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그〕'Αλέξανδρια · 〔라 · 영〕Alexand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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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변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왼쪽)와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세웠던 폼페이우스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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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변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왼쪽)와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세웠던 폼페이우스 기둥.

오늘날 인구 600만 명이 넘는, 이집트 지중해변의 항구 도시.
〔역 사〕 초기 :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은 기원전 331년 이집트를 침략하였는데, 당시의 지배자인 페르시아를 싫어하던 이집트인들은 그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카르낙 신전의 한 경당을 바치며 그를 아몬 신의 아들로 선포하였다. 이집트인들은 그를 정식 파라오로 인정하여 이집트 내정은 자신들이 맡고 군대의 통수권은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 델타 동부에 마케도니아식 대도시와 새 항구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드리아 라고 명명했다. 황제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항구를 만들고 동쪽 항구 파로스 섬에 큰 등대를 세웠는데, 이 '파로스의 등대' 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기원전 323년 대왕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사망하자 그의 막료인 프톨레메우스 1세(Ptolemaeus I Soter, 기원전 323~285)장군이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이집트를 통치했다.이후 알렉산드리아는 수 세기 동안 티로를 대신하여 지중해 연안의 문화 · 경제 ·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프톨레메우스 왕조는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이자살함으로써 사실상 막을 내렸다.
유대인의 알렉산드리아 역사 :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부터 이집트로 이주하였는데,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자 초기부터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 구(區)가 만들어졌고, 이 구역은 알렉산드리아의 다섯 구 중 하나였다. 이 구는 그리스 시대에 유대 문화와 종교를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기원전 20?~서기 50)에 따르면, 자신의 시대에 100만 명도 넘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살았다고 하는데, 그중 상당수는 알렉산드리아에 살았을 것이다. 38년 이집트인들이 유대인들을 집단학살하는 비극이 벌어지자, 필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대표로 칼리굴라 황제(37~41)를 찾아갔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이집트인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왔다(De Legatione ad Gaium). 클라우디우스 황제(41~54)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을 고수하는 유대인들과 그 밖의 다른 민족들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었다. 양쪽은 황제에게 대표들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이에 황제는 오래 전부터 이 도시에서 살아온 유대인들의 권리를 인정하였고,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 전통을 지키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이 지역에서 이방인들임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다른 민족들의 모임이나 행사에 공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시리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초대하지 않도록 특명을 내렸다. 그는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일종의 페스트를 퍼뜨리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면서, 황제의 특명을 거스르는 이들은 엄벌에 처하겠다고 부언했다. 여기서 페스트는 그리스도교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 사이의 충돌 또는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의 마찰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66년에 팔레스티나에서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이 일어나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도 봉기했다가 진압당하였다. 115~117년에 다시 봉기하였다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가 거의 해체되었다(에우세비오, <교회사》 4, 2). 4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415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 주교 치릴로(412~44)가 유대교 공동체를 괴멸시켰다.
알렉산드리아 유대교 공동체의 가장 큰 업적은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매우 오래된 전승에 따르면, 프톨레메우스 2세(Ptolemaeus II , 기원전 285~246)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원로들에게 성서 번역을 명령하였다고 한다. 번역 과정에 대한 전설은 기원을 전후해서 가명으로 쓴 《아리스테아 편지》에 적혀 있다. 역사 비평적으로 볼 때 이 70인역 성서는 여러 역자들이 알렉산드리아와 기타 지역에서 기원전 2세기에 오랜 시일에 걸쳐 번역한 것이다. 이 성서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 이외에도, 가톨릭 구약성서 목록에서 이른바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토비트서, 유딧서, 에스델서 11-16장, 마카베오서 상 · 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다니엘서 3장 일부와 13-14장이 포함되어 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이것들을 폄하하여 구약 외경이라고 부른다. 