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 본당

安岳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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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말에 신축한 안악 본당 사제관.

1936년 말에 신축한 안악 본당 사제관.

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안악군 안악면 신장리(新長里) 소재. 1936년 5월 매화동(玫花洞)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50년 12월에 폐쇄되었다. 관할 공소는 마명리 · 유천리 공소와 안악 재령군 군계 부근의 공소 등 3개소였다. 〔교 세〕 1937년 616명, 1944년 800여 명. 〔역대 신부〕 초대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1936. 5~1946. 5), 2대 김경민(金景旻) 루도비코(1946. 5~1950.6).
안악 지역에 신자들이 처음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말이었는데, 장련(長連) 지방에서 사목하던로(J.L. Rault, 盧若望) 신부에 의하면 1889년에 15명의 신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자수가 꾸준히 늘어나자 매화동 본당 우도(P. Oudot, 吳保祿, 바오로) 신부는 1899년 6월에 안악읍 공소를 설립하였다. 당시 신자수는 53명이었고, 예비 신자는 45명이었다. 그리고 1927년에는 안악읍 공소 신자들이 비석리(碑石里)에 함석집 한 채를 매입하여 공소 강당을 마련하였으며, 이듬해 12월에는 주일학교를 개설하였다. 이때 김경욱(루도비코)을 비롯한 여러 교리 교사들이 어린이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십이단(十二端)과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을 가르쳤는데, 한때는 학생수가 120명이 넘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 결과 1936년 5월에 양덕환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안악읍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양덕환 신부는 신장리에 3,0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한 뒤 성당을 신축한 데 이어 사제관을 마련하였으며, 풍수원(豊水院) 본당의 신 가타리나를 전교 회장으로 초빙하였다. 또 윤계진(尹啓鎭, 베드로) 회장도 예비 신자 교리반을 직접 지도하고 미신자 가정을 방문하는 등 교세 확장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다. 이어 1946년 5월 초 재령(載寧) 본당에서 사목하던 김경민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그 무렵 공산 체제가 더욱 강화되어 두드러진 사목 활동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김경민 신부는 피신해 있으라는 신자들의 간곡한 권유를 받고도 주교의 명령 없이는 본당을 떠날 수 없다며 남아 있다가 1950년 6월 24일 안악 정치 보위부 부원에게 연행된 후 행방 불명되었다. 한편 그 해 10월경 월남 중이던 사창(社倉)본당의 김충무(金忠務, 글레멘스) 신부가 안악 본당에 들러 두 달 간 사목을 대행하다가 12월 5일에 남하하면 서 안악 본당은 폐쇄되고 말았다. (→ 김경민 ; 매화동 본당 ; 침묵의 교회 ; 황해도 감목 대리구)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경향잡지》 729호(1932. 3. 15), p. 107 ; 732호(1932. 4. 30) 846호( 1937. 1. 28), p. 61.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