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학파

- 學派

[라]schola Alexandrina · [영]school of Alexand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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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시대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교리 학교와 신학의 전통적인 특성을 함께 일컫는 명칭. 초기 교회에서 안티오키아 학파와 함께 교의들을 정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최초로 증언한 사람들은 바실리데스(Basilides, 2세기경) · 발렌티누스(Valentinus, 120?~160)를 비롯한 그노시스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복잡한 그노시스주의 체계에 기초를 놓고,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와 유사한 학교의 책임자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역 사〕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하며 독자적으로 활동한 교사로 판테노(Pantaenus, 2세기 후반)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의 창립자로 여겨진다. 에우세비오(260-340)가 최초로 교사라고 부른판테노는 인도를 여행하고 인도의 철학과 종교의 영향을받은 인물로, 본래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공동체의 장로단에 속해 있으면서 성서 연구가 또는 성서 신학자로 활동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리제네스(?~254)는 판테노가 이단자들과 세속 철학에 심취해있었다고 하였다. 판테노의 제자이며 후계자인 글레멘스(Clemens Alexandrianus, 150?~215?)는 180~190년경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르며 그의 강의를 들었었다. 그 역시 알렉산드리아 공동체의 장로였다. 그리스 전승은 물론 이집트 · 동방의 전승에서 세계적 교양인으로 평가받은 글레멘스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변론한 위대한 호교가이자 교회 최초의 윤리학자였다. 그의 관심사는 주로 철학적 가르침과 밀접히 연관된 실생활이었으나,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초보적인 교리 문답 강의에만 전념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는 당시 교양 있는 지도층에 고등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였으며, 이를 실천하고 정식화하는 데 플라톤과 스토아 학파의 철학을 활용하였다. 그는 교양 있는 이교인에게는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하면서, 그리스도인에게는 경건한 신앙 생활의 실천을 넘어 신앙을 이성적으로 숙고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193~211)인 202~203년경에 일어난 박해 때문에 피신하였다. 판테노와 글레멘스는 명백히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스스로 교회의 신학자로 여겼으나, 주교 관할의 학교와는 관련 없는 독자적인 교사로 활동하였다. 3세기에 이르러 알렉산드리아에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기초 교육을 시키는 주교 관할 학교가 발전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이전까지의 독자적인 교사직을 주교 관할의 교회에 통합하고 고전적 세속 학문을 교회에 받아들이며, 신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이 학교가 신앙의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교리 교사를 위한 고등 학교의 의미로 이해하고, 오리제네스가 세운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학교에 관한 에우세비오의 일관되지 않은 명칭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교회의 예비 신자 교육과 고대의 철학 학교 · 신학 학교 전통과 상당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알렉산드리아 학교 전통의 새로운 시대는 문법학자 레오니데스(+202)의 아들 오리제네스와 함께 시작되었다. 오리제네스가 글레멘스의 제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데메트리우스 주교(189/190?~233?)는 오리제네스의 열성적인 믿음, 금욕적인 엄격함, 두드러진 박식함 때문에 18세의 그에게 예비 신자 강의를 맡겼다. 217년 오리제네스는 주교의 압력으로 이 강의를 후에 주교가 된 헤라클라스(Heraclas)에게 넘기고, 글레멘스가 그랬던 것처럼 교양 있는 이교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려는 의도에서 철학과 신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연구와 강의에 열중하면서,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철학자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 175?~244)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 창시자 플로티누스(205~270)와 함께 당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암모니우스 · 헤라클라스 · 플로티누스와 달리 오리제네스는 매우 일찍부터 저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수많은 여행을 하였다. 그가 여행할 때 일어난 사건, 신학적으로 새로운 그의 가르침은 논쟁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팔레스티나의 가이사리아(Caesaia)와 예루살렘의 주교들인 그의 친구들은 평신도인 그에게 설교를 부탁하였는데, 이 일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메트리오는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마침내 가이사리아의 주교가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허락도 없이 오리제네스에게 사제품을 준 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에 오리제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판결이 미치지 못하는 팔레스티나의 가이사리아로 떠나 그곳에 새로운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서남 아시아에 알렉산드리아의 사상 · 해석 방법 · 신학 등을 전파하는 구실을 하였다. 오리제네스는 254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오리제네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친 저명한 교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주교가 되었다. 교사들은 철학 강의를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고 다른 교사들과 논쟁하면서 당시의 교양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철학을 설명하는 역할도 맡았다. 헤라클라스(233?~247?)다음으로 디오니시오(Dionysius Alexandrianus, 247?~265?)가 교리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이 두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가 되었다. 이들은 이교인 교육 방식을 교회에 받아들였으나, 오리제네스의 전통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 뒤에 주석가 테오그노스토(Theognostus, 265~282)가 교리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장로이며, 박식함과 금욕적 열정 때문에 제2의 오리제네스라고도 불리는 피에리오(Pierius, +312?)가 테오나스 주교(282~300) 때 활동하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로 이주하였다. 그 뒤를 이어 마지막 순교자인 베드로 1세 주교(300~311)와 아킬라스 주교(311~312)가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따라서 이 학교가 확실히 4세기 초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디디모(Didymus Caecus, 313?~395/399?)는 장로는 아니지만 독자적인 교사로 활동한 중요한 인물이다. 루피노(Rufinus, 345~410)와 예로니모가 그의 제자이다. 남아 있는 작품에서 입증되듯이 디디모는 주석가와 신학자로서 오리제네스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사후에, 즉 4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리제네스 논쟁에 연루되었다. 교회사가인 시데(Side)의 필립보는 알렉산드리아의 마지막 교사가 로돈이라고 서술하였으나,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첫 번째 교사를 호교가인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2세기 후반)로 기록하는 등 일련의 오류가 있는 걸 보면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교리 학교는 결코 정해진 교과 과정과 체계를 갖춘 교육 기관이 아니었으며, 동방(에데사, 니시비스)의 페르시아 학파처럼 그리스도교의 고등 교육 기관으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더욱이 알렉산드리아는 4세기부터 교의 논쟁의 중심지였고 이 논쟁이 계속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실질적인 고등 교육 기관은 설립되지 않았다.
