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312-64)의 수도. 이 시기와 로마 제국 시기에 가장 번창했던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도시의 역사〕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의 장군들 중 하나였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기원전 358/ 354~281)는 기원전 312년에 현재의 시리아와 그 주변을 통치하는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웠는데, 기원전 301년경 오론테스(Orontes) 강변에 수도를 건설하고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케이아' (Αντιόχεια)라고 명명하
였다. 당시 중동의 정치 · 경제 · 학문 · 환락의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는 토착민들, 그리스인들, 유대인들이 모 여들면서 기원전 2세기에는 인구가 50여 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원전 167년 가을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기원전 175~164)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께 제사드리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7일에는 번제의 제단 위에 제우스 제단을 세우고, 안식일과 할례도 없앴다(다니 11, 31 ; 12, 11 ; 1마카 1, 54 ; 마르 13, 14). 이에 마타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이 주축이 되어 시리아군을 몰아낸 뒤 기원전 164년 12월에 성전을 정화 하고 성전 봉헌 축제인 '하누카' (חֲנֻכָּה)를 지냈다(1마카4, 36-60 ; 요한 10, 22).
기원전 67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동쪽으로 이동하여 안티 오키아와 다마스커스를 점령하였는데, 이로써 기원전 64년 시리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역대 총독들은 안티오키아에 상주하게 되었다. 기원전 37년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점령한 헤로데 대왕(기원전37~4)은 기원전 19년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웅장하게 건립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대도시에 사는 그리스계 유대인들의 찬사를 받고 싶었는지, 성전 본 건물 이외의 부속 건물들은 그리스 건축 양식을 도입하여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신약 시대의 안티오키아에는 황제 직속의 화폐 주조소가 있었는데, 그리스 화폐 체계에 따른 동전을 만들어 냈다. 이스가리옷이라 하는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기고 받은 은전 서른 닢(마태 26, 15)은 아 마도 안티오키아나 티로에서 주조된 은전이었던 것 같다. 526년과 528년에 이어 529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파괴된 안티오키아는 540년에 페르시아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다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 제(527~565)가 이들을 몰아내면서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635년 이슬람 군대가 또다시 점령함으
로써 969년까지 그들의 통치를 받다가 다시 통치권이 동로마 제국으로 넘어갔으며(969~1084), 그 후 십자군이 안티오키아 공국(1098~1268)을 세웠다.
1268년부터는 번갈아 가며 이집트와 터키에 의해 강점당하였으며, 제1 · 2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프랑스의 신탁 통치(1918~1939)를 받았다. 1939년 주민 투표에 따라 터키에 귀속되었으며, 2000년 현재 인구수는 10여 만 명이다.
〔교회의 역사〕 33년경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인 스테파노가 성전과 율법을 비판하다가 순교하자, 그중 일부가 안티오키아에 와서 유대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선교하였다 (사도 11, 19-26).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인 안티오키아 혼성 교회가 크게 성장함에 따라 예루살렘의 사도들 은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바르나바를 파견하여 교회 일을 돌보게 하였다. 일손이 부족해지 자 그는 다르소에 있던 바오로를 데려와 함께 일 년 동안 일하였다(사도 11, 19-26). 45~49년경 바오로와 바르나 바와 요한 마르코가 이곳에서 제1차 전도 여행을 떠났으며 49년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 이어 사도 베드로가 안티 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다(갈라 2, 11-14). 이때 베드로가 처음에는 이방인 신자들과 잘 어울리다가 후에 예루 살렘에서 온 신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이방인 신자들을 멀리하는 것을 보고 바오로가 그를 꾸짖은 일이 있었는 데, 이것을 "안티오키아 사건"이라고 한다. 바오로는 50~58년경 제2~3차 전도 여행 때에도 안티오키아를 전도 거점으로 삼았다.
지리상으로 팔레스티나와 가깝고 왕래도 잦았던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에 예수 전승이 널리 퍼지면서, 여러 차 례에 걸쳐 이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50~60년경 시리아의 어느 그리스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말씀 70 여 편을 모아 《예수 어록》을 편찬하였으며, 80~90년경에는 또 다른 그리스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이를 참고하 여 《마태오 복음》을 저술하였다. 100년경에는 역시 같은 계열의 그리스도인이 《디다케》(Διδαχή)라는 교회 규 범서를 편집하였는데, 필자는 마태오 복음서를 읽었던 것 같다. 또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35~107)가 로 마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 여러 교회에 보낸 7편의 편지가 전해져 온다. '그리스도인' (Χριστιανός)이라는 명칭 은 안티오키아에서 생겨났다(사도 11, 26).
초기 박해 시대 때 안티오키아에는 여러 개의 성당들이 세워졌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의 박해 시기에 모두 파괴되었다. 그 후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337~361)는 이들을 재건축하면서 341년 안티오키아에 하나의 성당을 봉헌하였다. 대규모의 그리스도교 도시가 된 안티오키아는 그 해 로마로부터 자치가 허용된 이후 동방 지역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해 오는 기록에 의하면, 요한 그리소스토모(347-407)는 안티오키아에서 12월 25일을 예수 성탄 대축일로 기념했다고 한다(386~388).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서는 법령을 통해 교 구 서열을 로마 · 알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 순으로 정하고(6조), 동시에 네 번째 교구로 예루살렘을 지정하였
다(7조).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는 로마 다음에 콘스탄티노플이 오도록 위치를 조정하였다(3조) . 그 후 칼체돈 공의회(451)에서는 로마를 제외한 4개의 대교구에 총대주교구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교구장을 총 대주교라고 칭하였으며, 교구 서열은 로마 다음으로 콘스탄티노플 · 알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 · 예루살렘으로 확정했다. 멜키트 총대주교좌는 바울루스 2세(519~521)총대주교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리스도 단성설을 믿는 야곱파 총대주교좌는 세르지우스(Sergius of Tella, 557/558~561)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티오키아에는 바오로 시대와 교부 시대의 유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베드로가 신자 들과 함께 몰래 미사를 봉헌했다는 '성 베드로 동굴 성당' 이 시가지 동쪽 산 아래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 신빙 성은 없다. 동굴 성당 정면 벽은 십자군이 안티오키아에 공국(公國)을 세웠을 때 만든 것이다. 안티오키아에서 서쪽으로 32km 떨어진 지중해안에는 안티오키아의 외항 셀레우케이아 피에리아(사도 13, 4 ; 셀류기아)가 있었 는데, 사도 바오로 일행이 제1차 전도 여행 때 출항하고 귀항하였던 항구였다. 안티오키아에는 신자수가 50명도 안되는 작은 성당이 있다. (→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 셀레우코스 왕조 ; 안티오키아 학파)
※ 참고문헌 Frederick W. Norris, 《TRE》 3, pp. 99~103/ 정양모, 《위대한 여행, 사도 바울로의 발자취를 따라》, 생활성서사, 1997, pp. 26~30. 〔鄭良謨〕
안티오키아
〔그〕Αντιόχεια · 〔라〕Antiochia · 〔영〕Anti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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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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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 전경(왼쪽)과 시가지 동쪽 산 아래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 성당'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