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셀모, 캔터베리의 (1033~1109)

〔라〕Anselmus Cantuai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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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모가 쓴 <대어록>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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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모가 쓴 <대어록> 일부.

성인. 스콜라학의 체계를 확립한 교회 학자. 캔터베리의 대주교(1093~1109) 축일은 4월 21일.
[생애와 활동] 1033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Aosta)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056년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클뤼니 수도원과 프랑스의 유명한 학교 등에서 교육을 받았다. 1059년에는 노르망디 베크(Bec)의 베네딕도회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 수도원 원장은 지나치게 논리학을 강조하던 변증론자들을 논쟁으로 물리쳐 명성을 얻은 란프랑코(Lanfanccus Cantuariensis, 1005~1089)였다. 란프랑코는 훗날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1060년에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안셀모는 수도원에 정식으로 입회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때 그는 수도원의 엄격한 수련과 병행하여 문법학과 논리학 등 정규 과정을 배우는 한편,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와 보에시우스(A_M.T.S.Boethius, 470/475?~524)를 포함한 다양한 학자들의 저서들을 섭렵하였다.
1067년에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안셀모는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고, 윤리교육과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 학교로 발전시켰다. 1078년에 수도원 원장이 된 그는 박학 다식과 성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많은 청년들이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한곳에서 교육할 수 없어 프랑스와 영국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를 통하여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영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안셀모는, 란프랑코가 사망한 뒤 영국 왕 월리엄 2세(William II Rufus, 1056~1100)에 의해 1093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후 안셀모는 적지 않은 분쟁에 휩싸였다. 그는 성직자들을 직접 임명하고 교황과의 연락을 제한하는 등 영국 왕의 교회 직무 간섭에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에 따라 교회는 자유로워야 하며 오직 하느님 계명의 지배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왕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교황의 권위를 위해서 투쟁하는 한편, 세속화된 성직자들을 개혁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로 인해 다른 많은 주교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영국의 교회 내외에서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영국 성직 서임권 논쟁의 여파로 1097년에 영국을 떠나 유럽 망명 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망명 중에도 자신을 존경하던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영국 왕 월리엄 2세가 사망한 후 1100년에 영국으로 돌아온 안셀모는 그를 계승한 헨리 1세(1100~1135)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 1103년에 다시 망명 길에 올랐다. 그 후 그는 영국 왕과 교황과 한자리에서 협상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충성 서약은 하되 왕으로부터 서임은 받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1106년 영국으로 돌아온 안셀모는 교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계속 힘쓰는 한편, 성직자들의 생활을 수도원 생활에 기초한 '수도적 삶 의 방향으로 혁신하고자 노력하였다. 만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힘든 상태에서도 영성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1109년 4월 21일 사망하였으며, 1720년에는 교황 글레멘스 11세(1700~1721)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저 서] 안셀모는 영적인 스승이자 사목자로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400여 통에 달하는 편지를 썼으며, 자신의 명상을 기도와 시 등으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철학 및 신학 저서들이다.
《독어록》(獨錄, Monologion)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경험적인 증명을 시도한 그는,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내용으로 논리적인 도약을 통하여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의 이데아설을 그리스도교 교리를 논증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이 저서에서 그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성서와 전승 및 교부들의 학설들을 배제하고 합리적인 방식만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이 신앙에 기초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한편 이 책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대어록》(對語錄, Proslogion)은 그의 다른 저서들과는 달리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방식으로 저술하였다. 제2~4장에 실린 간략한, 그러나 훗날 유명해진 '존재론적(본체론적) 증명'에서는 《독어록》의 귀납적 증명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연역적인 방식을 통하여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하였다. 《진리론》(DeVeriate)과 《자유 의지론》(De Libero Arbitrio) 등은 베크 수도원 학교 교장으로 있던 시기에 저술한 작품이다.
