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섭 (1905 ~ 1982)

梁基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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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섭 신부.

양기섭 신부.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1905년 12월 31일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신지리의 열심한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양덕현 (梁德鉉, 힐라리오)은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섶가지 공소 강당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 그리고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가 부임하자 기꺼이 그의 복사가 되어 샤플랭 신부를 보좌하였다. 이러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1930년 10월 26일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졸업과 함께 사제 서품을 받고, 평양 관후리(館後里) 본 당 보좌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 후 1934년 2월 관후리 본당에서 대신리(大新里) 본당이 분할 · 설립되면서 초 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부임과 동시에 성당 건축을 시 작하여 6개월 만에 준공하고, 그 해 9월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는 나자렛 양로원과 영해 고 아원을 개설하였다. 또 청년 활동을 중시하여 청년 수양 회를 개최하는 등 청년 사목에 주력하였으며, 이 지역에 교육 기관이 부족하여 미취학 아동이 늘어나자 1936년 에는 6년제 초등 교육 기관인 '동평학교' (東平學敎)를 설립하였다. 동평학교는 13개 학급에 1,000여 명의 학 생이 공부하는 규모가 큰 학교로 당시 평양 지역 초등 교 육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8년 9월 대신리 본당을 떠나 일본 유학 길에 올랐으나, 이듬해 1월 숙천(肅川) 본당의 4대 주임으로 임명 되어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때 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교회 활동에 대한 통제 또한 심했다. 이로 인해 양기섭 신부는 교세 신장이나 부속 사업 등의 활동보다는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 하자 평양 대목구를 관할하던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감금되었고 한국인 성직자의 수도 부족하였다. 이에 양기섭 신부는 1942년에 진남포(鎮南浦) 본당 으로 이임되었고 숙천 본당은 영유(永柔) 본당 관할 공 소가 되었다. 진남포 본당에서는 소화병원(小病院)을 개설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모든 일에 적극적 이고 직언을 서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성이 강해 주위 사람들과 마찰을 빚는 일이 종종 있었다. 본당 사목을 하는 과정에서 평양 대목구장 홍용호(洪龍浩) 주교와도 여러번 의견 충돌을 일으켜 결국 1946년에 서울 대목구 로 이적하였다.
서울로 온 양기섭 신부는 명동 성당 성가(聖家) 기숙 사 사감 신부를 역임하며, 신학교 동기이자 평소 친하였 던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와 자주 만나 가톨릭 일 간지를 발행하자는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후 양기섭 신 부 · 윤형중 신부 · 이완성(李完成, 요한) 신부 등이 뜻을 모았고, 양기섭 신부는 곧바로 신문사 설립 준비에 착수 하였다. 우선 1946년 8월 조선 정판사를 미 군정청으로 부터 불하받았고, 일본인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양질의 신문 용지를 확보하였으며, 신문사 직원들도 채용하였 다. 그의 적극적인 활동은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 가 재정적 문제와 교회 내의 반대 의견 때문에도 불구하 고 신문사 창설을 허락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그 해 10월 경향신문사가 설립되어 양기섭 신부가 사장 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사장에 윤형중 신부, 편집국장으 로는 시인 정지용(鄭芝鎔)이 임명되었다. 10월 6일 창간된 <경향신문>의 제호는 양기섭 신부가 건의하고 윤형 중 신부가 동의하였는데, 1906년 10월 19일부터 발간 되었다가 1910년 12월 30일 폐간된 주간 <경향신문>의 복간 의미를 담고 있다. 재정적 어려움과 주위의 우려에 도 불구하고 <경향신문>은 창간 1년 만에 발행 부수 1위 를 차지할만큼 급성장하였다.


그 후 양기섭 신부는 1947년 5월 미국 가톨릭 교회 시찰과 미국 가톨릭 교회와 한국 가톨릭 교회의 연계를 위하여 10여 년 간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1956년 잠시 귀국한 양기섭 신부는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성신대학 의학부(현 가톨릭대학 의과대학)를 고려대학교로 넘긴다는 소식을 듣고, 윤형중 신부를 여러 번 찾아가 자신이 미국 의 원조 등으로 의학부를 운영할 수 있으니 의학부를 인 계하지 말자고 요청하였다. 이에 이듬해 1월 양기섭 신 부는 이 학교의 의학부장 겸 명동 성모병원 원장에 임명 되었고, 대학 이름도 '가톨릭 대학' 으로 개칭되었다. 양 기섭 신부는 우선 성모병원 건물을 신축할 계획을 세우 고, 명동 성당 앞의 부지에서 1958년 12월 미국 뉴욕 교구장 스펠만(F.J. Spellman, 1889~1967)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3년 후인 1961년 12월 1일 완공되었다. 또한 양기섭 신부는 1958년 1월부터 명동 본당 7대 주임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그는 많은 임무 속에서도 같 은 해 7월과 8월에 성녀 소화 데레사상과 예수 성심상을 설치하였고, <명동 주보>를 창간하였으며, 사제관(현 교 육관)을 신축하였다. 1960년에는 미국 순방 중에 구입한 전동식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였으며, 성당 내의 성모 상을 교체하였고, 성모 동굴을 조성하여 8월 27일 축복 하였다. 격무에 시달리던 양기섭 신부는 1961년 12월 일산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고, 성신대학 의학부장 및 성모병원장으로는 박희봉(朴喜奉)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후 가평(加平) 본당 주임(1965. 7~1967. 4)을 거쳐 신당 동(新堂洞) 본당에 부임한 그는 성당 안팎을 정비하고, 성당 2층을 개축하였으며, 본당 주보를 활성화하는 등 활발한 사목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67년 9월 11일 의료원장 겸 의학부장으로 재취임하였으나 교수들의 반 대로 이듬해 3월 11일 사임하고 신당동 본당 사목만을 전담하였다. 1971년 9월에는 712평 규모의 성당을 신 축하였다. 신당동 본당에서 11년 간 사목하고 1978년 5월 은퇴하였다. 은퇴와 함께 성지화 작업이 추진 중이던 배론에 초대 관리소장으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배론 성지 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1979년에 성당과 최양업 신부 회관을 신축하였으며, 1981년에는 황사영 순교 현양탑 을 건립하였다. 10여 년 간 배론 성지화 작업을 추진하 였던 양기섭 신부는 배론의 6개 건물 축복식을 앞두고 1982년 4월 3일 사제관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사망하여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경향신문>)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평 양교구사 편찬위원회, 《天主教平壤教區史》, 분도출판사, 1981/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 60 년사 발간 소위원회,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 60년사》, 가톨릭 출판 사, 1996/ 京鄉新聞社 社史編纂委員會, 《京鄉新聞五十年 史》, 京鄉新 聞社 製作局, 1996/ 朴濤遠,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盧基南大主敎》, 韓國敎會史研究所, 1985/ 《경향잡지》 894호(1939. 1). 〔吳美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