '나쁘다' 는 진술과 결합되어 있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구약성서에 보면 "누구의 눈에 (בעיני) 나쁘다" 곧 "누구의 판단에 있어 나쁘다"는 표 현이 자주 나온다. 이 표현은 '나쁘다' 는 동사(רעע)의 '단순 능동형' (qal)과 함께 나오고(창세 21, 11. 12 : 38, 10 ; 48, 17 ; 민수 11, 10 ; 여호 24, 15 ; 1사무 8, 6 ; 18, 8 ; 2사무 11, 25. 27 ; 이사 59, 15 ; 잠언 24, 18 ; 1역대 21, 7), 또 형용사 '라' 와 함께 나온다(창세 38, 7 ; 1사무 15, 19 ; 29, 7 ; 2사무 12, 9). 그러나 이러한 표현에 있어 악 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동사(רעע qal)와 형용사 '라' 의 의미는 판단하는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
우선 판단하는 이가 인간일 경우, 그리고 자신에게 그 처럼 나쁘게 보인 사물 또는 사실에 대한 판단이 변경될 수 없는 경우에 그 동사(רעע qal)는 "(그 일이 그 사람에 게) 언짢다 · 괴로움을 주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창세 21, 12 ; 민수 11, 10).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이 판 단이 윤리적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 찬가지로 형용사 '라' 또한 윤리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 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립일 수 있다(창세 28, 8). 왜냐하 면 여기에서 '나쁘다' 라는 뜻의 형용사 '라' 는 판단하는 사람에게 무언가 마땅찮게 보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 다(1사무 29, 7).
이에 반해 판단하는 이가 야훼일 경우에는(이사 65, 12 : 66, 4 ; 시편 51, 6), '악' 이라는 단어 '라' 는 그 대상이 객관적인 윤리적 악, 곧 벌받아 마땅한 죄의 성질을 띠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판단은 징벌에 대 한 절대적인 힘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인간 행위의 궁극 적 규범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하느님의 눈에 (거 슬리는) 악을 행하다" 라는 유명한 신명기적 표현의 배경 을 이루고 있다(민수 32, 13 신명 4, 25 9, 18 ; 17, 2 ; 31, 29 : 판관 2, 11 ; 3, 7. 12 ; 4, 1 ; 6, 1 10, 6 ; 13, 1 ; 1사무 15, 19 ; 2사무 12, 9 ; 1열왕 11, 6 ; 14, 22 ; 참조 : 예레 32, 30 ; 52, 2 ; 이사 65, 12 : 66, 4 : 시편 51, 6).
불행과 재앙으로서의 악 : 형용사 '라' (רַע) : 남성형) · '라아' (רָעָה) : 여성형)와 명사화한 '라' (רַע) : 남성형) · '라아' (רָעָה : 여성형)는 같은 '의미의 폭' 을 지닌다. 하 지만 '라' 의 진술이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라' 를 당하는 자의 경험이 중심에 놓여 있는가, 아니면 '라' 를 행하는 자의 경험이 중심에 놓여 있는가 하는 점이다.
① 수동적인 의미의 악 : 인간이 자연 안에서 경험하 는 어떤 사물 · 사실 · 현상에 대해 '나쁘다' 는 형용사로 표현하는 경우에, 이때 겪는 악이 수동적 의미의 악이다. 수동적 의미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나쁘다' 고 일컬어 진다. 곧 병은 견디기가 힘들 만큼 고통스럽고(신명 7, 15 ; 28, 35 ; 욥기 2, 7 ; 전도 6, 2 ; 2역대 21, 19), 징벌은 괴 롭고(잠언 15, 10 ; 에제 14, 21), 운명은 가혹하고(전도 2, 17), 하나의 행위는 무의미하고(잠언 20, 17), 사업 또는 작업은 고되거나 신경이 쓰이고(잠언 20, 14 : 전도 1, 13 ; 4, 8 : 5, 13), 무기는 해를 끼치고(이사 32, 7 ; 에제 5, 16 ; 시편 144, 10), 야생 동물은 위협적이기에(창세 37, 20. 33 ; 레위 26, 6 ; 에제 5, 17 ; 14, 21) '나쁘다' 고 일 컬어진다. 그리고 파멸과 재앙을 알리는 소식(예레 49, 23) 및 결실을 이루지 못하는 땅(민수 20, 5) 또는 건강에 해로운 물(2열왕 2, 19 ; 4, 41)도 '나쁘다' 고 일컬어진 다. 그런가 하면 한 무리의 사물의 질(質)을 가리키는 데 에도 '나쁘다' 는 말이 사용된다. 곧 흠이 있고 덜 가치 있는 동물들 또는 과일들이 '나쁘다' 고 일컬어진다(창세 41, 3-4. 19-20 ; 레위 27, 10-12 ; 예레 24, 2. 3. 8). 그뿐 아니라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 또는 외관에도 '나쁘다' 는 말이 쓰인다(창세 41, 21 : 47, 9 ; 느헤 2, 2). 그리고 근심 러운 날들이 '나쁘다' 고 일컬어지며(창세 47, 9 ; 잠언 16, 4), 재앙의 날들과 파멸의 때 또한 '나쁘다' 고 일컬어진 다(아모 5, 13 ; 6, 3 : 예레 17, 17. 18 ; 51, 2 ; 시편 27, 5 ; 잠언 16, 4 ; 전도 7, 14).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라' 의 경험은 악을 당하는 경우의 경험 곧 수동적으로 나쁜 일
을 겪는 경우의 경험이다. 형용사로 표현되는 이런 어법 의 경우 '라' · '라아' 는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서 "불 행 · 화(禍) · 해(害) · 힘듦 · 수고 · 괴로움"을 의미한다.
② 능동적이고도 수동적인 의미의 악 : "누구에 의해 '라' (불행 · 화 · 해 · 재앙)가 일으켜지는가?" 하는 점을 고 려한 채, 또는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명사인 '라' 가 언급되는 경우에 이 둘 사이에는 의미의 차이가 있다. 먼 저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악이 언급되는 경우, 즉 '라' 를 당하는 자의 경험만을 언급하는 경우에 '라' 는 수동적 의미로 쓰이게 된다. 이 경우에 명사 '라' 의 의미 는 가장 적게 적용되는 의미로는 "비참 · 비통 · 고통"(창 세 44, 29. 34 ; 스바 3, 15 ; 요나 4, 6 ; 전도 11, 10)이고, 일상적으로 적용되는 의미로는 "불행 · 재앙 · 곤경"(창세 48, 16 ; 1사무 6, 9 ; 2열왕 14, 10 ; 시편 10, 6 ; 23, 4 ; 121, 7 ; 욥기 2, 11 ; 5, 19 잠언 5, 14 17, 20 : 24, 16 ; 예레 15, 11 ; 38, 4 ; 즈가 1, 15 ; 느헤 1, 3 ; 2. 17)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라' 는 누군가에 의해 일으켜진 다. 곧 구약성서의 본문들은 악을 일으키거나 해를 끼치 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언급하든지, 아니면 적어 도 그가 누구인지를 명백히 알 수 있게 되어 있다(창세 31, 29 ; 예레 39, 12 ; 에제 11, 2 ; 시편 56, 6 ; 잠언 13, 17 ; 21, 12 ; 전도 8, 9). 이러한 경우의 악이 능동적 의미의 악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해 또는 불행이 생기는 빌 미 곧 원인적 차원에 대한 표상과, 그로부터 발생한 해롭 고도 불행한 상황 곧 결과적 차원에 대한 표상이 '라' 의 표상 안에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라' 의 표상 안에 두 가지 차원에 대한 표상이 내포되어 있다는 "이해 도식" 은, 인간들이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들에게 재앙 · 화 · 불행을 불러오는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예레 7, 6 ; 25, 7). 물론 이 점을 정확히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 런가 하면 어떤 한 사람이 행한 윤리적 악이 다른 한 사 람에게 불행이나 해 또는 화가 된다는 "이해 도식"을 생 각해 볼 수도 있다. 이런 이해 도식들에 따르면, 악을 일 으키는 사람 편에서의 악은 능동적 의미의 악이 되고, 불 행을 당하는 사람 편에서의 악은 수동적 의미의 악이 된 다. 분명히 구약성서는 많은 구절에서 '라' 의 표상이 담 고 있는 이 능동적 의미와 수동적 의미를 동시에 시사하 고 있다(1사무 20, 7. 9. 13 ; 23, 9 ; 24, 19 ; 2열왕 21, 12 ; 22, 26).
③ 하느님과 능동적인 의미의 악 : "누구에 의해 악이 일으켜지는가?" 하는 점이 고려된 채 '라' 가 언급되는 경우로는, 악 · 재앙 · 불행 · 해를 일으키는 이가 야훼라 고 진술된 대목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야훼 자 신이 악 · 재앙 · 불행을 일으킨다" 고 진술되어 있는 대목 에서는 하나의 긴장이 발생한다(이사 31, 2 ; 45, 7). 왜냐 하면 하느님은 이 진술의 관점대로 선과 악을 모두 주관 하는 분이시므로 행복(שָׁלוֹם)뿐만 아니라 불행(רַע)까지 도 일으키며(이사 45, 7), 다른 한편으로는 선하시므로 결 코 어떤 윤리적 악도 행할 수 없고 아울러 어떤 불행이나 재앙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예레 29, 11). 이러한 긴 장은 야훼가 재앙을 내리다가 또는 내리려다가 그것을
후회한다는 표상 안에서 발견되는데(출애 32, 12. 14 ; 2 사무 24, 16 ; 예레 18, 8 ; 26, 3. 19 ; 42, 10 ; 요엘 2, 13 ; 요나 3, 10), 왜냐하면 이러한 표상은 한편으로는 선과 악 을 모두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부각시키고 있으면 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선하심 을 특히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상 은 비록 예언서 이전의 본문에서는 드물게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오래된 것으로서, 신명기적 영향을 받지 않은 이른 시기의 본문에서도 발견되고 있다(판관 2, 15 ; 1열 왕 9, 9 ; 2열왕 22, 20).
"야훼 자신이 악 · 재앙 · 불행을 일으킨다" 는 진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구절은 사무엘 하 17 장 14절과 열왕기 상 21장 29절 및 열왕기 하 6장 33절 이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우주적이고 보편 적인 권능에 대한 신앙과 만나게 된다. 하느님의 보편적 권능에 대한 믿음은 대략 예레미아 시대에 와서 완전하 게 표현되었으며(예레 16, 10 ; 18, 8 19, 15 ; 에제 6, 10 ; 7. 5 : 14, 22), 제2 이사야에 의해 이론적으로 확립되 었다(이사 45, 7). 그러므로 이러한 진술에서 주의를 기울 여야 할 점은 "행하다"를 뜻하는 동사(עָשָׂה)가 "악 · 재 앙 · 불행"을 뜻하는 여성형 명사(רָעָה)와 함께 인간적 주체에게는 자주 적용되어 사용되지만, 하느님께는 단지 몇몇 구절에서만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와는 비교되지 않게 '오다' (בוֹא qal)는 동사(에제 7. 5)와 '가져오다' (בוֹא hiphil)는 동사(예레 19, 15 : 32, 42 : 35, 17 ; 36, 3 : 2열왕 21, 12 등)가 "악 · 재앙 · 불행" 과 연관 되어 자주 사용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악 · 재앙 · 불행" 을 뜻하는 명사가 대부분 정관사(הַ)와 함께 사용됨으로 써 특정한 뜻을 지닌 한정적 형태의 "악 · 재앙 · 불행" 이 문제가 되고 있고, 이와 함께 "계획하다"(חָשַׁב)는 동사 (예레 18, 8 ; 26, 3 : 미가 2. 3) 또는 "선포하다 · 알리 다 · 위협하다" (דבר דבר piel)라는 동사(예레 16, 10 ; 19, 15 ; 26, 13. 19 ; 40, 2 ; 요나 3, 10 ; 참조 : 여호 23, 15)가 사 용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 는 "악 · 재앙 · 불행"은 우연성 및 자의성(恣意性)이 배 제된 "징벌"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야훼 에 의해 "악 · 재앙 · 불행"이 일으켜진다는 진술에 나타 나 있는 '징벌' 로서의 물리적 악은, 인간의 잘못으로 어 지러워진 구원의 질서를 하느님이 다시금 바로잡음으로 써 은혜로이 주어졌던 본래의 구원 질서를 회복하는 것 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종교사를 살펴볼 때, 유배 이전의 이스라 엘 사람들은 생명 · 선 · 복 · 행(幸)뿐만 아니라 죽음· 악 · 화(禍) · 불행까지도 모두 야훼로부터 온다고 믿었 다. 이런 믿음을 표현한 것이 "야훼가 죽이기도 살리기 도 하고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신다"(1사무 2, 6-7)는 한나의 노래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원초적 믿음의 표 현 안에 야훼가 악마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 담 겨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야훼에게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신비스러운 차원이 내포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 리고 이러한 믿음은 제2 이사야에 있어서 이론적으로 발
전되었다(이사 45, 7). 그러나 유배 이후 시대에는 점차로 이와는 다른 사상이 생겨났는데, 즉 거룩하신 야훼 하느 님은 선하시기에 악은 야훼에게 속할 수도 야훼에게서 찾아질 수도 없고, 다른 곳에서나 찾아질 수 있다는 사상 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하느님의 적대자로서의 사탄의 모습이 이스라엘의 종교사에 나타나게 되었다.
