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애국자. 의사(義士). 자는 응칠(應七). 본관은 순흥(順興). 세례명은 토마스.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하였다.
〔생 애〕 출생과 신앙 활동 :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안태훈(安泰勳)과 조 씨(趙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894년 김홍섭(金鴻燮)의 딸 김아려(金亞麗)와 결혼하였다. 그의 집안은 고려 말 유학자인 안유(安裕)의 후손으로 부유한 무관 가문이었다. 부친 안태훈은 진사(進士)로 해서(海西) 지방에서 학문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으며, 개화당과 관련되어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몸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信川郡 斗羅面 清溪洞)으로 이주하였다. 청계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학문에 힘쓰기보다는 사냥하기를 좋아했고, 특히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1894년 동학(東學) 농민 전쟁이 일어나자 안태훈은 마을 사람들로 사병(私兵)을 조직하여 이에 맞섰는데, 안중근은 부친을 도와 청계동 일대에 나타난 동학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에게 노획하여 군량미로 사용한 곡물이 국가의 소유라며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이 반환을 요구하자, 안태훈은 종현(현 명동) 성당에 몇 개월 동안 피신해 있어야만 하였다. 그는 이때 성당에서 교리를 배우며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군량미 문제가 해결되자 많은 양의 교리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마을에 천주교를 전하였다. 1896년 겨울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안중근은 1897년 1월 11일 부친을 비롯한 숙부 사촌, 그리고 청계동 주민 등 33명과 함께 빌렘(J. Wilhelm, 洪錫九)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빌렘 신부를 도와 황해도에서 천주교를 전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빌렘 신부로부터 프랑스어와 서양 학문을 배워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또 우리 나라가 자주 독립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기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빌렘 신부와 함께 서울에 있는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를 찾아가 한국에 대학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 일로 외국인은 믿을 수가 없다며 크게 실망한 안중근은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도 그만두었다.
교육 활동 및 독립 운동 : 1904년 한국과 만주를 차지하고자 발발한 러일전쟁이 1905년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하여 국내외정세를 주의 깊게 살피던 안중근은 부친과 의논한 뒤, 중국 산동성(山東省)이나 상해(上海)에서 반일 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에 국권 회복을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단신으로 상해에 간 그는 황해도 재령(載寧)에서 오랫동안 선교 활동을 했던 르 각(Le Gac, 郭元良) 신부를 만나, 조국으로 돌아가 교육을 통해 백성을 깨우쳐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그의 충고를 듣고 귀국하였다. 안중근이 돌아왔을 때에는 부친이 사망한 뒤였다. 1906년 초 안중근은 진남포(鎮南浦)로 이사하여,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에 관여하며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할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또한 서북학회(西北學會)에도 가입하여 계몽 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 으로 고종(高宗) 황제가 퇴위하고 이른바 '정미(丁未) 7조약' 이 강제 체결되었으며,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때 안중근은 교육만으로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해외로 나가 무장 독립 투쟁에 투신하고자 하였다. 그는 원산과 간도(間島) 지방을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沿海州)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1908년 봄 이범윤(李範允)을 대장으로 한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참모 중장(參謀中將)이 되었다. 그 해 7월 안중근은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慶興) · 회령(會寧)에서 일본 군인과 경찰과 접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그는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법에 따라 석방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의병 사이에서 대립이 일어났으며, 석방 포로들의 정보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의병 부대가 대패하고 말았다. 의병들은 흩어지고, 안중근도 굶주림에 시달리며 산길을 헤매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였는데, 도중에 사경을 헤매는 동료들에게 대세(代洗)를 줄 만큼 그의 신앙은 견고하였다.
이 일로 한인 사회에서 안중근의 신망은 크게 떨어졌으나, 그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교포들의 독립 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1909년 2월 그는 엔치아 부근의 카리마을에서 동지들과 동의 단지회(同議斷指會)를 결성하고, 11명의 동지와 왼쪽 약지를 잘라 태극기에 '대한 독립' 이라고 혈서를 쓴 뒤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이루기로 맹서하였다.
