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문경시 · 상주시 · 안동시 · 영주시와 봉화군 · 영덕군 · 영양군 · 예천군 · 울진군 · 의성군 · 청송군 등 4개 시와 7개 군을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주교구.주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1969년 5월 29일 대구대교구에서 분리 설정됨과 동시에 대구 · 부산 · 마산 · 청주교구와 함께 대구 관구를 형성하고 있다. 안동교구는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지역으로 여러 곳에 박해 시대의 교우촌 흔적과 교회 사적지가 남아 있으며, 교구 설정 25주년을 기해 지역 복음화와 교구 성장을 위한 새로운 사목 실천에 노력해 오고 있다. 〔역대 교구장] 초대 두봉(杜峰, René Dupont, 레나도) 주교(1969. 5. 29~1990. 12.2), 2대 박석희 (朴石熙, 이냐시오) 주교(1990. 12. 2~2000. 10.9), 직무 대행 김욱태(金旭泰, 레오) 신부(2000. 10. 9~현재). [교 세] 1969년 26,605명, 1975년 명, 1980년 29,940명, 1985년 36,600명, 1990년 40,285명, 1995년 40,846명, 1999년 43,437명.
I . 복음의 전래와 순교자의 탄생
〔신앙 공동체의 형성과 박해〕 경상도 북부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충청도 남부와 전라도 북부의 신자들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면서부터였다. 이와 관련하여 1775년에 경상도 영주 땅으로 이주한 홍유한(洪儒漢) 1785년의 명례방 사건(明禮坊事件, 즉 을사 추조 적발 사건) 이후 경상도 상주로 이주한 서광수(徐光修) 집안 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그들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기록상으로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처음 나타나는 신자들은 1815년의 을해박해(乙亥迫害) 때 지금의 봉화 · 영양 · 청송 등지에서 체포된 신자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좀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1800년 전후에 고향을 떠났고, 이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경상도 지역에 정착한 뒤 그곳 산간 지대에서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을 형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을해박해 때 포졸들의 습격을 받은 신자들은 청송 지방의 노래산(老萊山, 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포산면 포산동), 영양의 곧은정과 우련발(雨蓮田, 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교우촌 등지에 살고 있었다. 당시 포졸들은 전지수라는 밀고자의 인도로 이들 교우촌을 습격하여 모두 71명을 체포하였는데, 이 중 고성대(高聖大, 베드로) · 성운(聖云, 요셉) 형제와 최성열(崔性悅, 바르바라),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 등 7명은 이듬해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어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로 인해 경상도 북부 지역의 교우촌들은 다시 한번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이 박해는 본래 전라도 지역에서 시작되었으나, 전주 출신인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상주의 잣골(현 경북 상주군 이안면 신흥리) 교우촌으로 이주해 와 살고 있었던 탓에 경상도 지역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이때 잣골뿐만 아니라 상주의 멍에목(駕項里, 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과 앵무당(현 경북 상주군 화북면 평온리), 순흥의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등에서 여러 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옥사하거나 오랫동안 옥고를 치러야만 하였다. 그 결과 김흥금(金興金) 등은 안동에서 옥사하였으며, 신태보는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전주에서,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 등 3명은 대구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교우촌의 재건과 병인박해〕 두 차례의 박해를 겪은 뒤 경상도 북부에 형성되었던 교우촌들은 대부분 와해되고, 남은 신자들은 경상도 남부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그러는 사이에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6년부터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했다. 