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해박해(乙亥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충청북도 보은(報恩)에서 태어났으며, 1801년 이전에 윤필영(尹必永)을 통해 입교하였다. 그 후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전후하여 경북 청송의 노래산(老萊山,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였다가, 1815년 부활 대축일때인 2월 22일 전지수의 밀고로 4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청송의 상부 관청인 경주 진영(鎭營)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는데, 이때 26명이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옥사하였지만 안치룡은 신앙을 굳게 지켜 다시 대구 감영(監營)으로 이송되었다. "죽더라도 배교할 수 없다"는 신앙을 고백한 뒤 그 해 10월(음)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사형이 집행되기 전, 즉 1815년 혹은 1816년에 50여 세의 나이로 병사(病死) 또는 아사(餓死)하였다. (→ 노래산 ; 을해박해)
※ 참고문헌 《日省錄》 40, 영인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1993, pp. 222~224, 391~392/ 《가톨릭 사전》/《달레 교회사》 中, pp. 51~70. [方相根]
안치룡 (?~1815/1816)
安致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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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