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良心

〔라〕conscientia · 〔영〕conscience

글자 크기
8
양심은 하느님께서 인간 마음속에 새겨 주신 법이다.

양심은 하느님께서 인간 마음속에 새겨 주신 법이다.


선악을 식별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고 명하며, 옳은 선택은 승인하고 그른 선택은 고발하는 인간 공통 의 윤리 의식. 즉 인간이 선을 행하라는 무조건적 요청에 복종하는 자기 자신의 이해. I . 철학에서의 양심 〔정 의〕 양심을 한 가지 의미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은 도덕적 행위에서 사물이나 동료 인간들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양심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 홀로 있다. 이 와 같은 체험의 내면성 때문에 양심은 인격의 개별성과 동일성을 근거 지우는 것이다. 또한 양심은 넓은 의미로 는 계명과 도덕법과 같은 도덕적 가치들을 인식할 수 있 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뜻한다. 반면에 좁은 의미로는 직접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개인의 고유한 행위에 도덕적 가치들을 적용하는 것이다. 또 양심은 인간적 행위에 있 어 도덕적 정당성에 관한 최후의 실천적 판단이다. 철학자들이 정의 내리는 양심에 대한 이해와 현대 가 톨릭 윤리 신학에서 이해하는 양심은 서로 다르다. 윤리 신학에서의 양심은 단순히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식 · 원 리 · 느낌보다는 더 깊은 인간 실존의 심층이며, 하느님 을 향해 있는 인격의 가장 내적인 핵심이다. 뉴먼(J.H. Newman, 1801~1890)은 양심이 '음성' 혹은 '음성의 반향' 이 라고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양심은 그 자체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때그때 양심의 소리에서 의무를 부과하고 호소하는 분, 즉 하느님과 관련되는 한, 현존의 초월이 양심 안에서 표현된다. 뉴먼은 양심 속에서 이승을 넘어 서 있는 초월적인 현실을 보았다. 이러한 현실은 어떤 원 리가 아니라 위격(Persona)이어어야 한다. 여기서 인간은 양심의 부름의 초월적 성격과 그 배후에 있는 위격적 존 재인 부르는 자를 경험하고, 이런 존재에 응답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양심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완결된 것도 아니다. 양심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 의 대화의 장소이며, 인격적 실존의 중심이다. 용어 : 라틴어로 '콘쉬엔치아' (conscientia)는 '함께 앎 · '공통의 지식' 을 뜻한다. 따라서 양심을 지닌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는 의식을 자신 안에 지닌다 는 의미이다. 전자는 근원적 지식, 보편적인 가치 의식, 도덕적 행위에 대한 인식 원리와 방향의 원리로서의 양 심(synderesis)이다. 이런 의미의 양심에는 명백한 도덕적 행위 원리가 자리잡고 있다. 후자의 의미인 양심(conscientia)은 근원적 지식을 뜻하는 양심에 들어 있는 원리를 일정한 경우 요구되는 행위에 적용하는 것(applicatio notitiae ad actum)을 뜻한다. 동서양 철학자들의 개념 : 중국 철학에서 양심은 양지 양능(良知良能)으로 정의되었다. 예를 들면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는 사람이 "생각하지 않고도 알 수 있 는 것"은 양지이며,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양 능이라고 하였다. 맹자는 사람이 도덕 감정을 본성적으 로 지니고 있으므로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옳은가를 항 상 이미 알고 있으며, 그것을 알고 있는 한 행할 줄도 안다고 주장한 것이다. 서양의 철학자들도 양심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예 를 들어 칸트(I. Kant, 1724~1804)가 생각한 양심은 절대적 요구로서 나타나는 자율적인 심급(審級)이다. 후설(E. Husserl, 1859~1938)의 사상과 관련된 현상학자들 즉 셀러 (M. Scheler, 1874~1928) , 하르트만(N. Hartmann, 1882~ 1950) , 힐데브란트(D. von Hildebrand, 1889~1977) 등은 양 심을 일종의 가치 파악으로 이해하였다. 이들 중에서 하 르트만은 양심과 가치의 느낌을 동일시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두 가지 것을 구별하기도 하였다.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는 양심을 '염려의 부름' (der Ruf der Sorge)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하르트만과 하이데거의 정의에는 '초월적인 인격적 존재를 지향하는 양심의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 〔양심과 규범〕 양심은 규범과 관계되므로 그 자체로부 터 무엇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악한가를 아는 순전히 자 율적인 심급은 아니다. 