사악함과 악행으로서의 윤리적 악 : '라' · '라아' 를 일으키는 이가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일 경우에 '라' 는 능동적 의미의 윤리적 악 또는 사악함을 의미한 다. 윤리적 악에 대한 인간의 능동성은 여러 가지 어법으 로 표현된다. 대개 “행하다(עשה) · 행함(מעשה)" (이사 56, 2 ; 말라 2, 17 ; 시편 34, 17 ; 잠언 2, 14 전도 4, 17 ; 8, 11. 12 ; 느헤 9, 28 ; 2역대 33, 9), "행하다" (פעל, 미가 2. 1) "가하다 · 갚다" (5722, 시편 7. 5 : 잠언 31, 12), "꾸 미다(חרשׁ, 잠언 6, 14 ; 12, 20 ; 14, 22)와 같은 표현이 나 "뜻함 · 말함 · 꾀함"과 같은 표현(창세 8, 21 ; 전도 9, 3 ; 에제 11, 2 ; 호세 7, 15 ; 시편 41, 6 ; 109, 20 ; 잠언 15, 6)에 의해 윤리적 악의 능동적 의미가 규정된다. 이 런 윤리적 악은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중의 관계 곧 하느 님과의 관계 및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때 문에 인간을 거스르는 악은 동시에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을 의미한다(이사 11, 9 ; 말라 2, 17 ; 시편 97, 10). 그 리고 이러한 윤리적 악은 추상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구체성을 갖는다(미가 2, 1-2 ; 잠언 1, 16). 윤리적 악이 참으로 현실 안에서 구체성을 갖는다는 사 실은 "선을 악으로 갚는다" 또는 "악을 선으로 갚는다" 는 표현 안에서 드러날 뿐만 아니라(창세 44, 4 ; 1사무 24, 18 ; 예레 18, 20 ; 시편 35, 12 ; 38, 21 ; 잠언 17, 13) 윤리적 악을 공간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표상하는 데서 도 드러난다(시편 34, 15 ; 1사무 25, 39 ; 이사 59, 7 ; 예레 4, 14 ; 9, 2 ; 18, 8 ; 23, 10 ; 잠언 1, 16).
동사의 사역 능동형의 용례에 있어서의 악 : '나쁘다' 는 동사(רעע)의 사역 능동형(hpphil)에 있어 일반적인 의
미는 "악하게 행동하다" 또는 "누구에 게 해를 끼치다 · 괴로움을 주다"이다. 이 동사(רעע hiphil)의 주어는 인간이 다. 이 경우에 이 동사가 다른 인간을 직접 목적어로 취한다면 "누구를 괴롭 히다"는 뜻이고(민수 16, 15 ; 1사무 12, 3 ; 신명 26, 6 ; 1사무 25, 34), 전 치사와 함께 목적어가 나오면 "누구에 게 고통을 가하다"(1사무 26, 21 ; 시편 105, 15 ; 1역대 16, 22) 또는 "누구에 게 불이익 또는 손해를 주다"(창세 31, 7 ; 민수 20, 15)는 뜻이다. 그러나 이 처럼 남을 괴롭히고 남에게 해를 끼친 다고 해서 항상 윤리적으로 악한 의도 가 미리 전제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 는다(창세 43, 6). 그런데 하느님 또는 신들이 이 동사의 주어가 되기도 한 다. 이사야서 41장 23절과 예레미야
서 10장 5절에서는 신들이 이 동사의 주어이다. 그런데 야훼가 이 동사의 주어로 나오는 구절(출애 5, 22 ; 민수 11, 11 ; 여호 24, 20 ; 1사무 17, 20 ; 예레 25, 6. 29 ; 31, 28 ; 미가 4, 6 ; 스바 1, 12 ; 즈가 8, 14 ; 시편 44, 3 ; 룻기 1, 21) 중에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죄에 대한 하느님 의 징벌로 완전히 인정하는 대목은 드물고 주로 예언서 의 본문들에 한정되어 있다(예레 25, 6. 29 : 31, 28 ; 즈가 8, 14). 그러나 어떤 구절에서는 징벌 행위라고 생각될 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야훼가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 나 오기도 한다(룻기 1, 21 ; 미가 4, 6 ; 민수 11, 11). 야훼가 인간에게 고통을 가한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이로써 인 간을 부당하게 대한다는 점에서도 그분은 비난받을 수가 있다(출애 5, 22 ; 민수 11, 11 ; 1열왕 17, 20). 그런데 야 훼를 불신하는 불경스러운 자들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견 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훼를 비난하는 점에서는 같은 노선을 취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야훼 로부터 어떤 악이나 어떤 선도, 곧 어떤 손해나 어떤 이 익 및 보호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야훼가 하느님임을 증 명해 보여 주는 것으로 여겨졌던 그분의 갖가지 권능 및 힘들은 부인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스바 1, 12 ; 이사 41, 23 : 예레 10, 5). 하지만 시편 44편 3절 및 특히 여호 수아서 24장 20절과 같은 구절들은 불경스러운 자들의 그러한 견해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사상을 펼쳐 보였다.
[신약성서] 악 : 인간 존재의 전체 현상으로 이해하는 악이든 개별적으로 발생하는 상태로 이해하는 악이든 간 에 악은 신약성서에서 '고통' · '곤경' · '고난' . 박 해' · '위험' · '죽음' · '병' 과 같은 구체적인 이름을 갖 는다(로마 8, 20-21 ; 8, 35 ; 12, 13 ; 1고린 7, 26 ; 15, 25-26 ; 2고린 6, 4 ; 갈라 4, 13 ; 1베드 5, 9). 아니면 윤리 적 관점 아래 '악' 이라는 이름을 갖는다(갈라 1, 4). 하지 만 전반적으로 볼 때 악에 대한 신약성서의 관심은 물리 적 악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는 윤리적 악에 집중되어 있다. 공관 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인간의 마음
을 악의 자리로 보았다(마르 7, 21과 병행구). 곧 악은 인 간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인간 배후에 있는 "악한 자" 곧 사탄이 악의 궁극적 중심이라 할지라도 악을 결정하 고 행하는 자는 인간이며, 인간이 곧 악의 지은이인 것이 다. 그러면서 신약성서는 악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미숙한 신관을 배격하였는데, 하느님은 인간을 결코 악 으로 유혹할 수 없는 분일 뿐만 아니라(야고 1, 13) 오히 려 인간을 악으로부터 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2데살 3, 3 ; 2디모 4, 18).
악(κανόν)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바오로에 따르면 죄 (ἁμαρτία)가 무엇인가 하는 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즉 죄는 하느님을 거슬러 자기 자신이기를 고집하는 인 간의 행위, 곧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없이 자율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결국 악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 기를 거부하는 인간이 하느님과 대립해 있는 것을 말한 다(로마 1, 18-20). 이렇게 볼 때 바오로에게 있어서 악은 성령 없이 단지 인간에 의해서만 지속적으로 실현된 가 능성인 것처럼 보인다(로마 7, 19. 21). 따라서 악은 윤리 적 의미 이상의 것이다. 다시 말해 악은 단순히 윤리적 의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위한 의미를 뜻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등지는 불경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바오로는 모순에 빠져 있는 인간의 모습을 폭로하였다. 곧 인간은 한편으로는 당신 자신과 관계를 맺도록 부르시고 윤리적 선을 행하도록 부르시는 하느님 의 법에 동의하는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 의 법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동의를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한편으로는 선을 행하기를, 곧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채 순종하며 윤리적 선을 행하 기를 원하는 존재이다. 하느님께 대한 열망과 덕에 대한
갈망이 이를 입증한다. 인간의 이러한 내적 동의는 인간 이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며, 아울러 인 간이 자신의 기원을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을 등진 채 그 분과의 관계로부터 계속 멀어짐으로써 윤리적 악을 결정 하고 실행하는 비참한 존재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하느 님의 법 안에서 자신을 향해 스스로 다음과 같은 판결문 을 선언하게 된다. "바로 악이 나에게 붙어 있다" (로마 7, 21). 그런데 악의 법은 곧 죽음의 법이다. 왜냐하면 윤리 적 의미로 악의 종말은 '죽음'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인간은 "비참한 인간, 그것이 바 로 나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니 까?(로마 7, 24)라는 외침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어떻 게 이 죽음의 법으로부터 인간이 구해질 수 있는가?" 하 는 점이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악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은 오직 믿음에 의해 인간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진다. 곧 죄의 속박으로 부터의 인간 해방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능 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 된 악으로부터의 전환은 궁극적으로 사랑 안에서 성취된 다(로마 12, 21 ; 13, 10 ; 1고린 13, 5 ; 참조 : 로마 12, 17 ; 1데살 5, 15 ; 1베드 3, 9).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친교뿐 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참다운 친교 또한 오직 그리스도 로부터 나오고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악한 자 : 일반적으로 신약성서에서 '악' (πονηρόν)은 명사화된 남성 형용사인 호 포네로스 (ὁ πονηρός, 악한 자) 즉 하느님의 적대자라는 개념과 함께 이해된다. 따라 서 악의 탓은 "악한 자"(마태 13, 19. 38) 곧 "사탄" (마르 4, 15) 또는 "악마" (루가 8, 12)에게 돌려질 수 있다. 그자 는 인류를 악으로 이끄는 힘을 갖고 있다(에페 4, 27 ; 1 디모 3, 7 ; 2디모 2, 26).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 에 나오는 "악으로부터 구함"(마태 6, 13)과 '제자 들을 위한 예수의 기도' 에 나오는 "악으로부터 지켜 줌" (요한 17, 15)이 이해될 수 있다(1요한 5, 18-19 ; 2데살 3, 3). 그리고 다른 구절들에 나오는 "악한 자" 또는 "악"도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에페 6, 16 ; 1요한 2, 13-14 ; 3, 12 ; 5, 18). 이렇게 볼 때 신약성서에서는 악이 하느 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을 거스르는 악한 자로부터 나온다는 사상이 구약성서에서 보다 더욱 분명히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신약성서에 따 르면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은, 인간을 굴복시키려 하고 (1베드 5, 8)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려고 하는(요한 13, 2)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투쟁 중에 있는 절박한 상황인 것 이다(에페 6, 12).
그런데 '악' 전반에 대한 신약성서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신약성서가 인간이 겪는 온갖 '악' 곧 고난 · 곤 경 · 박해 · 재앙 · 질병 등을 종말 때의 현상으로 묘사한 채 구약성서보다는 더욱 명백히, 종말 때에 경험하게 되 는 더 큰 악에 대한 책임을 초자연적 존재들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점이 중요한 까닭은, 악에 대한
이러한 관점 안에는 종말 때에 즈음하여 온갖 악을 동원 해 인간을 괴롭히며 인간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 도록 유혹하는 "권세들"과 거기에 동조하여 타락해 가는 "인간들" 한가운데에 믿는 이들이 있음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악들에 대항하여 항구히 믿음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믿는 이들에게 일깨워 줌으로써 믿는 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차원이 내포되 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성서에 따르면, 인간들과 권세들이 믿는 이들을 겨냥하여 온갖 악을 일으키는 종 말의 시대는 악한 시대이고, 그때는 괴로움과 유혹이 가 득한 절박한 때이다(에페 5, 16 ; 6, 13).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언젠가는, 곧 우주 안에 있는 선의 힘과 악의 힘 간 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게 될 미래 어느 때인가는, 끝내 모든 악은 뿌리째 뽑히게 될 것이다(묵시 19-21장).
신약성서에서 악은 인간을 예속시키고 세상을 부패시 키는 적극적인 세력이다. 그러나 악이 선과 동등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사탄이나 악마는 오직 하느님에 의해 부과된 제한성 안에서만 활동할 뿐 이기 때문이다(요한 12, 31 ; 묵시 12, 9 ; 20, 1-3). 따라 서 신약성서가 '하느님의 왕국' 과 '사탄의 왕국' (마르 3, 22-30) 또는 빛 과 '어두움' (요한 1. 5 ; 1요한 1, 6-7 ; 2, 8-9)과 같은 이원론적인 표현을 통하여 선과 악의 대립 을 첨예화시키고 있다 할지라도, 악이 선과 똑같이 대등 한 힘을 가진다는 의미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신약성서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악마에 게 승리를 거두었고(히브 2, 14-15 ; 1요한 3, 8), 하느님 의 왕국으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고 계신다. 물론 그분 의 이런 승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최종적인 것은 아니며, 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가 궁극적으로 성취 되는 마지막 때(1고린 15, 24-26 ; 히브 10, 12-13)에 마침 내 악의 통치도 종결될 것이다(묵시 20, 2-3. 10).
