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센주의

主義

〔라〕Jasenismus · 〔영〕Janse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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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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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협력해야 하는데, 이 협력의 방식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인 사상. 벨기에 루뱅 대학교의 대표적인 신학 자였던 얀센(C.O. Jansen, 1585~1638)에 의해 비롯된 이 사상은 19세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배 경〕16세기 중엽 종교 개혁의 결과로 신학자들의 관심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와의 조화 문제에 집중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구원을 위해 공로가 되는 선업(善業)은 은총과 인간 의지의 결과이 며, 따라서 결정적으로 유일한 은총은 순전히 수동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오지 않는다고 정의했지만 은총과 인간 의지와의 관계는 여전히 하나의 신비로 남아 있었다. 사실 이 얀센주의는 16세기 스페인에서 도미니코회의 바네스(Domingo Báñez, 1528~1604)와 리스본의 예수회 회원인 몰리나(L. Molina, 1535~1600) 사이에 자유 의지와 은총과의 협력 관계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바네스는 만사와 만물의 제일 원인으로서 하느님의 절대적인 독립과 자유를 강조하며 이단인 펠라지우스주의(Pelagianismus)와 반대되는 것을 가르쳤다. 반면, 몰리나는 인간 의지의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 칼뱅(J. Calvin, 1509~1564) 의 신학과 반대되는 것을 주장하였다. 즉 이 당시까지는 원죄로 인해 상처 입은 인간 본성의 가능성을 약간 비관 적으로 논하였는데, 예수회 신학자들은 예전보다는 더 낙관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로 인해 1586년경 예수회의 레시오(Leonard Lessius)가 가르치고 있었고, 또 바유스 (Michel Bajus, 1513~1589)에 의해 엄격한 아우구스티노 신학의 전통을 견지했다고 자부한 루뱅 대학교를 중심으로 갈등이 일어났다. 〔발단 및 전개〕 얀센의 생애 : 얀센은 1602~1604년 과 1607~1609년에 루뱅 대학교의 학생이었다. 1619 년경 <인간 본성의 완전한 타락>과 <은총에 대한 무저항 성>이라는 글을 쓴 벨기에 신학자 바유스의 사상에 대한 논쟁 때문에, 얀센은 아우구스티노(354~430)의 저서와 신학 사상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었다. 바유 스는 아구스티노 신학 사상의 한 면만을 일방적으로 지 나치게 강조하여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하였다. 즉 첫째,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받은 선물은 결코 초자연적인 것 이 아니며, 원죄로 인해 그 본성이 손상되었다. 둘째, 원 죄와 죄로 기울게 하는 욕정(慾情)은 같으며 욕정이 있 는 한 인간은 의로워질 수 없고, 이 상태에서의 모든 행 위는 대죄이다. 셋째, 의화(義化)는 성사를 통해 받는 은 총으로서가 아니라 선업(善業)과 사랑을 필요로 하며, 완전한 사랑이란 하느님의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라는 내용 등을 주장하였다. 1563년 그는 이 문제 에 관한 소책자를 출판하였는데, 1567년 10월 1일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칙서로 그의 저서에서 뽑은 79 개 명제를 단죄했다. 이에 그는 교회의 판단을 돌리려고 여러 가지로 시도했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 1585)의 배척을 받았다. 결국 1580년 자기의 주장을 철 회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 1589년에 사망할 때까지 루 뱅 대학교 명예 총장을 지냈다. 바유스의 신학 사상에 심취하여 연구하면서 인간의 자 유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보편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얀센은, 은총에 관한 아우구스티노의 신학 사상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자기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얀센은 루뱅 대학교에서 연구를 마치고 파리에서 연구를 계속하 던 시기에 뒤베르지에(Jean-Ambroise Duvergier de Hauranne, 1581~1643)를 만나 함께 연구하였다. 