양심과 규범은 내적으로 서로 긴 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양자의 관계는 상관적이며 보 충적이다. 규범이 양심을 규범화하므로, 규범은 양심 없 이는 무의미하다. 다른 한편 양심은 규범 없이는 내용과 방향이 없게 된다. 양심은 그 내적 본질에 따라 규범을 요청한다. 그래서 양심의 본질은 규범에 열려 있고 규범 을 받아들이며, 이것을 분류하면서 구체적인 삶에 적용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규범, 즉 하느님의 뜻이다. 이는 개별적인 계명을 통하여 명백히 되고 구체 화된다. 양심은 최종적으로 '하느님' 과 하느님의 요구에 의존한다. 이렇게 양심의 권위는 도덕적 평가를 내리도 록 요구하며 하느님과 관계 있는 것이다. 또 도덕적 규범 들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도 중개된 것이다. 즉 양심은 하느님의 뜻이 사회적으로 중개된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 결단의 원천적 근거' 로 서 양심은 우선 개인과 관계한다고 할지라도, 규범의 내용이 사회적 · 역사적 · 문화적으로 각인된다. 그러므로 양심 문제의 사회적 차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양심의 자유〕 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양심의 자유' 이다. 인간은 자신이 도덕적 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도록 법적으 로 강제될 수 없고, 도덕적으로 명령된다고 생각하는 바 를 행하는 데 방해받아서도 안된다. 또 잘못된 양심의 자 유는 타인이나 공동체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허용 될 수 있다. 양심과 자유는 내적으로 함께 속한다. 자유 는 본질적인 전제로서 양심에 속한다. 또 진정한 자유는 늘 선(善)과 연결된다. 여기서 선의 내용은 개인적 · 종교적 · 사회적 관련성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종 교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에 의거한다. 양심의 자유는 인권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거의 모든 국가들의 헌법에서 기본권으로서 명시되어 있다. 한국의 헌법 제19조에 서도 기본권으로 명시되고 보장되어 있다.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양심의 자유를 종교와 자유와 함께 인간에 귀속하는 기본권 중의 하나로서 명시하며, 이 기본권은 최종적으로 인격의 존엄 성에 의거한다고 밝혔다. 또한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Dignitatis Humanae) 제2항과 <교회 헌장>(Lumen Gentium) 제16항에서 양심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최종의 규 범"이라고 정의하였다.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은 양심의 자유에 관한 인간의 주관적 권리를 진리의 객관적 권리보다 우선시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 양지양능)
※ 참고문헌  H. Kuhn · F. Furger · W. Loschelder, Stactslexikon, Bd. I , Hrsg. von Die Göorres-Cesellschatt, Herder Freiburg i. Br., 1986, pp. 1050~1059/ H. Kuhn, Begegmmg mit dem Sein, Tübingen, 1954/ A. Auer, Person und Veramtwortung, Hrsg. von A. Schavan . B. Welte, Diisseldorf, 1980, pp. 26~521 一, Das Gewissen als Mittte der personalen Existenz, Das Gewissen alsfreiheitiches Ordmumgsprintip, Hrsg. von Karl Forster, Wiirzburg, 1962, PP. 39~591 J. Griindel, Nommen im Wandel, Miinchen, 1980/ 一, Das Gewissen als norma normans, Grenzfragen des Glaubens, Hrsg. von Ch. Hörgl · F. Rauh, Köln, 1967, pp. 389-422/ A. Schuster, Philosophisches Worterbuch, Hrsg. von W. Brugger, Freiburg i. Br., 1967, pp. 347~348/ M. Nédoncelle, Überlegungen Zur Autorität des Gewissens, Probleme der Autorität, Hrsg. von John M. Todd, pp. 222~232/ W. Kerber, Gewissensentscheidung in Politik und Gesellschaft, Das Gewissen, Hrsg. von J. Fuchs, Düsseldorf, 1979, pp. 66~771 J. Blühdon, von Hrsg., Das Gewissen in der Diskusion, Wissenschafliche Buchgesellschaft Darmstadt, 1976/ J. Messner, Das Naturrecht, Tyrolia Innshruck-Wien-Münchchen, 1966. 〔朴鍾大〕