하얼빈 의거 : 1909년 9월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 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V.N. Kokovsev)와 회견하기 위하여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총리 대신을 여러 차례 지낸 이토는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한국 초대 통감(統監)을 거쳐, 추밀원 (樞密院) 의장으로 재임 중이던 한국 침략의 원흉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에서 정재관(鄭在寬) · 김성무(金成武) · 이강(李剛) 등과 이토의 처단을 논의한 안중근은 10월 21일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고, 이후 유동하(劉東夏) · 조도선(曹道先) 등이 거사에 참여하였다. 하얼빈에서는 김성백(金成白)의 집에 머무르며, 이토의 일정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는 우덕순과 조도선에게 채가구(蔡家溝) 역에서 이토를 포살할 기회를 찾도록 하였고, 자신은 하얼빈 역에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10월 26일 9시경 하얼빈 역에 도착하여 코코프체프와 열차 회담을 마치고 하차한 이토가 러시아군을 사열한 뒤 환영객들과 인사를 나누려 할 때, 안중근은 그를 향하여 권총을 쏘아 3발을 명중시켰다. 안중근은 즉시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되었고, 이토는 곧 절명하였다.
이 사건은 러시아령 하얼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재판은 러시아에서 맡아야 하였으나, 러시아 당국은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 안중근을 즉시 일본 영사관으로 인도하였다. 안중근은 일본 검찰관에게 이토의 포살 이유를 15가지로 지적하였다. 즉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해와 고종황제의 폐위, 을사조약과 정미 7조약의 강제 체결 등과 한국 침략을 위해 저지른 만행 등을 이토의 죄로 내세웠던 것이다. 안중근은 11월 3일 우덕순 · 조도선 · 유동하 등과 같이 여순(旅順) 형무소로 옮겨졌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난 뒤 이곳에 관동 도독부(關東都督府)를 설치하고 있었다. 안중근과 동료들은 여순 감옥에서 1910년 1월 26일까지 11번의 조사를 받았고, 2월 7일 관동 도독부지방 법원장 마나베(眞鍋十藏)의 심리하에 첫 공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은 국내외 변호사들의 변호가 불허되고, 일본인 관선 변호인만을 허용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안중근은 공판정에서 이토의 포살은 한국 독립 전쟁의 한 부분이고, 자신은 대한 의군(大韓義軍)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포로가 되었다고 밝히면서 만국 공법(萬國公法)에 의하여 처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공판은 2월 14일까지 6회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일본 형법에 따라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안중근은 옳은 일을 하였으므로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겠다고 항소를 하지 않았다. 그의 옥바라지를 위하여 두 동생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이 여순에서 머물렀으며,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로서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빌렘 신부의 내방을 청하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가 빌렘 신부의 여순행을 허가하지 않았으므로, 빌렘 신부는 3월 2일 주교에게 편지를 보낸 뒤 여순으로 출발하여 3월 8일 안중근을 면회하고, 다음날에는 고해 성사를, 3월 10일에는 그가 참석한 가운데 미사를 집전 하였다.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1909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3월 15일까지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를 집필하였으며,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의 저술에도 착수했으나, 이는 완성하지 못하였다. 또 옥중에서 많은 휘호를 남겼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일제는 유해를 가족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여순 감옥의 죄수 묘지에 매장하였는데, 아직까지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1962년에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70년에는 남산에 안 의사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또 1959년 숭의여자고등학교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다가, 1967년 남산 공원 광장으로 이전되었고, 1974년에는 개작되었다.
〔사 상〕 안중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동양 평화론》은 '서' (序)와 '전감' (前鑑)만이 완성되고, 쓸 예정이었 던 '현상' (現狀) · '복선' (伏線) · '문답' (問答)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그는 《동양 평화론》에서 동양 평화를 위하여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며, 청일전쟁 · 러일전쟁의 경과와 일본의 대한 · 대청(對淸) 정책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미완 부분에서는 국제 정세 · 일본의 침략 상황과 그에 대한 저항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상 등을 언급하고, 그가 구상하고 있던 동양 평화론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그는 여순에 한 · 청 · 일 공동 주관의 동양 평화 회의를 개설하고, 은행과 화폐, 그리고 군단을 계획하였던 것 같다. 안중근은 기본적으로 인종적 단합론과 도덕주의의 관점에서 동양평화론을 논의하였는데, 곧 황인종과 백인종을 대립시키고 방아책(防俄策)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동양 3국의 대등한 단합만이 서양 세력에서 동양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것은 한 · 청 · 일이 대등한 위치에서야만 가능하다는 견해로, 일본이 맹주가 되는 아시아 연대론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독실한 신앙과 조국애를 조화시켜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이루어 나갔다. 