Ⅲ. 철학에서의 악
악은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왜냐 하면 악은 선과 함께 인간이 현실 안에서 경험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악은 가장 포괄적인 개념 중 하나인데, 여러 가지 모습과 다양한 의미들을 지 니고 있기 때문이다. 악이 지닌 이러한 다양한 모습은 철 학의 역사 안에서 형이상학적 악 · 물리적 악 · 윤리적 악 으로 분류되어 이해되어 왔다. '형이상학적 악' 은 창조 된 존재인 피조물이 지니는 한계성에서 비롯되는 악이 다. 이것이 참으로 '악' 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 해서는 철학의 전통 안에서 문제가 되어 왔다. '물리적 악 은 자연 안에서 발생하는 악으로 광범위한 영역에 걸 쳐 있는 악이다. 이러한 물리적 악에는 신체적 악뿐만 아 니라 지진 · 홍수 · 폭풍과 같은 자연의 재해, 그리고 윤 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양심의 가책과 같은 정신적 악도 포함된다. 그리고 '윤리적 악' 은 본질적으로 의지 의 무질서 안에 놓여 있는 악이다. 윤리적 악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 곧 이성과 의지로부터 비롯되는 악으로서, 인격체로서의 인간에게 고유한 악이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악의 문제는 철학의 역사 안 에서 크게 두 가지 물음으로 집약되어 전개되어 왔다. 곧 "악이란 무엇인가?"(Quid sit malum) 하는 악의 본성에 관 한 물음과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Unde sit malum) 하는 악의 기원에 관한 물음이다.
〔고 대〕 플라톤 :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에게 있어 악의 문제는 우주의 창조 신화와 관련되어 있다. 하 지만 그는 창조 신화에서 그리스도교의 창조 형이상학과 는 달리 "어떤 것도 무(無)로부터 창조될 수는 없고 아울 러 제작신(製作神, δημιουργός)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창 조주는 아니다" 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원리를 고수하 였다. 왜냐하면 신은 우주를 만들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영원한 형상들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초적 혼돈 상태의 전(前) 우주적 물질인 '수용자' (ὑποδοχή, 容器) 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에 따르면, 우주를 만든 제작신은 최상의 신이라 할지라도 결코 영 원한 원형으로서의 이데아들을 만든 이도 아니고, 원초 적 혼돈의 물질인 수용자를 만든 이도 아니다. 그럼에도 신은 우주에 앞서 있는 불변하는 원형인 이데아들을 가 지고 혼돈의 상태에 질서와 주기를 부여함으로써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아름답고 그 세계를 지은 신은 선하다고 했다(《티마이오스》 29e~30a). 결국 우주를 만든 신에게는 악에 대한 어떤 탓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플라톤은 악의 기 원을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나쁜 혼' 의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악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법률》 896c, 898c, 904a ; <에피노미스> 988d~e). 그에 따 르면 우주 안에 있는 운동들은 질서 정연한 운동들과 무 질서한 운동들로 이루어지는데 이런 운동들의 원천이 ''혼' 이다. 이 가운데 무질서한 운동을 일으키는 원리가
'나쁜 혼' 이며, 악은 이 나쁜 혼으로부터 비롯된다. 둘째 는, 원초적 상태의 혼돈적인 물질인 '수용자' 로써 악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법이다(《티마이오스》 48e, 49a, 50b~ 51a). 그에 따르면 수용자는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한 운 동을 속성으로 하는 근원적 물질 또는 공간으로서, 악은 이런 수용자로부터 비롯된다. 결국 이런 것들을 토대로 하고 있는 가시적 세계의 유한성으로부터 질병 · 고통 · 죽음과 같은 물리적 악이 비롯된다는 것이다(《테아이테토 스》 176a). 그래서 플라톤은 우주를 만든 신은 본성상 선 하며 신은 결코 악의 원인일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그의 확신으로부터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신이 전능하다면 왜 여전히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 그리고 "전능 한 신의 섭리와 인간에게 고유한 자유 의지 및 도덕적 책 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변신론의 문 제였는데, 플라톤은 이런 복잡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어 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에 의해 플라톤 철학에서의 선의 원리를 나타내는 신적 요 소와 악의 원리를 나타내는 혼돈적 요소가 바뀌었는데 전자는 개념적인 것 곧 '본질' (οὐσία)로 바뀌었고 후자 는 물질적인 것 곧 '질료' (ὕλη, 재료 · 물질) 또는 '무규정 적인 것' (ἄπειρον, 무제한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질료는 더 이상 악의 원리가 아니다. 곧 질료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중립 개념' 이다. 만일 질료가 악의 원리라고 한다면 "악(κακόν)은 선 자체의 질료(재료) 또는 가능태" 라는 명제가 성립하게 되며,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불합리한 주장들이 나오게 된다고 하였다. 곧 "악은 선의 장소이다" , "악은 가능태 에 따른 선이다" , "악은 선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신을 파괴하는 선을 도리어 추구하는 것이다"는 주장들이 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명백히 모순이므로 질 료가 악의 원리일 수는 없다(《형이상학》 1091 b35~1092 a5).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특정한 악의 원리가 이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세계 안에 악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은 아니 었다. 사실 그는 '악함' (κακοποιόν)에 대하여 언급함으 로써(《자연학》 192 a15), 이 세계 안에 악이 있음을 인정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악함' 은 질료(물질) 자 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물질)에 부착되어 있는 '결여' (στέρησις)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결여' 로서의 악은 사물의 존재 밖에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건강과 병, 건설과 파 괴,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요소들을 함께 갖고 있는 존 재의 가능태에 있어서, 그중 하나의 요소인 부정적인 요 소만이 실현되고 다른 하나의 요소인 긍정적인 요소는 실현되지 않은 것이 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과 병, 건설과 파괴,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가능적 요소들을 함 께 갖고 있는 존재의 가능태가 병 · 파괴 · 악이라는 하나 의 부정적 요소만이 실현된 현실태보다 더욱 좋고 가치 가 있다고 하였다(《형이상학》 1051 a4~16). 결국 아리스
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물리적 악은 우주의 필연적인 모습 이 아니라 세계의 발전 과정의 부산물이었으며, 개별적 사물들이 자신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완전함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의 과정에서 우연히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물리적 악의 문제와는 달리 윤리적 악의 문제에 있어 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악을 인간의 영혼 또는 이 성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곧 이성이 욕구를 통제함으로 써 이루어지는 질서의 상태가 윤리적 덕 또는 선이라면, 이성이 욕구를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무질서의 상 태가 악덕 또는 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덕은 중용 곧 두 극단 사이의 균형을 뜻하며, 악은 두 극단 곧 과도함이나 부족함을 뜻한다. 여기에서 덕은 규칙적인 훈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중용인 데 반하여, 악은 덕스 런 행실에 뒤따르는 행복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용이 '조화' 와 '규정성' 인 한에서 선 인 데 반해, 악은 그런 규정성과 척도의 '결여' 이다. 그 러므로 선이 규정적인 것' 곧 제한성에 속하는 데 반해, 악은 규정되지 않은 것' 곧 무제한성에 속한다. 이 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과녁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설명하였다.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일' 곧 '악' 은 쉬운 일인데 그것은 무한정적이기 때문이고, 과 녁을 맞추는 일' 곧 '선' 은 어려운 일인데 그것은 한정적 이기 때문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106 b27~35).
플로티누스 :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의 철학에 의하면 만물은 선 자체인 '일자' (一者)로부터 흘러 나온 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물의 근원인 일자로부터 유출되 는 첫 번째 것은 '이성' 이며, 이 이성으로부터 '혼' 이 유 출된다. 이 세 가지, 즉 '일자' 와 '이성' 과 ''혼' 이 예지 계의 토대가 되는 '실체' (ὑπόστασις).로서, 이런 예지계 안에는 어떤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곧 예지계는 완전하 고 전적으로 자기 충족적이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이며 그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플로티누스에 있어서 '악' 은 '전적으로 있지 않는 것' 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있지 않는 것' 이다(《엔네아데스》 I, 8, 11 ; II , 4, 14 ; 아리스토 텔레스, 《자연학》 192 a16). 곧 악은 절대적 무(無)가 아니 라, 상대적 무일 뿐이다. 만일 악을 절대적 무라고 가정 한다면 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그렇 게 되면 이 세상 안에 악이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악이 '상대적으로 있지 않는 것' 이라 는 말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 안에 악이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뜻을 지니고 있고, 다 른 한편으로는 악이 존재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서 존재 의 그림자이자 존재의 반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곧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악' 은 "실재"가 아니라 단 지 '선' 의 "결여"일 뿐이다(《엔네아데스》 1, 8, 11). 그의 이러한 사상은 악이 선에 동등한 힘으로써 대적하는 절 대적인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논박할 수 있는 근거를 후대의 철학에 제공하였다.
그런데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유출의 마지막 단계에서
존재하게 된 감각계의 "질료" 는, 비록 그것이 궁극적으 로는 일자에 의해 생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선 자체와는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으로서 '결여' 또는 '비존재' 로 파악될 뿐만 아니라 악의 원천이기도 하다. 질료를 결여 또는 비존재로 이해하는 그의 관점은 플라톤에게서보다 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엔네아데 스》 Ⅱ, 4, 14 ; 《자연학》 192 a3~34). 하지만 그는 아리스 토텔레스의 중립 개념으로서의 질료 개념을 받아들이지 는 않으며, 질료(물질)를 악의 원리로 규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질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엔네아데스》 Ⅱ, 4, 15), 예지계의 질료와 감각계의 질료가 그것이다. 예지 계의 질료가 영원히 실현되어 가는 참된 가능태로서 일 자로부터 직접 출현한 것인 데 반해, 감각계의 질료는 형 상(forma)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적 무능력과 불 가능성으로서 악의 원천이다. 이처럼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이중(二重)의 질료에 대한 플로티누스의 사상에서 "왜 두 가지 질료 가운데 감각계의 물질만이 악의 원천 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이 문제 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중 세〕 아우구스티노 :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 430)는 그의 생애 말년에 악의 문제를, "가장 어려운 문 제"(difficillima quaestio)라고 고백한 바 있다(서간 215). 사 실 악의 본질 및 기원 문제는 그를 일생 동안 사로잡았던 문제였으며, 그 문제로 젊었을 때에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 그리고 빛의 원리와 어두움의 원리라는 두 개의 궁 극적인 원리로써 악의 기원을 설명하는 마니교에 9년 동 안 심취하였었다. 그러다가 악을 "결여"로 해석하는 플 로티누스적 관점에 접하면서 악을 실체로 보는 마니교의 이원론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신플라톤주의를 매개로 하 여 그리스도교적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물질까지도 '창조된 선 으로 보는 그리스도교의 창조 형이상학을 통하여 물질을 선으로부터 배제한 신플 라톤주의를 극복하였다.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악의 문제에 대한 마니교의 견해는 세 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첫째, 악은 실체적 존 재이자 물체적 존재이다. 둘째, 하나의 악은 오직 다른 하나의 악으로부터 온다. 셋째, 악의 궁극적 기원 및 원 천은 실재하는 '최고악' (summum malum)이다. 이러한 마 니교의 이원론에 대한 그의 답변은 무엇보다도 "악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나타났다(《가톨릭 교회의 습속 과 마니교도들의 습속》 II , 2, 2 ; 《선의 본성》 4). 곧 그는 악 의 기원에 관한 물음에 앞서 악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제 기하였는데, 이 물음에 대한 첫 번째 정의가 "악은 자연 및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Malum est id quod est contra naturam)라는 명제였다. 물질을 포함하여 모든 자연 및 본성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선(bonum, 좋은 것)이며 악 은 그러한 선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로부터 두 번째와 세 번째 정의가 나오는데 이것들은 첫 번째 정의를 변형시 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 정의는 "악은 해로운 것 이다" (Malum est id quod nocet)라는 명제이고, 세 번째 정 의는 "악은 부패이다" (Malum est corruptio)라는 명제이다.
이러한 정의들에 따르면 악은 결코 실체나 본성 또는 고 유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 또는 본성으로부터의 이탈이자 무 또는 비존재로의 경향으로서, 단지 부정성을 드러낼 뿐이다(《가톨릭 교회의 습속과 마니교도들의 습속》 II , 2, 2). 그러므로 악은 주체에게 있어야 할 존재의 결여이자, 주 체가 소유해야 할 선의 결여일 뿐이다. 결국 선은 악이 없이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악은 선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교리 요강, 신앙과 희망과 사랑》 4, 14), 악은 "선의 결여" (privatio boni)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고백록》 Ⅲ, 7. 12).
