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세기 남서 프랑스에서 세력을 떨쳤던 가타리파(Cathari)의 추종자들. 남부 프랑스의 '알비' (Albi)라는 도시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이 지역은 "알비의 땅" · "알비 왕국" 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기원과 발전〕 '알비' 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카타리'라는 말은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알바니아 가타라파의 이탈리아식 발음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것은 당시 문학에 있어서 이단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들을 반영하는 것에서 유래된 것 같다. 사실 로잔(Losanne)의 헨리코가 이탈리아의 북부 지역 린과도카(Linguadoca)에서 이단설을 유포하는 데 대항하여 교황 특사인 알베리코 추기경이 1145년 6월 25일 행한 선교는 알비 지역의 시민들에게 아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3일 후에는 베르나르도(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가 그곳의 군중들을 회개시켰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1165년에는 페이르(Guglielmo Peire) 주교가 그 지역 주변 교구들의 주교들과 제후들과 주민들을 알비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함으로써 이 지역은 가타리파 이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교회 회의의 이단적인 주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주교로 부터 단죄를 받았다. 그러자 그들은 다른 지역으로 멀리퍼져 나갔으며 그 후에도 이 이단의 기원은 알비 도시가되었고, 또 가타리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실 이들의 기원은 북부 프랑스의 아퀴타니아(Aquitania) 지역에서 11세기에 나름대로의 조직을 가지고 있던 이단인 이원주의적 신마니교의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1167년에 툴루즈(Toulouse)의 생 펠릭스 드 카라망(Saint-Félix de Caraman)에서 개최된 가타리파 회의를 통해 알비파는 자체적인 교리의 통일과 교계 제도적 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알비 · 툴루즈 · 카르카손 · 린과도카 지방의 발다란(Val d' Aran)과 프랑스의 옛 도시들 그리고 중세 오일(Oïl) 방언을 사용하는 왕령(王領) 지역에서도 자신들의 교구를 설립하였다. 1225년에는 툴루즈의 동부 해안 지역인 라제(Razés) 교구를, 1230년에는 툴루즈의 북부 지역에 아장(Agen) 교구를 설립하였다. 당시의 저술가인 사코니(R. Sacconi)의 저서 《가타리파 대전》(Summa de catharis, 1250)에서도 알비 · 툴루즈 · 카르카손의 세 교회가 언급되어 있다. 이단자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는데 아장 교구는 약 200명 정도였으며, 그들은 베로나의 가타리파 주교인 발라시난자(Balasinanza)를 지도자로 삼았고 알바니아의 가타리파 교리를 따랐기에 절대적인 이원주의로 남아 있었다. 한편 오일 방언을 사용하던 지역의 이단자들은 당시 프랑스의 국왕인 루이 9세(1226~1270)의 반이단주의 정책 때문에 베로나와 롬바르디아 지역으로 옮겨 150명 정도의 무리를 다시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이탈리아의 북동부 바뇰로 가타리파의 완화된 이원주의적 가르침을 따랐다. 13세기 후반기에는 린과도카 지역에서 롬바르디아 지역과 이탈리아 남부의 풀리아(Puglia) 지역으로 추방되거나 이주한 가타리파의 지도자들과 소집단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13세기 말에 완화된 이원주의 사상과 교리를 배워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그 이후 이단 심문과 알비파 중심 도시들이 분산되면서 14세기에는 단지 소수의 흔적들만 남게 되었다.
