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의미에서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전개되었던 극우적인 민족주의 운동. "프랑스의 행동" 이라는 의미이다. 좁은 의미로는 그 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들, 특히 왕당파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정치적 · 지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모라스(C. Maurras, 1868~1952)에 의해 1908년 3월 21일부터 1944년 8월 24일까지 발행된 일간지를 말한다. 그러나 악시옹 프랑세즈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반드시 동일한 역사 속에서 발전과 쇠퇴를 한 것은 아니었다.
〔배 경〕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서로 화합할 수 없을 정도로 노선을 달리하는 몇 개의 분파가 끊임없이 대결하였다. 즉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은 물론 알자스(Alsace)와 로렌(Lorraine) 일부 지역을 상실하였고 파리는 참혹한 내전의 참화에 휩싸였는데, 이러한 대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룩한 것은 보수주의적이고 반공화주의적이었던 공화파였다. 하지만 공화파는 가톨릭 교회를 지원하는 왕당파의 도전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교회사적인 면에서는 가톨릭 교회 옹호자들과 반교회주의자들 간에 대규모 이념 논쟁이 벌어져 정치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즉 1801년 이후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가톨릭 교회가 왕정 복고나 제2 제정과 같은 보수 체제를 적극적이고 노골적으로 지원하자, 자유 사상가인 동시에 합리주의자, 과학적 진보의 찬미자로 자처하는 공화파의 입장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이미 타도된 구체제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를 분열시킨 또 하나의 사건이 '드레퓌스(A. Dreyfus, 1859~1935) 사건' 이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인의 감정을 폭발시켰고, 국민들은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분 열되었다. 보수주의적 우파는 민족주의자 · 군국주의자 · 반유대주의자가 되었고, 민주주의자이며 인권을 주장하였던 좌파는 평화주의와 반군국주의로 발전하였다.
〔창설과 활동〕악시옹 프랑세즈는 이러한 정치적 · 사회적 · 종교적 상황에서 탄생하였는데, 즉 1899년 8월 보주아(H. Vaugeois)와 퓌조(M. Pujo)는 '프랑스 행동위원회' 를 창설하고 《악시옹 프랑세즈》라는 잡지를 격주간으로 발행하였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왕정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이 잡지를 중심으로 소그룹이 형성되었고, 여기에 모라스가 참여하면서 왕당파 잡지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1905년에 '프랑스 행동 동맹' 으로 명칭을 바꾸고, 모든 공화주의 제도들에 대한 투쟁을 통해 왕정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활동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은 악시옹 프랑세즈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나는 모로코를 둘러싼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분쟁이었다. 1905년과 1911년에 두 나라는 전쟁 직전 상태까지 갔었는데, 이 사건은 프랑스인들에게 1871년의 참담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부추겼다. 또 다른 사건은 프랑스 제3 공화국 정부와 가톨릭 교회 사이의 충돌이었다. 1901년에 정부는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종교 단체의 존립을 금지하고, 모든 공립 · 사립 학교에서 가톨릭 수도자의 교육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1904년 7월 교황청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이듬해 헌법을 개정하여 1801년에 맺은 정교 조약을 무효화하였으며, 국가로부터 교회를 분리하여 교회의 재산을 평신도 협회로 이전시켰다. 이에 따라 공공 기금에서 성직자의 봉급 지불을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으며, 이 법에 의해 프랑스는 국교를 갖지 않게 되었지만 자유로운 신앙은 보장하였다. 하지만 이 법이 시행되자 정부는 물론 군대 내의 가톨릭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위배되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사임하였다.
