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교회 학자. 주교. 신학자. 구속주회(Congregatio Sanctissimi Redemptoris, C.SS.R.) 설립자. 축일은 8월 1일.
〔생애와 활동〕 1696년 9월 27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가까운 마리아넬라(Marianella)에서 주세페(Giuseppe de Liguori)와 안나 카발리에리(Anna Cavalieri) 사이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나폴리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다. 아버지 주세페는 나폴리 공국의 해군이었으며 어머니는 트로야(Troja)의 카발리에리 주교의 동생으로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였던 알퐁소는 가정 교사들에게서 문학 · 수학 · 철학 · 음악 · 프랑스어 · 미술 등을 배웠으며,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세 때 첫영성체를 했으며, 그 후로도 오라토리오회(Oratoriani)의 파가노(Pagano) 신부에게서 영적 지도를 받으며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였다.
변호사 활동 및 회심 : 1708년 나폴리 대학에 입학한 알퐁소는 1713년까지 법학을 공부한 후, 16세의 소년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아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몇 년동안 변호사로 일하면서 결코 패소하지 않는 변호사로 널리 알려졌다. 1722년부터 알퐁소는 사교계에 관여하게 되었고, 그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기도와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을 즐겨 찾았다. 이듬해 토스카나(Toscana) 대공과 어떤 공작 사이에 큰 돈이 걸린 소송이 벌어졌다. 알퐁소도 이 소송에 참여하였는데 그가 어떤 중요한 문서를 잘못 해석하고 서명한 사실이 밝혀져 패소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변호사로서의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스스로를 생각하였다.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며 기도하며 지내던 중, 그는 1723년 8월 28일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찾아갔다가 신비 체험을 하였다. 갑자기 빛이 그를 둘러싸고 내면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를 두 번 들었다고 한다. "세속을 버리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살아라." 병원을 나온 알퐁소는 그 길로 성당으로 가 성모상 앞에서, 사제가 되어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러한 그의 뜻을 완강하게 반대하던 알퐁소의 아버지는 그가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지 않고 그냥 집에 머무른다면 사제가 되어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알퐁소는 그 해 10월 23일부터 집에서 토르니(Julio Torni)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수도회의 창설과 확립 : 1724년에 알퐁소는 공동 생활을 하지 않는 나폴리의 한 사도 선교회 회원이 되었으며, 1726년 12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고해성사와 설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1729년 4월에 리파(Matteo Ripa)가 나폴리에 '중국 신학원' (Chinese College)을 세우자, 알퐁소는 집을 떠나 그 신학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 신학원과 관련된 사목에 헌신하였다. 이듬해 친구인 팔코이아(T.Falcoia)가 스칼라(Scala) 지방에 있는 카스텔라마레교구의 주교가 되자, 알퐁소는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731년에 여자 구속주회를 창설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팔코이아 주교, 파가노 신부와 다른 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남자 구속주회를 창설하였다.
이 회는 공동 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주님의 말씀 전파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성직 수도회였다. 선교사와 교리 교육 · 영성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은 나폴리 왕국의 가난한 농촌 사람들을 주로 사목 대상으로 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알퐁소는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수도회를 정립하고 규칙을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새로운 회를 만드는 일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의견 충돌이 일어났으며,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733년 4월 1일 쿠르시오(Vitus Curtius)라는 수도자 한 명만 남고 모든 회원들이 다른 회를 창설하여 떠났다. 하지만 알퐁소는 흔들리지 않고 회를 지키며 곧 다른 회원들을 맞아 발전시켜 나갔다. 마침내 구속주회는 1749년 2월 25일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의 교서 〈앗 파스토랄리스 딕니타티스 파스티지움>(Ad pastoralis dignitatis fastigium)에 의해 인가를 받았으며, 같은 해에 열린 총회에서 알퐁소는 종신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왕권주의를 내세워 수도회들을 적대시하던 왕과 타누치(Tanucci) 후작 때문에 나폴리 왕국의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1752년 12월 9일 왕은 교황령과 시칠리아만을 사목 활동 영역으로 한정한다는 조건으로 인가를 해주었다.
주교직의 수행 : 1762년 6월 20일 교황 글레멘스 13세(1758~1769)는, 구속주회를 지도하고 설교하며 저술과 사도직 활동에 매진하던 알퐁소를 '산타 아가타 데이 고티' (Sant' Agata dei Got)라는 나폴리의 한 작은 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 교구에는 당시 3만 명 정도의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주민들과 대부분 냉담하고 불성실한 사제들, 그리고 17개 정도의 규율이 해이한 수도원들이 있었다. 이 교구를 돌보는 13년 동안 알퐁소는 눈물로 기도하며 밤낮으로 교구를 돌보고 개혁하는 일에 매달렸다. 악습을 제거하고 성당들을 복구하며, 전례를 수호하고, 수도원을 개혁하며, 선교 사업을 육성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763~1764년 남부 이탈리아가 기근으로 허덕이자 자선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다.
수도회의 위기와 분열 : 한편 알퐁소는 1764년 총회를 거쳐 수도회의 회칙을 채택하였다. 1768년 6년 간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중병을 얻은 알퐁소는 주교직을 수차례 사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1776년 교황 비오 6세(1775~1799)로부터 허락을 받고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주교직을 사임한 후에도 그는 구속주회의 정립과 운영을 위해 주력하였다. 하지만 나폴리 왕국의 당국자들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 예수회가 박해를 받은 이후 구속주회도 위험에 처하자, 알퐁소는 중개자를 내세워 당국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왕이 승인한 규칙과 교황 베네딕도 14세가 수도회를 인가한 교서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므로 늘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교회와 나폴리 왕국 사이의 갈등 상황에서 교황령 외의 지역에 있던 공동체들이 알퐁소의 관할권을 벗어나게 됨으로써 회는 두 계열로 분열되었다. 알풍소는 둘로 분열된 수도회가 다시 합쳐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1787년 8월 1일 살레르노(Salerno)에서 사망하였다. 구속주회는 알퐁소가 사망한 직후, 다시 하나로 재건되어 발전하였다.
〔시 성〕 1816년 9월 15일 교황 비오 7세(1800~1823)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71년에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그 후 1839년 5월 26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50년 4월 26일황 비오 12세(1939~1958)에 의해 고해 사제들과 윤리신학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되었다. (→ 구속주회)
※ 참고문헌 H. Castle,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1, trans. by Paul T. Crowley, Robert Appleton Co., 1907/ P. Zerbi, 《NCE》 1, pp. 336~341/ A. Vacant · E. Mangenot, 《DTC》 1, pp. 907~919/ Enzo Lodi,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trans. by Jordan Aumann, 0.P., 1992, pp. 207~210/ G. Liévin, C.SS.R., 《Dsp》 1, pp. 357~389/ Donal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 Saints, Great Britain, 1983, pp. 38~39/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87, p. 16/ G. Jacquemet, 《Cath》 1, pp. 352~358. 〔宋炯萬〕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1696~1787)
〔라〕Alphonsus Maria de Ligu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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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