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브로시오 (339 ~ 397)

〔라〕Ambros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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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오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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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오 성인.

성인. 밀라노의 주교. 신학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 교회 학자. 축일은 12월 7일. 암브로시오의 생애는 그가 남긴 저서들 특히 서간들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그의 사후에 밀라노의 파울리노가 쓴 전기 《성 암브로시오의 생애》(Vita S. Ambrosii)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파울리노는 암브로시오 주교의 비서(394~397)로서 밀라노의 성직자였고, 암브로시오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기에 그의 전기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 파울리노는 아우구스티노 주교(354~430)의 부탁으로 422년에 이 전기를 저술하였다(Via, 1).
I . 생 애
[초기 생애〕 339년 트리어(Tier)에서 로마의 귀족 가문이며 대대로 신앙을 지켜 온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아우렐리우스는 갈리아의 지방 장관(Praefectus praetorio Gallianum)으로 재직하였다(Vina, 3). 암브로시오는 트리어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의 사망 후 로마에서 인문 교육을 받아 수사학과 법학 외에 그리스어에도 능통하였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서 그는 국가 관리의 길을 택하였다. 뛰어난 실력과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그는 빨리 출세하였다. 시르미움(Simium)의 지방 법원에서 잠시 근무를 하다가 지방 장관 프로부스(Probus)의 고문이 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370년에 애밀리아 리구리아(Aemina-Ligumia)의 주도(州都)인 밀라노의 집정관이 되었다(Vita, 5). 로마가 쇠퇴해 가던 4세기 당시의 밀라노는 황실과 행정부가 있었던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따라서 밀라노의 주교좌도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암브로시오가 그 지방을 다스리던 때 밀라노에는 서방교회 아리우스주의의 대표자인 아욱센시우스(Aurentius,?~374)가 주교로 있었다. 그는 푸아티에(Poities)의 주교인 힐라리오(315?~367?)를 거스려서 논쟁을 벌였었다. 아욱센시우스는 359년의 리미니 교회 회의와 이후 다른 회의에서 이단자로 파문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364~375)의 도움으로 죽을 때까지 밀라노의 주교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자 후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집정관인 암브로시오는 사태가 더욱 악화되지 않고 밀라노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이 문제에 개입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을 중재하면서 암브로시오는 성당에 모여 있던 신자들에게 평화적 방법과 대화를 통한 화해를 추구하자고 연설을 하였다. 이때 어린이 하나가 암브로시오를 가리키면서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뽑자!"고 제안하였고, 양측의 신자들이 모두 다 찬성하여 그 결과 주교로 선출되었다(Vina, 6).
이때 암브로시오는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 신자였다. 따라서 그는 주교직을 사양하였지만, 결국 승복하였다. 그는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주교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은 뒤, 8일 후인 373년 12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Vita, 9).
[주교로서의 사목 활동]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후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히 고백하였다.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하면서 성서 공부에 몰입하였다(《성직론) 1, 1, 4). 그에게 신학을 가르쳐 준 사람은 훗날 그의 후계자가 된 심플리치아노(Simpiliciaus) 신부였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특히 동방 교부들의 저서에 심취하였다. 주교가 된 후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희사하였고, 자신은 수도자와 같이 청빈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사목 활동에 전념하였다. 주교관을 개방하여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를 만날 수 있었고,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줄을 서서 그를 찾았다. 조용한 시간이 생기면 늘 성서를 읽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우구스티노가 증언한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Cofessimes)에서 암브로시오 주교가 시간 날 때면 항상 성서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질문하러 갔다가 감히 방해할 생각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기록하였다(6, 3, 3).
암브로시오 주교는 강론을 열심히 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명을 심어 주었다. 아우구스티노가 그의 강론을 듣고 개종한 사실은 유명하다(6, 4, 6). 그는 이단에 빠진 신자들을 돌아오게 하고, 성직자들과 신자와 미신자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교구 사제들이 주교관에서 공동으로 모여 기도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교구 참사 수도회의 시조가 된, 사목자들의 아버지였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였고, 우는 사람과는 함께 우는 사람이었다. 죄인들에게 항상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였다."매번 죄를 고백하러 사람들이 그에게 올 때마다 그는 항상 같이 울곤 하였습니다. 그는 죄에 떨어진 사람과 함께 자신도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죄 고백을 들은 그는 항상 주님만을 신뢰하며 기도해 주곤 하였습니다. 그분은 이와 같이 후배 사제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제들은 사람들을 책망하고 고발하는 자세보다는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서 전구해 주는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 (Vita, 39).