II . 윤리 신학에서의 양심 〔양심에 대한 이해의 변천〕 인간은 양심을 통하여 자 신의 윤리적 당위를 의식하며 이에 따라 행동하였을 때 는 기쁨과 만족을 체험한다. 반면 이를 거슬러 행동하였 을 때는 언제나 불안과 가책을 느낀다. 인류의 모든 문화 는 이러한 공통 체험과 공감에서 양심의 존재를 긍정하 고 있으며, 그것을 인간 내부에서 들려 오는 "하느님의 소리"로 이해하고 있다. 고대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내 재적이고 천부적인 윤리적 능력으로서의 양심에 대해 가 르쳤으며, 양심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 쳤다. 힌두교에서는 양심을 "우리 안에 거처하는 불가시 적인 신" 으로 보고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양심이 세 상을 통치하는 신적 원리인 영원법의 참여로, 나아가 세 네카(L.A. Seneca, 기원전 4~서기 65)는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시는 신으로, 우리 안에 거처하며 선 과 악을 지켜 주고 살펴주는 거룩한 영으로 이해했다. 근대의 경험론자들은 양심에 대한 이러한 종교적 개념 을 거슬러 양심을 신적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문명과 사 회의 요구 등 환경적 요인에 의하여 형성된 인위적 산물 로 이해하였다. 스펜서(H.Spenser)는 사회학적 조건과 필 요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하였고, 니체(F. Nietzsche, 1844~1900)는 문명의 억압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이해 하였다. 또한 프로이트(S. Freud, 1856~1939)와 그 심리학 파는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양심을 이해하면서 개인으로 하여금 규정된 관습과 규범에 따라 살고 행동하도록 가 르치는 부모와 사회로부터 배운 요구와 습관의 총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렇게 그들은 양심의 신적 기원을 부정하면서 양심을 환경의 인위적 산물로 이해하였다. 20세기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경험론자들의 사상을 배 격하면서 양심을 "인간의 진정한 자기 표현" 으로 이해하 고 있다. 야스퍼스(K. Jaspers, 1883~1969)는 양심이 인간 에게 이야기해 주는 '인간 자아' 의 목소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신 분석학자인 융(C.G. Jung, 1875~1961)은 양심 을 인간 인격의 가장 심오한 요소인 '자아' 의 핵심으로 서 윤리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인격의 마지막 항 소 법정으로 이해하였다. [성서에서의 양심〕 구약성서와 복음서에서는 '양심' 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쉬네이데시스" (συνείδησις)를 찾 아볼 수 없다. 그것은 성서가 그리스 세계와 접촉을 하기 전까지는 양심을 의미하는 고유한 단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가 양심이 의미하는 내용을 모르 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성서는 "마음 · 내심 · 정 신 · 영혼 · 심장 · 신장" 등의 용어를 통해서 양심의 현상 과 체험을 표현하였다. 인간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악(惡)을 피하라고 명하며, 옳은 행위를 찬 양하고 그른 행위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며, 이 양 심의 소리 배후에 인격신 하느님이 계신다고 가르친다. 구약성서는 항상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요청과의 관련성 안에서 양심의 현상을 이해하였다. 양심 안에서 말씀하 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인간은 양심 안에서 하느 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하느님의 법정 앞에 소환되 어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성서는 인간이 양심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양심의 둔화와 마비 현 상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예수는 이완된 양심과 마비된 양심의 위험성에 대해서 "당신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 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마태 6, 23 ; 루가 11, 33)라고 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스토아 학파가 사용하던 '쉬네이데시스' 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양심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였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양심은 무엇보다도 인간 마음에 쓰여진 율법이다. 마음에 새겨진 이 법은 이방인 들의 스승이요 안내자가 되어, 창조를 통해서 알려진 하 느님의 법에다 묶어 놓으며, 이성에 위배되는 행위를 할 때에는 그들을 고발한다는 것이다(로마 2, 14). 그러나 그 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신앙 에 입각해서 행동한다는 것과 같다(로마 14, 23). 신앙은 양심을 비추고, 또 선한 양심은 신앙을 보호한다(1디모 3, 9). 