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데르, 알렉산드리아의 (250?~328?)

〔라〕Alexander Alexandri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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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오의 도움으로 아리우스의 파문 결정을 받아 냈다.

알렉산데르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오의 도움으로 아리우스의 파문 결정을 받아 냈다.

성인.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축일은 2월 26일.
〔생애와 활동〕 250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베드로(Petrus I , 300~311) 총대주교와 아킬라스(Achillas, 311~312) 총대주교 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지도자였으리라 추정될 뿐이다. 312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된 그는, 순교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테오나스(Theonas, 281/282~300)를 기념하는 성당을 건축하였다. 이 기념 성당은 기존의 다른 성당보다 규모가 컸으며, 완공되기 이전부터 알렉산데르가 사용했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알렉산데르는 앉아서 복음을 읽지 않았고, 단식을 지키는 날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총대주교 재임 기간 동안 멜리시우스주의(Meli-xtianismus)와 아리우스주의(Arianismus) 이단자들에 맞서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의 권위와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 데 노력하였다. 살라미나의 에피파니오(Epiphanius Salaminae, 315~403)는 자신의 저서인 《이단 반박론》(Adversus Haereses)에서 알렉산데르가 부활 대축일 날짜 문제로 크레셴시오(Crescentius)와 논쟁을 하였다고 전한다(70, 9). 알렉산데르는 임의로 사제 서품과 부제 서품을 거행한 콜루투스(Kolluthus)라는 신부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멜리시우스주의 배격 : 멜리시우스주의는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황제 때부터 특히 이집트에서 심하게 행해졌던 박해(303~312) 후에 생겨났다. 리코폴리스(Lico-polis)의 멜리시우스(Melitius)는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 총대주교가 박해 때 배교한 이들' 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과는 달리, 극도로 엄격한 태도를 취하였다. 실제로 교회 분열의 시작은 멜리시우스가 주교 서품을 거행하고 투옥이나 피신 등으로 공석이 된 주교좌에 이들을 앉힘으로써 시작되었다. 결국 멜리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306)에서 총대주교였던 베드로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하지만 그 이단은 계속해서 아킬라스와 알렉산데르 총대주교 재임 때까지 이어졌다. 이는 멜리시우스가 주교 서품을 거행하고 자신들의 교회인 이른바 순교자 교회(Märtyrerkirche)를 세움으로써, 알렉산드리아 관구에 속하는 교구장들의 절반 정도를 이단자들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서 해결되었다. 공의회 결정문 제6조에서 알렉산드리아 주교좌가 이집트 · 테베(Thebae) · 리비아(Libya) · 펜타폴리스(Pentaplis)에 대해 지닌 특권을 재확인시킴으로써 해결되었다. 하지만 멜리시우스파는 계속해서 알렉산데르 총대주교와 적대 관계를 유지하였다. 더욱이 멜리시우스파들은 아타나시오(Athansius Alexandrinus, 295?~373)가 328년에 새 총대주교로 선출되는 것을 방해하여 아타나시오 주교와도 계속해서 충돌을 일으켰다.
