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 사건

安岳事件

글자 크기
8
1910년 11월 안명근(安明根, 야고보)이 서간도(西間島)에 무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황해도 일대의 민족 운동가들이 탄압을 받은 사건.
1910년 8월 강제로 한일합병이 이루어져 국권을 잃자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사촌 동생 안명근은 북간도로 이주한 뒤 독립군을 양성할 무관 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그 해 11월 국내에 들어왔다. 이어 배경진(裴敬鎭) · 박만준(朴萬俊) · 한순직(韓淳稷) 등과 함께 자금 모집을 추진하던 그는, 신천의 이완식(李完植)으로부터 6,000원, 송화(松禾)의 신석효(申錫孝)로부터 3,000원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안명근은 신천 발산(鉢山)의 민모(閔某)에게 1만 원을 요구하다가 불응하자 권총으로 위협하여 약속을 받아 냈으나, 그가 재령 헌병대에 고발하여 12월 평양 역에서 천주교 신자 원행섭(元行燮)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런데 민모뿐만 아니라 빌렘(J.Wilhelm, 洪錫九) 신부 또한 안명근이 한국인들의 음모에 관여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뮈텔 주교에게 보냈고, 뮈텔 주교는 이를 아카시(明石元二郎) 조선 총독부 경무총장에게 알림으로써 일제는 안명근의 주변을 감시하였었다. 안명근은 서울로 압송되어 70여 일 동안 심한 고문을 받았고, 배경진 · 박만준 · 한순직 등도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일제는 그 동안 주시해 오던 황해도 지방의 배일(排日) 문화 · 교육 운동을 말살시키는 기회로 삼아 무관 학교 설립 자금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으로 날조한 뒤, 1911년 1월부터 황해도 지역의 지도적인 민족 운동가들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김구(金九) · 김홍량(金鴻亮) · 최명식(崔明植) · 이승길(李承吉) · 도인권(都寅權) · 김용제(金庸濟) 등은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와 면학회(勉學會)를 중심으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한 황해도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지도적인 인사들이었다. 일제는 이들에게 갖은 고문을 가하였는데, 단독 범행임을 주장하였던 안명근은 한순직의 회유에 무관 학교 설립 자금임을 진술하였다. 마침 최명식이 중국 안동현(安東縣)에 민족 자본 육성을 위한 무역회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일제는 이를 무관 학교 설립과 관련시켜 사건을 확대 · 날조하였다. 신석충(申錫忠)은 압송 도중 재령강 철교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고, 한필호(韓弼昊)는 고문을 받다가 순국하였다. 체포된 160여 명 중 18명이 강도 및 강도 미수죄 · 내란미수죄 · 모살 미수죄(謀殺未遂罪)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40여 명이 울릉도 · 제주도 등에 유배되어 거주 제한조치를 받았고, 안명근은 종신 징역, 김구 · 김홍량· 한순직 · 원행섭 · 배경진 · 이승길 · 박만준 등은 징역 15년, 도인권은 징역 10년, 김용제 · 최명식 · 양성진(楊星鎭) · 김익연(金益淵) 등은 징역 7년, 최익형(崔益馨) · 고봉수(高奉守) · 박형병(朴衡秉) · 장윤근(張倫根) . 한정교(韓貞敎) 등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15년을전후로 하여 김구 · 김홍량 · 최명식 등은 감형과 특사로 출옥하였으나, 안명근은 1924년에 가출옥하였다. 이 사건은 평안도의 민족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져 이른바 105인 사건과 연계되었고, 신민회 세력이 일망 타진되고 관서(關西) 지방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 빌렘, 니콜라 조제프 마리 ; 안명근)
※ 참고문헌  김구, 《백범 일지》, 돌베개, 1997/ 〈安岳事件判決文〉, 《韓國學報》 8집, 一志社, 1977/ 崔明植, 《安岳事件과 三一運動 과 나》, 兢虛傳記編纂委員會, 1970/ 《安郡誌》, 1976/ 有馬義隆 편, 《朝鮮總督暗殺陰謀事件》, 高麗書林, 1986/ 尹慶老, 1005人事件 新民會 研究》, 一志社, 1990/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崔起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