그의 영향은 교회 내에서 지대하였다. 이교도들과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교회를 옹호하였고,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였다. 밀라노 근방의 교회들이 아리우스주의의 추종자였던 교구장들이 사망하여 공석이 되었을 때, 암브로시오의 노력으로 니체아 공의회의 노선을 따르는 정통 신앙의 주교가 임명되어 점차 교회가 견고하게 내적으로 단합되었다. 376년 일리리킴의 아리우스주의자 주교인 제르미니우스(Geminius)가 사망하자, 암브로시오 주교는 황후 유스티나(Jusina)와 황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통 신앙을 따르는 아네미오(Anemins)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아리우스주의의 중심지였던 시르미움에서 377년에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암브로시오는 니체아 공의회의 삼위 일체 교리를 비방하는 아리우스주의를 단죄하였다(《신앙론) 1, 3-4 : 5, 3 ; 《성령론》 3, 15).
[교회 수호 정책] 암브로시오는 교회와 국가 간의 문제를 정식으로 다룬 최초의 교부이다. 교회가 고유한 영역에서는 최고권을 가지며, 도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황제에게까지 인식하게 하였다. 암브로시오가 주교품을 받은 지 약 1년 만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364~375)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그라티아누스(375~383)가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계모인 유스티나 황후는 아리우스주의의 추종자였다. 378년 고트족의 공격으로 유스티나는 시르미움에서 밀라노로 거처를 옮겼다. 379년 유스티나와 암브로시오 주교 사이에 첫 충돌이 있었다.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황제에게 성당 한 곳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청했을 때 유스티나의 중재로 황제는 이를 승낙하였다. 이에 암브로시오 주교는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주교의 권위로 대항하여 결국 성당은 반환되었다(《성령론》 1, 1, 21). 암브로시오의 이 단호한 조처는 그가 니체아 신조를 점점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추진해 나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니체아 신앙 고백을 따르게 되었다. 381년 아퀼레이아에서 열렸던 교회 회의에서 암브로시오 주교는 아리우스이단의 팔라디우스와 세칸디아누스 주교들을 대항하여 결정적으로 아리우스주의를 단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기간 동안 암브로시오는 이들에 대항하는 세 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신앙론》(De fide) · 《성령론》(De Spiritu Sancto) · 《주님의 육화의 성사》(De incarnationis dominicae sacramento)가 그것이다. 《신앙론》은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위해 저술하였다. 니체아 신경이 확정한 신조로 그의 신앙을 굳세게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다. 결국 381년 아퀼레이아 교회 회의와 382년 로마 교회 회의에서 암브로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을 무력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세웠다.
382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로마 원로원 회의실에 있던 승리의 여신상과 그 제단을 철거했었다. 그런데 로마시의 집정관인 심마쿠스(Symmachus)의 권유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대다수 원로들이 이 제단의 설치를 발렌티니아누스 2세 황제(375~392)에게 요구하였다. 본래 이 제단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설치된 것으로서 이교도원로들이 로마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여겼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337~361)가 이 제단을 처음 없앴으나, 율리아누스 황제(361~363)가 다시 설치했었다. 심마쿠스는 종교 혼합주의와 관용의 의미에서 이 제단을 다시 세우려고 했다. 이에 암브로시오는 황제에게 두 편의 서간을 써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였다(서간 17 ; 18). 결국 암브로시오 주교의 반대로 설치하지 못하였다. 이 사건은 이교도와의 싸움에서 교회가 결정적으로 승리한 사실을 보여 준다.
385년 유스티나 황후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성당을 내주라고 암브로시오에게 요구하였다. 암브로시오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고, 군인들을 앞세워 성당을 점거하려는 황궁의 압력에 대항하여 암브로시오를 따르는 신자들이 성당 안에 머무르면서 지켰다. 암브로시오는 신자들과 포르시아나(Poriana) 성당 안에 머무르면서 시편 찬미가를 작성하여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네 번의 강론을 했다. 이 강론들은 《루가 복음 주해서》(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제7권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야곱과 복된 생애》(De Jacob et vita beata)와 《아욱센시우스 반론》(Contra Auxentim)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위급한 상황은 386년 부활 대축일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황궁이 굴복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 황제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취한 명령을 철회하였다. 마침 암브로시오 주교의 용기를 축하하듯이 순교자 프로타시오와 제르바시오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반면에 그는 3명의 황제들의 고문이자 친구였다. 그는 흔들리는 황제의 권좌를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첫번째 주교였지만, 황제에게도 잘못을 지적하는 엄한 주교이기도 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가 데살로니카인들의 폭력을 다스리기 위하여 군인들에게 진압을 명령했을 때, 군인들의 무차별 진압으로 7,000명이 살해당하였다. 암브로시오는 황제에게 범죄의 중대함을 편지로 알리고 참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공식 참회 행위를 요구하였다(서간 51). 황제는 390년 성탄 때 제복을 벗고 참회복으로 갈아입고 통회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교회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 황제가 사망하였을 때 암브로시오는 직접 애도사를 써서 그를 애도하였다.
그 밖에도 암브로시오 주교가 동방 교부들의 가르침을 서방 교회에 소개한 일, 잘 알려진 몇몇 라틴 성가들을 작곡한 일 등도 그의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암브로시오의 정직하고 헌신적인 생애는 당시 큰 영향을 끼쳤다. 사도적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하던 암브로시오는 397년 4월 4일, 성주간 파스카 토요일에 사망하여 주교좌 성당에 안장되었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엘리아와 같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왕들과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지 않은" 모범적인 주교였다(Via, 47, 3).