그중 샤스탕(J. Chastan, 鄭牙各伯) 신부는 1837~1838년 무렵에 처음으로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였으며, 1850년 이후에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지역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이어 1858년 무렵부터는 그 전해에 입국한 페롱(S. Féron, 權) 신부가 주로 경상도 북부 지역의 사목을, 최양업 신부가 남부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1858년 사순 시기에 제주의 사도 김기량(金耆良, 펠릭스)이 최양업 신부와 페롱 신부를 방문한 것은 최양업 신부가 오두재(경북 상주군 모동면 수봉 2리의 오도티)에, 페롱 신부가 산막골(모동면 신흥 1리의 도리원)에 거처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경상도 북부에는 다시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또 1861년 최양업 신부가 문경의 한 교우촌에서 사망한 뒤에는 페롱 신부가 경상도 서북부 지역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864년 여름에 페롱 신부가 충청도 공주로 전임되면서 칼래(N. Calais, 姜) 신부가 경상도 서북부 지역을 맡아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까지 이 지역을 순방하였다. 당시 칼래 신부의 사목 중심지는 충청도 천안의 소학골(현 충남천안시 북면 납안리의 쇠약골) 교우촌이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는 이미 1865년 말에 시작되고 있었다. 경상도 문경의 건학리(乾鶴里, 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 회장인 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여우목(狐項里, 현 경북 문경군 문경읍 중평리) 회장의 아들인 이 시몬(혹은 요한)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것이다. 이어 1866년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면서 이에 자극을 받은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는데, 이때 여우목의 회장이던 성 이윤일(요한)이 10월에 체포되어 상주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1월 21일 대구 관덕정(觀德亭) 앞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또 그 무렵에 문경 모전리에 살고 있던 서유형(바오로)과 가족들, 문경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상내리) 교우촌에 거주하던 서태순(베드로)과 김 아우구스티노 일가, 장 서방 부부, 문경읍의 박상근(마티아)과 숙모 홍 마리아, 여우목의 김 수산나 등이 상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며, 1868년에도 다시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병인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이윤일 성인의 시신은 그 후 아들에 의해 대구 날뫼(飛山)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904년경 경기도 용인의 심방골(현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墨里의 먹뱅이)로 이장되었다가 1984년 성인품에 오른 지 3년 만인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장 이문희(李文熙, 바오로) 대주교에 의해 대구 성모당으로 옮겨졌으며, 1991년에 다시 관덕정 기념관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현재 이윤일 성인은 대구대교구의 제2 수호자로 현양되고 있다. 한편 박상근 순교자의 시신은 후손들에 의해 문중 산에 안장되어 오던 중 1985년에 그 무덤이 확인되었고, 9월 9일 현지에서 유해가 발굴되어 9월 15일에 마원 사적지(문경읍 마원 1리 600-1 소재)로 옮겨 안장되었다.
II . 공소와 본당의 설립
[교우촌의 재건과 공소 설정] 병인박해로 인해 경상도 북부 지역에 산재해 있던 신앙 공동체는 다시 한번 타격을 받았으며, 살아 남은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신자임을 숨기고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의 문호 개방을 틈타 1876년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듬해에 입국한 두세(C. Doucet, 丁力며爾) 신부는 박해 후 처음으로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였다. 이어 1882년에는 1878년 이래 강원도 · 황해도 ·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로베르(A. Robert, 金保祿) 신부가 경상도 지역의 전담 신부로 임명됨과 동시에 이 지역 전체가 경상도 지역 본당' 으로 설정되었다.
로베르 신부는 이후 자신의 거처를 지평(현 경기도 양평군 砥平里)과 예수성심신학교가 있던 원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釜坪里)에 정한 다음, 즉시 사목 순방에 나서 1882~ 1883년 사이에 경상도 지역의 교우촌들을 찾아 다녔다. 당시 그가 공소로 설정한 경상도 지역의 교우촌들은 모두 26개로, 신자수는 1,518명이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대구와 인근 지역, 그리고 경상도 남부지역의 교우촌이었으며, 북부 지역의 교우촌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 북부 지역을 처음 순방한 것은 1년 뒤인 1883~1884년으로, 이때 문경의 먹뱅이(현 문경군 가은읍 왕능리)와 함창의 새터(현 상주군 함창읍 신흥리)가 공소로 설정되었는데, 당시 이곳의 신자 수는 각각 97명과 11명이었다. 이어 로베르 신부는 상주의 수봉(현 상주군 모동면 수봉리)과 용궁의 도경(현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을 공소로 설정하였다.