아리우스주의 배격 : 아리우스(Arius, 256?~336)는 베드로 총대주교 재임 시기 동안 멜리시우스의 엄격주의 교회에 동조하였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와 아킬라스 총대주교 재임 때 사제 서품을 받았다. 초기에는 알렉산데르와 아리우스가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아리우스주의 역사가인 필로스토르지오(Philostorgius, 368~425)는 알렉산데르가 총대주교 후보로 오를 때 아리우스가 도움을 주었다고 전한다(《교회사) 1, 3). 이와는 달리콘스탄티노플의 에피파니오(Epiphanius, +535)는 아리우스가 총대주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좌절되자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며, 소조메노(Salamimius Hermias Sozome-nus, 380?~?)에 따르면 초기에 알렉산데르는 아리우스를 존경한 것으로 보인다(《교회사) 1, 15). 아무튼 알렉산데르는 아리우스를 중요한 성당인 바우칼리스(Baucalis)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데르가 총대주교좌에 오른 지 6년 정도 지난 후부터였다. 이 불화는 교의적인 문제로 시작되었다. 교회사가 소크라테스(Sokrates Scholasticus, 380?~450?)에 의하면, 알렉산데르 총대주교가 교구 내 모든 성직자들 앞에서 삼위 일체 신비에 대해 설명하면서 특별히 삼위의 단일성에 대해 강조한 데 대해, 아리우스는 알렉산데르가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us)의 경향을 지녔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무엇보다도 아리우스는 영원하며 낳음받지 않은 유일한 하느님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만약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면, 성자 자신은 시작하는 시점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성자는 성부처럼 영원한 분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또한 성부의 본체에서 난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운 창조 행위를 통해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해, 알렉산데르 총대주교는 온유함과 자부적 권고로 아리우스의 주장이 교회의 전통 교리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는 교회 전통에 따라 성직자들 앞에서 공개 토론회를 개최하여 아리우스에게 그의 주장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아리우스와 추종자들이 이에 불응하면서 계속 자신들의 사상을 퍼뜨리자, 318년 혹은 320년에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100여 명의 이집트와 리비아 주교들 그리고 다수의 신부들과 부제들이 참석한 이 교회 회의에서는 아리우스 사상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와 추종자들을 파문에 처하였다. 아리우스와 함께 교회 회의에서 단죄된 이들은, 알렉산데르 총대주교가 서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리비아 톨레마이데(Tolemaide)의 주교 세쿤두스(Secundus)와 마르마리카(Marmarica)의 테오나스(Teonas) 주교와 5명의 사제 그리고 6명의 부제등이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이 교회 회의의 결의 사항에 불순하고 팔레스티나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340) 주교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 Nicomediae, +342) 주교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안티오키아의 루치아노(Lucia-nus, +312) 밑에서 아리우스와 함께 공부하였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는 많은 주교들에게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아리우스주의가 계속 전파되도록 영향을 미쳤다. 한편 알렉산데르 총대주교 역시 아리우스의 잘못된 사상을 알리고 자신의 행위가 정당함을 알리는 서한을 각 지역 주교들에게 보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좌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결국 동방 교회는 정통 교의를 수호하려는 알렉산데르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부류와 아리우스파, 두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아리우스가 계속해서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자, 알렉산데르는 323년에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아리우스 이단뿐 아니라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아리우스 이단에 의지하고자 노력하던 멜리시우스파 문제, 부활 축일 날짜 문제 그리고 콜루투스 신부 문제 등이었다. 여기서 콜루투스 신부는 단죄되었다. 하지만 아리우스 이단 문제는 해결점을 찾지 못하였다. 결국 알렉산데르는 교황 실베스테르 1세(314~335)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교황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코르도바(Cordova)의 주교 호시오Hosius, 256~357/358)를 파견하였다. 호시오가 도착하자 알렉산데르 총대주교는 문제가 되는 사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림으로써 강력한 지원자를 얻었다. 한편 콘스탄틴 대제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는 대제를 설득하여 알렉산데르와 아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독촉하였다. 콘스탄틴대제는 호시오 주교의 편에서 이 편지를 보냈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이 편지에서 대제는 알렉산데르와 아리우스 모두에게 분열의 탓이 있음을 책망했다고 한다(Vita Constantini Ⅱ,64~72).
결국 콘스탄틴 대제는 325년 6월 제1차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알렉산데르 총대주교는 당시 부제였으나 후에 총대주교가 된 아타나시오의 도움을 받아 아리우스의 파문 결정을 받아 냈다. 또한 성자의 본성이 성부의 본성과 온전히 동일하다는 뜻의 '동일 본성' (ὁμοούιος)이라는 문구가 결정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의회가 폐막된 후 알렉산데르는 교부들의 서명이 있는 편지를 가지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와 대제측에서 아리우스를 다시 받아들이라는 압력이 들어왔으나, 알렉산데르는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소조메노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총대 주교는 자신이 사망하기 전에 아타나시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였다고 한다(《교회사》 II , 17).
알렉산데르의 사망 연대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아타나시오는 니체아 공의회에서 멜리시우스파를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는 것에 합의한 지 다섯 달 후 알렉산데르가 사망하였다고 전한다(《아리우스파를 반박하는 호교론》59).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326년 1월에 사망하였다. 이를 근거로 그리스인들은 1월 18일을 그의 사망 날짜로 보며, 콥트인들은 4월 22일 혹은 23일로, 그 외 다른 사람들은 4월 1일이나 18일 혹은 2월 26일로 보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아타나시오의 부활 서간 연도를 기준으로 328년 4월 17일 혹은 18일로 보고 있다. 서방 교회에서는 《로마 순교록》 (Martyrolologium Romanum)에 따라 2월 26일을 그의 축일로 지내고 있고,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5월 29일, 콥트 교회에서는 '파레무티' (pharemuthi)월 즉 4월 22일에 축일을 지내고 있다.
