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데르

〔라〕Alex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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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3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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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3세 교황.

① 알렉산데르 3세(1105~1181) : 교황(1159~1181). .본래 이름은 롤란도 반디넬리(Rolando Bandinelli.
〔생애와 활동〕 1105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나 신학과 교회법을 전공하였으며, 1139~1142년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후 피사(Pisa)의 참사 위원이 되었으며, 《그라시아노 법령집(Decretum Gra-tiani)에 대한 주해서》와 《신학 명제집》(Sentences)을 저술하였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아벨라르도(P. Abelardus, 1079~1142)의 영향을 받았으며, 1150년 부제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사제 추기경이 되었고, 1153년에는 교황의 상서(尚書, Cancellarius)가 되었다. 그는 교황하드리아노 4세(1154~1159)가 가장 신임하던 추기경이었으며, 이 시기에 교황 특사로 활약하며 친 노르만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1156년 시칠리아의 왕 굴리엘모 1세(Guilelmus I, 1120~1166)와 '베네벤토 정교 협약' 을 체결하는 자리에 참석하였다.
당시의 교회 상황 : 반디넬리가 알렉산데르 3세 교황으로 선출된 시기는 '카노사의 굴욕' (1077)으로 상징되는 교황과 황제 사이의 갈등이 여전히 남아 있던 상태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와 신성 로마 제국황제 하인리히 4세(1056~1105) 사이에서 발생하였던 '성직 서임권 논쟁' 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국왕과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을 확립하려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주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양대 세력 간의 격렬한 투쟁은 1122년 '보름스 정교 조약' 을 통하여 표면적으로는 상호 권한을 인정하는 것으로 종식되었다. 그러나 이 정교 조약은 교황의 권위를 높인 반면, 황제의 위신은 하락시킨 것이었기에 지속적인 분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황제 및 대립 교황과의 투쟁 : 교황 알렉산데르 3세보다 7년 먼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Barbarossa, 1152~1190)는 황제가 국가를 지배한다는 이념을 강력하게 내세우면서 교황들과 대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159년 하드리아노 4세 교황이 사망하자 추기경단은 내분과 토론을 거듭한 끝에 세표를 제외한 만장 일치로 반디넬리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를 지지하였던 추기경들은 반디넬리가 교황으로 선출될 경우 프리드리히 황제와 대립 관계에 있던 굴리 엘모 1세를 공개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그의 선출에 반대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중 하나인 몬티첼리(Monticelli)의 주교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는 프리드리히 황제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무력을 동원하여 베드로 대성전을 점거하고 알렉산데르 3세와 추기경들을 포로로 삼은 상태에서 교황 선출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옥타비아누스의 지지자들은 옥타비아누스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빅토르 4세(1159~1164)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불합리성을 인식한 로마 시민들은 감옥에 갇혀 있던 알렉산데르 3세를 구출하였고, 열광적인 환호속에 로마를 거쳐 산타 님파(Santa Nympha)까지 호위하였다. 교황은 수많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 도시를 축복하였고, 참석자들은 교황에게 순명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로써 알렉산데르 3세는 교황으로서 직책 수행을 시작하였다. 한편 대립 교황 빅토르 4세는 몇몇 도시의 총대주교를 비롯해 자신을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양측의 대립 상황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프리드리히 황제는 롬바르디아를 정복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황제에게 원정을 중지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황제가 이에 대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자 교황은 황제와 대립 교황을 파문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이탈리아의 모든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에게 알렉산데르 3세를 교황으로 인정할수 없으며, 동시에 파비아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교황은 황제에 의한 교회 회의 소집은 교회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황제의 권위보다도 교황의 권위가 우위에 있음을 망각한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1160년 2월 5일 이 교회 회의에서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한 빅토르 4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선포하였으며, 같은 해 3월 24일 알렉산데르 3세를 파문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교회 회의의 결정 사항을 모든 그리스도교 궁정에 통보하였으며,제국의 주교들은 빅토르 4세에게 순명하도록 지시하였다. 소수의 총대주교들이 이에 불복하자 그들을 모두 축출하였다. 교황과 대립 교황은 서로 상대방의 지지자들을 파문하는 동시에 자신의 동조자들을 확대시켜 나갔다. 한편 황제의 권력은 이탈리아에서 점차 강화되었으며, 황제는 롬바르디아를 장악하고 1162년에 밀라노를 공격하여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로마로 들어가려던 교황은 빅토르 4세 가족들의 제지로 포기해야만 하였으며, 더욱이 황제의 군대가 교황을 추격하자 결국 1162년 4월 프랑스로 피신하였다. 다행히 당시 프랑스의 주교들과 수도자들 대부분은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교황을 보호해 주고 있던 프랑스의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교황을 추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프랑스왕 루이 7세(Louis Ⅶ, 1137~1180)에게는 교황 선거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의하였다. 프랑스 왕의 한 측근은 분쟁을 피하려고 황제와 협상을 벌여 당시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영토의 일부와 교황을 황제측에 넘길 것을 루이 7세에게 제안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교황은 영국 왕 헨리 2세(Henry Ⅱ,1154~1189)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헨리 2세는 교황은 물론 프랑스와 협상을 전개하였으며 그 결과 교황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1163년 교황은 투르(Tous)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거의 모든 성직자들이 참여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교회의 일치를 재건하기 위해 이단자들과 투쟁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곳에 참석한 모든 성직자들은 교황에게 순명을 서약하였으며, 황제와 대립 교황 및 그 지지자들을 재차 파문하였다. 또한 두 왕의 제의를 받아들여 교황은 상스(Sens)에 교황청을 설립하고 1165년 4월까지 그곳에서 교황직을 수행하였다.
