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근 (1879~1928)

安明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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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가. 1910년 안악 사건(安岳事件)의 주모자.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사촌 동생. 본관은 순흥(順興). 세례명은 야고보.
1879년 9월 17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안태현(安泰鉉)과 진주(晋州) 김 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권(權) 수산나와 결혼하여 아들 의생(毅生) · 양생(陽生)과 딸 순생(順生)을 두었다. 고려 말의 이름난 유학자인 안유(安裕)의 후손으로 부유한 무관 가문이었는데, 조부인 인수(仁壽)는 진해 현감(鎭海縣監)을 역임하였으며, 부친 태현은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숙부 태훈(泰勳)이 개화당과 관련되어 갑신정변 이후 몸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信川君 斗羅面 清溪洞)으로 이주할 때 함께 따라갔다. 또 안태훈이 청계동에 천주교를 전파하자, 안명근은 1897년 11월 17일 청계동을 사목 방문한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국권 회복 운동에 관여하면서 비밀 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김구(金九) 등과 교류했던 그는, 특히 1909년 10월 사촌 형인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한 뒤 한일합병이 되자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1910년 11월 배경진(裴敬鎮) · 박만준(朴萬俊) · 한순직(韓淳稷) 등과 함께 자금을 모았는데, 신천의 이완식(李完植)으로부터 6,000원, 송화(松禾)의 신석효(申錫孝)로부터 3,000원을 모금했다. 또한 그는 신천의 민모(閏某)에게 10,000원을 기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불응하자 권총으로 위협하여 약속을 받아 냈지만, 그의 고발로 12월 평양 역에서 천주교 신자 원행섭(元行燮)과 함께 재령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한편 그 이전에 빌렘(J. Wilhelm, 洪錫九) 신부는 안명근이 한국인들의 음모에 관여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뮈텔 주교에게 보냈었는데, 뮈텔 주교는 이를 조선 총독부 경무 총장 아카시(明石元二郞)에게 알렸고, 이것이 그가 체포된 빌미가 되었다.
안명근의 체포는 안명근 사건, 즉 안악 사건(安岳事件)의 발단이 되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일대의 애국 계몽 운동과 관계가 없었으나, 일제는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 운동과 연계시켜 탄압하고자 70여 일 동안 관계자들을 고문하고 회유하였지만 자백을 받아 내지 못하였다. 이에 일제는 안악을 중심으로 160여 명의 민족 운동자들을 체포하고 안명근에게는 종신형, 김구(金九) · 김홍량(金鴻亮) 등에게는 15년 형을 언도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평안도의 민족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져 이른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 사건' (105인 사건)으로 연계 · 확대되었다. 안명근은 15년을 복역하다가 1924년 가출옥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계속하던 중, 1928년 7월 25일 길림성 의란현 토룡산진 원가둔(依蘭縣 土龍山鎮 袁家屯)의 팔호력(八虎力)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빌렘, 니콜라 조제프 마리 ; 안악 사건 ;안중근)
※ 참고문헌  《順興安氏大同譜》, 順興安氏大同譜所, 1990/ 김구, 《백범 일지》, 돌베개, 1997/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뮈텔 주교 일기》4 ·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安岳事件判決文〉, 《韓國學報》 8집, 一志社, 19771 崔明植, 《安岳事件과 三一運動과 나》, 兢虛傳記編纂委員會, 1970/ 慎鏞廈 〈新民會의 創建과 그 國權恢復運動〉, 《韓國學報》 8 · 9집, 一志社, 19771 有馬義隆 편, 《朝鮮總督暗殺陰謀事件》, 高麗書林, 1986/ 尹慶老, 《105 人事件과 新民會 研究》, 一志社, 1990/ 尹善子,〈 '한일합병' 전후 황해도 천주교회와 빌렘 신부>, 《한국 근현대사 연구》 4집, 한울, 1996. 〔崔起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