〔저 서〕 알렉산데르가 저술 활동을 한 것은 주로 아리우스 논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살라미나의 에피파니오는 자신의 저서인 《이단 반박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오래지 않아 그러한 일들이 알렉산데르 주교의 귀에 들어오자, 각 개별 주교들에게 회칙(encycli-cus)을 보냈는데, 이 회칙들은 오늘날 학자들의 손에 있으며 그 숫자는 70통에 이른다" (69, 4). 이 증언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주교가 70통의 회칙적인 서한을 썼고, 그 모음집이 살라미나의 에피파니오 시기까지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중에서 현재 두 통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두 통의 편지 또는 회칙은 아리우스 논쟁의 초기 역사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한 통은 테오도레토(Theodoretus Cyrensis, 393~466)의 《교회사》에, 다른 한 통은 소크라테스의 《교회사》와 젤라시오(Gelasius Cyzi-cus, 5세기)의 《니체아 공의회사》(Historia concilii Nicaeni)에 수록되어 있다.
테오도레토의 《교회사》 1장 3절에 수록된 서한은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서 아리우스에 대한 파문을 결의 한 다음인 324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신인은 콘스탄티노플 혹은 데살로니카의 알렉산데르(Alexan-der, ?~337) 주교이며, 그가 받은 서한은 모든 비이집트인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 중 하나이다. 이 서한에서 알렉산데르 총대주교는 아리우스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주의를 요구하면서 각 주교들이 자신들의 교구에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 교회 회의에서 파문에 처해진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서한에는 알렉산드리아와 마레오티스(Mareotis)의 36명의 신부들과 44명의 부제들도 서명하였다. 테오도레토의 《교회사》에는 세 명의 시리아 주교들은 아리우스를 지지하였으나, 상당수의 주교들은 알렉산데르 총대주교에게 지지를 보낸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교회사》 1장 6절과 젤라시오의 《니체아 공의회사》 2장 3절에서 발견되는 서한은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 폐막 후에 알렉산데르 총대주교가 교회의 모든 주교들에게 보낸 것이다. 이 서한은 아타나시오가 쓴 작품들의 여러 사본에서 '아리우스와 그의 제자들의 파면' 이라는 제목으로도 발견되었다. 아리우스 문제에 대해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가 각 지역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하자, 이에 대응하여 작성 · 발송한 것이다. 이 서한에서 총대주교는 각 지역에 있는 주교들에게 이단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에우세비오가 쓴 편지를 받는다면 이를 수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아리우스주의의 주요 내용을 요약 · 기술하고 있으며, 아리우스의 사상이 예수의 신성을 거부하는 에비온(Ebion)과 아르테마(Artema)의 주장과 다르지 않고 결국 사모사타의 바오로(Paulus Samosatenus, ?~260/270?)의 사상과도 관련이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상의 서한 외에 《영혼과 육신 그리고 주님의 수난에 관하여》(De anima et corpore deque Passione Domini)라는 강론 한 편이 시리아어 · 콥트어 · 조로지아어로 남아 있다. 사상이나 표현 등에서 사르디스(Sardis)의 주교 멜리토(Melito, 2세기)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강론으로 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알렉산데르 총대주교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강론들 혹은 단편들이 있다. 하지만 원 사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알렉산데르의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또한 선임 주교이며 순교자인 <베드로에 대한 찬미가〉(panégy-rique de Pierre)가 현재 시리아어와 콥트어로 전해지고 있다. 베드로 주교 축일에 그에게 봉헌된 경당에서 발표된 것으로 보이는 이 찬미가는 친저성이 의심되고 있다.〔신학 사상〕 오리제네스(Origenes Alexandriae, 185?~254)이후로, 특별히 성자에 관련된 두 가지 유형의 오리제네스주의적인 학설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보수적인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진보적인 입장이다. 전자의 대표자로는 알렉산데르 총대주교를, 후자의 대표자로는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주교를 꼽을 수 있다. 아리우스는 보다 엄격하게 유일신론(monotheismus)을 보존하고 이와 함께 하느님의 초월성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알렉산데르가 아리우스를 반박하면서 쓴 다수의 서한들 중에 두 통만이 전해지기 때문에 아리우스 논쟁에서 보인 알렉산데르의 일부 사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있으나, 일부 사상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예를 들면 알렉산데르가 아리우스와의 논쟁에서 콘스탄틴 대제를 진노하게 하였던 잠언 8장 22절에 대한 해석과 같은 것이다.