1619~1620년경 얀센은 은총과 의화에 대한 아우구스티노 신학을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문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후 생 시랑(Saint-Cran)의 아빠스가 된 뒤베르지에가 1621년 루뱅에 왔을 때, 얀센은 자신의 연구에 관한 소 위 '위대한 발견' 을 알렸다. 당시 은총에 관한 신학적 논쟁 때문에 교황청에서 예비 검열을 요구한 사실을 알고 얀센은 교회의 처벌을 두려워하여 극비리에 자신의 사상을 알렸다. 1627년 얀센이 《아우구스티노》라는 책을 썼는데, 그 는 이 글에서, 첫째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 생명을 바쳤다는 점, 둘째 하느님은 모든 의인들에게 계명을 주 시고 그것을 수행할 충분한 은총을 주셨다는 점, 셋째 선 악에 대한 내적 요청은 필연적이라는 가톨릭의 정통 신 학을 부정하였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아우구스티 노 교리가 오염되고 신학자들이 그 교리를 몰이해했다고 생각한 얀센은, 아우구스티노에 대한 정통한 주석가로 자처하였다. 그의 사상은 특수한 신심과 윤리, 도덕 및 신앙상의 엄격성을 가장하고, 아우구스티노의 원죄론과 은총론을 극단적으로 이해하여 가톨릭의 정통 신학과 신 심에 접목시키면서, 칼뱅파의 예정설까지 가미하였다. 또한 그는 원죄 이후의 절망적인 인간 조건을 부각시키 면서 원죄를 범한 순간 인간의 의지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어 욕정의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 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은총으로만 가능한데, 그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 에게만 주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5세 기에 인간의 힘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펠 라지우스주의를 논박한 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을 일방적으로 한 면만을 강조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얀센은 사 이비 철학과 스콜라학파의 합리주의적인 주장으로부터 신학을 해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뒤베르지에는 초기 의 엄격함으로 제반 규정과 도덕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 각하였다. 얀센은 이론적이었고, 뒤베르지에는 실천적인 경향이 더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얀센은 1636년 이프르(Ypres)의 주교가 되었지만, 2 년 후인 1638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는 두 사람에게 '아우구스티노' 라는 제목의 원고와 필요한 종이, 출판에 관련된 몇 가지 지시 사항을 남겼다. 이 글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하여 기도하고 돌아가셨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유 의지로부터 모든 실제를 없애는 바유스와 칼뱅의 오류를 되살렸다. 얀센주의의 확산 : 그가 죽은 지 2년 후인 1640년 루뱅 에서 정식으로 얀센의 신학 사상이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seu doctrina S. Augustini de humanae naturae sanitate, aegritudine, medicina adversus Pelagianos et Massilienses)라는 책명으로 출판되면서, 그의 이단적인 신학 사상이 여러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책명 이 시사하듯이 이 책은 몰리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와 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지지하는 예수회 회원들을 반대 하여 얀센이 22년 간 연구한 결과이다. 또한 아우구스티 노의 신학에 대한 바유스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옹호하고 발전시킨 신학적 연구의 논쟁적 특징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뒤베르지에는 이 책을 "최근의 신심서"로 선 언하며 옹호하고 전파함으로써 교황의 판결에 따랐던 안 센보다 교회의 정통 교리로부터 더 멀어졌다. 