서기 40년을 전후해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에 따라 이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70인역 성서를 사용하였고, 그로 인해서 70인역 성서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가 되었다. 교부들 가운데 70인역 본 이외에 구약성서 기타 그리스 역본들과 히브리어 원문에 관심을 지닌 교부는 오리제네스(185?~254)뿐이었다. 구약성서 옛 라틴어 역본들도 모두 70인역 성서에서 중역(重譯)한 것이다. 예로니모(342~420)가 처음으로 구약성서를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직역하였다. 교회의 역사 : 마르코 복음사가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선교하였다는 전승이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계 그리스도인 아폴로가 1세기 중엽에 에페소와 고린토에서 활약하였으나(사도 18, 24-28),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입교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지중해 문화의 중심지가 알렉산드리아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라비아의 북부 지방은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로부터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다. 오리제네스는 아라비아 교회 공동체의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아라비아의 통치자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데메트리오(189/190?~233?)에게 오리제네스를 자신에게 보내어 교리를 배울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로마 제국의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는 즉위 후 초기에 교회와 신자들에게 호의적이었으나, 202년부터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박해의 대상은 주로 예비 신자들과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된 신자들이었으며,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알렉산드리아 지역에서 희생자가 많았다. 오리제네스의 부친인 레오니데스(Leonides)도 이때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하였다. 카라칼라 황제(198~217)가 교회에 대해 관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교회는 다시 부흥하였으나, 북아프리카에서는 신자들이 군 복무를 거부하여 박해를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일찍부터 평신도들이 그리스도교 교리 학당을 세웠다. 교리 학당의 유명한 지도자로는 판테노(Pantaenus, ?~200?), 글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50?~215?), 오리제네스, 디오니시오(Dionysius Alexanddri-nus, 190~265?) , 테오뇨스토(Theognostus, ?~ 282?) , 피에리오(Pierius, ?~309?), 베드로(Petus Alexandrinus, ?~311) 등이었다. 성서를 자의적으로 풀이한 안티오키아 학파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우의적으로 풀이하였다. 이는 성서에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 심오한 뜻, 곧 상징적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의적 해석 방법은 그리스 철학자들(Pythagoras, Plato, Aristhenes, 스토아 학파)이 신화와 우화를 풀이할 때 즐겨 쓰던 방법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 철학자들도 이 방법을 애용하였는데, 특히 필로가 대표적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교리 학당은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글레멘스가 우의적 해석을 즐겼고, 오리제네스는 이 해석을 체계화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서 대표적인 인물들은, 테메트리오, 디오니시오, 베드로, 아타나시오(328-373), 테오필로(384~412), 치릴로, 디오스코로(Dioscorus, 444~451) 등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들은 이집트를 통괄하고 대표하는 이들로서 '총대주교' (patriarcha)라고 불렸다. 이는 4~5세기의 공의회에서 자주 논의되던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규정한 교구의 서열을 확정하였다. 즉 로마 다음으로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이었다. 로마를 제외한 4개의 대교구를 '총대주교좌' (patiarchatus)라고 규정하였다.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이 모두 있다는 양성론(兩性論)을 정통 교리로 의결하자, 그리스도 단성설(momophysitismus)을 주창하던 이집트 교회는 차츰 이탈해서 콥트 교회가 되었다. 실상 457년에 그리스도 단성설을 따르는 디모테오 2세(457~460)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됨으로써 이후 그리스도 단성설을 따르던 이들이 계속 총대주교가 되었다. 1997년 현재 이집트의 롭트 신자들은 600만 명 정도이다. 이와는 달리 양성론을 지지하는 동방 교회의 신자들을 멜키트 신자라고한다. 멜키트 교회 신자들은 537년 바오로(Paul ofTabenn,537~540)가 알렉산드리아에 멜키트 총대주교좌를 세우고 초대 총대주교가 된 이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유 적〕 알렉산드리아에서 눈여겨볼 만한 유적들은 다음과 같다. 기차 역과 동쪽 항구 사이에 그리스 로마 박물관이 있고, 그 반대 방향에 폼페이우스 기둥이 하나 서있는데, 이는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세운 둘째 도서관에서 있던 400개 기둥 중 하나였다. 이보다 규모가 큰 프톨레메우스 왕실 도서관은 동쪽 항구에 돌출한 알 시실라(al Sisilah)에 세운 궁전 남쪽에 있었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 ; 이집트)
※ 참고문헌  C.D.G. Müller · H.-F. Weiß, 《TRE》 2, pp. 248-464/ B.A. Pearson, 《ABD》 1, pp. 152~157/ Egypt(Blue Guide), London, Black, 1993, pp. 662~685/ F.W. Norris, Encyclopedia of Early Christianity, E. Fergusoned., Garland Publishing, 1997, pp. 30~34/ 박준서, 《성지》, 조선일보, 1992, pp. 177~181/ 천 사무엘,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 형성과 박해의 역사>, 《신학 사상》 88(1995. 봄), pp. 147~169.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