II . 저 서
암브로시오는 주교로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도 실천적이며 교육적인 목적으로 많은 저서들을 남겼는데, 성서에 대한 주해서와 윤리 · 수덕에 관한 저서들과 교의 신학적 저서들, 그리고 연설문과 서간과 찬미가 등이다.
[성서 주해서] 암브로시오는 특히 구약성서에 대하여 폭 넓은 주해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신자들에게 행한 강론을 통하여 잘 드러난다. 동방 교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필로(기원전 20~서기 50)와 오리제네스(?~254?)처럼 성서의 3중적인 의미(sensus naturalis, sensus mysticus,sensus oralis)를 받아들였다. 특히 윤리적 · 유비적 해석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는 성서의 각 사건에서 깊은 의미를 추구하였고, 신앙과 생활에 유익을 주는 가르침으로 활용하였다. 예를 들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방주는 인간의 몸으로, 방주의 각 부분은 인간 몸의 각 지체를 뜻한다고 하였다. 그 안의 짐승들은 육신의 정욕으로 이해했다(《노아와 방주》, 16, 57). 특히 필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를 "그리스도교적 필로" (PhiloChristianus)라고 부른다.
암브로시오의 구약성서 주해서로 우선 문학적으로 대작품인 《6일 창조론》(Exameron)이 꼽힌다. 바실리오(329~379)의 같은 제목 작품을 모방하였고, 중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외에 《낙원론》(De Paradiso)이 있다. 낙원은 인간의 영혼을 나타내며, 낙원에서의 생활은 덕행의 연마와 유혹과의 싸움으로 묘사한다. 낙원에서 흘러나오는 4개의 강물은 사추덕(四樞德) 즉 현명 · 절제 · 용기 · 정의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암브로시오는 그 외에 《카인과 아벨》(De Cain et Abel) · 《노아와 방주》(De Noe et arca)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성서 주해서들은 암브로시오의 초기 작품들이다.
《아브라함》(De Abraham)의 제1권은 예비 신자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의인들의 표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그를 모범으로 삼아 따르는 생활로 인도하는 내용이다. 제2권은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다루는데 좀더 진보된 영혼, 즉 높은 차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신자들을 위해 행한 강론 내용을 모은 것이다. 《이사악과 영혼》(De Isaac et anima)은 이사악과 레베카의 결혼을 그리스도와 인간의 영혼 간의 일치로 비유한다. 이사악은 성부의 뜻에 따라 희생 제물로 바쳐진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암브로시오의 이 생각은 점차 강해져서 아가서의 해설 중에 그리스도와 영혼의 사랑 안의 일치로 발전한다. 암브로시오의 《죽음의 선익》(De bono mortis)은 신자의 죽음을 찬미하는 작품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육신의 죽음은 인간에게 악이 아니, 오히려 선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상의 세 작품들은 암브로시오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에서 암브로시오가 오리제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암브로시오의 영성은 인간 영혼의 긴밀하고 개인적인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지향하는 신비 체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속 도피》(De fuga saeculi)에서 신자는 세상을 멀리하고 떠나야 한다는 가르침이 강하게 나타난다. 또한 금욕생활과 명상 생활로 초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야곱과 복된 생애》에서 그는 인간이 못된 욕심들을 이기고 하느님께 헌신할 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제2권에서는 구약의 모범 인물들, 즉 야곱, 엘레아잘, 그리고 7명의 마카베오 형제들을 다룬다.
《요셉 성조》(De Joseph patinarcha)에서는 요셉을 정덕(貞德)의 모범으로 보았고,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았다.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하느님의 섭리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내어 형제들을 살리신 은혜를 베푸신 사실을 강조하면서, 요셉을 희생 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살리시는 구세주 그리스도로 해석하였다. 이 작품은 아브라함 · 이사악 · 야곱에 관한 작품에 이어 389년에 강론을 토대로 저술되었다.
《성조들》(De patriarchis)에 의하면, 야곱이 아들들에게 내린 축복(창세 49장)은 메시아적인 의미를 풍성하게 나타낸다. 《엘리아와 단식》(De Helia et Jejunio)은 신자들이 먹고 마실 때 가져야 할 자세와 정신을 가르치며, 절제의 모범을 엘리아로부터 배울 것을 권고한다. 《나봇 이스라엘인》(DeNabuthe Jezraelita)은 부자의 탐욕을 질책하는 내용으로 된 작품이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 밭을 빼앗은 사건(1열왕 21장)을 해설하면서, 욕심 많은 부자들을 아합에 비유하였다.