〔특성과 의의〕 글레멘스와 오리제네스는 생애의 말년을 알렉산드리아 밖에서 활동하였지만 알렉산드리아 학교 전통의 고전적 대표자로 여겨진다. 두 사람은 이교적 그노시스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참된 그노시스, 곧 신앙을 통한 이성적 · 철학적인 인식을 교회의 성서적 · 전통적 신학 안에서 긍정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신학의 학문적 선구자가 되었다. 이들은 그리스화된 유대교(필로)와 플라톤주의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그리스도교 플라톤주의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때로 교의적 · 금욕적 영성주의의 위험성을 지녔지만 인간이 되신 하느님 말씀의 신비를 강조하였다. 오리제네스의 신학은 성서와 신앙의 규범에 기초를 두며, 이로써 그는 자신의 신학이 정통이며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중기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는 그의 교의 체계(《원리론》)는, 후대에 오리제네스 논쟁을 일으킨 신앙에 관한 신학적 명제(삼위의 종속, 영혼의 선재 등)를 담고 있어 정통 신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격동의 역사는 곧 이러한 그릇된 설의 변론과 투쟁의 역사였다.
오리제네스는 성서 본문을 언어학적 · 비평적으로 탐구하는 방법으로 역사적 · 문법적 의미를 중시하였을 뿐 만 아니라, 우의적(寓意的, allegory) 해석의 대가로서 성서의 깊고 감추어진 의미를 찾는 우의적 · 영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그의 성서 주석학은 알렉산드리아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그는 예형론(豫型論)적 해석으로 구약성서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추론하고, 구원사에서 신앙에 관한 진술을 해석하며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희망을 설명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통은 오리제네스가 기초를 놓은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오리제네스 전통을 동일시하는 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있다. 오리제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처럼 가이사리아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주교가 아니었던 테오그노스토 · 피에리오 · 디디모와 같은 신학자들이 그의 유산을 충실히 따른 반면, 주교인 헤라클라스 · 디오니시오 · 베드로 1세는 오리제네스 전통을 멀리하였다. 오리제네스의 삼위의 종속설에 대한 논박은 이미 디오니시오 때 무르익었으며, 베드로 1세는 스승을 존경하였지만 오리제네스의 일부 가르침에 명백히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오리제네스의 금을 정련하는 용광로라고 할 수 있다. 5세기의 학문적 수도 제도, 가빠도 기아 사람들과 비잔틴인들의 교의 신학과 종교적 가르침, 예로니모와 암브로시오의 성서 주석, 서방의 예형론적 해석 등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초대 교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서 해석 방법에서 우의적 · 도덕적 · 신비적 의미를, 안티오키아 학파는 역사적 ·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전자는 일치 그리스도론을, 후자는 분리 그리스도론을 중시했으며, 두 학파는 후대의 교의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그노시스 ; 글레멘스 1세 ; 디디모 ; 디오니시오, 알렉산드리아의 ; 안티오키아 학파 ; 알렉산드리아 ; 오리제네스)
※ 참고문헌  W.A. Bienert, 《LThK》 1, pp. 377~3791 H. Drobner, Lehr-buch der Patrologie, erder, 1995/ C.D.G. Miiller, Alexandrien, 《TRE》 2,pp. 248~261/ Fr.W. Norris, Alexandria, 《EEC》 2, pp. 30~34/ H. Rahner, 《LThK》 1, pp. 323~325.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