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목구 신부. 세례명은 루가.
1889년 1월 1일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안성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1902년 9월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9월 22일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그 해 10월에 서산(瑞山, 현 동문)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30리 정도 떨어진 안면도(安眠島)까지 방문하는 등 열성적으로 사목 활동을 한 안학만 신부는, 본당을 팔봉면 금학리(金鶴里)로 이전하고 7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을 건축하였다. 1919년 10월 개성(開城)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한 그는 경기도 개성 · 장단(長端) · 파주 · 양주 · 연천과 황해도 연백(延白) 지역까지 관할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부임 첫해에는 전임 신부인 르 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가 성당 건축 기금을 낭비했다는 신자들의 불만과 신부에 대한 불신을 대신 받았으며, 1921년에는 신자 부부의 이혼 문제로 재판소까지 불려 다녀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장사 동업을 약속한 이들이 불화가 생기자 그를 찾아와 중재와 판결을 요청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다가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1923년에는 하인이었던 방(方) 베드로가 여자를 겁탈하려다 미수에 그친 일이 발생하여 그를 쫓아낸 일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는 사실과는 달리 안학만 신부가 그 여자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정결을 더럽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문제는 신자들 앞에서 그와 대질함으로써 해결되었지만, 안학만 신부는 이 문제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로 신자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이에 그는 뮈텔(G. Mutel, 閔德孝)주교에게 본당을 떠나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1924년 6월 압고지 〔前垈里〕 본당(용인 본당의 전신)의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안학만 신부는, 성체회를 조직하는 등 전교에 힘썼으나 노력한 만큼 신자수가 증가하지 않아 실망이 컸다. 한편 본당 신자들과 지방 유지들에게 반일 독립 사상을 심어 주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한 신자의 모함으로 1929년에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고 소신학교에 머물러 있었던 그는 이를 부당히 여겨 이듬해 1월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주교에게 인사한 뒤 종적을 감추었는데, 만주에서 방랑 생활을 하며 독립 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성무 집행 정지가 해제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서울 주교관에서 머무르다가 1937년 서흥(瑞興) 본당의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16년 폐쇄되었다가 안학만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다시 승격된 서흥 본당에서 약 2년 동안 활발한 사목 활동을 전개한 뒤 1939년 5월 장연(長連)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만주에서 총상을 입어 불편한 몸으로도 활발한 사목 활동을 펼쳐 교세를 늘렸으며, 특히 청소년 사목에 주력하여 본당의 가톨릭 청소년단을 돈 보스코 청소년단' 으로 이름을 바꾸고, 직접 단가(團歌)를 작사하였다. 3년여 동안 장연 본당에서 사목한 후 1942년 2월 해주(海州) 본당으로 전임되었으나, 지병과 기관지 천식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부임 2년 만인 1944년 4월 20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해주 시립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교회와 역사》 102호(1983. 12. 25), 한국교회사연구소, pp. 5~6/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 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경향잡지》 904호 (1939. 6. 28), pp. 283~284 ; 970호(1944. 5. 15), p. 43/ <뮈텔 주교 일기> 1929 · 1930,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편찬실〕
안학만 (1889~1944)
安學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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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안학만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