로베르 신부는 1885년에 부엉골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하면서 대구에서 조금 떨어진 신나무골(경북 칠곡군 지천면 蓮花洞) 교우촌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때 대구로 진출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 신앙의 자유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고 천주교에 대한 적대감과 신자들에 대한 위협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고 이듬해 조약이 비준되면서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자, 로베르 신부는 1887년 3월경에 신나무골을 보좌인 보두네(X. Baudounet, 尹沙勿) 신부에게 맡기고 대구 인근의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인근)로 거처를 옮겨 '대구(현 계산동) 본당' 을 설립하였다. 1893년 겨울 경상도 지역의 공소들은 교구장 뭐텔(G.Mutel, 閔德孝) 주교의 사목 순방을 받게 되었다. 또 이를 기회로 대구 본당의 로베르 신부는 이듬해 봄까지 용궁의 청오리 · 예천의 허리티 · 문경의 쌍용 등을 공소로 설정하였으며, 이후로는 문경 · 상주 · 예천 · 풍기 등지의 교우촌들이 계속하여 공소가 되면서 신자수도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890년에는 '부산(현범일) 본당' 이 설립되었고, 1894년 6월에는 파이야스(C.Pailhasse, 河敬朝) 신부가 신나무골에 와서 머무르며 경상도 북부 지방을 맡아 전교하다가 9월경 가실(佳室, 왜관읍 낙산동 노호)로 이주하여 '가실 본당' (낙산 본당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그 후 1898년 파이야스 신부가 황해도 장연의 두섭 본당으로 전임될 당시 경상도 북부 지역의 공소수는 모두 12개였고, 신자수는 387명으로, 그중에서 문경의 쌍용(현 문경군 농암면 내서리) 공소가 신자수 81명으로 가장 컸다.
파이야스의 후임으로 가실에 부임한 사제는 한국인 김성학(金聖學, 알릭스) 신부였다. 그는 이후 북부 지방의 전교에 노력하면서 교구장 위텔 주교에게 본당 분할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1901년에는 '김천 본당' (황금동 본당의 전신)이 신설되면서 김성학 신부가 그 초대 주임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조아요(A. Joyau, 玉裕雅) 신부가 가실 본당의 3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경상도 북부 지역의 공소들 중에서 문경 · 상주 · 함창의 공소들은 김천 본당에, 안동 · 의성 · 예천의 공소들은 가실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조아요 신부는 가실 본당에 부임한 뒤 안동 지역에서 일어난 신자들과 양반 토호들과의 갖은 마찰을 겪어야만 하였는데, 오히려 그 와중에서 안동지역의 평민 개종자수가 크게 증가했다. 그는 이후 1907년 1월에 사망할 때까지 가실 본당의 신자수를 1,400명으로 증가시켰으며, 그의 후임으로는 소세(H. Saucet, 蘇世德) 신부가 임명되었다. 한편 김천의 김성학 신부는 1907년에 성당을 완공하고 성의학교(聖義學敎)를 설립하였으며, 1909년 1월에는 함창 잣골(척동)의 신자들도 학교를 설립하였다.
[본당의 설립과 확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경상도 북부 지역의 교세는 1910년 초에 15개 공소, 585명을 기록하게 되었다. 특히 그중에서 상주의 물미(사벌면 退江里) 공소는 1899년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이후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1910년에는 113명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문경의 표석골(현 점촌읍 공평리 表石洞) 공소도 신자수 79명으로 성장하였다. 바로 이 무렵 조선교구장 위텔 주교는 교구 분할의 필요성을 느껴 이를 교황청에 건의하였고, 교황 비오 10세는 이를 받아들여 1911년 4월 8일로 "대구교구"(대목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신부를 주교로 승품시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던 중 김천 본당 관할 아래에 있던 문경의 표석골 공소가 1922년 9월 24일 '공평 본당' (점촌 본당의 전신)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김천의 김문옥(金汶玉, 요셉)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날 상주의 물미 공소도 '퇴강 본당' (1969년에 폐쇄)으로 승격되면서 이종필(李鍾弼, 마티아) 새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경상도 북부 지역에는 한 번에 2개의 본당이 신설되었다. 공평 본당과 퇴강 본당에서는 이후 성당과 사제관 신축에 노력하여 1924년 10월에는 동시에 이를 완공하였고, 10월 5일에는 공평 성당이 먼저 '예수 부활'을 주보로 봉헌식을 가졌으며, 10월 6일에는 퇴강 성당이 '성모 그리스도인들의 도움' 을 주보로 봉헌식을 가졌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26년에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공평 본당 · 퇴강 본당을 비롯하여 안동 공소 등을 순방하였다.
