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陽明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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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明)나라 시대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 창시한 학문으로, 그의 호(號) '양명' 을 따서 '양명학' 이라고 한다. 왕양명이 제창한 심즉리(心卽理) · 지행 합일(知行合一) · 치양지(致良知) · 사구교(四句敎) 등이 그 핵심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이러한 왕양명의 사상을 그의 문인(門人)들이 계승하여 발전시켰는 데, 이들의 모든 학문 을 총칭하여 양명학이 라고 한다. 양명학은 주자학과 함께 신유학 (Neo-Confucianism)의 양대(兩大) 사조 가운 데 하나로, 그 사상은 왕양명이 쓴 《대학문》 (大學問)과 제자들과 토론한 글을 모은 《전 습록》(傳習錄), 그리고 그의 《문록》(文錄)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왕양명의 학문은 주자학의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주자 학은 송대(宋代)에 창시되고, 원대(元代)에 과거(科擧) 시험의 이념이 되어 관학화(官學(L)되었다. 그러나 그 체계는 방대하여 지리(支離)한 폐단에 빠졌고, 정연한 이론은 관념의 유희화가 되어 번쇄한 형식주의에 고착되 어 버렸다. 이와 같이 생명력을 잃어버린 주자학에 대하 여 양명학은 간단하면서도 쉬운 학문 방법을 제시하여 새로운 민학(民學)으로 등장하였다.
양명학도 주자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누구나 성인 (聖人)이 될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안으로 자신을 성 화(聖{七)시키고, 밖으로 왕도 정치(즉 도덕 정치)를 실현 시킬 수 있다(內聖外王)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인이 되 기 위한 수양 방법에서 양명학은 주자학과 그 궤를 달리 하였다. 왕양명은 주자학의 격물 치지(格物致知)의 방법 에 대하여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용장 (龍場)에서의 대오(大悟)를 통하여 "성인(聖人)의 도 (道)는 나의 본성에 스스로 충분한데 밖에서 사물의 이 치를 구한 것이 잘못되었다" 라고 말하고, 자기의 독자적 학설을 세우게 되었다.
〔격물 치지〕주자(朱子)는 《대학》(大學)의 8조목 가운 데 격물 치지에 관한 전(傳)이 빠져 있다고 생각하여 보전(補傳)을 지어 넣었다. 이러한 《대학》의 체계는 주자 학의 기본 틀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른바 치지는 격물에 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즉 나의 앎을 극진한 데까지 이르려고 하는 것은 사물[物] 에 다가가서[卽] 그 이치를 끝까지 캐 들어 가는 데 있 다" 라고 주장하여, 격(格)을 이르다[至)로, 물(物)을 사 물의 이치로 해석하였고, 치(致)는 극진한 데 이르다 · 미루어서 넓히다로, 지(知)는 앎 지식으로 풀이하였다. 그리고 주자는 인식 주체와 그 대상을 명확히 구분하여 "인간 마음의 신령함은 앎〔知)을 갖지 않음이 없다" 라고 주장하여, 인식 능력을 말하고, "천하의 사물은 이치를 가지고 있지 않음이 없다" 라고 말하여, 인식 대상인 물 리(物理)가 있음을 상정하였다. 그러니까 외물(外物)에 일정한 이치(定理)가 있으므로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끝까지 캐묻는다(卽物窮理)는 것이다.
왕양명은 그것에 대하여 "사물 하나마다(事事物物) 다 가가서 이치〔理〕를 구한다는 것은 이치〔理〕와 마음〔心]〕 을 구별하는 것이 되며, 사물 하나마다 다가가서 이치를 구하는 것은, 예컨대 효도의 원리를 그 부모에게서 구하 는 것과 같다. 효도의 이치를 그 부모에게서 구하면 효도 의 이치는 과연 나의 마음에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부모의 몸에 있는가? 만약 부모의 몸에 있다면, 부모가 돌아가시면 나의 마음에는 효도의 이치가 없어지는 것인 가"라고 주장하여, 도덕 원리를 밖에서 찾는 것에 반대 하였다. 그리고 또 만물의 이치를 끝까지 캐물은 뒤에야 그 이치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면, 성의(誠意) · 정심(正 心) · 수신(修身)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죽도록 격물 치지 공부만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은 일생 동안 심신(心 身)의 수행(修行)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여 반대하 였다. 왕양명은 '격물' 에 대하여 격은 바로잡다〔正〕로, 물(物)은 일〔事〕로 해석하였다. 일〔事〕은 외계의 사물이 아니라 마음[心]의 발동인 의지〔意〕가 있는 곳이 바로 일〔事〕이라는 것이다. 왕양명은 "대체로 의(意)가 발동 된 곳에는 반드시 그 일〔事〕이 있고, 의가 있는 곳의 일 을 일러 물(物)이라 한다. 격(格)이란 바로잡다〔正〕로, 그 올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아 올바름〔正〕으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그 올바르지 못함을 바로잡는 것을 일러 악 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하고, 올바름으로 돌리는 것을 일 러 선을 행한다고 한다. 이것을 일러 격(格)이라 한다" (物者 事也 凡意之所在必有其事 意之所在之事謂之物 格 者 正也 正其不正以歸於正之謂也 正其不正者 去惡之謂 也 歸於正者 爲善之謂也 夫是之謂格, 《大學問》)라고 주장 하였다. 그가 말하는 치지(致知)의 지(知)는 천리인 양지(天理良知)로서 일반적 의미의 경험적 지식이 아니다. 그는 치지를 말하면서 "그것은 후대의 유학자가 지식을 넓힌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양지 (良知)를 실현하는 것(致)이다" (非若後儒擴充知識之謂 致吾心之良知焉, 《傳習錄》, <答顧東橋書〉)라고 하였다. 그 러므로 왕양명이 말하는 격물 치지는 바로 치양지(致良 知)인 것이다. 왕양명에 의하면 "내가 말하는 치지 격물 (致知格物)이란 내 마음의 양지를 사물 하나하나에 실현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양지가 곧 천리이다. 내 마음의 양지를 사물 하나하나에 실현하게 되면, 사물 하나하나 는 모두 그 이치를 얻게 된다. 내 마음의 양지를 실현하 는 것이 치지이고,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그 이치를 얻게 되는 것이 격물이다. 이것은 마음[心〕과 이치〔理)가 합 쳐져 하나가 된 것이다"(《傳習錄》, 〈答顧東橋書〉)라고 하였다. 왕양명에게서 치지와 격물은 같은 것이며, 성의 · 정 심도 역시 격물 치지와 그 내용이 같은 것이 된다.