완전한 양심은 신앙의 비추임을 받고 사랑에서 활 기를 얻는다(2고린 1. 12 ; 1디모 3, 9). 바오로 사도가 쓰 는 양심이라는 어휘는 의미가 다양하다. 인간의 마음에 쓰여 있는 자연법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신앙에 입 각한 윤리 판단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과 의 관련성 안에서 종교적인 의미로 양심을 이해하고 있 다. 교회 전통도 사실상 바오로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스콜라 신학에서의 양심〕 양심에 대한 깊은 신학적인 반성은 아우구스티노(354-430)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는 양심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당신의 법 (영원법)에 참여하게 하는 하느님의 광채로 이해하였다. 하느님의 빛이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 안에 스며들어 인 간 본성의 가장 깊은 욕구인 당신과 진리를 향하도록 지 칠 줄 모르는 힘으로 인간을 이끌어 준다. 인간 안에 내 재하는 이러한 하느님의 빛으로 인간은 객관적인 진리와 선을 향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간다. 더 나아가 그는 양심을, 하느님과 인간이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장소이며, 인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 신적 중심이요, 하느님의 목소리로 이해하였다. 반면에 예로 니모(343~420)는 '양지 양능' (良知良能, synderesis) 안에 서 원죄에 의한 인간 본성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선을 식별하고 의욕하는 영혼의 능력이 모든 인간 안에 영속하고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통 해서 인간은 객관적인 진리와 선을 향하며, 궁극적으로 는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양심에 대한 더욱 체계적인 신학적 반성은 스콜라 신 학에서 이루어졌다. 스콜라 신학은 '양지양능' 을 실천적 인 윤리적 판단으로서의 양심인 '양심 작용' (conscientia)과 구별하였다. 그래서 양지양능은 선악을 식별하여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하라고 명하는 모든 인간의 "본성적 능력으로서의 양심"을 지칭한다. 반면에 '양심 작용' 은 양지양능과 윤리 지식을 토대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윤리적 결단을 내리는 "실천적 판단으로서의 양심"을 지 칭한다. 이러한 구별은 양심을 기능과 작용 면에서 나누 어 고찰한 것으로서, 양지양능은 양심의 기능을 지칭하 고, '양심 작용' 은 양심의 작용을 지칭한다. 일반적인 의 미에서의 양심은 보통 후자를 지칭한다. 양지양능 : 이것은 인간의 타고난 윤리적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윤리적 원리들을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선악을 식별하여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하라고 명 하며, 옳은 선택은 승인하고 그른 선택은 고발하는 인간 본성에 각인된 윤리적 인식 능력과 판단 능력을 말한다. 스콜라 신학은 양지양능이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지만 고 정 불변의 능력이 아니라 경험과 교육을 통해서 점진적 으로 성장 · 발달하는 역동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양지양능이 실제로 작용하는 데는 후천적인 교육과 체험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후천적인 교육과 체험을 통해서 윤리 지 식과 선인식(先認識)에 구속력이 부여되어 인간은 나름 대로 점차 개인적인 가치관, 자기 나름의 윤리 자세 등을 확립해 나간다. 다시 말해서 "양심의 습성" (habitus conscientiae)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 양심의 습성은 양심이 실제적인 판단을 올바로 내리는 데 결정적인 선결 요인 이 된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양지양능을 영혼의 능력으로 보았다. 보나벤투라(1090-1153)와 중세의 신비가들은 양지양 능의 본질적인 특성을 "영혼의 섬광" (scintilla animae)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양지양능을 "영혼의 정점"이요, 인 간이 하느님과 만나는 영혼의 가장 깊은 핵심으로서 죄 악에 물들 가능성이 가장 적은 곳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영혼의 정점" 으로서 이 양지양능이 이성에 속하는 기능이냐 아니면 의지에 속하는 기능이냐에 대해 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우선 알베르토(1200~1280) · 토마스 아퀴나스(1225?~ 1274) · 스코투스(1266?-1308) 등은 주지주의(主知主義) 적인 관점에서 양지양능이 실천 이성에 속하는 능력으로 이해하였다. 양지양능은 더 이상 연역되거나 추론될 필 요가 없이 그 자체로 자명한 일차적인 윤리적 원리들을 인식하고 이를 지키려는 실천 이성의 자연적 성향이라는 것이다. 