알렉산데르의 신학은 요한 복음 1장 1절과 1장 18절에서 설명되고 있는 성자의 신성에 대한 신비에 기초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성부만이 낳음을 받은 분이 아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음을 받았으나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며,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자는 '영원으로부터' (abaeterno) 성부에게서 난분이고, 성부와 영원으로부터 함께 있는 분이다. 때문에 성부와 성자의 상호 관계를 드러내는 용어와 성부에 대한 성자의 모습을 정의하는 각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말씀' (로고스, 요한 1, 1), '지혜' (잠언 8, 30), '모상' (골로 1, 15), '성부의 영광의 광체요 그분 본체의 표상' (히브 1, 3 ; 지혜 7, 26) 등이다. 즉 성자가 성부와 함께 영원으로부터 함께 있다는 것은, 성부가 당신의 말씀 없이, 당신의 지혜 없이, 당신의 권능 없이 당신의 모상 없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요한 10, 30)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것도 그분 자신이 성부라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성자가 모든 면에서 성부와 유사함을 지니고 있으며 성부의 완전한 모상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알렉산데르는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 문구인 '동일 본성' 이라는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성자가 성부로부터 난 분이라는 표현 안에 이 용어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알렉산데르는 예수가 단순히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격하였다. 요한 복음의 로고스 찬가뿐 아니라 시편 44장 2절과 109장 3절에 근거하여, 성자는 실제로 성부로부터 낳음을 받은 분임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그분이 '본체' (οὐσία)상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며, '본성' (φύσις)상 성부의 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자와 인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이\ 나타난다. 인간 역시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여전히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실제적 탄생이라는 점을 강조한 후, 알렉산데르는 이 탄생이 육체적 탄생과는 다른 것임을 설명한다. 즉 아리우스파가 설명하듯이, '분할' (τοῖς τομοῖς)이나 '분리를 유발하는 분출' (τοῖς ἐκ διαιρέσεων ἀπορροίαις)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정의는 현재 시리아어로 전해지고 있는 다음의 단편에서 잘 드러난다. "성부만이 낳음을 받지 않은 분이며 성자는 항상 그분 곁에 계십니다. 사실 성자는 빛의 투사로 불려졌습니다. 빛과 투사는 다른 것, 즉 서로서로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개체인 것입니다. 빛은 투사의 원인이 되기에, 이렇게 성부 역시 성자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원의(願意)로서 낳으신 성부의 위격의 원인으로서입니다."
알렉산데르는 2세기부터 전통적인 개념으로 자리잡은 성자 출생에 있어서의 '자발성' 의 개념을 여전히 종속론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중간적 본성으로서 보는 독생 성자에 대한 정의와 무엇보다도 요한 복음 14장 28절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사실 이 구절은 알렉산데르가 아리우스파와의 논쟁 속에서 성부와 그 모상인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최고의 유사함을 드러내기 위해 채택된 것이다. 이 때문에 알렉산데르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에서 전통적인 '종속설' (subordinatianismus)을 많이 제거하였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모상으로 보는 면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결국 성자가 성부와 함께 있다는 것과 성자와 성부의 불가분적인 관계를 강 조하게 된 것이다. 성자와 성부의 유일한 차이점은 성부만이 낳음을 받지 않은 분이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은 분이라는 점이다. 또 그는 성자에 대한 이해와 기술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 (θεοτόκος)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평 가〕 알렉산데르의 신학 사상에서 부족한 면이 있다면, 성부와 성자의 일치에 대한 기술적인 정식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와 논쟁을 벌이면서 오리제네스의 신학적 유산을 보호하고 종속설적 경향을 감소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아들이요, 참된 하느님으로 정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알렉산데르의 신학적 경향은 온건 또는 보수적 오리제네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 니체아 공의회 ; 니체아 신경 ; 아리우스주의 ; 아타나시오, 알렉산드리아의 ; 알렉산드리아 학파 ; 오리제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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