〔심즉리〕 심즉리설은 송대 육구연(陸九淵淵, 호는 象山, 1139~1192)이 이미 주장한 적이 있다. 왕양명은 지행 합 일 · 치양 지설 등으로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심학(心學) 을 완성시켰다. 심즉리란 마음 자체가 바로 이치(도덕적 원리)라는 것이다. 이때의 마음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 고난 본래의 마음인 본심(本心)을 가리킨다. 이것은 마 음의 본체 즉 심체(心體)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양지(良 知)라고 불렀다. 왕양명에 의하면 이 마음의 본체인 양 지가 바로 선천적 도덕 원리인 천리(天理)라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 주체인 마음과 보편적 도덕 법칙인 천리가 같다는 것을 말하며, 마음과 이치를 둘로 나누어서 보는 주자학을 비판한 것이다. 왕양명은 인간의 마음은 "덩 비고 영묘하여서 어둡지 않다. 여기에 여러 가지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모든 일이 여기서 나온다. 마음 밖에 이 치가 없고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 (虛靈不昧 衆理具而萬 事出 心外無理 心外無物, 《傳錄》 上)라고 주장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효(孝)라는 도덕 원리는 내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부모 의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양명은 도덕 법칙 과 마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치[理]란 마음의 조리 (條理)이다. 이 이치가 부모에게 발휘되면 효가 된다" (理也者 心之條理也 是理也 發之于親則為孝, 《陽明全書》 卷8 <書諸陽書>)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이 마음이 사물 에 있으면 이치가 되는데, 예컨대 이 마음이 아버지 섬기 는 데 있으면 효가 된다" (此心在物則爲理 如此心在事父 則爲孝, 《傳錄》 下)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효 · 충(忠) · 신(信) 등의 도덕 원리는 모두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기고,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이 다. 그것은 마음이 곧 도덕 판단의 기준이 되는 천리(天 理)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 밖의 어떠한 도 덕적 원리, 즉 예(禮)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물의 이치인 물리(物理)까지도 마음을 떠나 따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왕양명은 주장하였다.
왕양명은 마음 밖에 아무 이치도 없다는 심외 무리(心 外無理)뿐만 아니라 마음 밖에 아무 사물도 없다는 심외 무물(心外無物)도 주장하였다. 그는 마음과 사물의 관계 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체의 주 재가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발동한 곳이 바로 의(意)이 며, 이 의(意)의 본체가 바로 양지〔知〕이고, 의(意)가 있 는 곳이 바로 물(物)이다" (身之主宰便是心 心之所發便 是意 意之本體便是知 意之所在便是物, 《傳習錄》 上)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意)란 현상학에서 말하는 지향성(mtentionality)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발휘되어 작용한 것을 의(意)라고 한 것은 의식 작용(Noeesis)으로 해석할 수 있고, '의' 가 있는 곳· '의' 가 붙어 있는 곳〔所着)이 물(物)이라고 한 것은 의식 대 상(Noema)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의식 대상(物)이 의식 활동(意)에 의하여 생겨난다고 할 경우 '의' 가 작용하는 데는 '물' 이 있지만 '의' 가 없으면 '물' 도 없다. 따라서 마음의 작용을 떠나서 따로 사물이 없다(心外無物)고 주 장하는 것이다. 왕양명은 예를 들어 "만약 '의' 가 부모 섬김(事親)에 있으면, 부모 섬김이 하나의 물(物)이고, 의가 군주 섬김(事君)에 있으면 군주 섬김이 하나의 물 (物)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의 물(物)은 자연 세계의 산 천 · 초목 같은 외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연관되어 일 어난 일〔事〕을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의 의미와 가치가 전개된 삶의 세계(Lebenswelt)에서 생겨난 일이요, 그것 은 주로 도덕 활동[事親], 정치 활동[事君] 그리고 교육 활동[讀書] 등에 일어나는 일들을 가리킨다. 왕양명은 부모(親)나 책〔書〕을 하나의 물(物)로 보지 않고 부모 섬김〔事親〕, 책을 읽음〔讀書〕을 하나의 물(物)로 보았 다. 우리의 마음을 떠나서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 다. 그러므로 왕양명은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다" (心外 無物), "만약 나의 마음이 부모에게 효도할 생각을 발동 하면, 부모에게 효도함이 바로 물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다' 는 명제는 당시 사람들에게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한 친구가 남진에서 바위 속에 핀 꽃을 가리키면서 "천하에 마음 밖의 사물은 없다고 하였 지만, 예컨대 이 꽃나무는 깊은 산중에서 저절로 피었다 가 저절로 떨어지는데, 나의 마음에는 역시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라고 질문하였다. 