양지양능이 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원리는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하라는 것이다. 양지양능이 명하는 원리 (대전제 :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하라)로부터, 그리고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양심이 선언하는 실천적 판단(소전제 : 굶주 린 거지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선이다)으로부터, 실천적 삼단 논법에 의해서 양심의 판단(굶주린 거지에게 먹을 것 을 주라)이 연역된다. '양심의 판단' (conscientia)은 이러한 실천적 삼단 논법의 결론적인 명제이다. 따라서 삼단 논 법 안에서 얻어진 최종적 실천적 판단으로서의 양심(conscientia)은 양지양능의 대전제에 연결되어 있다. 이로부 터 양심 판단의 명령적인 특성이 유래한다. 그런데 토마 스에 의하면, 선에 대해 천성적 애착을 갖고 그 선의 실 현을 명하는 의지의 자연적인 성향은 항상 실천 이성에 종속되어 있다. 왜냐하면 의지는 이성이 인식하지 못한 선을 결코 의욕할 수 없기 때문이다(Nihil volitum nisi praecognitum). 의지가 선을 의욕하고 그 선의 실현을 결단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성의 바른 선인식(先認識)이 선행되 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토마스는 양지양 능을 의지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실천 이성의 특성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데르(Alexander Halensis, 1170?~1245) · 보 나벤투라 · 헨리코(Henricus Gandavensis, +1293) 등은 주의 주의(主意主義)적인 관점에서 양지양능을 의지의 능력 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양지양능의 결정적 동력을 인 식된 선을 열망하고 사랑하기 위한 의지로 보았다. 특히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선을 의욕하고 그것을 실현하도록 이끌어 주고 재촉하는 힘은 의지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선에 대한 근본적 결단은 선에 대한 지식보다는 사랑에 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이 인식한 선은 의지 의 선에 대한 애착에 의해서 그 실현을 명하는 양심 판단 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양지양능의 이 성적 특성을 배척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논하고 있는 의지는 맹목적인 의지가 아니라, 이성이 인 식한 선의 실현을 열망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 지 양지양능 안에서 이성에 대한 의지의 우위성을 강조 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B. Haring, F. Bockle, J. Fuchs, F.X. Linsenman)은 양지양능을 이성과 의지와는 구별되는 더 깊 은 실재이며, 이성과 의지가 영혼 안에서 합일된 전 인격 의 기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이성은 인식 된 선을 이행하라는 무류한 판단을 내리지만, 그 선을 실 제로 성취하는 힘은 의지가 선에 대해 갖는 천성적 애착 에서 비롯된다. 다른 한편, 의지의 선에 대한 타고난 애 착은 무엇이 참다운 가치인가를 파악하는 지식과 연결되 지 못한다면 맹목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따라서 양지양 능의 결정적 동력은 인간의 정신적 본성인 이성과 의지 가 영혼 안에서 합일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 락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양지양능을 지성과 의지와 감정 등 전 인격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보고 있다. 또한 교부들의 전통을 되살려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은 이성과 의지가 영혼 안에 합일된 양지양능 안에서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한다. 하느님 안에서는 알고 사랑하시는 분(성부), 당신의 앎(성자), 당신의 사랑 (성령)이 단일한 신적 본질 속에 하나가 되어 있다. 이러 한 삼위의 모상인 영혼은 자신 안에 이성과 의지의 합일 을 추구하며, 이때 인간은 그 내면 깊숙이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 충만한 행복과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 자신 안에 내재하시고 그 모습대로 창조된 삼위의 모상을 온 전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과 의지는 분열되 어 서로 상치되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이때 양자를 통 일시켜야 할 영혼은 그 심저에서 큰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게 된다. 양심에서 오는 반성 이전의 초보적인 가책 은 여기에 그 근원이 있다. 하느님을 닮은 조화를 파괴하기 때문에 인간 속에 있는 삼위의 모상이 경악하고 동요 하는 것이다.