드망즈 주교가 '안동(현 목성동) 본당' 의 설립을 결정한 것은 1927년 5월 23일이었고, 이를 발표한 것은 6월1일이었다. 동시에 그는 서정도(徐廷道, 베르나르도) 신부를 그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으며, 서정도 신부는 6월 14일 안동에 부임한 뒤 먼저 율세동의 사가를 매입하여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성당은 그 해 성탄 대축일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서정도 신부는 종숙(從叔) 서병조(徐丙朝, 베드로)와 공평 본당 김문옥 신부 등의 도움으로 1928년 10월 14일 안막동에 새 성당을 신축하였다. 이어 드망즈 주교는 1932년 5월 22일 이기순(李基順, 도미니코) 새 신부를 안동 본당의 보좌로 임명하여 임시로 예천의 신자들을 보살피도록 하였고, 11월 14일에는 예천의 성당(주보 :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을 완공함과 동시에 '예천 본당' 을 설립하고 이기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그 결과 경상도 북부의 본당수는 모두 4개로 증가하게 되었다.
퇴강 본당은 이종필 신부의 노력으로 꾸준히 신자수가 증가하였지만, 본당이 상주 지역의 한쪽에 치우쳐 있어 사목에 어려움이 있는데다가 신자들도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이종필 신부는 1926년 상주읍에 '부원 공소를 추가로 설립하였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인 1936년 초에는 문경의 공평 본당에 재임하던 김문옥 신부가 서문 외리에 부지를 매입한 뒤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36년 6월경에는 드망즈 주교의 결정으로 '상주 본당' (서문동 본당의 전신)이 설립됨과 동시에 김문옥 신부가 그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838년에는 드망즈 주교가 사망하면서 무세(G.Mousset, 文濟萬) 신부가 같은 해 12월 13일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42년 8월 30일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일본인 하야사카 구베에(早坂久兵衛) 주교가 대구교구의 3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퇴강 본당에 재임하던 정수길(鄭水吉, 요셉) 신부는 1937년 무렵부터 함창(咸昌) 공소에서 주로 거처하다가 1940년 7월 20일 언양(彥陽) 본당으로 전임되고, 후임으로 부임한 서형석(徐亨錫, 프란치스코) 신부가 함창 공소로 부임하면서 '함창 본당' 이 설립됨과 동시에 공평 본당과 퇴강 본당이 여기에 합병되었다. 이어 1942년 5월에 부임한 이기수(李己守, 야고보) 신부는 함창 공소에 잠시 머무르다가 이전의 공평 본당으로 가서 거주했으며, 퇴강 본당에는 김준필(金俊弼,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했다. 이기수 신부는 그 후 공평 본당을 함창으로 옮기려다가 실행하지 못했고, 1948년 8월 1일 그 후임으로 임명된 김동한(金東漢, 가롤로) 신부가 함창에 부임함으로써 공평 본당은 그 공소가 되었다.
한편 광복과 6 · 25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대구교구는 크게 변모하였다. 우선 1948년 12월 9일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가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1월 30일 주교 서품식 및 착좌식을 가졌으며, 1952년 7월 6일에는 '왜관 감목 대리구' 가 설정되면서 비테를리(T. Bitterli, 李聖道) . 신부가 초대 감목으로 임명되었다. 그 결과 1953년에는 안동 본당이, 이듬해에는 그 전해에 부활된 '점촌 본당' (공평 본당의 후신)이 새 감목 대리구 소속이 되었다. 그러다가 최덕홍 주교는 1954년 12월 14일 사목 방문 도중에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1955년 7월 3일 서정길(徐正吉, 요한) 신부가 제7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9월 15일에 주교 서품식 및 착좌식을 가졌다.
이 무렵 안동 본당은 1956년의 성당 화재 사건으로, 상주 본당은 '황 데레사 사건' 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결국 대구교구에서는 1955년 5월 12일 상주 본당을 폐쇄하면서 함창 본당의 공소가 되게 하였다가 이듬해 7월 14일에 본당으로 부활시켰으며, 1957년 2월 2일에는 황 데레사 사건에 대해 금지 판정을 내렸다. 한편 왜관 성 베네딕도회에서는 1957년 5월 문경에 '가은 본당 을 신설하고 지베르츠(E. Siebertz, 池仁洙 신부를 임명하였다가 이듬해 12월 7일에는 문경에서 새 성당 봉헌식을 갖고 가은 본당을 '문경 본당' 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전하였다. 문경과 가은 본당이 다시 분리된 것은 1962년이었다.