《토비아》(De Tobia)에서 암브로시오는 고리 대금업과 이자 놀이에 대해 언급한다. 4개의 강론들이 묶여진 《욥과 다윗의 탄원 기도》(De Interpellatione Job et David)에서 암브로시오는 욥기와 시편(41편 : 42편 ; 72편)에 나오는 두 가지 종류의 호소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는 인간이 당하는 마음과 몸의 고통에 대한 호소이고, 다른 하나는 의인들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반면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데 대한 호소이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악인들의 즐거움은 영원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끝나지만, 의인들의 고통은 참 행복의 원인이 되며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다윗의 변론》(Apologia prophetae David)에서 암브로시오는 다윗 왕이 두 가지 범죄, 즉 간음과 살인죄로 타락하였지만, 공적 참회의 보속 행위와 선행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죄의 용서를 얻은 사실을 역설한다. 시편 주해서로는 《시편 주해서》(Enarationes in 12 psalmos Davi-dicos)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다루는 시편들은 12편(1편 ; 35-40편 ; 43편 ; 45편 ; 47-48편 : 61편)이다. 1편 주해는 바실리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 외의 시편 주해는 예로니모(343~420)의 설명을 따르면, 오리제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예로니모, 서간 112, 20). 《시편 제118장 주해서》(Expositio in psalmun 118)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글자마다 해설을 붙여 모두 22개의 강론으로 되어 있다. 오리제네스의 작품을 많이 인용하였다.
《루가 복음 주해서》가 유일한 신약성서 주해서이며 대표적인 대작으로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루가 복음서뿐 아니라 다른 복음서의 구절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루가 복음 6장 20절 이하에 대한 강론에서 "성 루가(복음사가)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 중에 4개만을 택했고, 성 마태오(복음사가)는 반대로 8개를 택하였습니다(마태 5, 3 이하). 그러나 이 8개 안에 저 4개가 들어 있습니다. 한 분(즉 루가)은 사추덕을 일컬으신 것이고, 다른 분(마태오)은 8개(의 행복 선언)안에서 신비적인 숫자의 뜻을 열어 밝히십니다" (5, 49 50). 이 작품의 특징은 윤리적인 내용과 신비적인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윤리 · 수덕 저서] 가장 유명한 것은 3권으로 된 《성직자들의 직무론》(De officiis ministrorum, 391)이다. 이 작품은 밀라노 교구의 성직자들을 위해 암브로시오가 쓴 최초의 그리스도교 윤리 총서이다. 그는 치체로(M.T.Cicero, 기원전 106~43)의 동명(同名) 작품을 모방하여 그틀을 사용하였고,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였다. 치체로가 아들 마르쿠스를 위해 썼다면, 암브로시오는 그의 '아들들'' 인 사제들, 교회의 일꾼으로 일하는 사제들을 위해 저술하였다(1, 7. 24). 치체로가 스토아 철학의 전통에 입각하여 윤리적인 가르침을 전개한 반면, 암브로시오는 스토아 철학적 내용을 그리스도교적 윤리로 대치시켰다.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명과 가르침의 정신으로 그 내용을 꾸몄다. 스토아 학자들이 종교 없는 윤리관을 내세운 반면, 암브로시오는 윤리와 종교를 일치시켜 전개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인간의 생활 규범을 제시한다. 스토아학자들의 최고 목표는 덕(德) 그 자체에 있으나, 암브로시오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의 참 행복을 얻는 데 있다. 영원한 생명의 참 행복은 하느님을 알게 됨에 있다고 가르쳤다.
암브로시오는 동정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의 누나 마르철리나의 부탁으로 쓴 《동정녀》(De virginibus)는, 밀라노 교구 밖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피아천차와 볼로냐뿐만 아니라 마우레타니아카에서도 동정녀들이 찾아와 밀라노에서 서원하고 머릿수건을 쓰고자 하였다(1, 11, 57). 암브로시오의 다른 작품들에 대해서는 혹평을 가했던 예로니모도 이 작품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예로니모, 서간 22, 22). 그 외에 《과부론》(De viduis) · <동정성》(De virginitate) · 《동정녀의 지침》(De institutione virginiset Sanctae Mariae virginitate perpetua ad Eusebium) · 《동정성의 권면》(Exhortatio virginitatis) 등이 있다.
[연설문] 암브로시오의 연설들 중 애도사 몇 편은 서양의 고대 애도사에서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형 사티로의 죽음》(De excessu fratris sui Satyri)은 암브로시오가 자신의 형 사티로(+378)를 위하여 발표한 2편의 애도사가 담긴 작품이다. 특히 둘째 편은 위로의 말씀이다. 죽음이 슬퍼할 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 첫째 이유는 죽음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 때문이고, 둘째로 죽음이 세상의 근심에서 구출하기 때문이며, 셋째로 죽음이 좀더 나은 생활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는 육신의 부활에 대하여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마지막에는 뫼닉스 새의 전설을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애도사로써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교적 '위로문' (consolatio)의 문학적 형태의 전통을 보여 준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를 위한 애도사>(De obitu Valentiniani consolatio)에는 고인의 소원, 즉 죽기 전에 세례성사를 받으려 한 간절한 청원이 세례를 대신한다고 하면서 화세(火洗)에 대하여 말하였다(51-53).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위한 애도사>(De obitu Theodosii oratio)는 친분이 많았던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사망 후 40일째 날에 밀라노에서 행하였다.