그는 1098년에 저술한 《삼위 일체에 대한 신앙》(DefdeTiminitis)에서 유명론자인 로셀리누스Roscelinus Com-pendiensis, 1050?~1125?)를 철저히 비판했는데, 유명론자들이 삼신론(三神論)에 빠질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사벨리우스주의(Sorilanaisims)와 같은 모달리즘(modalismus)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동정녀 잉태론》(De Conceptu Virginal)은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 설명에 필요한 학문적인 근거를 마련하였다.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저서는 1094~1098년에 저술한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Cm Deus Homo)로, 육화와 구원에 관한 교리 발전에 신기원을 이룩한 책이다. 또 그가 죽기 전에 완성한 《성령의 유출론》(De Processione Spiritus Sanct)에는 아우구스티노의 《삼위 일체론》에 따라 '성자로부터' (filioque)도 성령이 유출(流出)된다는 서방 교회의 이론이 잘 설명되어 있다.
[사 상] 안셀모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개발한 학문적 방법과 목표를 통하여 수 세기 동안 중세 철학과 신학을 체계화하였기 때문에, '스콜라학의 아버지' 라고 불렸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변증법)을 통하여 신앙을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대어록》의 본래 제목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des quaerens intellectum)은 전체 스콜라학을 이끄는 좌우명이 되었다. 그리고 믿음의 내용을 이성에 의해서만 설명하려는 변증론자들에게는 반드시 신앙에 기초를 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 반면에, 신앙에 대한 이성의 개입을 완전히 거부하는 반(反) 변증론자들에 대해서는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는 내용을 이성을 통해 알려고 해도 무방할 뿐 아니라, 교회의 오랜 전통이 이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었다. 안셀모는 이러한 신앙과 학문의 견해에 따라 《독어록》과 《대어록》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며 탐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술하였다. 아우구스티노의 전통에 속하고 그 전통에 따라 사고한 안셀모였지만, 아우구스티노보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383~322/321)의 논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그의 관점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본질과 작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계와 구원사 안에서 필수적인 논증 근거(rationes necessariae)를 찾기 때문이다.
안셀모는 《대어록》 제2~4장에서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탐구하였다. 어리석은 자가 하느님을 부인할 때도 그의 정신 속에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관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 이론에 대하여 당시의 수도자 가우닐루스(Gaunilus)는 한 소책자에서 "상상 속에 떠오르는 행복한 섬에 대한 이데아만 보고 섬의 실존을 단정하지는 못한다" 고 반박하였다. 이에 안셀모는 최고로 가지적(可知的)인' (summum cogitabile) 이데아는 시작과 끝이 있고 한정된 경험적인 이데아와는 다른 것이며, 자신의 논증 과정은 이 절대적인 이데아에만 예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아우구스티노의 전통에 따라 세계를 선(善)으로 충만한 창조주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한 그는, 창조적인 정신이 인격적인 말씀으로 육화하였다는 근본 사고로 부터 창조주의 영원한 계획과 시간 안에서의 활동, 종말론적인 완성 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사고로부터 삼위 일체 하느님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에 의하면, 이성을 지닌 피조물은 창조주인 영원한 선과 진리로 향할 때 에만 자신에게 선사된 존재를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름(mecttudo)과 자유는 함께 속한다. 《악마의 몰락에 대하여》(De casu diaboli)에서 안셀모는, 인간이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지 못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타락의 사건을 반성하였다. 죄인은 창조주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리지 않았고 자신을 악한 욕심에 내맡김으로써 방향을 잃고 추해졌으며, 결국 치명적이고 죄스러운 결여와 심판 아래 서 있다. 이 죄악의 위급한 상황으로부터 그는 해방과 구원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 것이다. z장 참을 수 없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빚지고 있는 공경을 거부하는 것, 즉 빼앗은 것을 돌려 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 죄악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가치의 보상만이 하느님의 영예를 복구할 수 있을 정도로 심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해야 하지만 죄인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을 하느님이자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수행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인격적인 말씀이 인간의 구체적 · 역사적 본성을 취하였고, 이를 통하여 신적인 로고스 안에서 인간의 본성이 치유되고 구원받게 되었다.
