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턴, 존 에머릭 에드워드 달베르크 (1834~1902)
Acton, John Emerich Edward Dal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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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존 에머릭 에드워드 달베르크 액턴.
영국의 가톨릭계 역사학자. 사상가. 정치가. 〔생애 및 저서〕 1834년 1월 10일 이탈리아 나폴리에 서 영국 귀족 출신의 아버지 퍼디낸드(Ferdinand Richard Edward Acton, 1801~1837)와 신성 로마 제국의 귀족 출신 의 어머니 마리 루이즈(Marie Louise Pelline von Dalberg)와 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여러 언어 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아버 지가 사망한 뒤 어머니는 1840년에 훗날 자유당 내각의 외무 장관이 된 그랜빌(Granville) 경과 재혼했다. 이로써 그는 일찍부터 자유당 거물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액턴은 워릭셔(Warwickshire) 주의 오스콧 대학(Oscott College)에 서 교육을 받은 후 뮌헨으로 가서 교회사를 전공하였다.그는 될링거(J.JI. von Döllinger, 1799~1890)의 지도를 받으 며 공부하였는데, 독일의 새로운 역사 연구 방법을 배웠 다. 될링거는 액턴에게 큰 영향을 미쳐, 종교적 자유주의 와 역사학에 대한 열정을 심어 주었다.
정치 참여 : 1859년 계부 그랜빌 경은 액턴에게 하원 의원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나, 1865년까지 6년 동안 거 의 아무런 활동 없이 임기를 마쳤다. 1869년에 자유당 당수이며 수상이었던 글래드스턴(W.E. Gladstone, 1809~ 1898)은 그를 추천해 귀족 작위를 갖게 해주었다. 이때부 터 액턴은 자유당과 글래드스턴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 다. 그는 상원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보다는 외교관으로서 정치적 경력을 쌓으려 하여, 여러 차례 대사직에 임명되 고 싶다고 표명하였으나 매번 무위로 끝났다. 1892년 글래드스턴이 네 번째로 수상이 되자 그는 입각 의지를 피력하였으나, 빅토리아(Victoria, 1837~1901) 여왕의 왕실 시종이란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액턴은 왕실 도 서관을 조사하는 등 자신의 직위를 적절히 활용하여 궁 중 비사(秘史)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와의 갈등 : 액턴은 1859년 뉴먼(J.H. Newman, 1801~1890)의 뒤를 이어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가톨릭 월 간지 《램블러》(Rambler)의 편집장이 되자, 될링거의 원 칙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그는 신앙과 지식, 종교와 과학이 독립적으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추구되어야 하 며, 교회와 국가는 각기 상대방의 영역과 관심사를 존중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잡지는 영국의 교황 지상주 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1864년에 액턴은 자신 의 입장을 바꿀 의사도 없고 교회를 모욕할 생각도 없다 고 천명하며 잡지 간행을 중지하였다.
가톨릭 교회와의 이러한 갈등은 차후 있게 될 더욱 심 각한 대립의 서곡에 불과하였다. 될링거와 액턴은 교황 비오 9세(1846~1878)가 1869년에 소집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적인 교황 무류성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평신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 에 반대하는 소수파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약하였다.1870년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 교리가 발표된 후에도, 계속해서 그는 이 교리가 정당하지 못하며 따라서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그러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의 대주교 만닝(H.E.Manning, 1808~1892)의 도전을 받자, 액턴은 정통 교리에 대한 직접적인 거부를 회피함으로써 파문을 면했으나 될링거는 파문되었다.
역사학 연구 : 그는 몇 편 안되는 글을 남겼으나, 주목 할 만한 출판물로는 《쿼털리 리뷰》(Quarterly Review)에 실린 논문 <유럽의 민주주의>(Democracy in Europe, 1878.1)가 있고, 그 밖에 1877년 브리지노스(Bridgenorth)에서 행한 강의록 《고대의 자유의 역사》(History of Freedom in Antiquity, 1907) · 《그리스도교에서 자유의 역사》(History ofFreedom in Christianity, 1907) 등이 있다. 이 두 편의 강 의록은 그가 오랫동안 구상했던 《자유의 역사》(History of Liberty) 중에서 유일하게 활자화된 것이다. 그 밖에도 그 가 직접 창간을 도왔던 《영국 역사 학보》(Engish Historical Review, 1886) 창간호에 실린 근대 독일 역사학자들에 관한 논문이 있다.
1895년에 수상 로즈버리(Rosebery) 경은 그를 케임브 리지 대학의 근대사 담당 흠정강좌(欽定講座) 교수로 임 명하였다. 취임 강연인 《역사 연구에 관한 강의》(Lecture on the Study ofHistory, 1895)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 어 역사 연구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보여 주었다. 프랑스 혁명과 근대사에 관련된 귀중한 강의를 두 강좌 개설하 기도 했으나, 그의 가르침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학생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였다. 그는 1899~ 1900년에 객관적이며 상세한 공동 연구의 기념비적 저 작이라 할 만한 《케임브리지 근대사》(Cambridge Modern History)의 기획을 추진하는 데 정열을 쏟았다. 이 기획을 위해 집필자들을 확보하고 지휘하고 조정하는 일로 기진 한 그는, 1902년 6월 19일 바이에른에서 중풍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사 상〕 액턴은 영국의 자유주의적 역사가이자 도덕가 로서, 그 형태가 권위주의이든 민주주의이든 사회주의이 든 상관없이 사악한 국가에 대한 저항을 최초로 설파한 탁월한 사상가였다. 그가 쓴 편지의 한 구절인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 한다"는 오늘날 잘 알려진 격언이 되었다.
민족주의를 준엄하게 비판했던 그의 자유주의 사상은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 다. "정치적 권리는 종교적 의무에서 직접 나온다는 것 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이것이 자유주의의 진정한 바탕 이라고 본다." 그에게는 양심이 자유의 원천이었으며, 양심의 주장은 국가의 주장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국민 은 국가의 행동에 대하여 하느님에게 책임을 진다." 그 는 만약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자제할 수 없다면, 자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한 나라의 자유는 소수파가 누리는 자유의 정도로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 와 마찬가지로 정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도덕성을 가장 기본으로 삼았으며, 사악한 국가에 대한 저항권을 설파하였다.
〔의 의〕 세계주의자이며 풍부한 학식을 갖추었고 폭 넓은 교우 관계를 맺었던 그는, 몇 안되는 역사서를 통해 서뿐만 아니라, 정치 도덕의 문제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 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수십 편의 수필 · 평론 · 강연 등을 남겼지만 일관된 체제를 갖춘 저서는 한 권도 저술 하지 못하였다. 비록 단편적인 저작들만을 남겼음에도,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긴 역사가들 이상으로 높은 평가 를 받고 있다. 토인비(A. Toynbee, 1889~1975)는 근대 서양의 역사가들 중 액턴을 가장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로 꼽았다. (→ 뉴먼, 존 헨리 ; 될링거, 요한네스 요셉 이냐 츠 ; 만닝, 헨리 에드워드)
※ 참고문헌 G. Himmelfarb, LordActon : A Study in Conscience and Politics, Univ. of Chicago Press, 1954/ H.W. McNeill, ed., Lord Acton : Essays in the Liberal Interpretation of History, Univ. of Chicago Press, 1967. [朴相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