로마에서 금서로 결정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재판(再版)을 출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얀센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1642 년 우르바노 8세 교황(1623~164)이 바유스의 저서 독서 를 금지하자, 이 책의 애독자들은 이 조치를 아우구스티 노의 교리 자체에 대한 금지로 여겼고 얀센의 사상을 통 해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을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뒤베르지에는 은총론에 있어서 바오로와 아우구스티노 다음가는 세 번째 인물로 얀센을 평가하며 가장 새로운 신심서를 썼다고 추앙하였다. 그의 이러한 위험한 신학 사상은 파리에 있는 예수회 회원들에 의해 강력한 반대 에 부딪혔다. 얀센의 가까운 동료인 뒤베르지에가 1643 년 10월 11일 병자성사를 받고 사망하자, 그의 제자인 아르노(Antoine Arnauld, 1612~1694)에 의해 얀센의 신학 이론이 더욱 옹호되었다. 그의 사상이 프랑스에 전파되어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 하였는데, 그 근거지는 엄격한 수도원으로 이름난 포르 루아얄(Port-Royal des Champs) 수녀원이었다. 포르루아얄 수녀원은 원래 시토회 소속이었지만 1627년에 독립하였고, 뒤베르지에의 영성적인 가르침을 추종하고 아우구스 티노의 신학적 전문성보다 훨씬 더 얀센주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1635년 사순 시기 때에 그는 이 수녀원의 영 성 지도 신부 겸 고해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 수녀원의 결속력은 아주 강하였으며, 포르루아얄 수녀원은 뒤베르지에의 사상을 보급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아르 노는 자신의 누이이며 이 수녀원의 원장인 안젤리크 아 르노(Angelique Arnauld)와 다른 원장 수녀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얀센의 신학을 더욱 활발하게 전파하였다. 즉 아 르노 원장 수녀의 막내 동생인 앙투안 아르노는 얀센주의의 대변인처럼 적극적으로 그 교리를 옹호하며 전파하 였다. 그들은 학교, 피정 지도, 신앙 서적 등을 통하여 얀세주의 사상을 널리 보급하였다. 얀센의 신학 사상을 실천하는 추종자들 가운데에는 신심 깊은 신자들도 있어 미지근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 친 것도 사실이지만, 그 경향이 지나치게 엄격하였다. 일 상 생활에 있어서는 극장 출입과 사치가 단죄되었으며, 과도한 애덕 활동이 요청되는 등 대단히 엄격한 윤리성 을 요구하였다. 또한 성사 생활에 있어서도 엄격한 규범 과 기준을 요구하여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받기 위해 오랜 준비를 철저하게 요구하였다. 그리고 미심쩍은 부 분이 있다고 생각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지 말고 어지간한 준비로 영성체할 수 없도록 하였다. 1643년 출간한 《잦은 영성체》는 자주 영성체할 것을 권하면서도 그 이전에 많은 고백과 여러 가지 엄격한 조건을 요구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영성체하기가 아주 어렵도록 하였 다. 그러나 신앙 생활이 비그리스도교적인 세속의 요소 와 너무 타협하여 느슨해졌다고 염려하던 선의의 사람들은 엄격한 윤리 생활을 요구하는 이 사상에 쉽게 동조하였다.

교회의 대응 : 얀센주의는 교회, 특히 자신들의 이단 적 요소를 명쾌하게 논박하는 예수회 회원들을 세속주의 에 야합한 타락한 집단이라고 비난하였다. 1644년에 아 르노는 《예수회 회원들의 윤리 신학》이라는 책을 출간하 였는데, 예수회 회원들을 은총론에서는 반(半) 펠라지우 스주의(semipelagianismus)로, 윤리 신학에서는 이완주의 (laxismus)라고 비난하였다. 이로 인하여 프랑스 교회가 혼란스럽게 되자 83명의 프랑스 주교들은 빈천시오 아 바오로(1581~1660)의 권유에 따라 이 문제에 관한 판결 을 교황에게 요청하였다. 1653년 인노첸시오 10세 교황 (1644~1655)은 소르본 대학교의 코르베르(Nicolo Corbert) 가 얀센의 책에서 발췌한 은총과 인간 의지와의 관계에 대해 다섯 가지 명제를 칙서 <쿰 오카시오네>(Cum occasione)를 발표하여 단죄하였다. 즉 첫째, 하느님의 어떤 계명은 의인이 소유한 힘으로 그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 하고 희망해도 불가능하고, 또 이것을 지키게 하는 은총 이 없다. 둘째, 타락한 본성 안에서 인간은 결코 내적 은 총에 저항할 수 없다. 