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자크 에두아르 (1861~1890)
〔프〕André, Jacques-Edou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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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야고보.한국 이름은 안학고(安學古). 1861년 11월 21일 프랑스 쿠봉(Coubon)의 샤랑트 (Charentus)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삭발례를 받 은 후인 1883년 9월 13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편 입하였다. 1887년 9월 24일 사제 서품을 받고, 그 해 11월 2일 파리를 떠나 이듬해 1월 15일 한국에 도착하 였다. 그는 우선 블랑(J. Blanc, 白圭三) 주교의 주교관에 머무르며 한국어를 배웠는데, 활달하고 사교적인 성격 덕분에 주교관을 왕래하는 한국인들과 쉽게 친해져 한국 어 학습에 빠른 진전을 보였다. 같은 해 7월 수원의 갓등 이(현 왕림) 본당이 설립되면서 초대 주임 신부로 임명되 었다. 이 당시 공소는 갓등이를 포함해 25개소였으며, 신자수는 1,790명이었다. 그는 부임 직후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건축 자 재와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9년에는 200명 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그 해 4월 '법국 안성인 사건' (法國安安姓人事 件)이 발생하여 서울로 송환되었다. 이 사건은 앙드레 신부가 자신의 본당 신자에게 피해를 준 김익제(金益濟) 를 갓등이로 끌고 와 감금한 사건으로, 김익제의 아우 김 병제가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평소 천주교에 적대 적이었던 외무 독판(外務督辦) 조병직이 프랑스 공사에 게 앙드레 신부의 징벌을 요구하면서 교회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앙드레 신부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한 달 동안 서울에 머물러야 했고, 그 사이 갓등이 본당은 제물 포(濟物浦, 현 답동) 본당의 빌렘(J. Wilhelm, 洪錫九) 신 부가 담당하였다. 양측 사이의 합의로 문제가 해결된 후 다시 갓등이로 돌아온 앙드레 신부는,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신부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간호하 기 위해 충청도 간양골 본당(현 예산군 예산읍 間良里)으로 갔다. 약 10일 동안 병자를 간호한 후 병세가 호전되자 3월 28일 본당으로 돌아온 앙드레 신부는, 후임 알릭스 (J. Alix, 韓若瑟) 신부와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파스키에 신부의 병 간호와 예수 부 활 대축일 준비 등으로 몹시 지친 그는 부활절 미사를 마 치고 열병으로 앓아 누웠고, 회복되지 않은 채 부활 후 제2 주일인 1890년 4월 13일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갓등이 본당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미리내의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 안학고 ; → 왕림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旺林本堂編纂委員會 · 韓國教會史 研究所 編,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집》 I, 천주교 왕림 교회, 1990/ 《경향잡지》 1296호(1976. 3), pp. 38~40/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서 울敎區年報》 I , 천주교 명동 교회, 1884/ Compte Rendu, Paris, 1890, pp. 23, 251~253/ Mémorial de la Société des Missions-Étrangères 1, Paris, 1912, pp. 292293/ Nécrologie de la Société des Missions-Étrangères, Nazareth-Hongkong, 1932, pp. 68~69. 〔편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