그렇다면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악이 최고악으로 부터 오지 않는다면 악의 기원은 하느님인가? 하지만 하 느님은 본성상 선 자체 또는 최고선이므로 악을 하느님 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은 모순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노는 우선 '악' 을 인간이 행하는 악인 윤리적 악(malum morale)과 인간이 당하는 악인 물리적 악(malum physicum)으로 구분했다. 전자는 '죄'' (pecca- tum)이고 후자는 '죄의 벌' (poena peccti) 곧 고통이다(《자 유 의지론》 1, 1, 1 ; 《참된 종교》 12, 23)
물리적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아우구스티노는 물 리적 악의 기원에 대하여 이중의 방법으로 설명하였다. 첫 번째 설명 방법은 성서적 계시의 내용에 따라서 아담 이 지은 죄의 결과로 물리적 악이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명 방법은 무로부터 창조된 존재라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기원에 따라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물리적 악이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닥쳐올 수밖 에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설명 방법에 따르면, 아담의 죄로 인해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이 아담 을 통하여 주어졌던 은혜를 상실함으로써 죄의 벌인 고 통과 죽음이 왔다는 것이다(《창세기 축자 해석》 Ⅵ, 25, 36). 두 번째 설명 방법에 따르면, 하느님이 홀로 불변하 고 영원한 데 반해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인 인간은 존 재를 나누어 받은 존재자이면서도 동시에 무에 지나지 않으므로, 죄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고통 및 죽음과 같은 물리적 악이 닥쳐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무로부터 창조된 존 재이기에 근원적인 결핍을 가지고 있으며, 그 때문에 무 언가 더 좋은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변할 수 밖에 없다(《선의 본질》 1).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에서 고 통 및 죽음과 같은 물리적 악이 필연적인 결과로 뒤따르 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우구스티노가 피조물의 이러 한 근원적 결핍 곧 본성상의 한계를 '악' 이라고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이 갖고 있는 이런 본성상의 한계가 참으로 하나의 "악" 이른바 "형이상학 적 악"이라면,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만 으로도 벌써 '나쁜 존재' 가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창 조된 것은 좋은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창조 형이상학 과는 모순된다.
반면에 윤리적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아우구스티 노에 따르면 모든 죄는 인간의 의지 안에 있다. 왜냐하면 의지는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며, 죄는 인간이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즉 아우구스 티노에 따르면, 죄는 "마음의 운동" (animi motus)이라고 정의되는 '의지' 로부터 비롯되는 '자발적인 운동' 이다 (《두 영혼》 10, 14). 그런데 의지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그렇다면 악을 향한 의지의 자발적인 운동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가?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자유 의지는 일종의 '중간 선 으로서 본성상 좋은 것이지만, 인간이 자유 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지의 작용 및 결과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는 것이다(《자 유 의지론》 Ⅱ, 18, 48). 결국 본성상 '선' 인 자유 의지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런 '선' 의 잘못된 사용 은 인간의 전도된 의지로부터 올 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그러한 전도된 의지 곧 악한 의지는, 더 나아가 '무' (mihil)로부터 올 뿐이다(《자유 의지론》 Ⅱ 20, 54 ; 《결혼과 정욕》 II . 28, 48).
토마스 아퀴나스 :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 따르면, 악은 선의 반대 개념일 뿐만 아니 라 선의 결성 개념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 주론》(11장)에 따라 선악이 서로 반대 개념이라고 받아 들였는데, 여기에서 반대 개념이란 두 개념이 서로 배타 적이기는 하지만 두 개념 사이에 중간 개념이 있는 한 쌍 의 개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흑-백' , '건강-질병' , '선-악' 등이다. 하지만 토마스는 아우구스티노처럼 선 악이 '완전성-결성' 개념임을 더욱 강조하였다(《신학 대 전》 I , q, 48, a. 1 ad 3 ; 아우구스티노, 《교리 요강, 신앙과 희 망과 사랑》 4, 14). '완전성-결성' 개념이란 '완전한 것' 과 '결여되어 있는 것' 의 관계에 있는 한 쌍의 개념이다. 예를 들어 '봄-눈멂' , '들음-귀먹음' 등이다. 따라서 "악이 선의 결성 개념이다"라고 할 때의 '악' 은 후자의 개념으로서, '있어야 할 완전성의 결여' (privatio debitae perfectionis)를 의미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선을 '존재론 적 선' . '자연적 선 · '윤리적 선' 으로 구분했던 것과는
달리, 악을 자연적 악과 윤리적 악으로 구분하고 존재론 적 악을 배제하였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교의 창조 형이 상학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존재하는 한 선이며, 존재하 는 모든 것은 그것이 비록 악마라 할지라도 존재의 현실 태(actus)를 공유하는 한에서 '좋은 것' (bonum) 곧 존재 론적 선이기 때문이다(《신학 대전》 I , q. 63, a. 4c ; 아우구 스티노, 《참된 종교》 13, 26). 결국 존재하는 것들의 세계에 있어서 존재론적 선에 대립되는 존재론적 악은 있을 수 없으며, 악은 '존재론적 선' 의 결여가 아니라 단지 '개별 적 선' 의 결여일 뿐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자연적 악과 윤리적 악은 무엇인 가? 토마스에 의하면, 자연적 악 또는 물리적 악은 자연 에서 '완전성의 결여' 또는 '선의 결여' (privatio boni)를 의미하였다. 곧 자연적 악은 하나의 사물의 완전성을 위 해 요구되는 형상(species)의 상실이나 어떤 부분의 상실 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눈멂' 이나 '신체적 결함' 등이 다(《신학 대전》 I , q. 48, a. 5 c). 하지만 자연의 영역에서 물리적 선과 물리적 악이 직접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왜 냐하면 하나의 종(種)에 있어 결함이 곧바로 다른 종에 있어서의 결함이 아닐 뿐더러, 동물의 유(類, genus)에 있는 자연적 악이 필연적으로 식물의 유(類, genus)에 있 는 자연적 악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 어 ''손' 의 결핍이 인간에게는 자연적 악이지만 '발' 만을 필요로 하는 개에게는 자연적 악이 아니며, 심장의 결핍 이 인간과 개에게는 모두 자연적 악이지만 심장을 필요 로 하지 않는 식물에는 자연적 악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 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결여 및 단순한 부정성이 자연적 악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며, 오직 개별적 종과 관련된 결 함이나 결여만이 자연적 악을 구성할 뿐이다. 결국 모든 존재가 선인 데 반해 모든 비존재가 악은 아니며, 단지 '있어야 할 완전성의 결여' 로서의 '비존재' 만이 악인 것 이다(《악론》 q. 2, a. 5 ad 2).
한편 토마스에 따르면 윤리적 악은 윤리에 있어서의 완전성의 결여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자연적 악과 윤리 적 악이 모두 '완전성의 결여' 로 정의된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유비적 의미일 뿐, 자연에서의 완전성의 결 여와 윤리에서의 완전성의 결여가 똑같은 차원임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같은 한 사람에게 '악' 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경우, 자연적 악은 '동물' 로서의 인간에 게 해당되는 것인 데 반해 윤리적 악은 '인격체' 로서의 인간에게 고유하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 라, 악의 성격도 물리적 악에서보다 윤리적 악에서 더욱 크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통 때문에 악하게 되 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악하게 되기 때문이다(《신학 대 전》 I q. 48, a. 6 c). 그러므로 윤리적 악이 좁은 의미에 서, 또 고유한 의미에서 악이다. 그러면서 토마스는 윤리 적 악을 '이성 혼' (anima rationalis)과의 관련하에 더욱 구 체적으로 규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 혼' 곧 정신은 두 개의 주된 능력인 '이성' 과 '의지' 를 갖고 있 다. 여기에서 이성이 인간적 행위를 윤리적 선 · 악 · 도
덕적 중립으로 구분하는 원리라면, 의지는 어떤 행위의 도덕적 성격을 규정하는 원리이다. 다시 말해 이성을 어 떤 대상을 "행해야 할 선" 으로 또는 "피해야 할 악" 으로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의지는 이성에 의해 파악 된 그 대상을 윤리적 행위로 만드는 능동인이다. 따라서 윤리적 선은 이성이 선으로 파악한 것을 의지가 동의하 여 추구하는 것을 가리키고, 윤리적 악은 이성이 악으로 파악한 것을 의지가 동의하여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신학 대전》 I-Ⅱ , q. 13, a. 6c).
〔근대 및 현대〕 라이프니츠 : 라이프니츠(G.W. von Leibniz, 1646~1716)에게서 악의 문제는 변신론적 특성을 띤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 안에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창조주인 신의 정의로움이 변호될 수 있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변신론》(Theodizee, 1710)에서 '형이상학적 악' (malum metaphysicum) · '물리 적 악' · '윤리적' 악 등 세 가지 형태로 악을 나누었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적 악은 순전히 불완전함을 뜻하며 물리적 악은 고통과 동일시되고, 윤리적 악은 죄와 동일 시된다. 그리고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은 '형이상학적 악' 안에서 그 가능적 근거를 갖는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신은 순수하고도 무제한 적인 완전함으로 표상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은 여러 가지 형태의 피조물을 세상 안에 창조하면서 최선의 가 능적 세계가 이루어지도록 단계적으로 각 사물의 완전함 안에 차별을 지어 놓았고, 아울러 종류별로 한계를 지어 놓았다. 라이프니츠는 창조와 함께 주어진 이러한 필연 적 불완전성을 '형이상학적 악' 이라고 일컬었다. 이 악 은 어떤 긍정성이나 자립적 실재성도 갖지 않으며, 전통 적인 표현대로 '결여' 곧 '존재의 결여' 일 뿐이다. 그러 나 그는 이 '결여' 의 개념을 철학의 전통 안에서 이해되 었던 것과는 달리 '한계성' 으로 파악하였다. 곧 형이상 학적 악이란 피조물의 본질에 속하는 한계성 또는 제한 성으로서, 피조물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갖는 본성적 한 계를 의미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피조물의 모든 불 완전성은 이 한계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한계성이 진보 및 최고의 완성을 막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이 피조물의 행동에 있어서 완성 의 원인인 데 반하여 피조물의 한계성은 결여의 원인이 다. 그러면서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적 악이 필연적인 불완전성인 데 반하여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은 그처럼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곧 고통이나 죄 없는 세 계는 모순 없이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며 논리적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이런 악들을 적극적 으로 원한 것이 아니며 단지 어떤 윤리적 이유 때문에 그 것들을 허용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곧 신은 더욱 높은 선을 배제하지 않기 위하여 이런 악들을 허용했을 뿐이 다. 그러므로 창조주인 신이 이런 악들의 장본인일 수는 없다.
라이프니츠의 악 개념에 있어 특기할 점은, 그가 피조 물이 지니고 있는 가능적인 한계성 자체를 악 곧 형이상 학적 악으로 규정하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의 '형이상
학적 악' 또는 '존재론적 악 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전통 안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 스도교의 창조 형이상학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한에서 좋은 것, 곧 '존재론적 선 이기 때문이 다.