[교의 신학 저서] 그의 교의 신학 저서들도 대부분 강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중 많은 것은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요청으로 저술한 것이며, 주로 삼위 일체 교리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아리우스주의의 비판에 대항하여 성자가 참 하느님이 심을 옹호하는 내용의 《신앙론》 · 《성령론》 · 《주님의 육화의 성사》 · 《신앙의 설명》(Expositio fidei), 《신경 주해》(Explanatio symboli ad initiandos) · 《신비론》(De mysteriis) ·《성사론》(De sacramentis) 등이 있다. 《통회론》(De poenitentia)은 노바시아누스(200?~?) 이단의 극단적인 엄격주의 오류를 질책하는 내용이며, 교회의 사제들에게는 모든 죄를, 비록 중죄일지라도 사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밝힌다. 암브로시오는 이 작품을 자신이 직접 저술했음을 다른 저서에서도 분명히 밝혔다(《시편 주해서》 37, 1). 《재생의 성사》(De sacramento regene-rationis)라는 작품은 분실되었으나, 아우구스티노의 저서 가운데 이 작품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서 간] 암브로시오의 서간들은 당시의 시대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 서간의 수는 91편이다. 그중 누나 마르철리나에게 보낸 편지와 385년에 쓴 황후 유스티나와의 대결에 대한 편지는 유명하다(Nr. 20). 386년의 순교자 성 제르바시오와 프로타시오의 유해를 발견한 기록도 서간 안에 나타난다(Nr. 22). 388년에 쓴 편지(Nr. 41)는 황제 테오도시우스와의 갈등을 썼는데, 황제가 칼리니콘의 유대인 회당을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보낸 서간(Nr. 51)은 데살로니카에서 무죄한 시민들까지 살해한 잘못의 책임을 황제에게 있다며 교회의 출입을 금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런 이유에서 암브로시오의 서간은 역사의 자료로서 중요한 원천이 된다. 또한 그가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인가를 잘보여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성 가] 암브로시오는 성가와 찬미가의 보급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힐라리오와는 달리 암브로시오는 전례 때에 성가를 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서방 교회 전례 성가의 창시자가 되었다. 386년 성가와 시편 성가를 밀라노 성당에서 신자들에게 가르쳐 실제로 활용하게 하였다. 그 후 밀라노로부터 서방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암브로시오는 성가 작사뿐 아니라 작곡도 하였다. 음악적으로 암브로시오는 아우구스티노가 분명히 증언하듯이(《고백록》 9, 7, 15), 동방 교회의 성가곡을 따라 작곡하였다. 이런 성가곡들은 7세기경부터 '암브로시오 성가로 불린다.
암브로시오는 성가를 통해 전례가 장엄해지는 효과를 얻는 데 관심을 가진 것보다는, 오히려 교육적인 효과에 관심을 두었다. 즉 신자들에게 성가를 보급함으로써 신자들이 참 신앙 안에 강해지고 교육되기를 바랐다. 아리우스주의를 거슬러 신자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암브로시오는 성가 안에 들어 있는 신앙을 돋우어 주는 요소가 "요술의 힘" 같다고 표현하였다(《아욱센시우스 반론》 34 참조).
암브로시오의 생애를 저술한 바울리노의 증언에 따르면, 암브로시오는 시편 성가를 신자들에게 교송(交誦)형식으로 부르도록 하였고, 성가로 인해 전례가 장엄해졌고 확장되었다(Via, 13). 확실하게 암브로시오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4편의 성가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지난 하루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밤에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청하는 저녁 기도인 "데우스 크레아토르 옴니움"(Deus creator ommium), 아침 기도로서 하루의 시작을 맞으며 새벽닭이 울 때 좋은 소원과 경건한 다짐을 하면서 드리는 기도인 "에테르네 레룸 콘디토르"(Aeteme rerum conditor), , 3시경에 드리는 낮 기도인 "암 수르지트 호라테르티아" (Jam surgit hora tertia)가 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노래하는 성탄곡인 "인텐데 귀 레지스 이스라엘"(ntene, qui regis Israel)이있다. 이 성가는 교의적인 내용으로서 아리우스주의의 오류를 대항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시편 80편 2-3절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성가이다.
Ⅲ . 신학 가르침
비록 암브로시오가 독창적인 신학자는 아니라 해도, 그는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로 동방 교부들의 저서와 특히 필로 · 오리제네스의 사상을 하나의 잘 정돈되고 조화를 이룬 그리스도교적 진리 체계로 완성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릇된 가르침은 제거하고 옳고 유익한 것은 전해 주면서 그는 당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가르침을 모아 특별히 교리적인 면과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전해 준 뛰어난 증인이다.