〔알비파에 대한 십자군〕 12세기 중반부터 가타리파 혹은 알비파는 린과도카 지역에서 자치적인 제도를 정비하고 큰 집회를 소집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교회의 교도권과 여러 제도들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이단설을 확산시켰다. 이단자들은 당시의 세력 있는 봉건 영주들과 세속권의 지지를 받았다. 소위 '완전한 자' 로 불리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이 이단은 신자들과 지지자들이 어떤 방종한 상태에 있어도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반면에 '위령 안수 예식' (Extremis del Consolamen-tum)을 받음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고 약속하였다. 이단자들의 설교는 당시 교회의 부(富)를 반대 · 비판하면서, 욕심 많은 귀족 세력들에 대해서는 어떤 도덕적인 가책 없이도 파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일반 백성들은 가타리파 지도자들의 엄격한 생활에 현혹되어 갔으며, 교회와 성사 생활을 멀리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반대하는 폭력에 가담하였다. 이 같은 이단자들의 공격에 반대하지 않거나 심지어 이들과 내통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고위 성직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부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는 흔들렸다. 알비파는 국가와 그리스도교 사회에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툴루즈의 영주 레몽 5세는 1177년에 무장한 자신의 신하들이 적들에게로 도주할 가능성 때문에 영적인 무장도 아울러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알비파를 물리치기 위한 신앙 설교자들인 시토회 회원들이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1178년과 1181년에 이곳 해안에 상륙할 것으로 알았으나 어느 누구도 오지 않았다. 그러자 레몽 6세(1156~1222)는 이단자들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이단자들을 신에 대한 반역죄로 간주하였으며, 이들을 일종의 마녀 신앙으로 보고 교황 대사의 종교 재판을 통해 단죄하도록 권한을 강화시켰다. 즉 이단자들을 교회의 공직으로부터 면직시키고,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에게 가톨릭 신앙에 대한 충성과 이단자들의 추방과 그들의 재산 몰수를 통한 세속적 권력의 개입, 그리고 그들 자신도 이러한 단죄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지시는 교황 사절인 카스텔나우의 베드로와 루돌프에 의해서, 1203년에는 오스마(0sma) 교구의 주교인 디에고와 구즈만의 도미니코가 동료들과 함께 수행되었다. 그들은 금욕적인 모범 생활을 실천하면서 복음 설교와 논쟁적인 회의들을 개최하였으나 부분적인 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 툴루즈의 영주는 교황 사절들의 일이 실패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하 중 이단에 물든 이를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통해 1208년 1월 5일 카스텔나우의 베드로 교황 사절을 살해하도록 하면서 전쟁 상황으로 몰고 갔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랑스 남부의 이단자들을 무찌르기 위한 십자군을 조직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파문한 레몽 6세에게 충성을 약속한 신하들을 풀어 주도록 하였다. 프랑스 왕 필리프 2세(PhilipeII , 1179~1223)는 이에 대해 중립 노선을 취했으나 자신의 신하들이 십자군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서는 허락하였다. 교황 사절 시토는 모집된 십자군을 이끌고 리용에서 출발하여 1209년 7월 22일에 베지에(Béziers)를 함락하고 8월 15일에는 카르카손을 점령하였다. 십자군의 지휘자는 몽포르의 시몬(Simone di Monfort)이었는데 그는 점령한 두 도시에 북쪽 출신의 자작(子爵)을 두어 봉토로 다스리게 하였다. 십자군들은 열렬한 신앙심으로 무장되어 탁월한 용맹성을 보였으나, 자신들의 세속적 욕심 때문에 전쟁 중 잔인한 행동도 하였다.
교회 당국은 지역 교계 제도를 새로이 쇄신하였으며, 이단적인 영향을 받은 지역들을 정화시켰다. 그리고 시몬은 레몽 백작에게서 툴루즈 영주직을 박탈시키려 했으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관용적 차원에서 이를 연기시켰다. 이러한 갈등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계속되었는데 레몽 6세와 동맹을 맺고 있던 아라곤 왕국의 왕 베드로가 동맹을 결성해서 십자군에 대항하면서 교황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시몬이 지휘하는 십자군이 1213년 9월 12일 무래(Muret) 지역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실패하였다. 1215년에 개최된 몽펠리에 교회 회의에서는 시몬에게 툴루즈 도시를 양도하였으며, 같은해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화해적 차원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들은 툴루즈주의 아들 레몽 7세(1197~1249)에게 주지만, 정복된지역은 교회의 봉토로 지정하도록 시몬을 통해 프랑스왕에게 요구하였다.
이단에 반대하는 조치는 교회와 세속의 법적 차원에서도 진척되었다. 그러나 군사 분야에서는 프랑스의 왕 루이 8세(1223~1226)의 군대가 개입하지 않는 한, 프랑스의 전 지역이 일진일퇴의 혼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루이8세 왕이 사망한 이후 알비파의 세력은 다시 강화되었으며 전쟁은 1228년까지 지속되었고, 마침내 레몽 7세가 자신감을 잃자 조약을 맺기를 원하였다. 모(Meaux)에서 1229년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알비파는 남부 린과도카 지역을 잃는 대신 카르카손 지역과 스페인과의 국경 지대인 보케르(Beaucaire) 지역을 차지하였다. 레몽은 자신이 통치하던 지역을 계승하기 위하여 자신의 딸 요안나를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동생 푸아티에의 알폰소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새로이 툴루즈의 영주가 된 알폰소는 전통 신앙을 고수하겠다는 서명을 하여야 했다.
이단이 세속 권력과 공모하는 것을 단절시키는 데 기여한 알비파에 반대한 십자군의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도 성심을 다해서 이 예견되지 못한 일탈과 정치적 혼란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울러 십자군은 프랑스의 남과 북을 침투해 감으로써 프랑스의 일치를 위해 기여한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또한 이 같은 이단 출몰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 (1227~1241)와 그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이단 심문(Inqui-sizione) 제도를 만들도록 부추기는 역할도 하였다.