1164년 빅토르 4세가 사망하자 그 지지자들은 파스칼 3세(1164~1168)라는 새로운 대립 교황을 추대하였다. 한편 로마에서 교황 지지자들이 점차 확산되었으며,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이 황제에게 대항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교황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1165년 11월 22일 로마로 귀환하였다. 그런데 돌아온 직후 헨리 2세의 정책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망명 생활 중인 캔터베리 대 주교 토마스 베켓(Thomas Bechet, 1118~1170) 문제로 인해 교황과 헨리 2세는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교황은 헨리 2세가 종교적 자유를 억압한다면 왕을 파문할 뿐만 아니라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170년 12월 29일 베켓이 암살당하자, 교황은 헨리 2세를 파문하고 영국 성직자들에게는 성무 집행 정지를 내렸다. 그리고 1173년 베켓을 성인품에 올렸다. 결국 헨리 2세는 교황에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편지를 보내고 로마 교회에 절대적으로 순명할 것을 서약하였다.
한편 프리드리히 황제는 교황의 측근을 분열시키고자 성직자들과 관리들에게 파스칼 3세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하였으며, 동시에 이탈리아를 다시 침략하였다. 황제는 베드로 대성전을 방화하고, 이 성당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포로로 삼았다. 전쟁에 지친 로마 시민들은 파스칼3세에게 충성 서약을 할 경우 로마 교회의 평화를 보장하고 포로를 석방하겠다는 황제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교황에게도 이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황제의 공격을 피해 피신할 것을 명하였다. 황제는 로마를 점령하고,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후 베아트리체(Beatice)와 함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로마인들은 파스칼 3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자 황제는 1168년 9월 세 번째 대립 교황인 갈리스도 3세(1168~1178)를 추대하였다. 이때부터 상황은 알렉산데르 3세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흑사병이 창궐하여 황제의 군대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황제에게 대항하는 롬바르디아 동맹이 형성되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동서방을 재통일하자는 제의가 당시의 황제 마누엘 1세(1143~1180)로부터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를 거부하였고, 1176년 5월 29일에는 롬바르디아 동맹군이 레냐노(Legnano)에서 프리드리히의 군대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황제는 어쩔 수 없이 협상을 모색하게 되었다.
분쟁 종식과 제3차 라테란 공의회 : 1177년과 1183년 두 차례에 걸쳐 협약이 체결되었으며, 황제는 알렉산데르 3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교황의 사도적 계승을 인정하였다. 또한 황제는 점령한 모든 영토를 반환하였으며,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은 물론 시칠리아에도 평화적 관계를 약속하였다. 1177년 8월 교황은 황제에 대한 파문을 취소하고 대립 교황은 물론 그를 지지하였던 성직자들에 대한 파문도 철회하였다. 교황은 전쟁으로 인해 초래된 교회 내적인 무질서를 바로잡고자 1179년에 제3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교황 선출 방법을 새롭게 정하였는데, 투표에 참석한 추기경들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만 교황에 선출될 수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사망할 때까지 파문에 처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초대 교회의사도들이 직접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음을 들어 모든 성직자들에게 검소하게 생활할 것을 지시하였다. 교황은 발도파(Valdesii) 이단을 단죄하였으며, 12세기 초부터 유럽 각국에 확산되고 있었던 가타리파(Cathari)의 활동을 경고하였다. 여기에서 이단 심문의 기원이 생겨난다. 이외에도 이 공의회에서는 각 주교좌 성당에 대중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자격 있는 교수들로 하여금 교육을 담당하도록 규정하였으며, 나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의 설치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최후는 불행하였다. 황제와 전쟁을 벌일 때 자신에게 협조하였던 민중들에 의해 로마에서 축출되어 북쪽으로 55km 정도 떨어진 치비타 카스텔라나(Cività Castellana)로 피신한 교황은 그곳 에서 1181년 8월 30일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라테란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평 가〕 알렉산데르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분쟁을 통해 교황의 수위권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으며, 개혁 전통에 따라 교회를 다스렸다. 그는 교회의 위치를 보다 확고하게 다졌으며, 그의 정책들은 후임자들에게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신중함과 인내심은 오히려 중세 교황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 그레고리오 7세 ; 라테란 공의회 ; 베켓, 토마스 ; 성직 서임권 논쟁 ; 카노사사건)
※ 참고문헌  Histoire des Papes, Administration de Librairie, 1842, pp.417~463/ G. Castella, Histoire des Papes, Zurich, Fraumunster, 1944, pp.206~210/ M. Pacaut,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direc. de P.Levillain, Fayard, 1994, pp. 64~67/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176~1771 M.W. Baldwin, 《NCE》 1, pp. 288~290.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