[철학에 대한 입장] 암브로시오는 철학에 대하여 매우 신랄한 공격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철학 그 자체를 대항하여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성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철학과 인간의 이성이 고귀한 것이고 진리를 얻고자 하는 노력이 승고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항상 더 큰 지식을 찾는 연구를 분명히 인간의 사추덕 중 지혜의 특성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지혜를 암브로시오는 "참된 것을 깨달음"이라고 정의하였다.
이와 같은 요구와 참 지혜의 기능을 강조하는 암브로시오는 "세상 지혜" 또는 이교도들의 철학을 참 지혜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세상 지혜는 진리의 빛을 떠났고 따라서 밤의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암브로시오는 철학을 공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세상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눈을 갖고는 있으나 보지 못하여, 빛이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어둠 안에서 거닐고 있으며, 영원한 소경이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날이 밝았고 교회의 빛이 그들 눈앞에서 빛나건만,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입을 벌려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교도 철학자들의 저서에 흩어져 있는 단편적인 진리들은 성서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단자들과 하느님을 무시하는 자들은 참된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이단자들은 참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에 근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단자들이 철학을 도구로 이용하여 교회와 그 진리를 파괴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철학에 대한 그의 입장은 회의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삼위 일체론과 창조론] 암브로시오는 니체아 신경을 정통 신앙으로 수호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정통 교리를 지킨 교부였다. 그는 성령의 참된 신성을 가르쳤으며, 성령이 다른 두 위격과 동등함을 강조하였다(《성령론》 2, 11, 118).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1, 11, 120)고 하였다. 암브로시오는 아리우스주의를 거슬러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강조하였고, 이원론적 이단인 그리스도 가현설(docetismus), 마니교를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가르쳤다. 두 본성 안에 한 분 그리스도가 계심을 강조하였다(《형 사티로의 죽음》 1, 12).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수난성과 약함도 함께 지니고, 순결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의 힘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죄는 없이 태어났다. 암브로시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 예수의 지성적인 혼의 자리에 대신 자리를 잡았다" 고 주장하던 아폴리나리우스(Apmlinmins)의 신인 혼합(神人混合)의 이단을 거슬러 그리스도의 온전한 육화 교리를 가르쳤다.
모든 창조물은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창조의 원동력은 하느님 안에 계신 말씀(聖子)이다. 하느님은 완전한 자유 의사로 창조하셨다. 세상의 시작도 끝도 없음을 주장하는 이교도들의 잘못된 우주론에 대항하여 암브로시오는 창세기의 첫 구절을 인용하여 제시한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세 1, 1). 그는 이 구절이 세 가지 해답을 밝혀 준다고 하였다. 첫째, 사물에는 시작이 있다. 둘째, 세상의 창조주는 하느님이다. 셋째, 물질이 세상 창조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존하며 다스리고 이끄는 분이다. 암브로시오는 《6일 창조론》에서 특별하게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전능하심 · 지혜로우심 · 선하심에 대하여 묘사하였다. 암브로시오에 의하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반사" 이며 "나타나지 않은 사물이 있다"는 보장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이 세상을 관찰함은 더 높은 것을 향하고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늘 나라로 인도해 준다고 하였다.
〔천사론과 원죄론] 암브로시오에 의하면, 천사들은 하느님의 인간 구원 의지를 실천하는 영적 존재들이다. 천사들과 인간은 하나의 영적 인척 관계를 만들어 유지한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거처하며(서간 76, 12), 자연적인 면에서나 초자연적인 면에서 인간보다 우수한 존재들이다(《성령론) 1, 7, 83). 야곱이 꿈에서 본 천당에 오르는 사다리를 해석하면서 야곱이 본 사다리를 천사들과 인간의 미래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예표라고 가르쳤다(《형 사티로의 죽음》 2. 100). 암브로시오는 오리제네스와 같이 수호 천사(Angeli custodes)의 존재를 믿는다(《시편 주 해서》 37, 43 : 38, 3). 신자들은 수호 천사의 도움과 보호로 악령들을 거슬러 싸우게 된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도 수호 천사의 보호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천사들은 의인이 임종할 때에 그를 하늘 나라에 받아들이고, 죄인들을 위해서도 함께 진통과 고통을 겪으며,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이 벌을 내리실 때 가슴 아파한다(서간34).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에 대해서는, 예수가 현존하는 성사 안에 그리고 미사 때에 희생되실 때에도 그 곁에 함께 존재한다고 가르쳤다(《루가 복음 주해서》 1, 24, 28).