〔알비파의 교리] 마니교적 이원론이 교리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구약에 따르면 "태초에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가타리파에 따르면, 선한 빛의 하느님은 오로지 영혼의 세계만을 창조하셨고, 물질 세계는 어두움의 왕인 사탄이 창조하였다고 가르쳤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선하며, 물질은 본질적으로 약하다. 정신은 선하며, 육체는 약하다. 온 세계는 빛의 세력과 어두움의 세력, 영혼과 물질이 서로 싸우는 싸움터이다. 삶의 목적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정신을 구해 내어 죽은 뒤에 빛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정통 그리스도교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육체가 본질적으로 악하다면, 하느님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가타리파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자(使者)이며,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가타리파에게는 물질적 요소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내리는 것으로 간주되는 성사들도 본질적으로 신성 모독이었다. 가타리파는 결혼 역시 출산을 야기하여 더욱 많은 영혼을 사악한 육체에 속박되게 만든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러한 신앙은 3세기에 마니(Mani, 216~274?)가 가르쳤던 동방의 마니교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12세기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미 성 아우구스티노(354-430)가 마니교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기 때문에 마니교의 교리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 이원론적 신앙이 퍼지고 있음을 깨닫자마자, 그 신봉자들을 마니교도로 낙인찍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마니교의 전통이 살아나 12세기에 유럽에서 "표면화"된 것인지, 아니면 가타리파가 기성 교회의 부패상에 대한 반발로 자생된 것인지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는 입장이다. 서방의 가타리파는 불가리아에서 태동하여 10~11세기에 동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진 이원론적인 보고밀파(Bogomili)의 선교사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문제는 보고밀파와 본래의 마니교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보고밀파는 두 파로 나뉘어, 서유럽에서 어느 정도 신자를 모았다는데, 한 파는 "온건한 이원론" 으로,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이원론"으로 지칭될 수 있다. 두 파 모두 사탄이 물질 세계를 창조하였고, 물질 세계는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주장하였다. 전자는 사탄이 하느님의 탈선한 아들이라고 주장한 반면, 후자는 태초부터 선과 악의 두 창조 원리가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고 가르쳤다. 극단적 이원론자들의 교리는 본래의 마니교에 더 가까운 전자보다 정통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더욱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원론의 두 형태는 실제로는 같은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모든 물질은 사탄이 창조한 것이므로, 가타리파의 가르침에 따르면 완벽한 삶은 철저하게 금욕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 신봉자들은 완전히 독신이어야 했고,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아야 했다. 이러한 원칙을 지닌 가타리파의 생계 문제는 신자를 사제(Perfecti, 완전자)와 평신도(Credenties, 믿는 자)의 두 계급으로 나눔으로써 해결되었다. 사제는 엄격한 금욕의 이상을 실현해야 했다. 그들은 두 명의 사제가 주재하는 위령 안수 예식을 통해서 이 등급에 올랐다. 평신도는 마음내키는 대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떤 직업을 가져도 좋았고 가정을 이룰 수도 있었으며 고기를 먹어도 되었다. 그들의 유일한 기본적인 의무는 기성 교회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죽기전에 위령 안수 예식을 받는 것이었다. 지난날의 모든 죄를 씻어 내는 이 의식은 평신도가 죽기 직전에 행해졌다. 사실 다시 죄를 질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의식이 끝나자마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가타리파의 신앙에 관한 지식은 대부분 그들을 비난한 글들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당연히 그 교리 가운데 가장 알려진 측면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들이다. 예컨대 그들은 죄인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 당하기보다는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영혼은 구원을 얻을 때까지 인간의 육신으로 몇 번이고 태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가타리파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교리인 육화를 부정하고, 교회의 성사를 거부하였다. 결혼에 대한 그들의 비난은, 중세 교회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달라서 부부애보다는 자녀의 출산을 더 사악한 것으로 매도했기 때문에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히 충격적이었다. 가타리파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서약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요한 조목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교회와 모든 신자들의 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가타리파의 주된 관심은 사제들의 철저한 금욕 생활에 있었다. 이러한 점은 정통 교회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 억겸파 ;→ 가타리파 ; 이단 심문)
※ 참고문헌 C. Douais, L'Eglise et la croisade contre les Albigeois, Annales du Midi 2, 1890/ L. De Lacer, L'Albigeois pendant la crise de l'albigéoisme, L’Épiscopat de Guilhem Peire, 85~1227, Revue d'histoire ecclés., 29, 1933/ J. Guiraud, Histoire de l'inquisition au moyen âge, I , Parigi, 1935/ A. Varagnac, Croisade et marchandise pourquoi Simon de Monfort s'en alla défaire les albigeois, Annales(Ecomomie, société, civilisa-tions) I , 1946/ B. Tierney · S. Painter, Western Europe in the MiddleAges, 300~1475(이연규 역,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86). 李文 〔全壽洪〕
알비파
派
〔라〕Albigenses · 〔영〕Albigens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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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알바파와의 논쟁에서 비유를 들어 대답을 들려주고 있는 도미니코 성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