1905년 1월 '악시옹 프랑세즈 동맹' 이 창설되었을 때 프랑스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지식인들이 이 동맹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모라스를 중심으로 제도권에 대항하는 유일한 운동으로 등장하였고, 이듬해 왕당파들이 이 동맹에 참여하면서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동맹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이념을,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주의(modernismus)와 자유주의적 가톨릭 교회를 표방하는 성격을 띠었다. 이와 같은 왕당파들의 참여와 지지 속에서 일간지로 전환한 <악시옹 프랑세즈>는 그 후 36년 동안 동일한 성격의 논설을 게재하면서 중단 없이 발간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악시옹 프랑세즈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대 평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악시옹 프랑세즈는 단지 파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운동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또 그 구성원들이 중간 혹은 소지주 가문 출신이어서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반면에 악시옹 프랑세즈가 성공을 거둔 것은 전통주의적 · 반혁명주의적 흐름을 통하여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어 있던 민족주의를 수렴하였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범국민적인 단합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상황은 정치적 분위기가 악화될 것임을 시사하였다. 이제 분열은 더 이상 공화정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가 아니라,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우파와 변화를 추구하는 좌파 사이에서 일어났다. 더욱이 우파는 좌파의 방식을 본받아 조직화를 추구하면서 사립 학교나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기 위하여 거리 행진을 하거나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924년 총선에서 좌파 연합이 승리하자 이러한 분열은 더 심화되었고, 악시옹 프랑세즈는 이를 이용하여 그 영향력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악시옹 프랑세즈의 모호한 종교적 이념이 1926년 말 교황청으로부터 공개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가톨릭 신자들이 점차 이탈하였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A. Hitler, 1889~1945)의 등장 이후 국제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로 인한 프랑스 내의 정치적 혼란은 악시옹 프랑세즈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해 주었으나 이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모라스의 우유부단으로 악시옹 프랑세즈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어 1939년에 교황 비오 12세(1939~1958)가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함으로써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모라스는 히틀러의 위험성을 고발하면서 프랑스로 하여금 독일에 대항할 수 있도록 무장할 것을 촉구하였다. 더욱이 그는 프랑스 정부가 프리메이슨단의 결탁 세력과 모종의 공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많은 구성원들의 탈퇴에도 불구하고 모라스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계속 신문을 발행하면서 끊임없이 드골주의자, 기독교 민주당 당원, 유대인, 프리메이슨단 및 그 협력자들을 공격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 정부는 악시옹 프랑세즈가 독일 점령하의 비시 정권(1940~1944)에 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신문의 발행을 금지시켰다.
〔이념과 영향〕악시옹 프랑세즈의 이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라스의 사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지녔던 사고의 독창성은 당시까지 확실하게 구분되고 상호 적대적으로 나타났던 두 가지 경향, 즉 반혁명적 전통주의와 민족주의를 혼합하였다는 데 있다. 그는 소위 "반혁명의 대가들"이라고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가톨릭 사상가이자 보수주의자인 메스트르(J. de Maistre, 1753~1821), 보날드(L.-G-A. de Bonald, 1754~1840) 및 영국의 버크(E. Burke, 1729~1797) 등의 주장을 이어받아 프랑스 대혁명과 혁명의 공상성을 비판하였으며, 민주주의를 비난하면서 전통적인 제도들에 집착하였다. 그리고 자연적인 실체, 소위 역사의 유산과 과거로부터의 교훈 등을 토대로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려고 노력하였다. 또 "법적인 국가"와 "실제적인 국가"를 구분하였는데, 가족 · 지역 · 직업 등과 같은 자연적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모라스의 "자연 정치"가 등장한 것은 이러한 요인들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지적 배경 위에서 모라스는 19세기에도 여전히 프랑스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면서도, "위험스러운 애국심"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던 프랑스 대혁명의 전통을 지닌 민족주의를 단호히 반대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러한 민족주의는 낭만적 메시아주의와 혁명의 환상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단지 왕당파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모라스는 "1천 년 간 프랑스를 지배하였던 40여 명의 왕들에 대한 향수" 를 가지고 있었으며,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 패배와 알자스-로렌 지방의 병합을 회복할 수 없는 상처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전통주의와 민족주의의 종합이 새로운 체계로 등장할 수 있었음은 확실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종합은 처음부터 근본적인 모순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모라스식의 '완전한 민족주의' 는 사실상 프랑스 역사로부터 한 세기를 배제시키는 것, 즉 프랑스 대혁명과 그 역사적 유산을 역사책에서 완전히 