칸트 : 칸트(I. Kant, 1724~1804)는 《순수 이성 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에서 라이프니츠를 따라 '은총 의 세계' (regnum gratiae)와 '자연의세계' (regnum naturae) 로 구분하고, 이를 자신의 체계 안에 받아들였다. 곧 자 연의 세계는 감성계를 의미하고, 은총의 세계는 도덕적 세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순수 이성 비판》 B 840 ; 843). 자연의 세계는 자연의 기제(機制, Mechanismus)에 따라 진행되며, 이 자연에 의해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질병 및 죽음 등의 모든 물리적 악에 종속된다. 이에 반해 도덕적 세계는 자유에 토대를 두고 있는 정신적 세계 곧 예지계 로서, '자유' (Freiheit) 또는 '자유 의지' (freie Willkür)로부 터 윤리적 선과 악이 비롯된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 의지는 자연의 기제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으로서, 실천 이 성의 법 아래에 놓여 있다고 하였다. 곧 자유는 그 안에 내재한 법을 갖고 있으며, 자유 및 자율로서의 실천 이성 의 법은 '정언 명령' (kategorischer Imperativ)을 통하여 인 간에게 선을 행하도록 무조건적으로 명령한다. 그 때문 에 인간은 무엇보다도 선의 소질을 갖지만(《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B 19), 인간은 또 실천 이성의 법에 저촉되 는 윤리적 악을 행하기도 한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에게 악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경험에 모순되 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계몽주의적 순진한 낙관론을 거슬러 악의 현실을 솔직히 긍정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인간 안에 근본적이고도 생득적인 악이 있다고 주장하였 는데 , 이 악은 인간이 행동의 최상의 동기로서 순수한 실 천 이성의 '준칙' (Maxime, 행위의 주관적 원리)을 택하는 대신, 다른 준칙 이를테면 자기에(Selbstliebe)의 준칙을 순수한 실천 이성의 준칙의 조건으로 만듦으로써 윤리적 질서를 전도시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악의 경향이 인간 안의 윤리적 소질을 거슬러 인간 본성에 뿌 리박혀 있음을 고찰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은 모든 개별 적 행동에 있어서 이 악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 다고 해서 이러한 악의 경향이 인간에게서 자유와 책임 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인간이 도리어 악을 강요당할 정 도에 이른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어떤 인간도 악 때문 에 그리고 악을 위해서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도덕법을 부과하는 이성이 동시에 자신 안에 있는 법을 말살할 수 없으며, 아울러 자신의 본성을 악하게 바꾸어 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 성의 사악함은 '심정의 전도 (Verkehrtheit des Herzens, 마 음의 전도)에 지나지 않는다(《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B 36). 심정의 전도란 자기애를 최상의 동기로 삼은 채 도 덕법을 자기애에 종속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도 덕법을 자기애에 종속시키는 일은 자유 의지의 동기들에 서 윤리적 질서를 거꾸로 뒤집어 놓는 것을 말한다. 그래
서 칸트는 악의 근거는 인간 본성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인간의 자유 안에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리쾨르 : 리쾨르(P. Ricoeur, 1913~ )는 저서 <악의 상 징》(La Symbolique du Ma)에서 악과 구원에 관한 상징적 담화를 전개하였는데, 그는 먼저 '악의 고백' 이라는 현 상에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악의 고백은 인간의 가장 원 초적 체험인 악의 체험을 표현하고 드러내 주기 때문이 다. 그러면서 그는 악의 체험에서 토대가 되는 세 단계의 상징을 제시하였다. 즉 더러움(souillure, 얼룩), 죄(péc- he), 죄책(culpabilité, 죄과)이라는 세 가지 계기의 변증법 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원초적 상징인 더러움은 주술적 개념으로서, '물질에 있어서의 얼룩' 이라는 심상을 토대 로 이루어진 '상징적인 얼룩' 의 개념이다. 그리고 죄는 윤리적인 개념으로서, '과녁으로부터의 이탈' 이나 '곧은 길로부터의 탈선' 또는 '넘지 말아야 할 한계로부터의 일탈' 이라는 심상을 토대로 이루어진 개념이다. 끝으로 죄책은 더욱 내면화된 체험으로서, '짐' 곧 '무게' 라는 심상을 토대로 이루어진 개념이다. 리쾨르는 이 세 단계 의 악의 체험을 악의 일차적 상징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신화적 상징들과 구별하였는데, 상징의 해석인 신화는 이차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악의 일차적 상징들은 상징(symbole)의 지향 구조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고 하였다. 상징은 기호(signe, 표지)와 구분되지만, 다른 마찬가지로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을 지향하고 이러한 상징은 지향에 있어서 이중의 지향성,
적 한편으 로는 한편으로는 기호와 나 타낸다. 곧 '일차적 지향성' 과 '이차적 지향성' 을 지닌다. 일차적 지향성은 문자적 차원을 말하며, 지시된 사물과 유사하 지 않은 단어들 곧 얼룩 · 일탈 · 무게를 가리킨다. 이차 적 지향성은 상징적 차원을 말하며, 일차적 지향성 위에 세워진 지향성을 가리킨다. 곧 이차적 지향성은 물질에 있어서의 '얼룩' · 공간에 있어서의 '일탈' · '짐' 에 대한 현실의 경험을매개로 하여, 성스러운 것 안에 있는 인간 의 가장 원초적인 상황을 나타낸다. 따라서 상징의 본성 은 이러한 이차적 지향성 안에 있다. 그리고 이런 이차적 지향성이 나타내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상황이란, 더 러움에 물든 존재이자 하느님 앞에서 죄지은 존재, 그리 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죄책이 있 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상황을 가리킨다. 이처럼 악의 체 험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체험에 해당한다.
하지만 리쾨르는 악이 아무리 '뿌리깊은' (radical) 것이 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선처럼 '근원적인' (originaire) 것일 수는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악은 밖으로부터 인간에 게 오는 것으로서 인간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일 뿐만 아 니라, 그 악이 인간 본래의 본성을 바꾸어 놓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악의 신비 안에서 죄책이 있는 존재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악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따 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만큼 하느 님의 자비를 받기에도 합당한 존재이다. 결국 리쾨르에 따르면, 악의 체험에 있어 세 가지 계기를 이루는 '더러 움' · '죄' · '죄책' 은 각각 더러움의 '정화' (purifica-
tion) · 죄의 '용서' (pardon) · 죄책의 '의화' (justification) 와 함께 완전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Ⅳ. 신학에서의 악
'악' 은 신학에서 고통 죄 · 재해가 '악' 의 개념에 포 함되고 종속되기 때문에 가장 포괄적인 개념 가운데 하 나이다. 그리고 이러한 '악' 의 문제는 신학에서 가장 어 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세상 안에 '악' 이 있고 그 때문에 온 인류가 '고통' 을 당하고 있는 현실은 전능하시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느님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 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 곧 악에 대한 전통 신학의 해석과 현대 신학의 해석이 있다. 첫째로 악에 대한 전통 신학의 해석은, 하느님의 절대적 선성을 변호하려고 악의 원리 를 따로 상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마니교나 그노시스주의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배제한다. 그 리고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악의 현실이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과 간접적으로 연관될 수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하 느님의 유일하심과 전능하심을 고수한다. 그러면서 전통 신학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느님이 전적으로 악과 무관 하다고 해명함으로써 하느님의 '전능' 과 '절대적 선성' 이라는 두 가지 그리스도교적 원칙에 머문다. 둘째로 악 에 대한 현대 신학의 해석은, 먼저 악 또는 고통의 현실 에 대한 책임이 대부분 인간에게 있지만 자비로운 하느 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악 또는 고통의 현실에 대 해 스스로 책임을 떠맡으신 채 고통당하는 인간들과 함 께 고통당하실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를 통해서 사랑의 연약함에 자신을 내맡기시는 하느님의 전적인 선하심을 부각시킨다. 그러면서 현대 신학은 죽음으로부터의 예수 의 부활을 하느님 나라 완성의 '표징' 으로 해석한다. 즉 악과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 의 종말론적 행위로 해석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의 약 함"과 "전능하심"이 변증법적 관계에 있음을 주목하였 다.
〔전통적 해석〕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죄 의 악' (malum culpae)과 '벌의 악' (malum poenae)을 구분 하여 왔다. '죄의 악' 은 윤리적 악 곧 '죄' (peccatum)를 뜻하고, '벌의 악 은 물리적 악 곧 '죄의 벌' (poena pecca- t)로서 당하는 고통을 뜻한다(아우구스티노, 《자유 의지론》 1. 1, 1 ; 토마스 아퀴나스, 《악론》 q. 1, a. 4).
윤리적 악의 원인 및 책임 : 인간의 역사 안에는 끊임 없이 인간이 지은 죄 곧 윤리적 악이 있어 왔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창조주인 하느님이 인간에게 윤리적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 악을 행하도록 허용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결 국 윤리적 악의 원인이 아닌가?" 그리고 "그분에게 윤리 적 악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은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답변해 왔다.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에 따 르면, 물리적 악이 고유한 의미의 악이라고 할 수 없는
데 반하여, 윤리적 악은 엄밀하고도 고유한 의미의 악이 다. 윤리적 악 곧 죄는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 로부터 비 롯되며, 하느님의 의지와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다. 따라 서 하느님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결코 윤리적 악 의 원인이 될 수 없다(《자유 의지론》 1, 1, 1 : 《신학 대전》 I , q. 48, a. 6c). 그뿐 아니라 하느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코 윤리적 악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은 현실적으로 윤리적 악 곧 죄를 허용하는가? 그리스도교 신학에 따르면 비록 죄에 물든 영혼이라 할지라도 정신 적 존재인 인간은 모든 비정신적 사물보다 언제나 더 큰 품위를 지니고 있고(《자유 의지론》 II , 5, 16), 우리의 악한 행동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선하심이 작용한다(아우구스티 노, 《음악론》 Ⅵ, 30). 그러므로 악까지도 좋게 활용하시는 하느님은 악으로부터 더 큰 선을 이끌어 내시며(《교리 요 강, 신앙과 희망과 사랑》 3, 11 : 26, 100 : 《신학 대전》 I , q. 48, a. 2 ad 3 ; Ⅲ, q. 1, a. 3 ad 3 : 창세 50, 20 ; 로마 5, 20), 이 점이 아니라면 하느님이 윤리적 악을 허락하실 리가 없다(《교리 요강, 신앙과 희망과 사랑》 3, 11 ; 28, 104).
물리적 악의 원인 : 이 세상에는 많은 고통이 있고 하 느님이 그런 세상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물리 적 악의 원인일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은 전통적으 로 다음과 같이 답변해 왔다.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에 따르면, 하느님은 결코 윤리적 악의 원인일 수는 없지만 물리적 악의 원인일 수는 있다(《자유 의지론》 1, 1, 1 ; 《신 학 대전》 I, q. 48, a. 6 c). 왜냐하면 물리적 악인 고통은 인간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정당하게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물 리적 악은 인간을 훈육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나오 는 것으로서 옳고 좋은 것이다(《신국론》 Ⅳ, 1 ; XII 3). 그리고 하느님은 단지 이런 옳고도 좋은 의미에 있어서 의 물리적 악의 '장본인' (auctor, 지은이)일 뿐이다. 그렇 다면 왜 죄 없는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가? 전통적인 그 리스도교 신학은 죄 없는 이들 또한 원죄로 인해 인류와 의 연대성 및 공동 운명에 연루되어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고통을 통해 그들을 더욱 정 화시키고 단련시킴으로써 궁극 목적으로 이끄시려는 하 느님의 섭리로 귀결시켰다(《신국론》 I , 8 ; XII , 22). 결국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은 물리적 악이 옳고도 좋은 의미의 것인 한에서, 하느님이 이런 물리적 악의 원인일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물리적 악의 직접적 원인인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물리적 악은 인간이 피조물인 한 에서, 죄와 상관없이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피조 물의 본성상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 구스티노와 토마스는 그 근거로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중 구조로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을 제시하였다. 곧 인 간은 한편으로는 죽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지 않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 이다(아우구스티노, 《창세기 축자 해석》 Ⅵ, 25, 36 ; 토마스,
《명제집 주해》 Ⅱ, d. 30, q. 1, a. 1 ad 1). 인간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인간만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불사성의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고, 그러면서도 인간 이 죽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 지로 본성상 무로부터 창조된 존재로서 가변적이기 때문 이다. 곧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의 세계 안에는 죄와 상 관없이 피조물의 가변성에 따라 발생하는 생성 소멸이 있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고통과 죽음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아우구스티노, 《선의 본질》 1). 결국 이런 의미에서의 물리적 악은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 자체의 가변성으로부터 '직접' 비롯된다. 그러므 로 세상의 창조주인 하느님은 결코 물리적 악의 '직접 적' 원인은 아니며 단지 '간접적으로' (quasi per accidens, 偶有的으로)만 그 원인일 뿐이다(《신학 대전》 I, q. 49, a. 2 c).
물리적 악의 허용 및 섭리 : 그렇다면 물리적 악이 발 생하도록 허용하고 또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에 게 사람들이 현실 잘못의 탓을 돌린 채 그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지 않는가?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물리적 악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선적 으로 중요한 것은 악을 전 우주적 차원의 시야에서 보는 일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다양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체의 조화 안에서 물리적 악을 볼 때, 다시 말해 악을 선들의 총합의 조화로부터 이해할 때 비로소 세계 안에 서의 악의 위치 및 그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 《질서론》 2, 19, 51 ; 토마스, 《신학 대전》 I, q. 48, a. 2c).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 따르면 물리적 악은 윤리적 악과는 달리 엄밀하고도 고유한 의미의 악이 아 니다(《고백록》 7. 13, 19 : 《신학 대전》 I , q. 48, a. 6 c). 곧 물리적 악 때문에 불완전한 것으로 보이는 개별적인 현 실들은 단지 전체적 시야의 결여에서만 그렇게 나타날 뿐이다(《질서론》 2. 19, 51). 따라서 하느님이 물리적 악 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선들이 자연 안에서 소멸 될 것이다(《신학 대전》 I, q. 48, a. 2 ad 3). 결국 신적(神 的) 관점에서 본다면 물리적 악이란 아예 없는 것이다 (《고백록》 7. 13, 19). 곧 물리적 악은 우주의 질서와 완성 에 이바지하는 것으로서(《자유 의지론》 3, 15, 42 ; 《신학 대 전》 I , q. 48, a. 1 ad 5 : I , q. 48, a. 2 ad 3), 궁극적으로는 더 큰 선과 전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로 귀결될 뿐이다(《자유 의지론》 3, 15, 42 : 《대이교도 대전》 Ⅲ, cp. 1, n. 6). 그러므로 세상 안의 온갖 물리적 악 에 대해 하느님을 원망하며 그분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자유 의지론》 3, 15, 42) .
