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공근 (1889~?)

安恭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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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가.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막내 동생. 세례명은 요한.
1889년 7월 11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信川郡 斗羅面 清溪洞)에서 진사(進士) 안태훈(安泰勳)과 조(趙) 마리아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나 1898년 부활 시기에 빌렘(J. Wilhelm, 洪錫九)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일어 학교를 거쳐 한성사범학교(漢城師師範學校)를 마치고 1909년 8월부터 진남포보통학교 부훈도(副訓導)로 재직하던 중 그 해 10월 26일 그의 형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하자, 진남포에 거
주하고 있던 둘째 형 정근(定根)과 함께 진남포 경찰서로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형의 의거를 사전에 알지 못하였고 관련이 없어 한 달여 만에 석방되었으며, 그 뒤 여순(旅順)으로 가서 형을 면회하고 옥바라지를 하였다.
1910년 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이들 형제는 이듬해 4월 무링(穆棱)에 정착하였는데, 안공근은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유학하여 러시아어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안공근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일본과 동맹을 맺고 한국인들을 탄압하였고, 러시아 당국은 안공근 형제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안공근 형제는 러시아로 귀화하였으며, 그 후 안공근은 가족을 데리고 니콜리스크로 옮겨 그곳에서 벼농사로 크게 성공하였다.
1920년 1월 상해 임시 정부에 의해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위한 특사로 선정된 그는, 5월 상해(上海)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임시 정부의 외무 차장으로 임명되어 외무 총장 대리 이희경(李喜儆)과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또 1925년 11월 1일에는 대통령 박은식(朴殷植)의 서거 전에 유언을 적었고, 호상 위원(護喪委員)으로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형 정근이 신병 요양을 위하여 자신의 가족만을 데리고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떠나자, 상해에서 그는 모친 조 마리아와 안중근의 가족들을 부양하였다.
안공근은 1926년 5월 전 민족적 통일을 촉구하기 위해 결성된 '독립 운동 촉성회' (獨立運動促成會) 회장에 선임되었고, 이듬해 4월에는 좌우 세력이 참가하여 조직한 '한국 유일당 상해 촉성회' (韓國唯一黨上海促成會) 에도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유일당 운동이 1920년대 말에 결렬되자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과 함께 1930년 1월 25일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을 결성한 그는, 그 후 주로 김구(金九)와 함께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을 주도하였으며, 무정부주의 세력과도 연계하였다. 안공근은 또 1934년 2월에 설치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 특별반(韓人特別班)을 직접 운영하면서 중국측과의 교섭도 담당하였다. 이후 김구의 조직과 세력을 관리하면서 그 대리자로 활약하던 중 1935년에 김구가 한국 국민당(韓國國民黨)을 결성하자 안공근은 이사직을 맡았다. 그리고 임시 의정원 의원 · 임시 정부 군사 위원회 위원 등에 선임되면서 당과 정부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안공근의 전횡은 김구 세력 사이에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상해가 일본군에 함락되자 형수를 모시고 나오라는 김구의 지시를 어겨, 김구와
도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공근은 임시 정부가 이동하던 1938년에 형 정근이 이주한 홍콩으로 갔다가 이듬해 충칭(重慶)으로 이주하여 김구의 활동을 지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행방 불명되었는데, 그가 다시 김구의 신임을 회복하자 반대 세력에서 제거하였다는 소문이 있다. 1995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안중근 ; 안태훈)
※ 참고문헌  韓詩俊, <安恭根의 생애와 독립 운동>, 제 124회 한국교회사 연구 발표회 발표 요지, 2000/ 《한국 민족 운동 사료》 중국편, 국회 도서관, 1976/ 韓相禱, 《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 문학과 지성사, 1994/ 金九, 〈白凡逸志〉, 《白凡金九全集》 1 · 2, 대한매일신보사, 1999/ 金正明 편, 《朝鮮獨立運動》, 原書房, 1966. 〔崔起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