안셀모가 주장한 구원론의 근본 의도들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첫째, 안셀모가 성서 안에서 발견하였고 <독어록》에서 다룬 하느님의 자비심과 정의(진리)의 분리할 수 없는 연관성을 주의하지 않는 경우에 오해가 생긴다. 하느님은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의롭고, 그분은 자신의 자비심 안에서 신의를 지킨다. 둘째, 하느님의 구원하는 정의에서는 "무한한 죄에 대해서 무한한 속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죄를 저지른 인간의 편에서 스스로 속죄할 수 있을 경우에만 정의로움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기 스스로 일어나고, 스스로를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그의 구원론에는 게르만족의 명예 회복에 대한 사회법적인 표상이 적용되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가 없다.
[영 향] 안셀모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에 관한 통찰은 수 세기 동안 많은 토론을 불러일으키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교부 신학을 개념적이고 논리적으로 조명하고 증명하려는 안셀모의 의도는 '권위' (auctorias)를 '이성' (ratio)을 통하여 학문적으로 변형시키려는 '스콜라학적인 방법' 으로 체계화되고 효과를 얻었다. 이와 같이 그의 뛰어난 학문적 성과나 단호한 정치적인 투신의 배경에는 창조의 질서와 계시의 질서가 서로 구분될지라도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하나의 "빛나는 질서"에 귀속된다는 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철학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안셀모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가지는 위력은 안셀모-아우구스티노적인 사고 체계 전체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안셀모에게 '신앙의 이해' (intellectus fidei)는 이성적인 통찰, 변증법적인 개념화 사고의 노력, 개인적인 체험이 연결된 복합적인 행위이다. 한 차원이 억압된다면 그의 신학적인 계획은 그 가치가 축소된다.
13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존재론적 증명을 시도하였던 사람들, 대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는 가우닐루스 수사와 마찬가지로 사고 속의 가장 완전한 존재로부터 사고상의 최고 완전자의 현존으로 넘어가는 안셀모의 사고 과정을 비판하였다. '존재' (esse)와 본질' (essentia)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에서 출발해서, 이들은 하느님에게 근본적인 본질과 존재의 동일성을 형이상학적으로만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존재론적 증명을 변호하였던 스콜라학자들, 예를 들어 보나벤투라(Bonaventua, 1217?~1274)나 스코투스(Joannes Duns Scotus, 1265~1308)는 증명 과정의 형이상학적인 심화를 위해서 노력하였다. 또한 여러 근대 철학자들(데카르트 · 스피노자 · 라이프니츠 · 헤겔 등)의 철학 체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안셀모의 증명 방식이 수용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의 철학적 신론(神論)이 발전되었다. 반대로 칸트(I. Kant, 1724~1804)는 《순수 이성 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이러한 시도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비판가들이나 옹호자들 모두 안셀모의 증명 과정을 전체적인 사고 체계로부터 분리시켰다. 신 존재 증명의 신학적 성격은 바르트(K.Barth, 1886~1968)에 의해 지나치게 강조되었고, 분석 철학의 대표자들은 언어 철학적인 요소들을 극단화시켰다. 증명에 대한 이런 해석들은 논증의 주어인 하느님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필수적으로 존재하는"이라는 술어에만 관심을 보였다.
교부들의 전통을 따르는 안셀모의 '자유 의지론' 은 시토회 신학자인 베르나르도(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와 파리의 대학 총장 필립보(Philippus Cancellarius, 1160/1185~1236)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에서 밝힌 그의 구원론은 가톨릭 신학에서 오랫동안 규범적인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안셀모의 이론이 하느님의 본질적인 윤리적 통일성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외부 세계를 본질적으로 서로 반대되는 위치에 놓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 자기 비허(自己脾虛)의 하느님을 강조하는 일부 현대 신학자들도 하느님의 전능함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인간적인 속성에만 국한시킨 그의 이론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안셀모의 구원론은 종교 개혁에서 시작된 비판들을 거치면서도 그 중요성을 계속 유지했다. → 보상 ; 스코투스, 요한네스 둔스 ; 스콜라학 ; 신학사 ; 아우구스티노주의 ;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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