왕양명은 "그대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는 이 꽃과 그대 마음이 다 같이 고 요했었다. 그대가 이 꽃을 보았을 때 이 꽃은 색깔이 일 시에 분명하게 되었다. 곧 이 꽃이 그대의 마음 밖에 있 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왕양명은 결 코 저절로 피었다가 지는 꽃나무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꽃을 보는〔看花〕 의식〔心〕과 연관되었을 때 그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마음이 아직 꽃과 감응되 지 않았을 때는 이 의(意)가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이며, 마음이 고요하다고 하여 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왕 양명의 심외 무물 · 심외 무리는 모두 심즉리의 사상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에 맞서 주장한 것으로, 글자 한 자 차이에 지나지 않지만, 양자간에는 엄청난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지행 합일〕 왕양명의 지행 합일설은 주자학의 앎을 먼저하고 행을 뒤에 한다는 선지 후행설(先知後行說)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다. 왕양명의 수제자 서애(徐 愛, 1487~1517)가 "이제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함을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효도할 줄 모르는 경우가 있 는 것을 보면, 앎과 행위가 분명히 두 가지가 아닙니까" 라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양명은 "이것은 이미 사욕(私欲)에 의하여 잘라져 버린 것이다. 지행의 본체 가 아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없다. 알면서 행하 지 않으면 단지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 다. 그리고 《대학》에서 말하는 "마치 예쁜 여자를 좋아하 듯, 마치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如好好色 如惡惡臭)의 구절을 가리켜 예쁜 여자를 본 것은 앎에 속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행에 속한다. 예쁜 여자를 보는 순 간 저절로 좋아한 것이지, 보고 난 뒤에 다시 마음을 세 워 좋아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참되게 아는 것〔眞知)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러므로 왕양명은 "참된 앎은 행하기 위한 까닭이다. 행 하지 않으면 그것을 앎이라 할 수 없다"(眞知所以爲行 不行不足以爲知, 《傳習錄》, <答顧東橋書〉)라고 하였다. 왕 양명에 의하면 앎은 실천 중에 터득되는 것이므로 지행 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앎이란 행위의 시작 이요 행위는 앎의 완성이다. 성학(聖學)은 하나의 공부 일 뿐이며, 지행은 둘로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 반적으로 앎이란 지식이나 이론 등을 나타낸다. 그러나 양명 철학에서 앎이란 의식 · 의념(意念) · 의욕(意欲) 등의 지각 형식을 가리킨다. 왕양명은 "대체로 사람은 반드시 먹으려는 마음이 있다. 그런 뒤에 먹을 줄 안다. 먹으려고 하는 마음이 바로 의(意)이고, 이것이 바로 행 위의 시작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앎은 인식론적 인 지식이 아니라 동기 · 욕망이 포함된 의지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앎은 무엇을 대상화하여 아는 지식이 아 니라 그 안에 행위까지 포함된 무엇을 할 줄 아는 앎이 요, 이것이 바로 양지라는 것이다.
왕양명은 지행이 하나임을 설명하면서 "앎은 행위의 주된 의도이며, 행위란 앎의 공부이다" (知是行之主意 行 是知之工夫)라고 하였다. 앎이 행위의 주된 의도라는 명 제는 인간의 의식 중 미리 설정한 활동에 관련된 목표와 방식을 가리키며, 행위는 앎의 공부라는 명제는 실천 활 동이 앎을 현실화하는 길 또는 방식이라는 것을 말한다.
왕양명은 만년에 지행 합일의 취지를 더욱 강조하여 "앎의 참되고 절실하며 독실한 곳이 바로 행위이고, 행 위의 분명히 자각하고 자세히 살피는 곳이 앎이다" (知之 真切篤實處即是行 行之明覺精察處即是知, 《傳習錄》, 〈答 顧東橋書〉)라고 하였다. 우리가 앎의 활동에 종사할 때, 참되고 독실한 태도를 가질 수 없으면, 앎은 정확하고 분 명하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실천 활동에 종사할 때, 분명 히 깨닫고 세밀히 분석할 수 없으면 이런 활동은 맹목적 이 되고, 이런 활동을 참으로 완성시킬 수 없다. 그는 《중용》의 "널리 배우고〔博學〕, 자세히 묻고〔審問〕, 신중 히 생각하고〔愼思〕, 분명히 따지고[明辯〕, 독실하게 행 한다〔篤實〕" 고 하는 다섯 가지 조목을 해석하면서, 보통 앞의 네 가지를 앎에, 뒤의 한 가지를 행에 소속시키는 견해에 반대하고 다섯 가지 모두가 행에 속한다고 보았 다. 황종희(黃宗羲, 1610~1695)에 의하면 왕양명이 "사 물에다 양지를 실현〔致〕시킨다" (致知于事物)라고 하는 치(致)자는 바로 행(行)자이며, 이것으로 공허한 궁리 (窮理)를 구제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지를 실현시키 는 치양지(致良知)가 바로 지행 합일이라는 것이다.