Ⅲ . 교구의 설정과 성장
[안동 감목 대리구의 설정] 대구교구에서는 이 무렵 경상도 북부 지역의 전교 활성화를 위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초청하려고 계획하였다. 그 결과 1955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펠리스(M. Pélisse, 裴世英) 신부가 포항(현 죽도) 본당에 부임하였고, 이때부터 감목 대리구 설정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1958년 6월 2일에는 마침내 "안동 감목 대리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알레르(F. Haller, 하예례) 신부가 초대 감목 대리에 임명되었다. 그에 앞서 5월 10일에는 경상도 북부 지역의 본당 신부들에 대한 인사 이동이 단행되면서 '봉화본당' 이 설립되고 모리스(J.M. Maurice, 이성춘)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영주 본당' (휴천동 본당의 전신)이 설립되면서 펠리스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안동 감목 대리구는 안동 · 영주 · 영양 · 봉화 · 예천 · 영덕 · 청송 지방을 사목관할로 하였으며, 의성은 대구교구, 상주 · 문경은 왜관 감목 대리구 소속이었다.
안동 감목 대리구가 설정된 이후 경상도 북부 지역의 전교 활동은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우선 왜관 성 베네딕도회에서는 1962년 4월 12일 상주 본당에서 '화령 본당' 을 신설 분리하면서 지베르츠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했고, 1963년 11월 28일에는 상주 본당에서 '남성동 본당 을 분리하고 쇠펄링(A. Seuferling, 閔公道)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때 상주 본당이 '서문동 본당' 으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도 안동 감목대리구 설정을 전후해서는 1958년 5월 춘천교구의 '울진 본당 , 1960년 2월 '의성 본당' , 1961년 5월 의성의 '다인 본당 , 1962년 4월 '영덕 본당' , 1963년 11월 '영양 본당' , 1965년 2월 점촌의 '신기 본당 과 '청송 본당' 등이 신설되었다.
1962년 3월 24일에는 한국 천주교회에 정식으로 교계 제도(敎階制度)가 설정되면서 대구 대목구가 대구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부산 · 청주교구와 함께 대구 관구를 형성했다. 한편 그 해 2월 15일자로 코요(C. Coyos, 具仁德) 신부가 제2대 안동 감목 대리로 임명되면서 초대 감목 대리였던 알레르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대전으로 옮겨 갔다. 이어 1965년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면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강조되기 시작하였고, 전례나 제도적인 측면에서 여러 가지 쇄신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코요 신부는 1966년에 룩셈부르크 관구의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를 초청함과 동시에 안동의 율세동에 학교 부지를 매입하였고, 1968년 7월에는 이 수녀회의 수녀들이 안동에 도착하여 학교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안동교구의 설정과 초기 사목] 경상도 북부 지역의 교세가 점차 확대되어 가자 교황 바오로 6세는 1969년 5월 9일 경상도 북부 지방을 사목 관할로 하는 "안동교구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두봉(레나도) 신부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7월 25일 새로 완공된 상지학교 교정에서 두봉 주교의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안동교구로 편입된 지역은 안동 감목 대리구 지역인 안동 · 영주 · 영양 · 봉화 · 예천 · 영덕 · 청송 지방과 대구대교구 지역인 의성, 원주교구 지역인 울진, 왜관 감목 대리구 지역인 상주·문경 지역이었으며, 교세 현황은 18개 본당에 175개 공소, 그리고 총 신자수는 27,742명이었다. 이때 본당 신부가 공석이던 퇴강 본당은 폐쇄되었다.
착좌식 이후 두봉 주교는 1969년 12월 14일 류강하(柳康夏, 베드로) 등 3명의 사제 서품식을 처음으로 집전하였고, 이길준(李吉俊, 바오로) 신부를 교구 상서국장으로 임명하는 등 인사 이동을 통해 교구의 사목 체계를 정립하였으며, 본당 순회를 통하여 교구의 전반적인 실정을 이해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런 다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상을 정립해 나간다는 원칙 아래 교구의 사목 방향을 설정하고, 신자들의 신앙과 성사 생활, 교구의 육영과 사회 사업에 알맞는 지침을 발표하였다. 아울러 두봉 주교는 각 본당마다 사목위원회를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교구 차원의 경제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앞서 교구에서는 1969년 10월 23일에 '학교 법인 상지학원' 을 설립하고, 이듬해 3월에는 '상지여자실업전문학교 (상지대학의 전신)와 '상지여자중학교 를 개교하였다. 또 그 이전부터 활동해 오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 운동과 1969년에 새로 설립된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와 가톨릭 농촌 청년회(J.A.C.)를 중심으로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활성화에 노력하는 한편, 1971년 8월에는 안동교구 제1차 꾸르실료를 개최하였다. 이어 1972년 5월에는 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창립하였고, 1971년부터는 '안동 문화 회관' 건립을 시작하여 1973년 9월 22일에 이를 개관하였으며, 1978년 3월에는 안동의 목성동 본당에서 처음으로 성령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수도회로는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에 이어 1970년부터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가 신기 본당(주평 본당의 후신)과 점촌 본당 등지에 분원을 설립하였고, 1973년에는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 가 진출하여 1976년에 마리스타 회관을 완공하고 학생 기숙사와 야간 학교를 시작하였다.