〔현대적 해석〕 죄 없는 사람들이 같은 인간에 의해 숱 하게 희생되었던 아우슈비츠 사건 이후 오늘날 사람들은 고통의 문제를 하느님의 침묵 또는 부재(不在)의 문제와 연관시켜 제기한다. 곧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현실을 마냥 구경만 하는 무정한 하느님이라면, 또는 그 처럼 죄 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능력도 발 휘하지 못한 채 침묵하는 무능력한 하느님이라면, 인간 이 그런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고통과 인간의 윤리적 책임 : 물리적 악인 고통이 자연 의 세계와 동물 및 인간의 세계 안에서 발생한다는 점에 서는 '객관적인 사실' 이지만, 주체인 인간이 자신의 내 면으로부터 겪고 체험한다는 점에서는 '주관적이고도 인 격적인 것' 이다. 이 고통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공유하 고 있는 '신체적 아픔' 과 정신적 존재인 인간에게 고유 한 '영혼의 아픔' 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고통' (suffering, 괴로움)과 '아픔' (pain)이 이처럼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 다고 할지라도 이 두 단어의 의미가 내적으로 완전히 일 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통의 주관적이고 인격 적인 차원을 고려할 때, 고통은 신체적 아픔 · 배고픔 · 잃음 · 외로움 · 늙음 · 헤어짐 등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이런 것들의 내면적 차원 곧 '내면화된 아픔' 을 가리키 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은 인격체로서의 한 인간이 겪 는 '개인적 차원의 고통' 과 사회의 구조악 및 불의로 인 해 겪게 되는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차원의 고통' 으 로 구분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은 신체 를 갖고 있는 인간이 주변 세계 안에서 '관계 존재' (Beziehungswesen)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겪는 것이다. 즉 고통은 한편으로는 '신체적 아픔' 과 신체에 필요한 것의 결핍이 지속되는 데 따른 고통이나 이것들이 하나의 인 격체 안에 내면화되어 이루어지는 '영혼의 아픔' 을 뜻하 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세계로부터 그리고 함께 살아 가는 동료 인간들로부터 겪게 되는 '상실의 체험' 을 뜻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실의 체험은 자연에 의해 주어지기도 한다. 곧 지진 · 홍수 ·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와 그에 따 른 질병 · 기근 등이다. 하지만 자연 과학의 발달로 자연 의 많은 위험들이 예측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이 마련된 이래 실제로 오늘날에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초점이 전 보다 더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문제로 옮겨지고 있다. 곧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제국주의, 아우슈비츠의 시체 더미, 전쟁, 고문, 착취, 제3 세계 사람들의 굶주림, 대 도시의 빈민가, 산업 국가의 익명화된 사람들, 인간의 잘 못으로 초래된 생태 위기 등이 오늘날 고통의 문제에 있 어 주요한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은 일차 적으로 인간의 상호 의존성의 장소이자 연대성의 장소인 세상 안에 있다. 세상은 모든 인간의 삶이 함께 얽혀 있 는 장소로서 인간의 외부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 삶은 끝없는 관계의 틀 안으로 인간을 묶어 놓는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의 주변 영역이며, 우리는 모두 공통된 삶의 기반을 공유하고 있 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세상을 공유하는 것이고 함 께 나누는 것이다. 곧 같은 빵과 같은 잔을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시는 것이다. 나눔이 깨어지는 곳에, 그리고 주어 진 자연의 선물이 나누어지지 않는 곳에 악과 고통이 시 작된다. 이러한 의미의 악과 고통은 하느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다시 말 해 이러한 의미의 악과 고통은 인간이 자신의 윤리적 책 임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
통은 죄가 있는 곳에서 시작되며, 이처럼 죄와 고통이 있 는 곳에서 역설적이게도 메시아적 "하느님 나라"가 시작 된다(로마 5, 20).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느님 : 인간이 윤리적 책임을 다 하지 않음으로써 악과 고통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인류 는 또한 그런 악과 고통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악과 고통 의 희생자로서 인류가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선 하신 하느님이 그것들을 즉각 중단시키지 않은 채 침묵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하느님은 결국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마냥 구경만 하고 있는 비정한 하느님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물음은 궁극 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에 대해 의문을 제 기하는 것이다.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현대 신학은 "하느님의 열정"과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느님"의 상을 제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을 부각시 킨다.
전통적인 유신론(有神論)에서는 "하느님이 고통을 당 할 수 있다"는 표상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느님 의 완전성과 영원성과 불변성에 대한 가르침이 그렇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든 근거였다. 하지만 하느님의 인간화 (incarnatio, 육화)를 받아들인 채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신앙 고백 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인간에 대한 열정과 연민의 정으로 아들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 셨고 지금도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 한가운데에 현존하신 채 "함께 고통당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사 실 하느님은 당신이 인간을 징벌하시고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친교의 하 느님임을 인간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아들 안에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 위대한 복음을 가 져온 아들을 믿지 않고 거꾸로 그분을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 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나 그분은 저항 하기는커녕 자유로이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써, 힘없고 약함을 통해 드러난 사랑과 봉사의 위대한 의미를 깨닫 고 그분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였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당신의 전능하심을 발휘함으로써 세상의 악과 고통을 당장 종식시키는 그런 하느님이 아 니다. 오히려 당신의 전능하심을 숨기고 사랑의 연약함 안에 기꺼이 당신 자신을 내어 놓으심으로써, 인간과 함 께 고통을 당하는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 되셨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하느님 이라는 사실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그리움과 간절한 기다림에서도 드러난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 사랑에 자유로이 응답하기를 기다린다. 심지어 인간이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죄와 고통이 발생하는 곳에서 조차도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여 자유로운 응답을 기다린 다. 곧 그분은 인간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유롭 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기를 기다릴 뿐 아니라, 이 웃의 고통을 자유롭게 함께 나눔으로써 인간 세상을 변 화시켜 나가기를 기다린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침묵
한 채 인류가 당하는 고통을 구경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 이는 진정한 이유이다. 이를 신약성서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루가 15, 11-32) 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곧 이 비유에 나오는 자비로운 아 버지처럼 하느님은 사랑에 불타는 마음으로 반항적인 자 녀들이 자유로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그리워한 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간절한 기다림과 그 리움 안에는 하느님이 당신 자녀들로부터 사랑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고 마음 아파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들인 예 수의 인품과 행적 안에서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셨던 하 느님은 고통을 당할 수 없는 하느님이 아니라 고통당하 는 인간 곁에서 함께 고통당하는 그런 하느님이다. 혹시 과거 어느 때인가 사랑이신 하느님이 반항적인 자녀들의 죄에 대해 인내하지 못한 채 화를 내는 하느님으로 비쳤 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죄가 당신의 영광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당신 자 녀들이 생명의 원천인 당신을 등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마음 아프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결 국 그분의 화냄도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그리움과 사랑 의 연약함을 보여 주는 반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느님의 전능과 힘없음 : 전능하신 하느님이 사랑의 연약함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표상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이 힘이 없다는 표 상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상처를 입고 고통 을 당한다면 그는 약하고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인데, 이 러한 표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능 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마냥 부재중인 하느님이라면, 인 간이 그런 무능력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 가 있겠는가?" 결국 이 물음은 하느님의 전능에 대해 의 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현대 신학은 '전능' 과 '사랑의 힘없음' 이 하느님께 있어서는 대립 관 계가 아니라 변증법적 관계에 있을 뿐이라고 답변한다.
사실, 하느님이 전능할 뿐 아니라 무력(無力)하기도 하다는 표상은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 안에서 자신을 약 하게 만드셨다는 신약성서(필립 2. 5-11)의 사상에도 접 근해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전능' (Allmacht)과 '힘없 음' (Ohnmacht)을 구별한 채 양자 사이의 긴장과 조화를 표현하는 일은 모순된 표현 방식이라기보다는 무한하신 하느님 존재의 신비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변증법적 표 현 방식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윙거(E. Jiinger)에 따르면 하느님의 '전능' 과 '힘없음' 사이에 구 별이 있기보다는, 하느님의 '전능' 과 그분의 '현존' 사 이에 구별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그분의 전능은 그분의 현존으로부터 물러남이고, 그분의 현존은 그분의 전능으로부터 물러남이다. 곧 하 느님은 부재중에는 전능하시지만 현존해 계신 가운데에 서는 권능을 행사하시기를 포기하신다. 다시 말해 이 세 계로부터 물러나 숨어 계실 때에는 전능하시지만, 이 세 계 안에 와 계실 때에는 권능을 포기하신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전능하심' 과 '힘없으심' , 하느님의 '현존' 과 '부재' , 하느님의 '가까이 계심' 과 '멀리 계심' 과 같 은 대당 개념들은 그분의 초월성과 내재성, 불변성과 역 동성 사이의 긴장과 조화의 다른 표현들일 뿐이다(H. Haring). 그러므로 하느님의 '전능하심' 과 '사랑의 힘없 음' 은 결국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생명의 실재' 인 하느님 안에 통 합되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을 뿐이다.
예수의 부활과 성령 안에서의 삶 : 하느님은 예수를 부 활시킴으로써 고통받는 이들 · 죽은 이들 · 죄인들을 구 원하시는 생명의 실재로 자신을 계시하신 채, 자신을 가 까이 계시는 구원의 하느님으로 입증하였다. 즉 예수의 부활은, 자신을 낮추어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 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자 비로운 사랑의 하느님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을 죽 음과 죄와 고통으로부터 해방하실 전능하신 영광의 하느 님임을 결정적으로 입증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현실의 폭력과 고통과 악과 투쟁하고 또 그 일을 위하여,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고통에 내맡겨 지면서까지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 의 생명의 실재에 대한 가장 예리한 표현이자 가장 외적 인 표징인 것이다.
그런데 폭력 · 고통 · 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부활한 메시아인 예수는 지금도 선포된 말씀 안에서 우리 가운 데 현존하는 분일 뿐만 아니라(루가 10, 16), 특히 가난한 이들과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들의 인격 안에 현존하시 는 분이다(마태 25, 40).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
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이듯 예수의 삶의 주제인 사랑의 나눔을 실 천하고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 또한 자명한 사실 이다. 이것이 자명한 사실인 까닭은 그런 일이 그리스도 인들에게 있어서 당연히 해야 할 윤리적 실행이기에 앞 서, 무엇보다도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 다. 사실 성령 안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존에 참여하 는 이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므로 교회의 구성원인 그리스 도인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이웃의 고통 에 동참하여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힘도 성령 안 에서 받게 된다. 그래서 이런 성령의 힘에 의하여 그리스 도인들은 자신의 삶과, 죄와 고통으로 가득 찬 인간 세상 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결국 실천적 차원에 있어서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십자가의 길을 거쳐 부활의 영광에 이른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신앙인들의 체험과 성령 안에서의 나눔의 삶 안에 놓여 있다.
〔악의 신비 및 신학적 전망〕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 인 신학은 하느님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 는 악의 문제에 부딪혀 끊임없이 악의 문제에 대한 성찰 과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신학에 있어서 악의 문 제에 대한 성찰과 해명은, 그것이 전통적 해석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지건 현대적 해석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지건 간에, 하느님의 거룩함(聖性)을 손상시키지 않는, 따라 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정당화하는 범위의 한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깨닫는 일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자비롭고도 선하신 다스림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은 모든 신학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악 은 문제일 뿐 아니라 또한 신비이다. 악은 단지 불분명하 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신비인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 의 구원 계획 안에서 악의 의미가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도 신비이다. 결국 악은 한편으로 는 인간 이성과 이해를 초월하여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는 그리스도가 선포하고 계시하신 하느님 나라의 신비 안에서 결정적으로 밝혀지고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그러므로 악의 신비에 대한 성찰과 해명은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구원 의지 및 하느님의 통치 안에 악이 위치해 있으며, 악과 고통은 완성될 하느님 나 라 안에서 궁극적으로 극복되고 종결된다는 종말론적인 전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V . 윤리 신학에서의 악
'윤리적 악 과 '죄' 는 동의어이므로, 죄는 윤리적 악 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윤리 적 악과 일치한다. 그러나 '죄' 가 윤리적 개념이면서 특 히 종교적 개념인 데 반하여, '윤리적 악' 은 윤리적 개념 이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윤리학과 윤리 신학은 '윤리적 악' 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윤리적 선' 에 대한 정의를 배제한 채 '윤리적 악' 에 대해서만 따로 정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윤리적 악' 이 '윤리적 선' 의 결성
개념이자 반대 개념인 한에서, '윤리적 악' 은 그 자체로 는 파악되지 않고 오직 '윤리적 선' 을 근거로 해서만, 그 리고 '윤리적 선' 과 더불어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 다. 그러면 인간 행위의 윤리성을 가리키는 개념인 '윤 리적 악' 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측정되고 규정되는가? 윤 리 신학에서는 인간 행위의 윤리성 곧 윤리적인 '선악' 과 '옳고 그름' 을 측정하고 규정하는 데 있어서 "윤리의 객관성과 주관성" , "객관적 규범인 도덕법과 주관적 규 범인 양심", "윤리성의 원천인 행위의 대상 · 의향 · 상 황"을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배제한다면 인간은 하나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윤리적 선인지 윤리적 악인지를 측정하고 규정할 수 없 게 된다.