셋째, 타락한 본성 상태에서는 공 로나 선악의 상벌을 위해 내적 자유를 갖는 것은 필요하 지 않다. 외적 자유만으로 충분하다. 넷째, 반 펠라지우 스주의는 신앙을 처음 갖는 데 있어서 모든 행동을 위한 내적 은총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들의 이 오류는 이 은 총을 마음대로 저항하고 복종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 다는 점이다. 다섯째,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서 죽고 피를 흘렸다는 것은 반 펠라지우스주의적인 이단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명제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은 1656 년 1월 31일에 발표되었다. 이로써 아르노는 '소르본 대 학 교수 (socius sorbonicus)로서의 모든 특권을 상실하였 으며, 그 후에도 여러 교황들로부터 단죄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었는데, 1655년 2월 1일 쉴피스회 의 올리에(J.J. Olier, 1608~1657)가 포르루아알측과 가깝 게 지낸다는 이유로 리앙쿠르(Liancourt) 공작에 대한 사 죄경을 금지하였다. 아르노는 즉각 이에 반대하는 내용 의 인쇄물을 여러 사람에게 유포하였고, <아우구스티노> 에는 단죄받은 다섯 가지 명제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항변 하였다. 1656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 1667)는 칙서 〈앗 상탐 베아티 페트리 세템>(Ad Sanctam beati Petri sedem)을 통해 오류로 단죄된 다섯 가지 명제가 얀센의 책에 포함되어 있다고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 르노는 법적 문제(Quaesitio juris)와 사실 문제(Quaesitio facti)를 구별하여, 사실 문제의 경우에는 내적인 찬성을 요구할 수 없고 단지 순종의 침묵(Silentium obsequiosum) 만 요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법적 문제 측면에서는 다섯 가지 명제로 간주한 이단 교리 자체에 대한 교황청 의 단죄를 받아들이지만, 사실 문제 측면에서는 《아우구 스티노》에 다섯 가지 명제가 들어 있다고 보는 교황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내적으로는 승복하지 않았다. 《광세》(Penses)의 저자로 유명한 파스 칼(Blaise Pascal, 1632~1662)의 누이 자클린(Jaculine)은 1652년 이래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 수녀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파스칼은 포르루아얄의 자기 친구들을 옹호하 기 위해 얀센주의에 가담하였다. 그는 《벗들의 모 지방 인들에게 보내는 편지》(Lettres à Provinciales des ses amis, 1656~1657)에서 프랑스 고위층의 비도덕성을 폭로하였 고, 도덕과 수덕 생활에서 어떠한 타협의 가능성도 두지 않고 예수회의 결의론적(決疑論的)인 관대한 개연론(蓋 然論)을 극단적인 자세로 공격하였다. 이 책은 1657년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이 책의 영향은 오랫동 안 지속되었다. 포르루아얄의 수녀들은 얀센의 저서를 어느 누구도 읽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지도자 들만을 추종하여 결국 1664년 6월 9일 파문되었다. 얀 센주의는 공적으로도 많은 동조자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4명의 주교가 공개적으로 그들을 지지하였 다. 루이 14세(1643~1715)와 그의 고해 신부인 예수회 회원 앙나(F. Annat)는 그들을 면직시키려고 하였으나 갈 리아주의자들이 이에 항의하였다. 1667년 교황 글레멘 스 9세(1667~1669)가 착좌하자 화해를 모색하고 새로운 이교(離敎) 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1669년 1월 14일에 소칙서 <글레멘스 평화>를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그 해 2월에는 포르루아얄 수녀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얀센주의자들의 활동과 영향 : 그러나 포르루아얄과 얀센주의의 영향은 잔존하여 내면적으로는 더욱 강력하 게 반항하였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이 분열을 더욱 격화 시켰다. 이 논쟁은 얀센주의가 중산층과 고위 귀족층의 폭 넓은 세력을 얻었다. 