교구에서 중점을 둔 또 다른 사목 활동은 농어촌 사목과 사회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서 두봉 주교는 1969~1970년에 농어촌 개발과 신용 협동 조합 운동을 위한 교서를 발표한 바 있었다. 이에 맞추어 1970년에는 영주 본당에서 먼저 영농 협업 단지를 시작했고, 1972년에는 울진 본당에서 어민들이 모여 '해성 친목회' (1976년에 해성 협업회로 개칭)를 조직하였으며, 1970년에 개최한 신용 협동 조합 강습회를 시작으로 1972년에 목성동 본당과 예천 본당에서 신용 협동 조합을 설립한 데 이어 각 본당과 공소로 이 운동이 확대되어 나갔다. 아울러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서는 노동자와 농어민들을 위한 인권 교육을 실시하였고, 교구에서는 유치원과 탁아소를 건립하여 지역 사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두봉주교는 1973년 11월 26일 안동시 용상동에 장애인 직업 훈련원을 개원하고, 11월 27일에는 영주 상망동에 다미안 피부과의원을 개원하여 나환우들을 위한 진료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농민 운동과 교구의 성장] 이미 설립 직후부터 농촌지역에 관심을 가져오던 교구에서는 1970년대에 들어와농촌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농촌 본당 · 공소 살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1976년에는 공소 주일학교 교사 피정과 농촌 공소 지도자 연수회를 가졌으며, 1977년 4월에는 사목국 안에 '농촌 사목부' 를 설립하였다. 교구 안에서 본격적으로 농민 운동이 전개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우선 1977년 10월에는 안동 문화 회관에서 농민 · 근로자 · 양심수를 위한 기도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류강하 · 정호경(鄭鎬庚, 루도비코) 신부 등이 연행되어 고초를 겪은 뒤에 석방되었으며, 이듬해 11월에는 함창 본당에서 쌀 생산자 대회 및 추수 감사제가 개최되었고, 그 해 12월 27~28일에는 '안동교구 농민회' 가 창립되었다.
감자 농사 폐농으로 발단된 '안동 농민회 사건' (일명 오원춘 사건)이 일어난 것은 농민회 창립 총회 때였다. 당시 동해 지역 이사로 선출된 오원춘(吳元春, 알풍소)이납치되자 교구의 모든 신자들은 항의 기도회를 개최하였으며, 성직자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사건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그 와중에서 정호경 신부와 정재돈(鄭數)이 투옥되었으며, 경찰에서는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구의 전 사제와 신자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독재 정치에 항거하였다. 정호경 신부와 오원춘 · 정재돈이 석방된 것은 1979년 12월 8일 긴급 조치 제9호가 해제되면서였다. 이후 교구에서는 1981년 11월 18일 안동 용상동에 농민 회관을 건립하였으며, 계속하여 소 값 피해 보상 · 고추 피해 보상 · 농촌 의료 문제 · 농민 부채 탕감 등을 위한 농민 대회와 농촌 지도자 교육을 수시로 개최하였다.
