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 학파

學派

〔라〕schola Antiochena · 〔영〕school of Anti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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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 전통에 따른 성서 해석과 그리스도론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였던 신학 사상가와 저술가들의 교의적인 경향. 또는 안티오키아를 주요 무대로 2~7세기에 교회 신학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대립했던 학파.
〔발생과 발전〕 초기 시기 : 안티오키아의 신학자로서 첫 번째 인물로는 169~188년에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있었던 테오필로를 들 수 있다. 그가 《마르치온 논박》 (Against Marcion)을 저술하였다고 전해지나(에우세비오, 《교회사》 Ⅳ, 24), 이는 분실되고 없다. 현재까지 전해 오는 그의 저서로는 이교도 친구인 아우톨리쿠스(Autoly-cus)에게 보낸 세 편(Ad Autolycum)의 호교론이 있는데, 첫째 권은 하느님 인식에 대하여, 둘째 권은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우주 창조에 대하여, 셋째 권은 성서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 사상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다.
초기 교회의 대표적 신학파인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schola Alexandrina)가 발생하게 된 출발점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오리제네스 (?~254)의 '로고스-그리스도론' (Logos-Christologia)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사상과 역사를 중시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구별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260년경부터 268년까지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던 사모사타의 바오로(Paulus Samosatenus, ?~?)에게서 이미 제기되었는데, 철저한 유일신론자(唯一神論者)였던 그는 하느님은 오직 하나의 위격(ὑπόστασις)이라고 하면서, 로고스는 위격이 아니고 단지 하느님의 능력으로서, 세례 때 예수께 내려왔다고 하였다. 예수는 하느님의 능력인 로고스에 힘입어 죄악을 극복하고 인류 구원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 양자설(adopianisimus)의 일종이었다. 바오로는 268년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에서 성부와 그리스도가 '동일 실체' 라는 교의를 거부함으로써 이단자로 단죄받고 주교관에서 쫓겨났으며,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서는 바오로의 삼위 일체론을 비판하면서,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경우는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또 그 추종자들의 주장에는 안티오키아에서 발생한 루치아누스주의(Lucianismus)와 아리우스주의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의 사제인 루치아노(240~312)는 그 곳에 신학당을 세움으로써, 이후 많은 이들이 안티오키아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였다. 또한 히브리어에 능통하여 70인역 성서의 교정본을 발간하였는데 자의적(字義的) · 역사적으로 성서를 풀이한 데 대해 안티오키아 신학파는 이 방법을 승계한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신학파에서는 교의적 · 우의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하지만 그의 삼위 일체 교리는 성자의 성부 종속설을 주장하여 아리우스 사상의 기원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상반된 삼위일체론은 아리우스(256?~336)로 말미암아 사건화되었다. 루치아노의 제자였던 아리우스는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였는데, 그로 인해 321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그의 주장은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이에 아리우스가 니코메디아의 주교인 에우세비우스(+342)를 포함한 안티오키아 학파에 지지를 호소하자 그의 지지자들은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알렉산드리아의 결정을 거부하였고, 단죄받은 아리우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이러한 결정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의 대결을 초래하였다. 323년부터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별도로 집회를 개최하여 상대방을 이단으로 비방하면서 교회를 분열의 위기에 빠뜨렸다. 결국 이 문제는 로마 제국 내의 혼란으로 비화되었고, 325년에 개최된 니체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단죄가 재확인되었다.
후기 시기 : 아리우스 사건으로 안티오키아 학파가 교회로부터 단죄를 받은 이후 교회의 정통 교리를 내세운 안티오키아 신(新) 정통파가 등장하였는데, 주요 인물로는 다르소의 디오도로(?~394?)를 들 수 있다. 탁월한 호교론가이자 성서 주해가로 명성을 얻은 디오도로는 안티오키아 학파를 유명한 성서 학파로 만들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요한 그리소스토모 (347?~407)와 디오도로의 그리스도론을 잘 반영하였던 몹수에스티아의 주교 테오도로(350?-428)를 꼽을 수가 있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예수의 신
성을 강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그는 신성과 인성의 일치보다는 결합(conjunctio)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위험도 내포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제자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네스토리우스(381~45)가 에페소 공의회(431)에서 이단자로 단죄받을 때 간접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에서는 정식으로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이외에도 4~5세기에 안티오키아 학파에서 배출한 많은 신학자들이 있는데,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던 에우스타티오 (Eustathius, 324?~330) · 플라비아노(+404), 안치라의 마르철로(280?~374) 에메사의 주교였던 네메시오, 안티오키아의 요한(+441), 그리고 키프로스의 주교였던 테오도레토(393~458) 등이다.
이후에도 삼위 일체론과 그리스도론, 구원론에 대한 논쟁과 이단이 계속 발생하였다. 제1차 에페소 공의회(431)에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장이 인정받았으나, 칼체돈 공의회(451)에서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장이 인정되었다. 경우에 따라 양 학파의 주장이 대립되거나 한쪽의 주장이 이단으로 판정받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대립은 문화 · 언어 · 전통의 차이에 따른 이해가 달랐던 것이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또 지역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용어와 견해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과 철학적인 사고가 신학을 발전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확고한 교리 체계를 만들도록 한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신 학〕 신론 : 성서의 자의적 · 역사적 해석으로 유일 신론을 강조하였다(신명 6, 4). 한 분인 하느님이 창조와 구원과 성화를 이룩하심으로써 세 '위격' 또는 세 '위' 로 나타나지만, 하나의 신성, 하나의 뜻, 하나의 힘임에는 변함이 없다. 세 위격은 융해되지 않고 결합되며, 그 존재 방식으로 구분된다. 곧 성부는 태어나지 않았고, 성자는 성부에게서 태어났으며,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셨다.
인간론 :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지만, 질적으로는 무한히 다르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과 호의 덕분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론 : 안티오키아 학파에서는 예수가 지닌 두 품성, 신성과 인성의 차이점을 강조하였다. 로고스가 인간과 일치하여 두 품성이 온전히 하나가 되었지만, 두 품성의 구별은 그대로 존속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두 품성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곧 그리스도 인성이 로고스 신성으로 융해되어 신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그리스도가 인간들을 당신 신성에 참여시킴으로써 구원한다고 하였다. (→ 네스토리우스주의 ; 디오도로, 다르소의 ; 바오로, 사모사타의 ; 신학사 ; 아리우스주의 ; 알렉산드리아 ; 알렉산드리아 학파 ; 요한 그리소스토모)
※ 참고문헌  B. Drewery, Die Bedeutung Antiochiens in der alten Kirche, 3, pp. 103~113/ A. van Roey, 《NCE》 1, pp. 627~628/ 김성태, 《세계 교회사》 I, 신학 선서 11, 바오로딸, 1995/ M. Simonetti, Encyclopedia of the Early Church, Cambridge, James Clarke & Co., 1992, pp. 50~51.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