[치양지] 치지(致知)는 《대학》에서, 양지(良知)는 《맹 자》에서 나온 말이다. 왕양명은 이 두 사상을 결합하여 그의 만년에 '치양지' 설을 제출하였다. 왕양명은 "양지 두 글자를 실로 아득한 옛날부터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 한 한 방울의 골육이다"(良知二字 實千古聖聖相傳之一 點滴骨肉), "이 두 글자는 참으로 성인 문하의 바른 진리 의 눈이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此二字眞聖門之正法眼 藏也), "이것은 배우는 이들의 궁극적 화두이다" (是學者 之究境話頭)라고 하여 양지가 학문의 정수이며 성인의 도가 궁극적으로 드러난 곳이라고 보았다. 왕양명은 양 지의 설을 터득하고는 기뻐서 "이제 다행히 이 뜻을 드 러내었다. 한마디로 전체를 꿰뚫어 보았으니, 참으로 통 쾌하여 나도 모르게 손발이 저절로 춤추고 들썩거렸다" 라고 하였다. 양지라는 말은 《전습록》 상권의 서애의 기 록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만년의 것과는 의미에서 차이 가 난다. 왕양명이 '치양지' 설을 주장한 시기는 그의 50 세 이후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양지란 말은 《맹자》 <진심 편 상>의 "사람이 배우지 않 고도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양능이며, 생각하지 않 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양지이다"(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 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라고 한 데 근본을 두고 있 다. 왕양명은 또 《맹자》의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지 이다" (是非之心 智也, 〈告子 상〉), "지의 단서이다" (智之 端也, 〈公孫표 상>)라고 하는 지(智)를 양지로 해석하였 다. '양지' 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연스런 지각 능 력으로서 옳고 그름과 선악을 아는 것이다. 왕양명은 "마음은 저절로 알 수 있다. 아버지를 보면 저절로 효도 할 줄 알고··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저 절로 불쌍히 여길 줄 안다. 이것이 바로 양지이다"(《전습 록》 상)라고 하였다. 또 "양지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是非之心)이며, 옳고 그름은 단지 좋아하고 싫어함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양지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단 하는 도덕 원칙일 뿐만 아니라, 도덕 정감(좋고 싫음)의 원칙이기도 하다. 양지가 선악 · 시비를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천리의 영명(靈明) · 영각(靈覺)의 드러 남이며, 또한 천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양 지는 단지 하나의 권리의 자연스런 명각일 뿐이다"(良知 只是一個天理自然明覺, 《傳習錄》, 〈答聶文蔚二〉)라고 하였 으며, 또 "양지는 천리의 환히 밝게 명각한 곳이다. 그러 므로 양지가 곧 천리이다"(良知是天理之昭明靈憲, 《傳 習錄》, 〈答歐陽崇 一)라고 하였다. 이것은 양지와 천리의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 주는 말이다.
양지는 또한 의념(意念)의 판단 원칙이기도 하며, 의 념에 대하여 감독하고 지도하는 작용을 한다. 왕양명은 "너의 의념이 붙어 있는 곳, 그것이 옳으면 곧 옳다는 것 을 알고, 그르면 곧 그르다는 것을 안다"(意念着處 他是 便知是 非便知非)라고 하였으며, "대체로 의념이 발동된 것은 내 마음의 양지는 저절로 그것을 안다. 그것이 불선 (不善)이면, 오직 내 마음의 양지가 스스로 그것을 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양지가 타인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 이 아니고 자기의 의념을 판단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 다. 그는 이것을 독지(獨知)라고 불렀다. 또한 "이른바 남이 알지 못하는 곳을 자기가 홀로 아는 것, 이것이 바 로 내 마음의 양지가 아는 곳이다”(所謂人所不知己所獨 知者 此正吾心良知處, 《전습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양지가 완전히 활동한다면, 저절로 의(意)는 선하게 되 고, 행위는 도덕적인 것이 된다. 양지는 도덕의 근원이요 규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왕양명은 이것을 방원(方 圓) · 장단(長短) · 경중(輕重)에 나타난 컴퍼스(規矩) · 잣대〔尺度〕 · 저울〔權衡〕이며, 배〔舟〕에 있는 키〔舵〕로 비유하였다.
