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파 - 派

〔그〕Ἰακωβῖται · 〔라〕Jacobitae · 〔영〕Jacob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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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파 전례에 따른 부제 수품(시리아의 주교 예식서 삽화, 1238년) )

야곱파 전례에 따른 부제 수품(시리아의 주교 예식서 삽화, 1238년) )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sisimus)을 믿는 시리아의 그 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명칭. 이 명칭은 6세기 중반 시리아에서 그리스도 단성설을 따르는 교회 체제를 확립한 야곱 바라데우스(Jacob Baradaeus, 500?~578)에게서 유래되었다. 이들은 야곱파라는 명칭보다는 시리아 정통 교회(Syrian Orthodox Church)라 는 말을 선호한다. 시리아의 가톨릭 신자들과 구분하여 '옛 시리아인들' (Syriaque anciens)이라는 명칭을 사용하 기도 한다. 콥트인들은 '세베루스파' (Sévériens)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 사〕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선포한, 예수에게 는 신성과 인성이 있다는 양성론 교의(兩性論敎義)를 배 척하고, 그리스도 단성설을 고집하는 신자들이 생겨났 다. 이들 중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 총대주교좌에 속한 사람들을 '야곱파' 라고 부르고,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좌에 속한 이들은 '콥트' 라고 부른다. 야곱파 교회 체제 를 갖춘 야곱 바라데우스는 500년경 텔라(Tela)에서 태 어나 니시비스(Nisibis) 근처에 있는 페실타(Phesilta) 수도 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5년 간 시리아 비칼체돈 공의회 파의 대사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생활하였는데, 이곳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의 부인 테오도라(Theodora, 500?~548) 황후의 환대를 받았 다. 542년경 그리스도 단성설적 경향을 가진 갓사니드 (Ghassanids)의 왕이 주교를 요청해 왔을 때, 야곱은 비밀 리에 에데사(Edessa)의 주교를 축성하였다. 이외의 그의 삶은 주로 유랑하며 비밀리에 성품성사를 거행하고, 독 자적인 교계 제도를 세우는 데 전력하였다. 거지로 변장 하여 다녔기 때문에 '바라다이오스' (Baradaios)라는 별명 을 갖게 되었다. 이 말은 '안장 방석의' 라는 뜻을 지닌 부르다나(Burd’ānā)라는 시리아어에서 유래하였다. 시리아 동방 교회에서는 7월 31일을 그의 축일로 지내고 있 다. 헬레니즘화한 도시에서는 정통 신앙이 우세한 반면, 그리스도 단성론은 특히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시골 지역 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스도 단성론은 로마 제국 정치 상황의 혼란스러움과도 연결되어, 536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465?~538)가 단죄되 고 그를 따르는 거의 모든 주교들이 파면됨으로써 반칼 체돈 공의회 운동을 펼치던 이들이 몰락하였다. 하지만 야곱 바라데우스의 끊임없는 활동 때문에 독자적인 교계 제도를 설립할 수 있었다. 또한 사회적 · 정치적 요인과 도 맞물려 로마 제국의 통치에 대한 반대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적개심을 반영한 시리아 민족주의와도 연결되었다. 페르시아에서는 6세기 말 네스토리우스주의가 들어온 이후 그리스도 단성설을 따르는 이들이 추방되었지만, 7 세기 초 페르시아인들이 시리아 · 팔레스티나 ·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는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611 년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페르시아인들 밑에서 그리스도 단성설을 따르는 이들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해라클리우스(610~641)는 시리아에서 페르 시아인들을 쫓아낸 후(629) 그리스도 단성설을 따르는 이들을 제국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리스도 단성설 을 화해의 정식(Fommla)으로 선언하였다. 아울러 그리 스도 단성설을 따르는 총대주교인 아타나시오(594-631) 를 안티오키아의 유일한 총대주교로 인정하였다. 아랍인들의 침입으로 시리아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처음에는 정복자들의 환대를 받았지만 7세 기 말경 이들의 상황은 어려워졌다. 10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이 다시 정복하면서 야곱파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 다. 동로마 제국은 야곱파를 정통 신앙으로 개종시키려 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터키인들이 동로마 제국에 승리 를 거두자 야곱파는 터키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배척하 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이 자신들을 지배하기를 원했 다. 그 후 십자군과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특별히 대 미카엘(Nichele il Grande) 총대주교는 십자군의 친구로 지냈으며, 이냐시오 2세 총대주교는 예루살렘에서 가톨릭 신앙 고백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2세기 야곱파의 총대주교좌는 시리아 · 메소포타미 아 · 키프로스(Cyprus)에 200만 명의 신자와 20명의 대 주교, 103명의 주교들이 있었다. 하지만 13~15세기까 지 야곱파가 여러 파들로 분열되었다. 이로써 교회 구성 원들의 협력이 약화되어, 17세기에는 주교수가 20명으로 감소되었다. 피렌체 공의회(1439~1443)는 야곱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1444년 이냐시오 9세 총대주교의 특사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에 거주하는 야곱파의 이름으로 에우제니오 4세(1431~1447) 교황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일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다른 시도는 1581년 이 냐시오 다윗 샤 총대주교를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로 인 정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 시기에 이루어 졌다. 