그는 모든 인간은 유산으로 죄의 상태(haereditas peccati, haereditarium vinculum)를 물려받는다고 가르쳤다(《시편 주해서》 38, 29). 따라서 어린이도 세례성사를 받아야 한다. 세례받지 못한 인간은 마귀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원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상실하고 그 대신 지상의 모상(imago terrena)을 지니게 되었고, 즉 마귀의 모상(imago diaboli)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총을 상실하였고, 그 대신 지상의 고통과 괴로움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원죄는 인간에게 이중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와 같은 상태는 죽음이 원죄의 열매를 끝낼 때까지 계속된다. 원죄의 유산은 하나의 죄로 기우는 경향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심판 날에 인간은 벌을 받고 저주를 초래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을 상실한 인간은, "죄악 안에서 비참한 빈곤"을 당한 존재가 되었다. 평화와 안정이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양심에 평화가 없이 인간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내릴 때까지, 이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지니고 다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마리아론] 암브로시오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가르쳤다(《시편 제118장 주해서》 22, 30). 그는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아무런 죄가 없는 인간이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애원하였다. 그는 모든 죄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모습의 마리아를 생각하였다. 그래서 암브로시오는 마리아 신심의 시조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마리아가 능동적으로 동참하였음을 가르쳤고, 창세기 3장 3절을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에게 적용시켰다. 그는 이레네오 주교(130~200)가 시도하였던 마리아와 하와의 비교를 체계적으로 조명하였다. 즉 하와가 인류에게 죽음과 저주를 가져다 준 여인이 된 반면, 마리아는 인류에게 참 생명과 축복을 가져다 준 어머니가 되었다. 남자와 여자 때문에 육체가 낙원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으나, 같은 육체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되었다고 강조하였다(서간 63).
[성사론] 암브로시오는 처음으로 '미사' (Missa)라는 용어를 신자들의 성찬 전례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서간 20, 4). 그는 미사의 "희생 제사" 성격을 강조하였다. "전에는 양이 봉헌되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봉헌되신다"((성직자들의 직무론》 1, 48, 238). 암브로시오는 세례 · 견진 · 성체 · 고해 · 성품 · 혼인성사에 대해 확실히 언급하였다(서간 19). 반면 병자성사에 대해서는 확실한 성사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저서 《신비론》과 《성사론》에서 세례성사 · 견진성사 · 성체성사에 대하여 자세히 다룬다. 고해성사에 대해서는 《통회》에서 다룬다.
그에 의하면, 교회 안에 오직 하나의 세례가 있을 뿐이다. 그는 세례성사를 늦게 받기 위한 인공적인 지연을 반대하였다. 또한 혈세(baptismus assionis)와 화세에 대하여 《시편 제118장 주해서》와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를 위한 애도사>에서 가르친다. 또한 《성사론》에서 초기 교회의 전례사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즉 예비 신자들의 교육 내용과 세례성사의 집전 형태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세 번 질문을 하는 예식과 입과 귀를 열게 하는 축성 및 해가 지는 방향을 향하여 행하는 마귀를 끊어 버리겠다는 약속, 신경의 고백과 자신의 개인적 죄를 고백함, 성삼위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행하는 세례 예식,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순서와 새 영세자들이 착용하던 흰 옷 등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세례성사에 이어서 곧 견진성사가 주어진다. 성령의 인호(signaculum spiritus)를 받은 신자를 주님께서 신앙 안에 견고하게 만드신다. 성체는 세례를 받은 지 8일 후에 받게 된다. 그는 성체성사의 희생적인 성격을 자주 분명하게 강조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이었고 동시에 사제였듯이 미사 때에도 제대 위에서 제물로 또한 사제로 계신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주님의 축성 말씀의 능력으로 빵이 주님의 몸으로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된다고 가르쳤다. 암브로시오는 성체의 효과, 즉 영원한 생명의 양식임을 자주 강조하였다.
고해성사에 대해서 암브로시오는 노바시아누스 이단을 거슬러 교회가 모든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권한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음을 분명히 가르친다. 그리고 매일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소죄나 경미한 잘못에 대한 참회와 공적인 대죄에 대해 행해지는 참회를 구별하였다. 대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만의 참회를 인정한다. 왜냐하면 죄인이 참되게 통회하였다면, 반복해서 대죄를 지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례도 하나이듯이, 공적으로 행해지는 고해도 하나이다"(《통회》 2, 10, 95). 그는 또한 기본적으로 중대한 비밀죄(occulta crimina)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참회를 주장하였다(《통회>1, 16, 90).
[수위권과 심판] 대립 교황 우르시누스(Usimus, 366~367)로 곤경에 처한 교황 다마소 1세(366~384)를 위해 암브로시오는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서간을 보냈다. "전 로마 세계의 머리인 로마의 교회와 또한 거룩한 사도적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그곳에서부터 존경하올 교회 공동체의 모든 권한이 다른 모든 교회로 가기 때문입니다"(서간 11, 4). 로마 수위권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써 암브로시오는 마태오 복음16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제시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필립비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서 수석 자리를 차지하였다고 가르친다(《주님의 육화의 성사》 4, 32) .
암브로시오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모든 영혼은 불길을 통과해야 한다.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 요한도 예외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시편 제118장 주해서》20, 12). 이 불은 심판의 불이다. 영혼들은 세 무리로 분류될 것이다. 먼저 의인들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마른 발로 지나갔듯이 불을 통과하여 낙원으로, 낙원을 통하여 천국으로 들어간다. 다음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과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불은 복수의 불이 된다(ultorignis) . 그들의 운명은 파라오의 군대와 같이 영원한 지옥의 불길 속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첫째 그룹과 셋째 그룹은 이와 같이 결정적인 영원한 심판의 결과를 이때 갖게 된다.
