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르디니, 로마노(1885~1968)

Guardini, Rom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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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르디니, 로마노.

과르디니, 로마노.


사제. 신학자. 종교 철학자. 문화 · 사회 평론가. 이탈 리아의 베로나에서 태어나 무역업에 종사하던 부친을 따 라 한 살 때 독일 마인츠로 이주해 1915년까지 30여 년 간 독일 문화를 깊이 습득했다. 그러나 모국의 문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모친의 영향을 받아 가정에서는 이탈리아적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후대 저서와 활동에는 이러한 성장기의 주변 환경에서 형성된 개성이 드러나고 있는데, 곧 독일과 이탈리아 문화의 다양성을 하나로 종합하려는 그의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18세 때인 190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튀빙겐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화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문화와 연 극, 음악 등 예술 분야에도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식견이 풍부해지면서 현대 기술 문명 에 대한 문제 의식도 갖게 되었다. 전통적인 가톨릭 집 안에서 성장한 그는 뭔헨의 자유 분방한 분위기에서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과정을 통 해 신앙이 성숙하게 되었고, 마침내 하느님께 자신을 온 전히 바칠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06년 겨울 학기부터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이듬해 인 1907년부터 튀빙겐 대학에서 세 학기 동안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 기간 중 도나우 계곡에 위치한 보이론 베네딕도 수도원과 많은 접촉을 하였다. 이 수도원의 전례 생활에서 받은 깊은 감동은 후에 《전례의 정신》(Vom Geist der Liturgie)에서 승화되어 그를 당대의 유명한 전례 운동가로 부각시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튀빙겐에서 마인츠로 옮겨 신학 공부를 계속한 그는 1910년 5월 28일 마인츠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헤펜하임, 다름슈타트, 보름스, 마인츠 등 지에서 보좌 신부 생활을 한 후 1912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로 가서 요셉 프링스(Josef Frings),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1915년 봄에 <성 보나벤투라의 구원론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획득했다. 그 후 교구로 다시 돌아온 그는 청소년 운동의 본산인 유벤투스(Juventus)의 지도 신부를 맡아 정신적 역량을 서서히 펼쳐 나갔다. 그러나 당시 저명한 철학 교수인 막스 쉘러(Max Scheler) 등 여 러 사람들이 그에게 교수 자격을 얻도록 여러 번 권했다. 1920년 이를 위해 본으로 간 그는 마르틴 부버, 쉘러 등 저명한 학자들과 친분을 가지면서 보나벤투라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논문을 쓰는 일 외에 틈틈이 본 대학에서 <켄터베리의 안셀모>에 대한 강의를 하는 동시에 전례학에 대한 정기 간행물도 발간하였다. 교수 자격 시험이 끝난 1922년부터 본(Bonn) 대학에서 교의 신학을 강의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활발한 저술 활동과 다양한 특강을 했다. 그의 특강 '교회의 의미' 를 들은 독일 문화부 장관은, 프로테스탄트와 비그리스도적 분위기가 팽배하던 베를린 대학에 그를 위해 '종교 철학과 그리스도교적 세계관' 이란 강좌를 개설해 주었다. 베를린 대학에서 그는 '하느님과 세계' 란 강의부터 시작하여 학기마다 각기 다른 주제로 폭 넓은 강의를 하였다. 소크라테스, 아우구스티노, 단테, 세익스피어, 파스칼, 훨덜린,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뫼리케, 라아베, 릴케 등이 강의 주제였는데, 그는 이들과 그리 스도교적 관점을 비교 고찰하였다. 강의 외에 '청소년 운동' 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 운동은 가톨릭 교회 차 원을 넘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33년 이후 그는 나치스 당원들의 감시를 받아 오다가 1939년 1월 베를린 대학의 정규 강의를 박탈당했다. 