양지는 아는 활동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랑〔仁〕 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타인에 대하여 동정하고 사랑 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대개 양지는 단지 하 나의 참으로 거짓 없이 불쌍히 여기는 것일 뿐이다" (蓋 良知 只是一個眞誠懺坦耳)라고 하는 말은 순수 자연의 동정심을 양지로 간주하는 것이고, 양지를 실현(致)하여 끝까지 나아가면 천지 만물도 하나의 몸으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지는 인(仁)이 라는 것이다. 왕양명은 천지 만물을 성립시키는 우주의 본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양지는 조화의 정령 (精靈)이다. 이 정령이 하늘을 생기게 하고 땅을 생기게 한다. 귀신을 이루고 제(帝)를 이루는 것도 모두 여기에 서 나온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양지는 천지와 귀신을 생성시키는 근거가 된다. 그는 "만약 풀 · 나무 돌 · 기와는 인간의 양지가 없다면 풀 · 나무 · 돌 기와가 될 수가 없다" (若草木瓦 石無人的良知 不可以爲草木瓦石矣, 《陽明全集》 권3)라고 하였다. 이것은 양지를 지각의 주체로 본 것이며, 천지 만물이 모두 양지와의 의미 연관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양지는 보고 듣는 지각으로 말미암아 생 겨난 것이 아니다(良知不由見聞而有)라고 하여, 양지는 경험적 지각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 내 재적 · 천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보고 듣는 지각은 양지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見聞莫非良知之 用)라고 하여, 인간의 여러 가지 경험 활동은 양지 활동 의 필요 조건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양지는 견문에 의 하여 막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견문에서 분리되지도 않 는다고 하여, 양지는 경험에 의하여 국한되지 않지만 경 험 활동을 통하여 발현(致)된다고 인식하였다.
왕양명은 '치양지' 공부를 만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 하였다. 치(致)는 주자와 마찬가지로 '이르다' 〔至〕로 풀 이하였으나,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확충이 아니라 "내 마음의 양지를 그곳에 이르게 한다" '(致吾之良知焉耳) 라고 달리 해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치(致)는 양지를 방 해하는 인욕이나 자기 사욕을 배제하여 양지를 완전하게 발현시킨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양지를 발현시키는 방 법은 언제나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戒愼恐懼)하여 홀 로〔獨〕를 삼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늘 또랑또랑 깨 어 있으면서 시시각각 옳은 일을 쌓아 가면서 일을 게을 리 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구교〕 왕양명이 그의 만년인 1527년에 사전(思田) 을 정벌하러 떠나려고 할 때, 전덕홍(錢德洪, 1497~1574) 과 왕여중(王汝中, 1498~1583)이 학문을 논하였다. "전 덕홍이 선생의 가르침을 들어서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은 마음의 본체이고(無善無惡心之體),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은 의(意)의 움직임이며(有善有惡意之動)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고(知善知惡是良知), 선을 위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격물이다' (爲善去惡是格物) 라고 말하고(四有), 이 뜻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이에 대 하여 왕여중은 '아마도 이것은 궁극적인 화두(話頭)가 아닌 것 같다. 만약 심체(心體)가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라면, 의(意) 역시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의이며, 지 (矢口) 역시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지이고, 사물[物] 역시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사물이다' (此恐未是究境話頭 若說 心體是無善無惡 意亦是無善無惡的意 知亦是無善無惡 的知 物亦是無善無惡的物矣)라고 반박하였다(四無) 이 날 저녁 천천교(天泉橋)에서 선생을 모시고 제각기 올바 른 해답을 청하였다. 선생은 두 사람의 견해는 바로 서 로 의지하여 쓰일 수가 있다. ··· 날카로운 근기[利根]의 사람은 곧바로 본원(本源)상에서 깨달아 들어간다. 일단 본체를 깨우치면 바로 이것이 공부이다. ··· 그 다음에는 습심(習心)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여 본체가 가리게 되므 로, 가르침은 의념(意念) 위에 있게 된다. 실제로 선을 위하고 악을 버려야 한다 ···여중의 견해는 내가 여기서 만난 날카로운 근기의 것이다. 덕홍의 견해는 내가 여기 서 그 다음을 위하여 방법을 세운 것이다. ··· 이후 벗들과 학문을 강의하면서 절대로 나의 종지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고 말씀하셨다. ····과 여중은 모두 반성함이 있 었다" (《전습록 하》)라고 하였다.
이 사구교는 왕여중이 쓴 《천천증도기》(天泉證道記) 에 비교적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왕여중은 사구교가 임 시 방편의 권법(權法)이지 정법(正法)은 아니라고 하고, 왕양명의 근본 취지(宗旨)는 무선 무악(無善無惡)이라 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논쟁의 단서가 되어 문인들 사이 에 의견이 엇갈렸다. 추수익(鄒守益, 1491~1562)은 '무 선 무악이 마음의 본체이다' (無善無惡心之體)는 명제를 "지극히 선하여 악함이 없는 것이 마음이다" (至善無惡者 心)라고 고쳤다. 그것은 왕양명의 '지극히 선함이 마음 의 본체이다' (至善是心之本體)라는 말에 근거를 둔 것이 다. 그 후 그의 제자와 동림학파(東林學派)들이 왕양명 의 심체(心體)는 지선(至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 하였고, 유종주(劉宗周, 1578~1645)도 이 견해를 따랐다.