그 동안 교구 지역 안에서는 농민 운동에 감화되어 입교하는 신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1971년 의성에 '안계 본당' 이 설립된 데 이어 1973년에는 안동의 '동부동 본당' 이 설립되었고, 이후로 안동 '태화동 본당 (1979), 영주 '풍기 본당' (1980), 점촌 '모전 본당' (1981), 영주 '하망동 본당' (1986)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1972년 12월 29일에는 '상지여자고등학교' 가 인가를 받아 이듬해 3월 개교하였으며, 1978년 12월 1일에는 교구 성소 후원회가 발족되었고, 1979년에는 교구 매리지 엔카운터(M.E.) 운동이, 1981년에는 인성회(仁成會) 활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1979년 10월 14일에는 오원춘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교구 설정 10주년 기념 신앙 대회를 개최하였으며(장소 : 상지전문대학),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기념하여 피정과 기도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고, 이듬해 8월 교구 정의 평화위원회가 발족된 데 이어 9월 15일에는 마원 성지에서 순교자 박상근(마티아)의 유해 발굴과 안장식을 가졌다. 이에 앞서 1984년 4월에는 안동시 안막동에서 교구청사 신축 공사가 시작되어 같은 해 12월 17일에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교구 설정 25주년과 현재〕 1990년 5월부터 교구에서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생명의 공동체 운동' 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생명 운동과 소공동체 운동의 접합을 통하여 농민 운동을 새로운 방향에서 전개하고, 2000년 대희년과 삼천년기의 복음화를 준비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던 중 초대 교구장 두봉주교가 오래 전부터 교황청에 표명해 온 교구장 사임 건의가 받아들여져 1990년 10월 6일자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박석회(이냐시오) 신부가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12월 2일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사목 표어 아래 박석희 주교의 서품식 및 교구장 이 · 취임식이 거행되었고, 박석희 주교는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사목 순방을 완료한 뒤 사목 방향을 설정하였다. 당시 안동교구의 교세는 25개 본당에 신자수는 40,285명이었다.
박석희 주교는 교구장 착좌 다음해에 울진의 후포 본당을 설립하고, 이미 시작된 생명의 공동체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교구 안에서는 생활 협동 조합 운동과 소공동체 운동, 지구별 생명 공동체 모임 운동이 동시에 시작되었으며, 1990년에는 함창 본당에서 생활 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할머니 두레 집' 을 개설하였다. 아울러 1991년 12월에는 영주시 상망동에 양로원 '다미안의 집' 을 인가받아 이듬해 개원했고, 안동시 남후면에 있는 '우리집 양로원' 의 운영권을 위임받아 용상동 본당에서 운영하였다. 1992년부터는 영주 하망동 본당 · 안동 학생 회관 · 상주 계림동 본당 등에서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또 교구에서는 이 무렵부터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고, 1993년에는 우리 농산물 직판장을 운영하였다.
1994년에 안동교구는 교구 설정 2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 해 5월에 25주년 기념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각 분과별로 기도 봉헌 운동 · 교회사 강연회 · 교회 사적지 개발 사업 등을 전개해 나갔다. 아울러 안동군 풍천면에 마련된 새 부지에서 교육관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고, 5월 29일에는 '이 땅에 푸른 움이' 라는 주제 아래 교구 설정 25주년 기념 신앙 대회(장소 : 안동시민 운동장)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후 박석희 주교는 대희년을 앞두고 교구 전 신자들에게 올바른 신앙 생활과 신심 활동,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활성화에 노력하도록 하였고, 교구는 안정 속에서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2000년 10월 9일 박석희 주교가 사목 활동 도중에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김욱태(레오) 신부가 교구장 직무 대행을 맡아 교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안동교구는 교구 설정 30년인 1999년 말 현재 총 신자수 43,437명, 본당수 31개, 공소수 84개, 성직자수 61명(외국인 및 수도회 소속 포함), 진출 수도회 21개인 교구로 성장하였다. (→ 대구대교구 ; 한국 천주교회)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상 · 중 · 하1 김구정, 《천주교 경남 발전사》, 天主教 釜山敎區, 1967/ 天主教釜山教區, 《教區年報》, 韓國敎會史研究所, 1984/ 天主教 大邱大教區史 編纂委員會 편, 《大邱本堂 百年史》, 대건출판사, 1986/ 마백락, 《경상도 교회의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천주교 안동교구, 《고문서》, 안동교구사 자료 2집, 1994/ -, <교구 전사》, 안동교구사 자료 4집, 1997/ 一, 《기타자료》, 안동교구사 자료 7집, 1997/ -, 《교구 25년》, 안동교구사 자료 5집, 1997/ 영남교회사연구소 편, 《대구의 순교자들》, 천주교 대구대교구, 1998. 〔車基眞〕
안동교구
安東教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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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본당 분할 계통도(1922~ 1999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