그 후 일시적인 휴식을 취하면서 다른 강의들을 비정규적으로 하던 중 1943년 연합군의 폭격 을 피해 모스하우젠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친구의 권유로 자신의 삶과 활동을 정리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그 밖에도 나치스당에 대한 고찰로서 《신화 속의 구원자》와 《계시와 정치》 등을 저술했다. 종전이 되자 튀빙겐 대학에서 '종교 철학과 그리스도교적 세계 관' 강의를 다시 맡았으며, 1948년부터는 뭔헨 대학으로 옮겨 같은 강좌를 계속했다. 수강 신청이 쇄도해 대학에서는 1천여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의실을 마련해 주었으나 좌석은 여전히 부족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윤리와 인간학에 대해 강의했으며, 특히 기술 문명의 진보와 그에 따른 문제를 비판했다. 현대 문명의 문 제에 관한 그의 예언자적 견해는 1950년과 1951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근세의 종말》과 《권력》에 잘 드러나 있다. 이 무렵 그에게는 수많은 강의와 강연 요청이 쇄도하였다. 그는 독일의 정신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뭔헨 대학 성당에서는 매주일 성당을 가득 메운 청장년들과 미사를 봉헌했으며, 그의 강론은 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1962년 대학에서 은퇴했을 때, 그의 강좌를 이어받은 사람은 칼 라너(Karl Rahner)였다. 〔사상 및 저술〕 과르디니는 그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듯이 진리를 알고 탐구하는 데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바쳤다. 그는 교의신학 분야에서 박사 및 교수 자격 논문을 썼지만 그의 진리 탐구 대상은 매우 다양했다. 초기에는 전례학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곧이어 교회론을 비롯한 신학의 제분야, 교육학, 문학, 철학, 문명 비판 등의 분야를 연구했다. 진리 탐구의 일환으로 그는 세계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찰하였다.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전통적인 존재론적 관점에서만이 아 닌 현상학적 입장도 수용하여, 당시만 해도 각자의 영역 안에 분리되어 있던 존재론과 현상학적 세계관의 종합을 시도했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그는 외적이고 구체적인 현상론에서 출발하여 존재론적으로 고찰함으로써 현상론과 존재론을 연결하였다. 그의 인간 이해는 실체의 개념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인격 이해와, 나와 너의 만남의 관계를 강조하는 대화적 인격주의 (Dialogischer Personalismus)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또한 현대 의 기술 과학 문명이 가져올 여러 부정적인 문제들을 예언자적 시각에서 내다보았다. 그리고 인간이 기술 문명 을 발달시켜 지배하지만 동시에 그것에 지배를 받는 상황이 온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술 문명으로부터의 도피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감 있는 새 관계의 모색을 권고하였다. 그는, "현대인은 새로운 질서 정립을 통해 이 고삐 풀린 힘들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움직임은 기술 문명 자체에서 나올 수 없고, 오직 깨어있는 생동적인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곧 깊은 정신력, 통일된 내면의 힘, 진정한 자유, 창의력 등으로 무장된 새 인간들의 세대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갈파하였다. 그가 저술한 책은 그 분야가 다양하고 그 수도 1백여 권에 달하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Das Ende der Neuziet und die Macht》, Grünewald-Mainz, 1986/ 《Tugenden), Grünewald-Mainz, 1987/ 《Sorge um den Menschen》, Grünewald-Mainz, 1988/ 《Welt und Person》, Grünewwald-Mainz, 1988. ※ 참고문헌  H. B. Gerl, Romano Guardini., Grünewald-Mainz, 1985(2 판)/ E. Biser, Werk und Wirkung Romano Guardinis, Schonigh-Paderborn, 1979/ A. Schilson, Studien zum Werk Romano Guardinis, Patmos, Düsseldorf, 1986/ G. Mahr, Romano Guardini, Collegium. Berlin, 1979/ J. Cardinal Ratzinger, Die bleibende Bedeutung von Romano Guardini, Patmos, Düsseldor, 1985/ 전헌호, 《인간에의 연민》, 분도출판사, 1991. 〔全憲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