〔윤리적 절대와 윤리적 악〕 근원적 경험과 실천 이성 의 제일 원리 : "윤리적으로 절대적인 것" (das sittlich Absolute)이 없이는 결코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은 본질에 있어서 '윤리적으로 절대적인 것' 에 대한 근 원적인 경험을 갖고 있다. 곧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신앙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든 인간 에게는 '윤리적으로 절대적인 것' 에 대한 함축적 인식과 그것을 향한 초월적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무신 론자라고 할지라도 그 역시 어떤 방법으로든, 윤리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신비적이고도 절대적인 것' 에 대한 근 원적인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윤리적으로 절대적인 것' 에 대한 근원적 경험 안에서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자신 안에 자유로운 자기 실현의 능력 곧 선의 선택 가능성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자기 소외의 능력 곧 악의 선택 가능성도 있음을 경험하 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선과 악 중 어느 쪽을 선 택해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며, 또 그렇게 선택하는 일 이 인간에게 허용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과 악이 모두 가치 있는 것이라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오 직 선만이 '가치' 가 있고 악은 '반(反)가치' 라고 경험하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은 '행해야 할 것' 으로, 그리 고 악은 '피해야 할 것' 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완전히 자신의 임의성(任意性)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이러한 인간 적인 자기 경험이 '윤리적으로 절대적인 것' 에 대한 근 원적이고도 함축적인 경험이며, 인간의 이런 근원적인 경험은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해야 한다" (Bonum est facien- dum, malum est vitandum)는 '도덕법의 제일 원리' 또는
'실천 이성의 제일 원리' (《신학 대전》 I-Ⅱ q. 94, a. 2 c)로 표현된다. 그리고 '실천 이성의 제일 원리' 와 함께 인간 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품위를 지닌 각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서의 '선' , 그리고 각 개인과 인간 사회 에 요청되는 공정과 정의로서의 '선' 등을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실현하고 행하여야 할 하나의 '절대적 가치' 로 의식하게 된다.
윤리적 악과 외견상의 선 :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해야 한다" 라는 '실천 이성의 제일 원리' 로 표현되는 '윤리적 절대' 에 대한 근원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을 '참된 선' 과 '외견상의 선' 으로 나누었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113 a15~1113 b2). 그에 따르면 선한 사람이 바라는 대상은 '참으로 좋은 것' (bonum verum, 참된 선)인 데 반 해, 악한 사람이 바라는 대상은 우유(偶有)적인 것 곧 '단지 좋게 보일 뿐인 것' (bonum apparens, 외견상의 선)이 라는 것이다. 토마스 또한 이 점과 연관시켜, 악한 행위 는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인 '외견상의 선 (bonum appa- rens)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하였다(《신학 대전》 I-Ⅱ, q. 18, a. 4 ad 1). 결국 사람들이 윤리적 악을 선택하는 이유 는 윤리적 악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악에 있어서 무 엇인가 좋게 보이는 다른 어떤 것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 때문에 도둑질을 한다면 이 경우에 외견 상의 선은 돈이다. 물론 이러한 선택에는 인간의 주관적 선택과 결합되어 있는 객관적 윤리 기준에 있어야 할 '질서' (ordo)가 결여되어 있다.
〔윤리의 객관성과 주관성〕 선악 및 옳고 그름 : 현대 윤리 신학에서는 윤리적인 '좋고 나쁨' [善惡]과 윤리적 인 '옳고 그름' [正邪)을 구별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경향에 따르면 윤리적인 '선악' 은 의지 또는 의 향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지만, 윤리적인 '옳고 그름' 은 행위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 이 큰 사고를 당해 수혈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 종교적 양심에 따라 이를 거부할 경우, 그 사람의 의 지 또는 의향은 선하지만 그의 행위는 그릇되다고 판단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어떤 유명한 의사가 자신의 명예 욕 때문에 빈민가에 병원을 개설할 경우, 그 사람의 의지 또는 의향은 선하지 않지만 그의 행위는 옳다고 판단할 수 있다B. Schüller). 그러므로 이런 구분에 따르면 윤리적 옳음과 그름은 어떤 사실 및 사안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 고, 윤리적 선과 악은 윤리적 지향을 갖고 하는 행동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즉 '옳음' 또는 '그름' 이라는 말 이 "맹세하는 일, 혼인의 서약을 지키지 않는 일, 낙태하 는 일은 '사실' (Sache, 사안)에 있어 윤리적으로 옳은 일 인가 그른 일인가?" 하고 묻는 경우에 사용될 수 있다. 반면에 '윤리적 선' 이라는 말은 선한 의지와 의향을 갖 고 하는 옳은 행동을 가리키거나 사실(사안)에 있어 그른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이 그르다는 것을 알지 못 한 채 선한 의지와 의향을 갖고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또 '윤리적 악 이라는 말은 나쁜 의도를 갖고 하는 그른 행동을 가리키거나 사실(사안)에 있어 옳 은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나쁜 의도를 갖고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H. Weber). 이렇게 본다면 '옳고 그름' 은 객관적 윤리성 곧 윤리적 사실(사안)의 객 관성에 강조점이 있고, '선악' 은 주관적 윤리성 곧 의지 (의도)의 주관성에 강조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양자의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점 에서 학문적 공헌을 하고 있지만 '선악' 과 '옳고 그름' 사이의 이런 구분이 항상 요구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행위의 선악을 결정하는 의지가 본래는 곧고 옳은 것이지만 인간의 습성에 의해 굽고 그른 것이 될 수
도 있지 않는가?" 하고 묻는 경우, 의지 자체의 옳고 그 름을 또다시 문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악은 주관적 윤리성만이 아니라 객관적 윤리성에도 적 용되기 때문이다. 곧 '선악' 은 이성이 제시한 옳은 것과 그른 것에 의지가 자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행위의 윤리성 곧 의지적 행위의 '선악' 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사안(사실) 자체의 '옳고 그름' 에도 적용된다.
객관적 윤리성과 주관적 윤리성 : '윤리성의 규범' 은 인간 행동의 윤리성을 측정하는 규율 · 표준 · 척도를 말 하며, 이 윤리 규범은 '객관적 규범' 과 '주관적 규범' 으 로 나누어진다. '객관적 규범' 이란 도덕법을 말하며, 도 덕법이 부여하는 객관적 윤리 질서는 인간이 자신의 행 위의 윤리성을 측정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 객관적 척도 및 표준이 된다. 그리고 '주관적 규범' 이란 양심을 말하 는데, 양심의 판단 및 명령은 인간이 따라야 할 행위의 주관적 척도 및 표준이 된다. 인간의 행위는 이 두 가지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객관적 규범 인 도덕법이 일반적으로 부과하는 윤리적 의무를 주관적 규범인 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기 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이루어지는 인간적 행위가 이 두 가지 윤리 규범에 '합치되면' 윤리적으로 선이고, 합 치되지 않으면' 또는 '위배되면' 윤리적으로 악이다. 그 러므로 이 두 가지 윤리 규범에 따라 윤리성도 객관적 윤 리성과 주관적 윤리성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객관적 윤리성은 어떤 행위가 도덕법에 객관적으로 "일치하는가" 또는 "일치하지 않는가" 또는 "위배되는 가" 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데, '일치하면' 그 행위는 옳고 '일치하지 않으면' 그 행위는 그르다. 이에 반해 주 관적 윤리성은 그 행위가 행위자의 양심에 주관적으로 일치하는가 또는 일치하지 않는가 하는 것에 의해 결정 되는데, '일치하면' 선하고 일치하지 않으면' 악하다. 예를 들어 "살인은 그른가?" , "진실을 말하는 것은 옳은 가?" 하는 물음과 같이 사안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물음 은 객관적 윤리성에 관한 것이다. 반면에 "그 의사가 중 환자에게 그의 병의 진행 상태에 대해 늦게야 진실을 밝 혔을 때 그 의사는 양심에 따라 순전히 선의로 그렇게 하 였는가?" 또는 "이 소년이 그 소녀를 죽였을 때 그가 하 고 있는 행동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물음 과 같이 양심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 개별적인 행위나 충분한 인식과 자유로운 의지로써 이루어진 구체적인 행 위에 대해 선악을 따지는 물음은 주관적 윤리성에 관한 것이다.
〔윤리성의 규범〕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도덕법 : 도덕 법은 '자연법' 또는 '자연 도덕법' 의 동의어이다. 도덕 법은 인간의 행동을 궁극 목적으로 이끄는 "이성의 질 서"(ordo rationis)이자, 자유로운 결정을 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 목적의 실현에 필연적인 것을 행하도록 의 무를 지우는 "이성의 명령" (dictamen rationis)이다(《신학 대 전》 I-Ⅱ q. 90, a. 1 c ; I-Ⅱ q. 92, a. 2 c). 따라서 '도덕 법' 에서의 "법"은 권리나 규칙의 “법전(法典)적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 목적을
향하도록 윤리적 질서를 부여한 채 의무를 부과하는 "이 성의 법" (ratio legis)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선은 행 하고 악은 피해야 한다"는 '도덕법의 제일 원리' 또는 '실천 이성의 제일 원리' 안에 표현되어 있는 "선을 행해 야 한다"는 당위는, 모든 선을 행해야 하는 의무를 뜻하 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 목적과 연관된 선을 행해야 하는 의무를 뜻하는 것이다.
자연법 또는 도덕법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 의 이성 또는 마음에 각인된 도덕법은 인간에게 부여된 윤리적 질서가 '객관적' 으로 존재함을 말해 준다. 둘째, 자연법의 윤리성은 종교적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필연적' 으로 주어져 있다. 셋째, 윤리 가치에 대한 주관 적 인식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 으로 갖고 있다. 넷째, 윤리적 질서는 행하거나 피해야 할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으로서 궁극적 목적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도 덕법은 객관적으로는 이성에 주어진 법이지만 주관적으 로는 실천 이성이 인식하고 따라야 할 법이다. 먼저 도덕 법이 이성에 주어진 법인 까닭은, 인간이 이성에 의해 영 원법에 참여하기 때문이다(《신학 대전》 I-Ⅱ, q. 91, a. 2 c). 그리고 도덕법이 실천 이성에 의해 파악되고 준수되 어야 할 법인 까닭은, 도덕법이 무엇보다도 인간의 마음 또는 이성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신학 대전》 I-Ⅱ, q. 90, a. 4 ad 1). 그 때문에 인간은 이성 앞에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규범인 도덕법을 실천 이성에 의해 주관적 으로 인식하고 파악하여 그 규범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행위가 도덕법과 실천 이성에 따라 서 인생의 궁극 목적을 향할 때 그 행동은 옳은 것으로 규정되는 데 반하여, 그런 궁극 목적으로부터 방향을 바 꿀 때 그것은 그른 것 곧 죄로 규정된다. 곧 윤리적 선은 실천 이성 및 도덕법과의 조화 안에 있는 인간적 행위인 데 반하여, 윤리적 악은 이성의 질서 및 도덕법의 질서로 부터 벗어난 인간적 행위인 것이다(《신학 대전》 I-Ⅱ, q. 19, aa. 3-4 : I-Ⅱ, q. 21, a. 1).
주관적 규범으로서의 양심 : 가톨릭 교회의 전통은 오 랫동안 양심의 우위성(primacy), 품위(dignity), 신성 불가 침성(inviolability)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전통에 따르면 결코 아무도 자기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될 수 없을 뿐더러 허용되지도 않는다. 가톨릭 신학의 전통에 서 '실천 이성의 기능 으로서의 "양심"의 전체적 의미는 다음 세 가지 차원 및 단계로 표현되어 왔다.
① 양지양능 : 양지양능(良知良能, synderesis)은 선을 알고 행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경향 및 능력을 말한다. 양 지양능이 파악한 가장 보편적인 원리는 "선은 행하고 악 은 피해야 한다"는 도덕법의 제일 원리이다. 곧 인간은 이런 양지양능 때문에 윤리적 가치에 대한 일반적 감각 을 갖게 되며, 이런 일반적 감각은 행해야 할 옳은 것과 피해야 할 그른 것 사이에 구분을 만들어 놓는다. 인간은 양지양능이 없이는 윤리적으로 생활할 수가 없다. 하지 만 각각의 구체적인 행동에 있어서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양지양능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 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의 두 번째 차원인 윤리 지식을
필요로 한다.