그의 독실한 신앙은 의병 전쟁 중에도 아침 · 저녁 기도와 묵주 기도를 바쳤다든가, 전투에서 패배한 위급한 상황에서 동료들을 회개시켜 대세(代洗)를 베푼 일,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장남을 사제로 양성해 줄 것 등을 유언으로 남기고 있던 점에서 확인된다. 이와 함께 자신의 사형일을 파스카 금요일인 3월 25일로 해달라는 요청에서도 그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천주교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기도와 신앙이 생활화되어 있던 그에게 있어, 천주교 신앙은 민권 · 평등 사상과 문명 개화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민족 구원을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서게 하였다. 따라서 안중근은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악에 도전하고 선을 구현하려는 행동적인 신앙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안중근은 이토를 포살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대한 의군' 의 참모 중장으로서 전쟁 중에 수행한 정당한 행위라고 하였다. 또한 비록 성서에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였지만,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죄악이므로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라고 하여 신앙적으로도 정당한 행위였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교회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안중근이 정교 분리에 위배되고 살인을 하였다는 이유로 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뮈텔 주교는 처음 이토를 죽인 자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였고, 안중근의 행위로 밝혀진 후에는 그가 잘못을 시인할 것을 요구하면서 빌렘 신부의 여순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주교의 기관지였던 <경향신문>은 안중근의 의거를 보도하는 대신, 이토의 추도 소식을 장황하게 소개하면서 이토를 추모해 마지않았다. 그 결과 오랜 기간 애국자로서의 안중근은 기억된 반면,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은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1970년대 들어 한국 교회 내에서 안중근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1979년 '안중근 탄생 100주년 기념식' 과 '안중근 추모 미사 가 처음으로 거행됨으로써 신앙인 안중근이 주목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추모 미사는 계속 이어졌다. 또 1990년대에는 학문적으로도 신앙인 안중근을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1990년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에서 《안중근 의사 추모 자료집》을 간행하였고, 1993년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 운동'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 심포지엄에서 연구자들은 안중근의 행위가 천주교회에서 살인을 인정하는 '전쟁 중의 전투행위' · '정당 방위' 에 해당한다는 점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특히 심포지엄과 함께 거행된 추모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당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잘못 판단한 데 대한 과오를 반성하며, 안중근이 이토를 포살한 행위의 정당성을 천명함으로써 신앙인 안중근에 대한 재평가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안중근에 대한 연구는 개별 연구자들에 의해 꾸준히 진행되었으며, 2000년 11월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다시 한번 '2000년 대희년과 안중근 토마스'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안중근의 신앙과 사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신학적으로도 정당했다는 사실이 거듭 확인되었으며, 그 결과 안중근은 오늘날에 있어서 신앙과 조국애를 조화롭게 연결시킨 모범적인 신앙인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 돈의학교; 빌렘, 니콜라 조제프 마리 ; 안공근 ; 안정근 ; 안태훈)
※ 참고문헌 《順興安氏大同譜》, 順興安氏大同譜所, 1990/ 安重根, 《安應七歷史》 · 《東洋平和論》, 1910/ 《韓國獨立運動史》 資料6 · 7, 국사편찬위원회, 1976 · 1978/ 駐韓 日 本公使館記錄》 39 · 40, 국사편찬위원회 1994/ 《亞洲第一義俠 安重根》 1~3, 국가보훈처, 1995/ 尹炳奭 역편, 《安重根傳記全集》, 國家報勳處, 1999/ 《安重根事件公判速記錄》, 滿洲 日 日新聞社, 1910/ 朴性綱 편, 《獨立運動先驅安重根先生公判記》, 京鄉雜誌社, 1946/ 崔洪奎 校註, 《安重根 事件公判記》, 正音社, 1975/ 李全, 《安重根血闘記》, 延泉 中學校期成會, 1949/ 《나라 사랑》 34, 외솔회, 1979/ 장석흥,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 한국독립 운동사연 구소, 1992/ 김구, <백범 일지》, 돌베개, 1997/ 한국교회사연구소 ,《黃海道天主敎會史》,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盧吉明, 〈安重根의 가톨릭 信仰〉, 敎會 史研究 9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pp. 5~30/ 趙珖 <安重根의 愛國啓蒙運動과 獨立戰爭〉, 《教會史研究》 9집, 1994, pp. 65~93/ 崔奭祐, 〈安重根의 義擧와 敎會의 反應〉, 《敎會 史研究》 9집, 1994, pp. 97~119/ 趙珖, 〈安重根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 근현대사 연구》 12, 2000/ 崔起榮, <安重根의 東洋平和論〉,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p. 461~483/ N. Weber, Im Lande der Morgenstille, Missionsverlag St. Ottilien, Oberbayern, 1923. 〔崔起榮〕
안중근 (1879~1910)
安重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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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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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왼쪽)과 그의 처 김아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