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대주교. '글라렛 선교 수도회' (Congregatio Missio-nariorum Filiorum Immaculati Cordis Beatae Mariae Virginis)의 설립자. 축일은 10월 24일.
〔생애와 활동〕 1807년 스페인 카탈루냐(Cataluia) 지방의 비크(Vich) 교구 관할인 살렌트(Sallent)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안토니오는, 직조공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라틴어와 인쇄 공부를 하였다. 1829년 신학교에 입학하여 1835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뒤 비크 교구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한 그는, 해외 선교 활동을 결심하고 로마로 가서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나 건강이 나빠져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1840년부터 약 10년 동안 열정적으로 카탈루냐 지방의 본당 사목과 피정 지도 등을 하면서 유능한 설교가라는 명성을 얻었는데, 그는 언제나 성체와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였다.
수도회의 창설 및 대주교직 수행 : 1835년 이후로 스페인에서는 반성직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몇 도미니코회 수도원들과 작은 형제회 수도원들, 그리고 카탈루냐 지방의 일부 교구 사제들만이 안토니오처럼 교리와 대중 설교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이때 복음을 설교하면서 공동체의 필요성을 깨달은 안토니오는, 마침내 1849년 7월 16일 다섯 명의 사제들을 모아 설교 활동을 하는 '글라렛 선교 수도회' 를 설립하였다. 이 수도회는 '원죄 없으신 성모 성심의 아들들' 이라고도 불렸다. 1850년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2세(Isabel II 1833~1868)의 요청으로 쿠바 산티아고(Santiago)의 대주교로 임명된 그는, 7년 동안 신학교 개혁과 성직자 쇄신을 추진하면서 방대한 관할 구역을 수시로 순회하였다. 또한 결실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농사법을 권장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가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협동 조합을 결성하도록 도왔는데, 이 과정에서 안토니오는 수많은 반대자들의 표적이 되었으며,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기도 하였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1846~1878)에 의해 스페인으로 돌아가 이사벨 2세의 고해 신부 겸 왕실의 영성 지도자가 된 그는, 이후 스페인 전역의 가난한 사람과 죄수들 그리고, 병원을 대상으로 피정 지도를 하는 등 적극적인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그는 대중적인 서적이 말로 하는 설교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카탈루냐와 마드리드(Madnd)에 출판사를 설립하여 많은 가톨릭 서적들을 인쇄 · 보급하였는데, 그중 대부분의 책들이 그가 직접 집필한 것이었다. 또 문화 방면에도 관심이 커 에스코리알(Escorial)에 과학 연구소 · 자연사 박물관 · 음악 학교 · 언어 학교들을 세우는 등 그리스도교 문화의 발전을 위한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궁정에서 활동하였던 그는 자연히 성직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비판과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혁명이 진행 중이던 1868년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추방된 이사벨 2세와 함께 로마로 간 안토니오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 참석하여 1870년 5월 31일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옹호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해 프랑스 나르본(Narbone) 근처 프롱프루아드(Frontfroide)의 글라렛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1934년 2월 25일 교황 비오11세(1922~1939)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0년 5월 7일 교황 비오 12세(1939~1958)에 의해 시성되었다.
〔수도회의 인가 및 활동〕 안토니오가 창설한 수도회는 문서화된 수도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쿠바의 대주교직을 수행하던 몇 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공동체를 결성하게 된 동기나 목적에 대한 혼란이 생겨났으며, 새로운 회원들이 들어오면서 초기의 선교 열정과 목적 의식이 희미해지기도 하였다. 이에 제2대 총장(1857~1899)시프레(José Xifré)의 요청으로 1857년에 안토니오가 15장으로 된 회칙을 작성하였는데, 이는 그 후 설교 활동을 강조하는 글라렛 선교 수도회 수도 회헌의 골격을 이루게 되었다. 이 회헌은 1859년에 스페인 정부의 승인을 받았고, 이듬해에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으나, 회헌이 개정되면서 1870년 5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가 새로운 교회법에 따라 다시 개정되면서 1924년 7월 16일에 교황 비오 11세의 인가를 받았다.
초창기 글라렛 선교 수도회의 주요 활동은 안토니오가 먼저 시작하였던 대중 설교였는데, 이의 주요 주제는 성체와 원죄 없으신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이었다. 1862년 이후 글라렛 선교 수도회는 교구 신학생 교육과 본당 사제의 피정 지도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 갔으며, 안토니오가 사망할 무렵인 1870년에는 첫 해외 선교지인 북아프리카로 회원들을 파견한 데 이어 기니 · 콜롬비아 · 파나마 · 중국 · 일본 등지로도 계속 파견하였다. 회원들은 특히 수도 생활에 관한 교회법과 마리아론에 있어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는데, 이들의 노력으로 1920년에 로마에서는 수도 생활과 관련된 교회법 문제들을 다루는 계간지 《수도자들을 위한 해설서》(Commentarium pro Reli-giosis)가 창간되었고, 1951년에는 마리아론에 관한 잡지 《마리아론지》(Ephemerids Mariologicae)가 발간되었다. (→ 글라렛 선교 수도회)
※ 참고문헌 P. Xerbi, 3, pp. 915~917/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87, p. 90/ Donal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Saints, Great Britain, 1983, p. 48/ Enzo Lodi, Saints ofthe Roman Calendar, trans. by Jordan Aumann, OP., New York, 1992, pp. 327~3291 Clifford Stevens, The One Year Book of Saints, Our Sunday Visitor Books, 1989, p. 305. [宋炯萬]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1807~1870)
〔라〕Antonius Maria Claret
글자 크기
8권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성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