② 윤리 지식 : 윤리 지식(moral science)은 행해야 하는 개별적 선들과 피해야 하는 개별적 악들을 탐구하는 과 정이다. 양지양능은 인간으로 하여금 행해야 할 옳은 것 과 피해야 할 그른 것을 발견하도록 각각의 구체적 상황 에서 객관적 가치 질서를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 게 부여하는데, 이것이 양심의 두 번째 차원인 윤리 지식 이다. 곧 윤리 지식은 도덕적 가치와 반(反)가치, 행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을 구체적으로 탐구하는 단계이다. 따라서 이 단계의 주된 과업은 예리한 지각과 윤리적으 로 옳은 이성의 추리 작용으로써 윤리적 진리에 도달하 는 일이다. 이 때문에 양심의 윤리 지식은 교육 · 형성 · 정보 · 시험 · 검증 · 변화를 필요로 한다. 결국 양심의 윤 리 지식은 양심의 형성이라고 불리는 과정에 매여 있다. 이 두 번째 과정의 목표는 바르게 보고 옳게 생각하는 것 이다. 그리고 이 점은 양심의 윤리 지식이 공동체 안에서 형성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도덕적 지혜의 원천들로 부터 획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③ 좁은 의미의 양심 : 세 번째 단계의 양심(consci- ence)은 개별적 상황에서 내가 행해야 하는 선과 행하지 말아야 하는 악에 대해 구체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의미 한다. 이런 양심 곧 좁은 의미의 양심을 통하여 인간은 지각 및 이성의 추리 작용으로부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따라서 양심의 품위와 자유의 정 수(精髓)는 이 세 번째 차원의 좁은 의미의 양심에서 나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구체적인 양심의 판 단을 하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판단을 남이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좁은 의미의 양심의 판단의 특징 은 그것이 항상 나 자신이 해야 하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항상 내가 옳다고 믿는 것 곧 선을 행해야 하고, 내가 그르다고 믿는 것 곧 악을 피해야 한다. 만일 어떤 행동 노선보다는 다른 행동 노선이 참으로 하느님 의 객관적인 부르심이라고 마음속으로 믿는다면, 그러한 행동 노선은 더 이상 많은 것 가운데 있는 하나의 '선택 사항' (option)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양 심의 판단을 따라야 하는, 윤리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행 동 노선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세 번째 차원의 양심은 신성 불가침의 것이다. 좁은 의미의 이런 양심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우리의 "가장 내밀한 핵심이자 지성소" (사목 16항)라고 부른 바로 그곳으로서, 인간이 홀로 하 느님과 함께 머무르는 곳이다. 이렇게 볼 때 윤리적 선은 양심의 판단에 의해 파악된 윤리 규범에 "합치되는" 인 간적 행위를 뜻하고, 윤리적 악은 그런 윤리 규범에 "합 치되지 않는" 또는 "위배되는" 인간적 행위를 뜻한다.
그런데 행위의 윤리적 성격 일반에 관한 정보를 제공 해 주는 객관적 규범인 '도덕법' 과 한 인격체를 위해 인 격적 행위의 윤리성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주는 주관적 규범인 '양심' 의 판단 사이에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 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의 심리 상태를 고려하 여 아직 진실을 밝힐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에게 선
의(善意)의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 그런 행위는 "객관적으로는 윤리적 악"이지만 "주관적으로는 윤리적 악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런 선의의 거짓말은 '질료적 죄' (peccatum materiale)이기는 하지만 '형상적 죄' (peccatum formale)는 아니다.
〔윤리성의 원천〕 세 가지 원천들 : 윤리성의 원천 (fontes moralitatis)은 인간 행동의 윤리성을 결정하는 세 가지 요소들, 곧 대상 · 의향 · 상황을 말한다.
① 대상 : '대상' 곧 '행위 자체' 는 윤리적 행위의 외 적 부분 또는 질료적 요소이다. 윤리적 행위의 외적 차원 은 쉽게 관찰될 수 있는 것으로서 '행위의 목적' (finis operis) 또는 목적에 대한 수단' 이라고도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행위는 의지의 동의의 '대상' 이라는 것이다(《신학 대전》 I-Ⅱ , q. 13, a. 1 c). 따라서 어떤 행위 의 윤리성은 이성이 윤리적으로 '선' 또는 '악' 이라고 제시한 "대상"에 대해 의지가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진 다.
② 의향 : '의향' 곧 '행위자의 목적' (finis operantis)은 윤리적 행위의 내적 부분 또는 형상적 요소이다. '목적' (finis)이고도 불리는 의향(intentio, 지향)은 행위에 있어 서 추구되는 것 또는 행위의 전체 의도이다. 이러한 의향 이 행동에 인격성을 부여하므로, 하나의 행동의 윤리적 성질은 의향으로부터 온다. 예를 들어 자선 행위가 곤궁 한 사람을 구제하려는 의향으로 실행되는 경우에는 윤리 적으로 선할 수 있지만, 자신의 허영을 만족시키고 다른 사람의 찬사를 받기 위해 실행되는 경우에는 윤리적으로 악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질료적 특성을 갖는 행위라 할지라도 행위를 이끄는 의향이 다름에 따라서 다른 윤 리적 의미를 갖게 된다. 결국 행위의 대상과 의향을 함께 고려할 때 비로소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행위에 대한 윤리성을 판단할 수 있게 된다.
③ 상황 : 상황은 행위의 여러 가지 우연적인 주변 사 정을 의미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행위는 상황에 따라서 선하거나 악하다는 것이다(《신학 대전》 I-Ⅱ, q. 18, a. 3).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는 목적과 수단 사이에 관계적 긴 장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을 느닷 없이 공격하는 자에게 정당 방위로 폭력을 사용하는 경 우에, 만일 그러한 폭력의 사용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적 범위의 한도 안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그것은 정 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적 범 위의 한도를 초과하여 발생한 것이라면 그 폭력은 정당 화될 수 없다. 결국 정당화될 수 있는 자기 방어와 정당 화될 수 없는 자기 방어의 차이는 목적에 대한 수단의 '균형성' (proportionality)에 있다(L. Janssens). 이러한 이론 에 따르면, 조건 지어진 상황들의 전체 문맥 안에서 의향 과의 관계 아래 어떤 행동을 고려할 때 비로소 그 행위의 참된 윤리적 의미를 규정할 수 있게 된다.
내적 악 : '내적 악' (intrinsece malum, 내적으로 악한 것) 은 행위의 '대상' · '의향' · '상황' 중 행위의 '대상' 에 관계되는 말이다. 교회의 공적 가르침과 전통적인 윤리 신학에 따르면, 어떤 행위는 '대상' 에 있어 본래 그리고
그 자체로 윤리적으로 악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에 대한 증오, 독성, 살인, 도둑질 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그 자체로 악한 행위로서 살인 · 도둑질 · 간음 등을 들었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107 a9~27). 그런데 전통적 인 윤리 신학에 따르면 이러한 악한 행위들은 '자연 질 서를 거스르기' 때문에 또는 '권리의 결함' 때문에 내 적 악' 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서 '자연의 질서를 거스 른다 는 말은, 피임이나 불임의 경우처럼 하느님이 생명 을 낳으라고 주신 자연의 능력을 인간이 손상시킴으로써 자연법을 위배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권리의 결함' 이란 남의 재산을 도둑질하는 경우처럼 남의 권리를 침 해하거나, 죄 없는 이를 살해하는 경우 또는 자살을 하는 경우처럼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해 있는 인간 생명에 대 한 권한을 침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전통적 윤 리 신학에 따르면, 내적으로 악한 행위' (intinsece malus actus)는 어떤 의향이나 상황도 그런 내적 악을 정당화시 키지 못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의 윤리적 성질은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하기 전에 벌써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그런 행위는 어떤 상황이나 결과와는 별도로, 행위 자체의 고유한 객관적 구조 때문에 윤리적 으로 악한 것이며 결코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것이 다.
이러한 전통적 가르침에 대한 윤리 신학계의 반응은 오늘날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있다. 한편에서는, 어떤 행동의 옳고 그름의 토대가 되는 객관적 윤리 질서 가 존재하며, 그러한 객관적 윤리 질서는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 윤리 질서의 정확한 본성에 대한 통찰을 획득함 으로써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객관적 윤리 질서는 인간의 임의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며, 결국 하 나의 행위가 사실에 있어 '객관(대상)적으로 윤리적 악' 이라면 어떤 상황이나 의향도 그것을 '객관(대상)적으로 윤리적 선' 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는 것이다(Ph. S. Keane). 다른 한편에서는, 내적 악이라고 불리는 행위는 순수하게 그 자체만 고려할 때에는 전혀 윤리적으로 판 단될 수 없고, 구체적으로 의향 및 상황과 함께 고려할 때에만 비로소 윤리적 범주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곧 윤리적 판단은 행위 · 의향 · 상황이라는 세 가지 요소 들을 동시적으로 고려할 때만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것은 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향 및 상황과 는 별도로 추상적으로만 고려된 행위는 단지 '전(前) 윤 리' (premoral)적 의미에서만 악일 뿐이다(J.Fuchs) .
선은 완전함에서, 악은 어떤 결함에서 : 토마스에게서 도 발견되며(《신학 대전》 I-Ⅱ, q. 18, a. 4 ad 3) 오랫동안 윤리 신학 안에서 엄격히 존립해 온 이 명제(axioma)는, 신플라톤 학파의 영향을 받았던 6세기 초의 신학자 아레 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의 비슷한 명제로 소급된다(〈하느 님의 명칭들> 4, 3). 플라톤주의적 세계관 및 사상을 담고 있는 이 명제에 따르면, 인간은 원칙적으로 그리고 일차 적으로 '이데아적이고도 완전한 것' 으로 방향 지어져 있 으며, 그것이 인간의 규범이 된다. 따라서 그런 규범으로
부터 방향을 바꾸는 것은 죄의 성격 곧 부정성(否定性) 을 띠게 되는데, 이 점이 이 명제에도 각인되어 있다.
① 명제의 의미 : 이 명제는 하나의 행위가 윤리적 내 용에 속하는 모든 점을 충족시킬 때 비로소 선이라고 말 한다. 곧 선은 모든 점에 맞을 때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윤리적 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두 '질서' 안에 있 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선하고 옳은 것 으로 간주될 수 있으려면 행위의 대상뿐만 아니라 행위 가 이루어진 상황들 곧 어디서 · 언제 · 어떻게 행동하였 는가 하는 점도 맞아야 하고, 여기에 선한 지향 및 바른 목적이 결합되어야 한다. 행위의 이런 요소들이 모두 윤 리성의 내용에 맞을 때 비로소 하나의 행위는 윤리적 선 으로 간주된다. 결국 "선은 완전함에서" (Bonum ex integra causa) 나온다. 이에 반해 행위의 윤리성을 구성하는 여 러 요소들 가운데 한 가지라도 결함이 있다면 그 행위는 선의 성질을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벌써 하나의 결 함' 이 선을 부정(否定)적인 것으로 만든 채 '악' 의 소인 을 찍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사안에 있어 그른 것을 행하는 경우, 선을 나쁜 의도 및 왜곡된 동기로 행하는 경우, 그리고 선을 다른 시간이나 다른 장소에서 옳지 못한 방법으로 행하는 경 우에 그런 행위는 더 이상 선이 아니다. 결국 "악은 어떤 결함에서" (Malum ex quolibet defectu) 나온다. 그러므로 윤 리성의 세 가지 원천인 행위의 대상 · 의향 · 상황이 모두 윤리 규범과 조화를 이룰 때 그 행위는 윤리적으로 선이 고, 세 가지 원천 중 단 하나만이라도 윤리 규범에 어긋 날 때 그 행위는 윤리적으로 악이다. 이것이 바로 이 명 제가 표현하고 있는 의미이다.
② 명제의 평가 : 다른 이에게 친절히 대하거나 이웃 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명예욕 때문에 또 는 어떤 계산된 의도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러한 행동들은 옳은 지향에는 이르지 못한 것들이므로, 이런 경우의 행위들은 지향에 있어서 결함 이 있다. 그렇다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계산된 의도는 비 난받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성장하는 정도에 따른 선은 없는 것인가?
지향과 의도가 그 즉석에서 당장 완전할 수 있다거나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인간의 능력 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완성을 향 해 나아가는 존재인 인간은 윤리적 차원에 있어서도 마 찬가지로 완전을 향한 도상(途上)의 존재로서, 인간의 지향 또한 끊임없이 정화를 필요로 하고 또 그렇게 정화 될 수 있는 힘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 가 지닌 한계는, 이 명제가 선의 성장의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명제는 인간의 윤리성의 본질적 특 징 곧 "인간은 거의 언제나 도상의 존재" 라는 특성을 간 과하였다. 따라서 이 명제는 목적을 인상적으로 표현하 고 있지만, 목적을 향한 길에 대한 표상은 너무 적게 담 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명제를 과거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그리고 낯선 것으로 느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리의 긍정적 측면을 간과하는 것은 현명하지도 정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원리는 선이 지닌 완 전하고도 통합적인 성질, 곧 선의 포괄적이고도 전체적 인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원리는 선이 악보다 더욱 근원적인 것으로서, 악은 단지 이러한 선을 근거로 해서만 측정되고 파악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주기 때 문이다. (↔ 선 ; → 도덕법 ; 악덕 ; 악행 ; 양지양능 ; 윤리 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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