〔사상 마련(事上磨煉)〕 왕양명이 일을 하면서 자신을 갖고 달구는 사상 마련을 주장하게 된 것은 그가 42세 때인 정덕(正德) 8년 저양(滁陽)에 있을 때였다. 당시 제 자들이 세상의 공리적(功利的)인 풍조에 물들지 않고 오 로지 구도(求道)에만 마음을 쓰도록 하기 위하여 고요히 앉아〔靜坐〕 마음을 맑게 하는〔澄心〕 공부를 권하였다. 그러나 오래되니까 점차 고요함을 좋아하고 움직이는 것 을 싫어하며, 생기가 없이 말라 버리는 병(枯槁之病)에 흘러 들어가 버렸다. 이에 따라 유가의 본래 모습을 잃어 버릴 우려가 생겼다. 왕양명 자신도 젊었을 때 좌선(坐 禪)이나 도가의 수행(修行)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왕양 명은 누일재(婁一齋)의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안으로 반 성하고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적연 부동(寂然不動) 등을 많이 언급하였다. 그런데 제자들이 형이상학적 해석(玄 解)이나 묘한 깨달음〔妙覺〕 등에 빠지는 폐단을 보고서 현실 생활 속에서 양지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인 '사상 마련' 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 동정(動 靜)을 초월하여 수행을 하는 것으로, 언제나 스스로 주 체가 되어 모든 기회를 실천하는 장소로 변화시키는 것 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사상 마련이란 구체적이며 복잡한 행동과 실천 중에서 자기 마음의 대응 능력을 단련시킨 다는 뜻이다. 왕양명은 관직 생활과 군사 활동 등 바쁜 가운데에서도 언제나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전체 공부론은 모두 역동적인 행위 방면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사회를 바꾸려는 유가의 실천적인 관심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만물 일체설(萬物-體說)〕 정명도(鄭)〕는 "인(仁) 이란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 삼으니 자기 아닌 것이 없 다”(仁者以天地萬物爲一體 莫非爲己, 《遺書》 第二 上)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이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대체로 인간은 천지의 마음〔心〕이다. 천지 만물은 본래 나의 한 몸인 것이다"(夫人者 天地之心 天地萬物本 吾一體者也, 《傳習錄》, 〈答聶文蔚一〉)라고 하였다. '인간이 천지의 마음이다' 라는 말은 《예기》(禮記) <예운 편>(禮 運篇)에 나오는 것으로, 인간은 천지에 감동하는 신령 (神靈)을 가지고 있으며, 천지와 같은 기운〔氣〕을 타고 났다는 뜻이다. 왕양명에 의하면 천지 만물은 인간과 본 래 한 몸이지만, 여기서 한 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집착 과 사욕(私慾) 때문에 양지를 실현시키지 못하는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大人]과 거룩 한 사람〔聖人〕이 천지 만물과 한 몸이 되는 것은 사욕이 없이 본래의 양지를 잘 실현시키기 때문이다. 천지 만물 을 한 몸으로 생각하는 정신 경계는 구체적으로 "천하를 마치 한 집안 보듯 하고, 나라의 중심을 한 사람처럼 본 "(視天下猶一家 中國猶一人)라고 한 데 표현되어 있 다. 이것은 남을 자기처럼 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인(聖人)의 마음은 천하 사람을 안과 밖, 가깝고 먼 구별 없이 본다" (聖人之心 其視天下之人 無內外遠近, 《全書》 二)라고 하였다.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 생각하는 대아(大我)의 경지는 그 본질이 인(仁) 또는 사랑[愛]에 있다. 만물 일체를 실현하는 방법은 바로 양지를 실현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양명학파와 그 전개〕 양명학파는 간단히 왕학(王學) 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왕양명이 도처에서 강학(講學) 하여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양명학의 파별(派別) 을 지역에 따라 나누기도 하고, 학설에 따라 나누기도 한 다. 황종희는 (명유학안)(明儒學案)에서, 절중(浙中) 왕 문(王門)에서 서애 · 전덕홍 · 왕기(王畿, 1498~1583) 등 19명, 강우(江右) 왕문에서 추수익 · 섭표(聶豹, 1487~ 1563) · 나홍선(羅洪先, 1504~1565) 등 27명, 남중(南中) 왕문에서 11명, 초중(楚中) 왕문에서 2명, 북방(北方) 왕문에서 7명, 월민(粵閩) 왕문에서 설황(薛況, ?~1545) 등 2명, 태주(泰州) 왕문에서 왕간(王艮, 1483~ 1541) · 나여방(羅汝芳, 1515~1588) 등 18명, 모두 86명을 지역 별로 다루고 있다.
일본의 현대 양명학자 오카다(岡田武彥)는 양명의 문 하를 3파로 분류하였는데, 그것은 양지에 대한 해석의 다름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양지 현성파(現成派)의 대표자로 왕기와 왕간을, 귀적파(歸寂派)는 섭표와 나홍 선을, 수증파(修証派)는 추수익과 구양덕(歐陽德)을 들 었다. 한편 양명학은 명대(明代) 사상의 주류를 형성하 였으나 청대(淸代)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현대 신 유학이 등장하면서 웅십력(熊十力) · 모종삼(牟宗三) 등 이 양명학과 서양 철학을 결합하여 신심학(新心學)의 체 계를 형성하였다.