그러나 중간 위치의 죄인들은 그들이 행한 선행이나 악행의 많고 적음에 따라 두 종류로 가려지는데, 악행이 더 무거운 죄인들은 미신앙인들과 같은 운명에 떨어지고, 선행이 더 많은 죄인들에게는 불길이 마치 씻어 주고 정화시켜 주는 불길(purgare, purificare)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빠르게, 또 어떤 이는 느리게 불을 통과하여 완전히 깨끗하게 된 후에 낙원에 들어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시편 주해서》 36, 26 : 《다윗의 변론》 6, 24 : 서간 2. 14, 16). 이와 같이 암브로시오는 연옥의 존재를 믿었고, 최후 심판 때의 결정이 있음을 가르쳤다.
[그 밖의 가르침] 암브로시오는 영성사(靈性史)에 있어서도 지도적 역할을 한 교부이다. 그리스도의 동정 모친이신 마리아를 영성의 이상적 모습으로 나타내고, 마리아의 생애를 덕행의 학교 자체로 묘사한다. 마리아는 마귀를 이기고 구원을 가져다 주는 새 하와이다(서간 63, 32 : 49, 2).
또한 천사, 성인, 순교자 공경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공경하는 이유에 대해 그 위에 못박혀 달리신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암브로시오의 애도사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고,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한다고 가르친다(서간 39, 4)
Ⅳ. 평가와 의의
암브로시오는 영성적이며 사색적인 성품을 지녔었다. 그는 교리나 신학에 있어서 크게 독창성을 지닌 학자는 아니었으나 용기 있는 정통 신학의 수호자, 도덕적 스승, 모범적인 목자, 그리고 탁월한 설교가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니체아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였고 교회를 보호한 교부이다. 암브로시오는 교회 역사에서 전 시대를 통하여 가장 사랑받는, 또한 가장 중요한 주교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우구스티노는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암브로시오는 이 세상을 거닐고 가신 최고의 인물 중에 한 분 이십니다"(<고백록> 6, 3, 2).
암브로시오란 이름은 그리스어로 '불멸' · '신적(神的)인'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동방 교부들의 가르침을 서방 교회 안에 도입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또한 "교회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리고 많은 저서와 유명한 강론들을 남겼다. 그의 저서와 가르침은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니었고, 실천적이며 신자들의 일상 생활에 유익을 가져다 주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특별히 동정을 지키는 수도 생활을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 신자의 표상으로 강조하였다.
암브로시오는 교회를 위하여 올바른 신앙을 지키고자 이단자들과 대항하였고, 국가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대항하여 교회의 고유 권한을 지켰다. 이 점에서 그는 초기교회 정치사에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는 또한 참된 사목자의 모범이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였고, 죄인들을 감싸 주었고, 성서 말씀을 묵상하고 강론에 정성을 바쳤다. 모든 이들의 영혼 구령에 온 힘을 다 바쳤다. 1338년 이래 암브로시오 주교는 밀라노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 오고 있다. (- 라틴 교부 ; 암브로시오 성가)
※ 참고문헌  E. Dassmann, Die Frommmiskit des KirchemanatersAmbro-sius von Mailand. Quellen und Entfaltung, Miinster, 1965/ J.R. Palanque, Saint Ambroise et I'empire Romain, Paris, 1933/ Paolino di Milano, Vita di S. Ambrogio, Roma, 1961/ B. Altaner · A. Stuiber, Patrologie. Leben, Schriften und Lehre der Kircherviter, Herder, 1993, pp. 378~389/ J. Quasten, Patrology Ⅳ, Westminster, 1986, pp. 144~179/ 0. Bardenhewer, der altkirchlichen Literatur Ⅲ , Herder, 1912, pp. 498~5471 E. Dassmann, Ambrosius von Mailand, 2, pp. 362~386/ G. Madec, Saint Ambroise et la Philosophie, Paris, 1974/ L.F. Pizzolato, La dottrina esegetica di SantAmbrorgio, Milano, 1978/ A. Paredi, San2Ambrogio e la sua eta, Milano, 1960/ c. Moreschini, Ambrosius von Mailand, Gestaltender Kirchengeschichte, Hrsg. von M. Greschat, Bd. 2., Alte Kirche II, Kohlhammer, 1984, pp. 101~123/ H. von Kampenhausen, Lateinische Kircherviter, Kohlhammer, 1960, pp. 77~108/ 장인산, 《복된 사람들-성 암브로시오 교부의 진복 팔단 풀이》, 성서와 함께, 1992/ 박대종, <암브로시오 성가>, <현대 가톨릭 사상》 10집, 대구 가톨릭대학교, 1994, pp. 9~115. [張仁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