하지만 총대주교가 칼체돈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디오스코로(Dioscoo)를 단죄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7세기에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단성론에서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한 시리아 가톨릭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1662년 아키드잔(Andrea Akhidjan)이 이들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무슬림의 세속적인 압력은 야곱파 교회를 감소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야곱파 주요 공동체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북쪽 지역, 쿠르디스탄(Kurdistan)의 디아스포라와 동인도쪽에 분포하였다. 하지만 제1차 세 계대전 동안(1914~1918)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많은 야 곱파 신자들이 터키인들에게 학살당하였다. 전쟁 후 총 대주교는 자신의 좌를 터키 남동부의 마르딘(Mardin)에 서 데르 샤프란 수도원으로 옮겼다가 이후 이라크 북서 부의 모술(Mosul)로 다시 옮겼다. 1932년에는 시리아 중부의 힘스로 옮겼다가, 1959년에 다마스커스에 정착 하였다. 이 총대주교좌 산하에는 23개 대교구가 있으며, 전례어로 시리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많은 신자들 도 시리아나 레바논 등으로 피신하여, 터키에는 적은 수 만 남게 되었다. 현재 야곱파 총대주교는 인도와 미국에 있는 야곱파에 대한 재치권(jurisdiction)을 가지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야곱파 교회에서 가톨릭 교회로 돌아온 시리아 가톨릭 신자들의 총대주교좌는 레아논의 베이루트에 있다. 이에 속한 신자수는 시리아 · 이라크 · 레바논에 7만여 명, 유럽과 미국에 5천여 명이 살고 있다. 〔문학 작품〕 야곱파는 많은 신학 작품들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던 이들의 시리아어 작품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 시기는 아랍인들의 침입까지이고, 두 번째 시기는 첫 천년기 마지막까지, 그리고 마지막 시기는 13세기 말까지이다. 야곱파 교회의 주요 교부는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였던 세베루스(Severus, 668~680/684)이다. 그리스어로 집필 한 그의 작품들 중 많은 것들이 현재 시리아 번역본으로 남아 있다. 시리아를 사용한 첫 그리스도 단성설 작가는 마북의 주교였던 필록세누스(Philoxenus of Mabbug, 440?~ 523?)이다. 또 시리아 단성설자 중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는 세룩의 야고보(Giacomo di Sĕrug)를 꼽는데, '성령의 플롯' 이라고도 불렸다. 두 번째 시기는 신학 논쟁이 작품의 주요 성격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의 영향력은 계속 유지되었다. 세베로 세복트(Severo Sēbokt) 가 그리스화한 시리아 문학의 융성 시기를 열었다. 마지막 시기는 야곱파의 문학의 번성기였다. 대 미카 엘(MicheleilCimande) 총대주교는 야곱파 교회사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며, 아미다(Amida)의 주교인 디오니시오 (Diomigi bar Salibi)의 활동은 시리아 문학 문예 부흥의 절정을 보여 주었다. 그레고리오(6merciobarEo)는 서방 의 알베르토(Albertus Magnus, 1200~1280)와도 비교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쇠퇴기를 맞았다. 〔교 의〕예수는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이며, 인성과 신성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양성론 정식은 인정하지 않으며, 칼체 돈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거부한다. 야곱파에 의하면 이 결정 사항들이 스토리우스주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야곱파는 이교도(異敎徒, eretici)라기보다는 이교도(離敎徒, schismatici)라고 보아야 한다. 칼체돈 공의회 이후의 공의회도 인정하지 않으며, 가톨릭의 영향으로 칠성사를 인정한다. 성사 집전자는 오직 사제뿐이었으나, 최근에 와서 필요한 경우 평신도가 거행하는 세례성사를 인정하고 있다. 초기 야곱파 학자들 은 성체성사에서 실체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혼인성사 역시 최근에 와서 가톨릭의 영향으로 성사로 인정되 었다. 전례 측면에서 야곱파는 비잔틴화되지 않은 안티 오키아 전례를 따르고 있다. (→ 그리스도 단성설 ; 동방 전례 ; 시리아) ※ 참고문헌  H. Brakmann, Jakobiten, 《LThK》 5, 1996, p. 7341 F.L. Cross . E.A. Livingstone eds., Jacob Baradaeus,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3rd ed., 1997, p. 855/ 一, Jacobites,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3rd ed., 1997, p. 856/ Guglielmo de Vries, Giacobiti, Encyclopedia Cattolica 6, Città del Vaticano, pp. 313~316/ E. El Hayek, Jacobites(Syian), 7, pp. 795~796/ J.M. Fiey, Dictiom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Ecclésiastiques 26, p. 581/ E. Hammerschmidt, 《LThK》 5, 1960, p. 860/ S.J. Voicu, Giacobita(chiesa), Dizionario Patristico e di Antichità Cristiane 2, Casale Monferrato, 1994, pp. 1506~1507.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