〔한국 양명학〕 우리 나라에 양명학이 언제 누구에 의 해 최초로 전해졌는지 확실한 설명이 없다. 이능화(李能 和)에 의하면, 동강(東岡) 남언경(南彥經)과 경안령(慶 安令) 이요(李瑤)가 그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선조 (宣祖)가 1594년에 이요에게 양명학에 대하여 질문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양명학이 이미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은 17세 때인 1558 년에 연경(燕京)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던 심통원 (沈通源)의 행탁(行橐) 속에서 왕양명의 글을 발견하고 이를 등서(謄書)했다고 하며, 이전에는 왕양명의 글이 들어온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종일(吳鍾逸)에 의하면, 1521년 이전 왕양명이 생존하였을 때 이미 《전 습록》 초간본(初刊本)이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 로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의 연보에 <변왕양 명수인전록(辨王陽明)(仁))이란 것이 있고, 십청헌 (十清軒)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의 《십청헌집》(十淸 軒集)에 〈우화눌재〉(又和齋)라라는 삼절시(三絶詩)에 "양명노자치심학" (陽明老子治心學)이란 글이 있다고 지 적하고, 이것을 근거로 전래 시기를 1524년(중종 16) 이 전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윤남한(尹南漢)에 의하면, 한국에서의 양명학 형성은 중종 말(1528)에서 명종 초(1533)에 정주학(程朱 學)이 심학화(心學化 )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다. 초기 양명학 수용 과정에서 이요는 선조에게 양명학 을 찬양한 바 있고, 선조는 이에 적극 동조하여 유성룡의 양명학 배척을 거부하였다. 선조는 양명학을 배우지 않 는 것보다는 배우는 것이 좋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이처럼 선조 때에는 양명학을 수용하려는 논의가 있었으 나 주자학자들, 특히 퇴계(退溪)의 〈전습록변〉(傳習錄 辨) 이후에 양명학은 이단 사설(異端邪說)로 배척당하였 다. 퇴계의 문하생 유성룡이 왕양명의 심즉리설과 지행 합일설은 물론 치양지설까지도 비판하였으며, 1594년 선조와의 대담에서 양명학과 이를 숭상하는 이요 · 남언 경을 비난하였다. 그 후 노론(老論)이 국가 권력을 장악 하게 되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인 한 원진(韓元震)은 왕양명의 학설을 조목조목 비판하였고, 소론의 영수인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도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였 다. 그뿐 아니라 남인(南人)의 이익(李瀷, 1579~1624)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도 양명학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주자학 신봉자들에 의하여 양명학이 배척을 당하였으 나 그 명맥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선조 때의 남언경 · 이요를 위시하여 장유(張維, 1587~1638) · 최명길(崔鳴 吉, 1586~1647) 등 양명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하려 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장유는 우리 나라에 학문의 다양 함이 없고 주자학만을 고수하여 학문 발전이 왜곡됨을 통절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왕양명의 치양지설을 높이 평가하고, 주자와 왕양명의 격물 치지설을 비교하여 주 자는 전적으로 지(知)를 위주로 하지만 왕양명은 지행 (知行)을 겸한 것이라고 하여, 양명학을 더 높이 생각하였다.
그 후 오로지 양명학을 연구하여 한국 양명학을 창시 한 이는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였다. 그 는 1687년 자신의 스승 박세채에게 올린 서신에서 왕양 명 학설의 정당함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제가 왕 씨의 설에 애착을 갖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 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자연히 끊어버리기 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聖人)의 뜻을 찾아서 실제 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 이제 성학의 올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하지 않고 버려 둔다면 한평생 보내 게 될 두려움이 마음속에 간절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의 혹이 풀리기 전에야 어찌 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하곡 집》 '답박남계서' )라고 하였다. 여기서 정제두는 양명학이 바로 성학(聖學)의 올바른 길이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 지 특이함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양 명학에 관한 논의는 주로 《존언》(存言), 《학변》(學辨) , 그리고 민언휘(閔彥暉)에게 준 《변언정술》(辨言正術)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정제두는 많은 학자와의 토론을 거 쳐 양명학의 본지를 설명하였으며, 양명학을 배척하는 풍토에서 끝내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한국 양명학을 이 론적으로 정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한국 양명학 사에서 대표적인 양명학자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유명종(劉明鍾)은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 도 양명학파로 다루고 있다. 