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훈 (1862~ 1905)

安泰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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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에서의 안태훈 가족(왼쪽)과 그가 설립한 청계동 성당과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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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에서의 안태훈 가족(왼쪽)과 그가 설립한 청계동 성당과 신자들.

한말의 학자.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한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부친. 세례명은 베드로.
안태훈은 1862년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안인수(安仁壽)와 제주 고씨(濟州高氏, 안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부친 안인수는 진해 현감(鎮海縣監)을 역임하였다.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해서(海西) 지방에서 학문과 문장으로 유명하였던 그는 일찍부터 개화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개화당과 관련되어 갑신정변(甲申政變) 직후 1885년 몸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信川郡 斗羅面清溪洞)으로 이주하였다.
1894년 동학(東學) 농민 전쟁이 일어나자 황해도에도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11월 중순 농민군이 안태훈 집에 대한 공세를 취하자, 그는 포군 70여 명과 촌정(村丁)100여 명 등 170여 명을 모아 농민군과 일대 접전을 벌여 농민군의 지휘관 3명을 포살하였다. 이때 안중근도 16세의 어린 나이로 그 선봉에 섰으며, 안태훈은 황해 감사의 추천으로 황해도 초모관(招募官)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청계동에 동학의 접주(接主)였던 김구(金九)나 해서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알려진 고능선(高能善)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사상이나 인품이 편벽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안태훈은 동학 농민 전쟁 중 동학군에게 노획하여 군량미로 사용한 양곡 500석이 국가의 소유라며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이 반환을 요구하자, 종현(현 명동) 성당에 몇 개월 간 피신해 있었다. 군량미 문제는 천주교회의 알선으로 해결되었는데, 그 동안 성당에서 교리를 배우며 천주교를 받아들인 안태훈은 많은 양의 교리서 등을 갖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마을에 천주교를 전파했다. 1897년 1월 11일 그는 형제와 아들 안중근, 조카, 그리고 청계동 주민 등 33명과 함께 빌렘(J. Wilhelm, 洪錫九)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안태훈은 천주교의 선교에 앞장서는 한편, 청계동에 황해도에서 두 번째 본당을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열의를 보였다. 그 결과 1898년 4월 마렴(麻廉)에 있던 빌렘 신부가 청계동 본당으로 부임하였고, 청계동은 황해도 선교의 지휘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해 140여 명이던 청계동의 교세는 1900년 25개 공소에 영세 신자 800여 명, 예비 신자 600여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고, 1902년에는 영세 신자 1,200여 명, 예비 신자 900여 명으로 늘어나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황해도 자체의 교세도 급증하여, 1899년 1,800명에서 1902년에는 7,000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 같은 교세 확장은 빌렘 신부의 활약과 안태훈 · 안태건(安泰建, 가밀로) 형제의 헌신적 노력, 그리고 천주교측이 신자들의 사회적 · 경제적 이권을 대변하는 등 신자들의 신상 문제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안태훈 가족의 천주교 선교 사업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안태훈 형제는 천주교 신자를 탄압하던 관리들에게 여러 번 체포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고, 급기야는 '해서교안' (海西敎案)이 발생하게까지 되었다. 이러는 동안 안태훈과 안태건이 번갈아 투옥되었으며, 특히 안태훈은 주모자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자, 안태훈은 안중근과 상의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부질없이 죽을 뿐 아무 이익도 없을 것이므로, 중국 산동(山東)이나 상해(上海)로 가족들을 옮겨 놓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안태훈은 안중근이 1905년 말 상해로 향한 직후 진남포(鎭南浦)로 가던 도중 재령(載寧)에서 사망하였다.
부인은 백천 조씨(白川趙氏) 마리아였고, 중근 · 정근(定根, 치릴로) · 공근(恭根, 요한) 3남은 모두 독립 운동에 투신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 안공근 ; 안정근 ;안중근 ; 해서교안)
※ 참고문헌  《順興安氏大同譜》, 順興安氏大同譜所, 1990/ 安重根, 《安應七歷史》, 1910/ 李全, 《安重根血闘記》, 延泉中學校期成會, 1949/ 김구, <백범 일지》, 돌베개, 1997/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盧吉明, <安重根의 가톨릭 信仰〉, 《教會史研究》 9 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pp. 5~30/ 趙珖, <安重根의 愛國啓蒙運動과 獨立戰爭〉, 《敎會史研突든》 9집, 1994, pp. 65~93/ 崔奭祐, 〈安重根의 義擧와 敎會의 反應〉, 《敎會史研究》 9집, 1994, pp. 97~119/ 〈甲午海營匪擾顛末〉,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 12, 역사문제연구소, 1996/ N. Weber, Im Lande derMorgenstille, Missionsverlag St. Ottilien, Oberbayern, 1923. [崔起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