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복 (1712~1791)

安鼎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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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기호 남인(畿湖南人) 및 성호학파(星湖學派)에 속한 실학자. 역사학자.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 또는 상헌(橡軒). 본관은 광주(廣州).
1712년(숙종 38) 경기도 광주의 덕곡(德谷)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독학하다가 35세 때인 1746년에 성호 이익(李濯)을 방문하여 문인이 된 후 성호학파의 실학자가 되었다. 특히 윤동규(尹東奎) · 신후담(愼後聃) · 이병휴(李秉休)는 그의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성호의 고제(高弟)들이었다. 안정복은 성호의 문인이 된 후 만영전(萬零殿) 참봉(參奉)을 시작으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 익위사(翊衛司) 익찬(翊贊) · 목천 현감(木川縣監) 등의 벼슬을 거쳤으나, 관직 생활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주로 덕곡에 칩거하며 저술 활동과 후학 교육에 치중하다가 1791년(정조 15)에 사망하였다.
〔사 상〕 안정복은 유형원(柳馨遠)의 실학 사상과 더불어 성호의 학문과 사상을 가장 철저하게 전승한 성호의 문인 중 한 사람이었다. 공맹(孔孟)의 수사학(洙泗學)을 기본 학문으로 삼고, 성호의 《사칠신편》(四七新編)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으며, 《성호사설》(星湖僿說)이)이나 《곽우록》(藿憂錄) 등의 실학서를 통하여 성호의 실학 사상을 전수받았다. 그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성호의 가르침과 성호 문인들의 협조 아래 편찬되었는데, 철저한 역사 고증 · 역사 지리의 활용 · 정통 체계의 확립 · 사론(史論)의 강화와 함께 현실 개혁 의식이 담긴 실학적 역사서라는 점에서 후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대내적으로 조선 사회 전반의 모순과 부패를 비판하고 비교적 온건 개혁을 주장하였던 안정복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선배 성호 문인인 윤동규나 신후담과 더불어 벽위적(闢衛的)인 사상을 보였다. 특히 노년기에 서학(西學)에 보인 반응과 대처가 남달라 성호학파의 대표적인 벽위론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40대 때인 1750년대에 들어 서학에 관심을 갖고 이에 관한 여러 종류의 책을 읽었다. 리치(M.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 · 《기인십편》(畸人十篇) · 《변학유독》(辨學遺牘)을 호기심과 의구심을 갖고 분석한 그는, 서유럽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호평하였으나 종교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래서 천학(天學) 즉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단정하였고, 특히 영혼 불멸설 · 천당 지옥설 · 마귀론에 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분석 · 비판하여 성호의 동의를 구하기도 하였다. 성호가 1763년 사망하기 전까지 안정복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이론적인 비판에 머물렀다.
〔천주교 비판〕 안정복의 적극적이고 본격적인 천주교 비판은 노년기에 접어든 1780년대부터였다. 성호가 사망한 이후 윤동규 · 이병휴와 함께 성호학파를 유지하였으나 이들마저 각각 1773년과 1776년에 사망하자, 안정복은 성호학파의 원로로서 학파를 이끌어야 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호학파의 후계자로 기대와 촉망을 받던 권철신(權哲身)과 그를 따르는 유능한 젊은 학자들 다수가 천주교에 입교하거나 관심이 깊어지면서 유학 공부를 소홀히 하였다. 그리고 점차 자신을 멀리하자 안정복은 성호학파의 진로에 위기 의식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당시 천주교에 관계된 이들은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권철신의 동생 일신(日身)이 그의 사위였고, 정약용(丁若鏞)의 형 약현(若鉉)과 약전(若銓)은 그의 문인이었으며, 이기양(李基讓) 역시 인척으로 그의 문하를 자주 드나들던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지역적으로나 문인 관계로 그의 주변에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들이 많았던 것이 그에게 강박 관념을 갖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하학(下學) 중심의 유학을 고집하면서 천주교를 이단이라며 비판적 입장을 보이던 안정복은 정부의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성호학파의 진로에 타격이 될 것을 미리 막고, 또 많은 성호 문인이 희생될 것을 우려하여 권철신에게 천주교에서 손을 뗄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였다. 