허균은 양명학 좌파인 이탁 오(李卓吾)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분서》(焚書)를 인 용하는가 하면, <동심설>(童心說)의 주장을 반영하고 있 다고 했다. 유명종은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 1563~ 1628) 또한 양명학과 서학(西學)을 수용하여 주자학적 권위에 구속되지 않는 인물로 평가하였다. 이수광은 《지 봉유설》(芝蜂類說)에서 상산학(象山學)과 양명학을 지 지하였으며, 왕양명의 핵심 사상인 치양지와 사구교도 언급하였다. 그리고 양명학 우파인 나홍선(羅洪先)과 좌 파인 초횡(焦竑)을 동시에 소개하였으며, 마테오 리치 (M. Ricci,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 면서, 무실(務實)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양명학을 받아들 여 후기 실학파가 양명학을 도입하는 선례가 되었다고 하였다. 유명종은 정인보(鄭寅普, 1892~?)의 설을 받아 들여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을 실학과 양명학을 절 충한 것으로 보고, 그 밖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原) 과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등도 같은 부류로 다루고 있다. 양명학과 천주교회와의 관계는 유승국(柳承國)에 의하여 소개되었는데, 그는 《천주실의》나 <상재상서>(上 宰相書) 같은 글을 보면, 천주교 교리를 권면함에 있어 서 양명학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고, 정약용 · 권철신(權哲身, 1736~1801) · 이벽(李蘗, 1754~1786) 같은 이들이 왕양명의 논지를 원용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와 양명학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서종태(徐鍾泰)의 논문 <성호학파의 양명학 수용>(1989) 에 잘 소개되어 있다. 성호학파의 양명학 수용은 1766 년(영조 42)경부터 1784년 무렵 그들이 천주교로 귀의할 때까지 성호의 조카이자 제자인 정산(貞山) 이병휴(李秉 休, 1710~1776)를 통해 이기양(李基讓, 1744~1802) . 권철 신 · 한정운(韓鼎運, 1741~1819) · 정약전(丁若銓, 1758~ 1816) 등이 양명학을 공부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들은 양명학 좌파의 경향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러나 성호학파들의 양명학 소개는 거의 단편적인 것이었 고, 정제두처럼 어떤 체계나 학파를 형성한 것은 아니었 다. 정제두가 강화로 이주한 뒤에 이른바 강화학파의 양 명학이 형성되어, 현대 한국 양명학의 대표자인 정인보 에까지 전수되었다.
강화학파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 항재(恒齋) 이광신(李匡臣) · 이광명(李匡明) 일족이 모 두 양명학을 신봉하였으며, 원교의 아들 이긍익(李肯翊, 1736~1806) · 이령익(李令翊)은 조선조 학술사를 정리하 였고, 이광명의 아들 이충익(李忠翊, 1744~1816)과 그의 아들 이면백(李勉伯, 1767~1830)은 《해동돈사》海東停 史)를 저술하였다. 이시원(李是遠, 1790~1866)은 병인양 요(丙寅洋擾, 1866) 때 강화에서 자결하였고, 아들 이상 학(李象學)도 양명학을 계승하였으며, 손자 이건창(李建 昌, 1852~1898)과 이건승(李建昇) 그리고 이건방(李建 芳) 등은 이른바 강화학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강화의 양명학은 사실 정제두의 아들인 정후일(鄭厚一)에 의하 여 계승되었고, 정제두의 외손인 신작( 申綽, 1760~1828) 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이광사의 문 인 정동유(鄭東愈, 1744~1808), 정제두의 현손(玄孫)인 정문승(鄭文升, 1788~1875) , 그의 아들 정기석(鄭箕錫) 등은 모두 가학을 이어받은 학자들이었다. 그 밖에 김택영(金澤榮, 1850~1927)도 이 학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한국 현대 양명학은 바로 박은식(朴殷植, 1859~1925) 과 정인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儒敎求新論)에서, 주자학은 지리하지만 양명학은 간단하고 쉬운 학문이므로 현대 학문을 수용하는 데 적절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치양지설에 관심을 가지고 양 지의 자연 명각(自然明覺), 순일 무위(純一無僞), 유행 불식(流行不息), 범응 불체(泛應不滯), 성우 무간(聖愚 無間), 천인 합일(天人合一)의 6가지 특징을 들었다. 그는 양명학과 서양 근대 학문을 연계하려고 시도한 한국 현대 신유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정인보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하여 주자학파의 허(虛)와 거짓 〔假〕을 비판하고, 지행 합일의 실천력으로 조선 민족의 독립 정신을 삼자고 하였다. 《양명학 연론》은 중국의 양명학은 물론 조선 시대의 양명학을 소개함으로써 후학들 의 길잡이가 되었으며, 현대 한국 양명학의 빼놓을 수 없는 고전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 유학)

※ 참고문헌  《傳習錄》 《霞谷集》 岡田武彥, 《王陽明 と明末の儒 學》, 明德出版社, 1970/ 柳承國, 〈韓國近代思想史에 있어서 陽明學 의 役割〉, 《同大論叢》 10집, 1980/ 尹南漢, 《朝鮮時代의 陽明學 研 갖든》, 집문당, 1982/ 劉明鍾, 《韓國의 陽明學》, 동화출판사, 1983/ 陳來若, 《存無之竟》, 人民出版社, 1991/ 《한국 유학 사상 논문집》 28집, 불함문화사, 1993/ 金吉洛, <조선조 후기 陽明學에 있어서 근대 정 신의 형성과 전개>, 《儒學研究》 1집, 충남대 학교, 1993/ 宋錫準, 韓 國 陽明學과 實學 및 天主敎와의 思想的 聯關性에 關한 研究>, 성균 관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2/ 《한국 유학 사상 논문집》 90집, 불 함문화사, 1997/ 車基眞, 〈星湖學派의 西學 認識과 斥邪論에 대한 연 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1995/ 徐鍾泰, 〈星湖學派 의 陽明學과 西學>, 서강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6. 〔鄭仁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