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베르,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1796~1839)
〔프〕Imbert, Laurent-Joseph-Ma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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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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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앵베르 주교.
성인. 제2대 조선 대목구장.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 국 선교사. 세례명은 라우렌시오. 한국 이름은 범세형 (范世亨). 축일은 9월 20일.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액스(Aix) 교구의 마리 난(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 다.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 에(Cabrié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학교 에 갈 수 없었던 앵베르는 이웃 할머니의 도움으로 읽고 쓰는 것을 배웠으며, 얼마 뒤에는 카브리에 본당의 아르 노(Arnaud) 신부와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807년 경 그리스도교 은수회에서 운영하는 성 요아킴 기숙 학 교에 들어갔고, 1812년에는 액스의 대신학교에 입학하 였다. 그러나 앵베르는 신학 공부를 마쳤을 때에도 나이 가 어려 차부제품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2년 동안 가정 교사를 하는 등 시간을 보내다가, 1818년 10월 8일 에 그벨(Aiguebelle)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원장에 의해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보내졌다. 앵베르는 그곳에서 이듬 해 3월 27일에 차부제품을 받고, 이어 연령 제한에 대한 특별 관면을 받은 뒤, 그 해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중국의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된 앵 베르 신부는 다음해 3월 20일 파리를 떠나 1821년 3월 19일 페낭에 도착하였다. 그는 페낭 신학교에서 몇 달 동안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다가 이듬해 2월 10일 마 카오에 도착하였다. 이어 코친차이나로 가서 5~6개월 동안 머물렀고, 다시 통킹으로 가 2년 이상 머물며 신자 들을 돌보다가 1825년 3월에 중국의 운남성(雲南省)을 거쳐 목적지인 사천에 도착하였다. 앵베르 신부는 이곳 에서 12년 동안 활동하는 가운데, 티벳 국경의 모팽(Moping)에 신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주교 서품과 조선 입국〕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 구가 설정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브뤼기에르 (Bruguière) 주교가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 나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채, 1835년 10월 20일 만주의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앵베르 신 부는 사천에서 조선 대목구의 설정 소식을 듣고, 1831 년 파리 본부에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또 1833년에 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마카오 대표부에 여러 번 자신의 뜻을 전달하였으나, 그의 지원은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 았다. 그런 가운데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망하자, 포교성 성에서는 1836년 4월 26일 앵베르 신부를 브뤼기에르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교황청의 칙서를 1년이 지난 1837년 4 월 초에야 받았고, 같은 무렵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앵베르 주교는 갑사 주교의 명의 로 5월 14일 사천 대목구장 퐁타나(Fontana) 주교에 의 해 성성됨으로써,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성성 식을 마친 앵베르 주교는 8월 16일 사천을 떠나 10월 말경 달단의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고, 다시 북경 · 산해관(山海關)을 경유해 12월 4일 봉천(奉天)에 이르 렀다. 여기에서 며칠 휴식을 취한 앵베르 주교는 12월 16일 봉황성의 변문(邊門)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 로) ·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등을 만나 이들과 함께 12 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 땅을 밟 은 최초의 주교가 되었으며, 조선 교회는 창설 53년 만 에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사목 활동과 순교〕 입국 후 서울 후동(后洞)의 정하 상 집에 머무르며 한국어를 배운 앵베르 주교는 3개월 후에는 우리말로 고해성사를 줄 수 있게 되었고, 5월부 터는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서울과 경 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모방(Maubant, 羅) 신 부 ·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함께 전교에 힘쓴 결과, 1836년 초 6,000명이던 신자수는 1838년 말 9,000명 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앵베르 주교는 일상적인 사목 활동뿐만 아니라, 신자 들의 신심을 함양하고 방인 사제를 양성하는 등 조선 교 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먼저 한국어 로 된 기도서가 없는 것을 알고 한국어 기도서의 편찬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4명의 통역들을 데리고 기도문 번역에 착수하여 1838년경 《텬주 성교 공과》(天主聖教 功課)와 《텬주 성교 십이단》(天主聖敎十二端)을 완성하 였다. 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매괴회(玫瑰 會) · 성의회(聖衣會) 등 신심 단체를 설립 운영하였으 며,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아이들에게 세(洗)를 주는, 일종의 성영회(聖嬰會) 활동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앵베르 주교는 정하상 ·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등 네 사람을 신학생으로 뽑아 하루에 두 시간씩 라틴어를 가르쳤고, 얼마 뒤에는 그중 두 사람에게 신학을 가르침 으로써 3년 안에 신품을 줄 계획도 갖고 있었다. 이외에 그는 일본의 류큐(琉球) 섬을 돌보기 위해 사천에서 데 려온 회장을 보내려고 시도하였고, 박해의 조짐이 보이 던 1838년 말부터는 <1839년 조선 서울의 박해 이야 기>라는 박해 일기를 작성하여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일기는 앵베르 주교의 체포 뒤, 정 하상 · 현경련(玄敬連, 베네딕다) · 이문우(李文祐, 요 한)를 거쳐, 최영수(崔榮受, 필립보) ·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 이재의 등에 의해 《기해일기》로 완성되었다.
한편 1838년 말부터 서서히 나타나던 박해는 1839년 초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월 25일 갓 등이 공소에서 동소문 밖 신자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 1 월 30일 상경(上京)하여 박해가 확대되기 전에 서둘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그런 가운데 조정에서는 4월 18일에 <사학 토치령>(邪學診治令)을 반포하였고, 5월 24일에는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과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등 9명이 공식 처형되었다. 이러한 상황 에서 앵베르 주교는 6월 3일 손경서(안드레아) · 정화경 (안드레아)이 마련한 수원 근처의 상귀(현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송교리)로 피신하였다.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3명의 서양인 신부가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 무렵 배교자 김순성(金順性, 요한, 일명 여 상)은 정화경을 유인해 앵베르 주교의 거처를 알아냈으 며, 주교는 그의 거처가 알려졌음을 알고 8월 11일 자수 하였다. 다음날 서울로 압송된 앵베르 주교는 처음 좌포 도청에 갇혀 심문을 받았으며, 이어 의금부로 넘겨져 문 초를 당하였다. 의금부에서 4차례의 심문을 받은 앵베르 주교는 혹독한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신자들의 이름을 대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 결과 군문 효수 형을 선고받고 1839년 9월 21일 모방 신부 · 샤스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처형된 지 20여 일 후에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老姑山,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으로 옮겨졌으며, 1843년에는 삼성산(三聖山,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 57-1)으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 21일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 다가, 그 해 11월 2일 종현(현 명동)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다. 1857년 9월 24일 가경자(可敬者)로 선 포되었고, 1925년 7월 5일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다. (⇦ 범세형 ; → 기해박해 ; 《기해일 기》 ; 한국 성인)
※ 참고문헌 《기해일기》《가톨릭 사전》/《달레 교회사》 Travaux et Martyre de MGR IMBERT, de Cabriés, Diocèse D'Aix, et de ses deux compagnons, MM. MAUBANT et CHASTAN, Marseille, 1858/ A. Launay, Mémorial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Paris, 1916. 〔方相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