동시에 이기양 등에게도 협조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는 당시 천주교에 심취해 있던 젊은이들 대부분이 권철신과 친한 사람들이거나 그의 문도들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정복은 천주교의 확산을 막으려는 의도로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였다. <천학고>는 천학이 중국과 우리 나라에 들어온 역사와 서방 국가의 천학 풍습을 여러 문헌을 통하여 분석 · 소개한 논고이다. 천학이 동방에 전래된 지 오래되었지만 별 문제가 없었는데, 근래 선비들이 북경을 왕래하면서 천주교 서적을 반입하거나 탐독하는 등 천주교에 동요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리려는데 주된 목적을 두었다. 이 논고 뒷 부분에는 성호가 쓴<천주실의발>(天主實義鈸)을 요약하여 첨부하고, 안설(按說)을 통하여 성호가 천주교를 부정하였음을 밝혀 놓았다. <천학문답>은 《천주실의》를 겨냥하여 천주교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가한 논고이다. 서술 방법은 《천주실의》와 마찬가지로 문답 형식을 활용하였고, 내용에 있어서는 1724년에 쓰여진 신후담의 《서학변》(西學辨)을 많이 참고하였다. 29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본문의 주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서교(西敎, 천주교)를 불교의 여론(餘論)이라고 단정하였다. 현세를 내세의 천당에 가기 위하여 잠시 거쳐가는 세계라고 하거나 금수의 세계(禽獸世)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난하였으며, 천주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원수 즉 삼구(三仇, 己身 · 世俗 · 魔鬼)를 유교적인 입장에서 부정하였다. 그리고 영혼 불멸설 · 천당 지옥설 마귀론은 믿을 수 없으며, 천주교에서 말하는 천주의 천지 창조나 아담의 인류 조상론은 이치에 맞지 않고, 성서도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이 걸어 놓고 기도드리는 천주상도 가짜 상〔假像〕이라고 하면서 서사(西士, 신부)가 마귀에 미혹되었다고 비판하고, 천주교의 제사 금지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천학에서는 내세를 위해 하늘을 섬기지만 유교에서는 상제(上帝)의 명에 따라 하늘을 공경할 뿐이라고 하였으며, 천주라는 이름은 한(漢)의 애제(哀帝, 기원전 6~1) 이전에도 등장하였으니 예수의 천주성은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였다. 말미에 부록을 두어 성호가 살아 있을 때 천학에 관심을 두었다는 항간의 풍문을 반박하는 글도 실었다. <천학고>와 <천학문답>은 기호 지방은 물론 영남 남인의 벽위론자였던 남한조(南漢朝) · 정종노(鄭宗魯) 등에게 전해져 영남 지방의 유림들 에게도 많이 읽혀졌다.
천주교로부터 손을 떼게 하려는 안정복의 권고와 설득에 권철신과 그의 동료 및 문도들은 동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안정복을 멀리함으로써 성호학파는 유학을 고수하는 안정복 계열과 천주교에 입교하거나 관심 깊었던 권철신 계열로 사실상 양분되었다. 이후 안정복 계열은 '안정복→황덕일(黃德壹) · 황덕길(黃德吉)→허전(許(傳)→허전의 후학들' 로 학통이 전승되면서 천주교를 주된 표적으로 삼아 벽위의 강도를 더하였다. 그리고 보수적 성향이 강한 영남 지방으로 확산된 안정복 계열의 성호 학통은 19세기 후반 들어 천주교 배척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안정복은 그 밖에도 《동사강목》 · 《임관정요》(臨官政要) · 《하학지남》(下學指南) · 《성호사설유선》(星湖催說類選) · 《열조통기》(列朝通紀) · 《만물유취》(萬物類聚) ·《광주부지》(廣州府志) · 《대록지》(大麓志) · 《의 문》 (擬問) . 《대학심해》(大學心解) · 《잡동산이》(雜同散異) ·《내범》(內範) · 《희현록》(希賢錄) · 《가례집해》(家禮集解)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가 후학을 양성하던 '여택재' (麗澤齋)가 현재 경기도 광주읍 중대리 터골에 보존되어 있다. (→ 남인과 천주교)
※ 참고문헌  崔東熙, <안정복의 서학 비판에 관한 연구>, 《亞細亞研究》 19-2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李元淳, 《韓國天主教會史研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姜世求, 《순암 안정 복의 학문과 사상 연구》, 혜안, 1996/ -, 《성호 학통 연구》, 혜안, 1999. [姜世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