양심 작용 : 일반적인 의미에서 양심을 의미하는 양심 작용은, 양심이 양지양능과 윤리 지식을 토대로 구체적 인 상황에서 어떤 윤리적 결단을 내리는 실천적 판단을 의미한다. 이러한 실천적 판단으로서의 양심은 사변적 성격의 실천적 판단과는 성격이 다르다. 전자는 구체적 인 상황에서 개인의 구체적인 행동에 관한 판단이고, 후 자는 인간 행동의 윤리성에 대한 일반적인 윤리적 원칙 들을 지금 당장의 개인의 구체적인 행동에 관계없이 추 상적으로 규정하는 판단이다. 실천적 양심 판단은 두 가 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요소는 구체적 행위 행동 의 윤리성, 즉 시비선악(是非善惡)에 대한 판단이다. 그 리고 둘째 요소는 그 행위, 곧 윤리성이 판단된 행위를 명하거나 금하는 정언 명령으로서의 판단이다. 이러한 실천적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세 가지 단계를 구분할 수 있다. ① 선행적 양심 판단 :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현 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 유형들을 심사숙고하는 단계의 양심을 말한다. 어떤 행동을 선택할 경우, 또 달 리 선택할 경우 어떠한 결과가 따를 것인가를 숙고하고, 그 행동들의 윤리성을 비교하여 평가해 봄으로써 가장 바람직한 행위가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단계의 양심이다. ② 현행적 양심 판단 : 구체적인 상황에서 가장 바람 직한 행위, 곧 자신의 윤리적 당위를 식별하여 최종적인 결단을 내리는 양심 판단이다.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인 규범과 윤리성에 부합되거나 배치됨에 따라서 올바른 판 단이 될 수도 있고, 그릇된 판단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판단하고 결단한 그 행위에 대해서 책임 을 져야 한다. ③ 후속적인 양심 판단 : 현행적 양심 판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단한 행위에 대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하거 나 그 부당성을 비난하는 양심을 말한다. 정당성을 인정 할 수 있을 때 기쁨과 평화를 느끼며,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을 때는 내려진 결정에 항의하고 비난한다. 자아 실 현의 기회가 상실되었음을 깨닫고 또 자신의 가치관과 괴리된 결정이 내려진 데 대해 불쾌한 기분이 들고 죄의 식이 표출된다. 이 단계에서 양심의 평화 또는 가책이 일 어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의 양심〕 제2차 바티 칸 공의회는 양심의 존엄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 하였다. "인간은 양심 속 깊은 데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 종해야 할 법이다. 이 법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사람을 타이르고, 필요하면 '이것 은 행하고 저것은 피하라' 고 마음 귀에 들려준다. 이렇 게 하느님께서 새겨 주신 법을 인간은 그 마음에 간직하 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 이며, 이 법을 따라서 인간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양심 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 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이며,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 소리가 들려 온다.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써 완성되는 그 법을 놀라운 방법으로 밝혀 준다.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다른 사람과 결합되 어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따라서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윤리 문제들을 해결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른 양심이 우세하면 우세할수록 개인 이나 집단이 맹목적 방종에서 더욱 멀어지고, 객관적 윤 리 기준에 더욱 부합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불가항력적 무지 때문에 양심이 오류를 범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 렇다고 해서 양심이 존엄성을 잃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 람이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거나 죄의 습관으로 양심이 점차로 어두워진 경우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사목 16항). 이 내용은 인격주의적 관점에서 하느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을 논하는 맥락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에 유의하면서 공의회가 선언한 양심에 관한 교의를 분 석하면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공의회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양심 을 무엇보다도 인간 마음 안에 새겨진 법(로마 2, 14-16) 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 마음속에 새겨진 이 법은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라는 법이다. 더 나아가 이것 은 행하고 저것은 피하라고 알려 주는 법이며, 인간이 자 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 마음에 새겨 준 법 이다. 인간은 이 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공의회는 인간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는 법(객관적인 법) 을 발견하고, 이 법의 소리에 응답하도록 재촉하는 정언 명령으로서 양심을 이해하고 있다. 공의회는 법이라는 중심 개념을 통해 양심의 본질을 해명하고 있다. 