또한 후에는 정치적인 색채까지 지니게 되어 프롱드당에 의해 추진된 정치적 반동과 공 존하는 영성 운동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교황청의 단 죄는 프랑스 교회의 갈리아주의(Gallicanismus) 경향을 되 살렸고, 포르루아얄 수녀원에 대한 제재는 교황청을 반 대하는 프랑스 교회의 전형적인 저항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감정적인 분위기는 얀센주의가 소멸될 때까지 지 속되었다. 1657년 아르노는 단죄되었다가 짧은 기간 동 안 복권된 후 1679년에 유배되었다. 루이 14세는 얀센 주의자들의 존재가 프랑스 왕국의 일치를 저해할까 염려 하여 개인적으로 아주 꺼려 하였다. 그는 포르루아얄 기 숙인들과 청원자 · 서원자들을 퇴거하도록 조치하였다. 프랑스 성직자 협회는 혼란을 초래한 이 논쟁을 종식시 키기 위해 국내 성직자와 남녀 수도원 전원에게 다섯 가 지 명제를 단죄하는 '신앙 고백서' 에 서명하도록 하였 다. 아르노와 그의 추종자들은 법적 문제' 와 '사실 문 제' 의 구분을 유지하면서 형식적으로 서명하겠다고 하였 다. 교황청과의 오랜 대결은 그들을 교황직에 대한 격렬 한 대립으로 이끌었고, 후에 갈리아주의와 에피스코팔리 즘(Episcopalismus)과도 연계되어 정치성까지 띠게 되었 다. 이후 얀센주의의 공격성은 지도자가 된 오라토리오 회의 신부이며 극단적인 갈리아주의자인 케넬(P. Quesnel, 1634~1719)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는데, 그는 얀센주의 확산에 대단히 열성적이었다. 케넬은 1634년 파리에서 태어나 28세에 복음서의 각 절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집필하였다. 1675년 글레멘스 10세 교황은 이 글을 금서로 정하였지만, 케넬은 1681 년에 이 글을 《복음서의 윤리 요약》이라는 책으로 출판 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계속 전개하여 4권으로 된 《윤리적 성찰에 의한 신약성서》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을 출판한 이후 파리 대주교의 명으로 오를레앙으 로 추방되었는데, 1684년에는 오라토리오회로부터 제명 처분을 당했다. 1702년 유명한 소위 "양심의 관점"이 소 르본 학자들에 의해 단죄된 이후 얀센주의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케넬은 이듬 해 체포되었으나 3개월 후 탈출하였다가 곧 브뤼셀에서 잡혀 다시 투옥되었다. 그리고 1705년 교황의 칙서 <비네 움 도미니>(Vineum Domini)가 발표되어 포르루아얄 수녀 원이 1709년 해산될 때까지 제재를 받았다. 루이 14세 는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 1710년 포르루아얄 수녀원을 폐쇄하고, 그 해 아르노를 프랑스에서 추방하였다. 그런 데 아르노가 네덜란드에서 이교 사태를 일으키자 1713 년 9월 8일 교황 칙서 <우니제니투스>(Unigenitus)가 발표되었다. 프랑스 교회의 대응과 얀센주의의 몰락 : 케넬의 얀센 주의는 얀센의 《아우구스티노》나 아르노의 책처럼 체계 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또한 때로는 교화적으로 때로 는 과격하게 신비적이라 할 정도의 표현을 신약성서 본 문에 삽입하여 자신의 주장을 드러냈기 때문에 '신(新) 얀세니우스설' 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칙서 <우니제니투 스는 케넬의 저서 내용 중 인간 구원에 있어서 은총의 역할 · 악인의 기도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 교회론 등 101개 명제를 단죄하였는데,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성 되어 있다. 하나는 신학 명제로서 은총(1~48) 두려움 (49~57)에 대한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규정에 관한 명제로서 교회(72~75), 성서(79~86) 죄와 파문(87~ 92), 교회의 남용(93~101)에 대하여 지적했다. 이 칙서 는 얀센과 뒤베르지에 때처럼 치밀한 라틴어 본문이 아니라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로부터 말 마디 하나하나를 적시하여 쉽게 이해 하도록 프랑스어로 발표하였다. 대부 분의 프랑스 성직자들이 이 칙서를 지 지했지만, 네 사람의 주교가 공의회에 서 이 문제를 다루자고 주장하여 이들 을 상소자(上訴者)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 얀센주의 문제에 소위 '프랑스 교회의 자유' 문제가 겹치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교황의 수 위권을 격하시켜 교황도 공의회의 결 정에 예속되며, 교황은 다른 주교들보 다 위엄에 있어 우위일 뿐이라는 반 교계 제도적인 관점에서 이교적(離敎 的)인 경향까지 드러냈다. 