삭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민족주의의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그렇지않은 사람들을 확실하게 구별함으로써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였는데, 이는 완전함이 아닌 '불완전한 민족주의' 를 추구하는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모라스가 왕당파들이 극소수에 불과하였을 때, 또 왕정의 복고가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시점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되었을 때, 왕정 복귀를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악시옹 프랑세즈를 소수의 분파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으로 악시옹 프랑세즈가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 영향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악시옹 프랑세즈의 핵심적 지도자들은 무신론자였지만 가톨릭 교회가 역사적으로 많은 선행을 실천하였음을 인정하면서, 가톨릭 신앙은 프랑스의 전통 속에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프랑스가 과거와 같은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정치적 형태와 종교적 관행으로 복귀하여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정치적 원칙들은 경험을 토대로 진행되며 민족적 이해는 도덕적인 문제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 사회 및 종교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회나 종교의 구성원들이 보유하는 도덕적 의식을 말살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또 악시옹 프랑세즈의 지도자들은 점차 자신들이 본래 지니고 있던 반가톨릭적인 이념을 드러내면서 갈릴레오 사건 ·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 ·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와 보르자(Borgia) 등과 같은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교황이 신성 로마 제국을 재건하려는 음모의 희생 양이 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성직자들이나 젊은이들은 공화파들의 반교회적인 정책에 불만을 갖고 악시옹 프랑세즈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기 때문에, 은폐된 반가톨릭적인 측면을 올바로 인식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지도자들의 태도로 인해 <악시옹 프랑세즈>는 프랑스에서 가장 반교회적인 신문으로 분류되었다. 나아가 교황청은 1913년부터 몇몇 주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모라스의 저서 다섯 권을 금서로 지정하였고, 1926년 12월 29일에는 <악시옹 프랑세즈> 구독을 신자들에게 금지시켰다. 성직자들에게는 악시옹 프랑세즈에 가담한 이들에게 성사 집전을 하지 말도록 금지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교회법적인 제재를 받게 하였다. 그러자 악시옹 프랑세즈 지도자들은 반교회적인 운동을 일으켜 교황을 비롯하여 교황청의 관리들과 파리 주재 교황 대사를 중상 모략하였으며, 자신들과 함께 로마에 대항하
지 않는 주교들을 불공정하다고 비난하였다. 사태가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프랑스 정부는 1937년 악시옹 프랑세즈와의 공식적인 결별을 선언하였다. 이에 악시옹 프랑세즈는 교황청과의 화해를 표명하였고, 1939년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교황청의 지시에 순명할 것을 서명하였다.
〔의 의〕 악시옹 프랑세즈 혹은 모라스의 이념을 살펴볼 때 확실히 시대 착오적인 요소들과 내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이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멸되지않고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불가피하게 국가에 대한 경멸로 이어지기 때문에 민주적인 국가를 언급한다는 것은 중요한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모라스의 지지자들은 물론 현재까지도 악시옹 프랑세즈와 모라스의 활동과 이념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존재하는 근거이다.
사실상 '완전한 민족주의' 라는 이념과 다양한 출판물에 의한 악시옹 프랑세즈의 영향은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렇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세 가지이다. 먼저 모라스의 사고는 당시 분열된 우파의 사고를 결집시켜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양차 대전 사이 프랑스에 새로운 정치적 체계를 수립할 것을 촉구한 유일한 정치적 이념이었다. 두 번째, 그의 사고는 비록 왕당파의 입장과는 완전히 다르기는 하였지만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된 급진적인 반대, 절대적인 반대의 이념이었다. 마지막으로 악시옹 프랑세즈의 구성 원들이 가지고 있던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악시옹 프랑세즈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출판물을 통하여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또한 악시옹 프랑세즈의 영향을 받은 몇몇 단체들은 우파적인 활동을 통하여 프랑스-알제리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1968년 운동 때에는 좌파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왕정 복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 참고문헌 Jean Touchard, 《EU》 1, pp. 238~241/ G. Jaequemet, 《Cath》 1, pp. 108~110/ A. Dansette, 《NCE》 1, pp. 97~98/ R. Girardet, L'Hèritage de I'Action française, Revue française de science politique, oct.-déc. 1957/ A. Laudouze, Dominicains français et Action,française : 1899~1940, Paris, Ed. ouvrières, 1990. [琪燦]
악시옹 프랑세즈
[프]Action Franç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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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악시옹 프랑세즈> 발간 당시의 모라스(가운데)와 그의 협력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