다른 두 대 주교와 주교들, 파리와 낭트의 두 개 대학,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도 이 상 소자들의 주장을 호응하였는데, 교황 은 1718년 그들을 파문했다. 1731년 이후 교회는 상소자들이 성사를 받는 것을 거부하도록 하자 새 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상소자들은자기들에게 성사를 집전해 주지 않는 교회의 사제들을 대상으로 의회에 소 송을 제기하였는데, 의회의 반교회적인 재판관들은 이 사제들을 처벌하였다. 그러나 루이 15세 왕(1715~1774) 은 의회의 판결이 부당하다며 이 사제들에 대한 처벌을 정지시켰다. 이러한 상태에서 싸움이 25년 동안 지속되 었으나 루이 15세 왕이 1754년 모든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법을 부과하였고,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 1758)는 1756년 "주지(周知)의 상소자"에게만 성사 집 전 거부를 결정함으로써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 세력 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였지만, 이때부터 프랑스나 이탈 리아에 얀센주의 운동은 현저하게 수그러들면서 19세기 까지 지속되다가 그들의 독선과 파당적인 정신으로 결국 자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옹호한 교리 논쟁은 신 앙의 근본적인 요소의 하나였다. 〔평가와 의의〕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관심이 신학적 인 논쟁과 신앙에 뒤섞일 때 논쟁의 핵심은 자취를 감추면서 신자들은 분열되고 감정적인 열성이 이성적인 요소보다 민중을 더 쉽게 흥분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게 한다. 교회사에 있어서 이 얀센주의 논쟁의 중요성은 포르루아 얄 수도원을 중심으로 고대 교회의 참회 규정들이 되살아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교회가 복음적인 삶에서 멀어지고 세속의 풍조에 휩쓸린다고 우려한 많은 열심한 신자들이 얀센주의의 엄격주의에 아주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도덕적으로나 신앙 생활에서보다 엄격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부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 쳤다. '보편성' 을 존중하는 가톨릭 정신은 적응을 구실로 하는 기회주의적인 타협이나 야합도, 그리고 순수성 을 수호한다는 빌미로 내세우는 극단적인 원리주의도 거 부한다. 교회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 도덕이나 계율을 모든 사람에게 확대하여 일반화시키는 주장도 배척해왔다. (→ 결의론 ; 아 르노 ; 우트레히트 교회 ; 갈리아주의 ; 프랑스)
※ 참고문헌  요트 마르크스, 《가톨릭 교회사》 하, 가톨릭출판사, 3판, 1975/ K. Bihlmeyer · H. Tiichle, Church History Ⅲ , Newman Press, 1966/ M. Dupuy, 《DSp》 8, pp. 102~148/ - Cent points chauds de L'histoire de Eglise, trd. F. Pierini, Ed. Paoline, 19843, pp. 260~263/ L.J. Cognet, pp. 820a~824b/ M. Cristiani, Brève Histoire Héresise(김 종진 역, 가톨릭출판사, 1967, pp. 139~162)/ A. Fliche · V. Martine Ed., Storia della Chiesa XVIII-2(1988), XLX(1974), Ed. Paolini/ A. Franzen,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K. Hecker, 《SM》 2, pp. 171a~174a/ J. Huby · P. Rousselot, etc., 강성위 역, 《가톨릭 사상사》, 성바오로출판 사, 3판, 1975/ A. Krailsheimer, The Westmister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The Westminster Press, 1983, pp. 305~306b/ J. Lortz, Storia della Chiesa, trad. L. Marinconz, Ed. Paoline, 1980³ / G. Martina, La Chiesa nell età assolutismo II , Morcelliana, 1980⁴/ B. Matteucci, Giansenismo, Dizionario storico religioso, Ed. Studium, 1966, pp. 375~377/ -, Giansenio e Giansenismo, 《EC》) 7, pp. 350~360. 〔金喜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