그것은 양심이 단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규범으로 오해할 수 있는 우려를 종식시키고, 양심의 객관적 특성과 비자의 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공의회는 이 법이 하느님께서 새겨 주신 법이라는 것을 천명함으로써 양심 의 초월성, 곧 양심의 신적 기원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양심이 단순히 사회나 환경의 인위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는 특정 사회학파와 심리학파의 주장을 배격하고 있다. 둘째, 공의회는 다른 관점에서 양지양능을 인간의 가 장 깊은 내면으로, 그 깊은 내면 안에 거처하시며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하느님 의 목소리를 듣는 지성소로 이해한다. 여기서 공의회가 논하고 있는 내면은 인간 "인격의 핵심" 으로서 자신 안 에 고립되고 폐쇄된 내면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과의 일 치로 인간을 부르시며 응답하시기를 요구하시는 하느님 의 목소리를 듣고 하느님과 깊은 인격적 친교 안에서, 따 라서 이웃과의 친교 안에서 자신의 인격적 소명을 발견 하고 자신의 윤리적 의무를 식별하는 내면이다. 공의회 는 이처럼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깊은 인격적 친교를 나누는 초월적 깊이의 내면으로부터 들려 오는 소리를 양심, 곧 하느님의 목소리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하느 님과 그리고 이웃과의 친교가 단절된, 그래서 자신 안에 고립되고 폐쇄된 양심은 이미 그 존엄성을 상실한 양심 으로서 그러한 양심의 소리를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깊은 내면 안에서 자신을 당신과 의 친교로 부르시고, 모든 법의 완성인 사랑의 법을 밝혀 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하느님의 부르심 에 응답하는 태도에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 어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다. 셋째, 공의회는 양심이 윤리적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원리임을 천명한다. 공의회는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곧 인간 본성에 각인된 법에 충실함으로써, 그리고 하느님 과 이웃과의 친교 안에서 진리와 선을 충실히 추구함으 로써 인간은 윤리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 고 그 진리에 따라서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에서 야기되 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러 한 맥락에서 윤리적 진리란 추상적 규범의 진리가 아니 라, 양심의 충실성을 통해서 식별해 내는 양심의 진리라 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공의회는 양심의 객관성을 천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른 양심이 우세할수록 개인이 나 집단이 맹목적 방종에서 더 멀어지고, 객관적 윤리 기 준에 더욱 부합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바른 양심은 하느 님과 그리고 이웃과의 상호 인격적 친교 안에서 진리와 선을 성실히 추구하는 양심이다. 이렇게 바른 양심은 결 코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법을 명할 수 없다. 상호 인격적 친교 안에 인격의 객관성 · 친교의 객관성 · 탐구의 객관 성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관적 독단으로 부터 벗어나 객관적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양심의 충실성은 객관성의 원리가 되며, 주관주의나 상대주의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넷째, 공의회는 양심 판단의 오류와 그 책임성을 논하 고 있다. 불가항력적인 무지 때문에 양심이 오류를 범하 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그 존엄성을 잃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거나 죄의 습관으로 양심이 점차로 어두 워지는 경우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공의회에 의하면 양심의 존엄성이란 단순히 객관적 규범과의 부합성에서 유래하는 존엄성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이웃과 의 깊은 인격적 친교 안에서 진리와 선을 성실히 추구하 는 탐구의 성실성에서 유래하는 존엄성이다. 따라서 객 관적으로 볼 때 그릇된 양심 판단이라 할지라도, 주관적 으로 그 양심 판단의 오류를 인식할 수 없다면, 다시 말 해서 자신의 양심 판단이 진리와 선에 대한 성실한 추구 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참된 확신의 표현이라 면 그 양심 판단은 선한 양심 판단으로서 양심의 존엄성 을 지닌다. 그러나 진리와 선을 성실히 추구하지 않음으 로써, 또는 죄의 습관에 의해서 오류를 범하는 양심, 곧 가항력적인 무지에 의해서 오류를 범하는 양심은 존엄성을 잃는다. 이렇게 공의회의 양심에 관한 모든 논의는 인격과 친 교에 토대를 두고 있다. 양심은 인격이 하느님과 이웃과 의 깊은 인격적 친교 안에서 윤리적 진리를 발견하는 지 성소로 이해된다. 공의회에 의하면 양심은 단순히 객관 적인 윤리법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법의 시녀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 안에서 윤리적 진리를 식별하는 인격적 자아의 핵심이다. 〔양심 판단의 원리〕 제1 원리 : 자신의 양심 판단이 객 관적 진리(윤리 규범)와 부합되는 판단인 정당하고 확실 한 양심 판단은 절대적 행동 규범이 된다. 자신의 양심 판단이 객관적인 규범과 일치하고, 아무런 오류나 하자 가 없음을 확신할 수 있을 때, 그 양심 판단은 마땅히 추 종되어야 하며, 아무도 이를 저지할 권리가 없다. 양심 판단의 확실성은 절대적 확실성과 통념적 확실성으로 분 류할 수 있다. 절대적 확실성이란 오류의 가능성을 전적 으로 배제하는 확실성이며, 통념적 확실성은 상당한 개 연성을 가지고 있는 확실성이다. 통념적 확실성은 윤리 적 확실성, 또는 실천적 확실성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즉,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최소한의 실 천적 확실성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하고 확실한 양심 판단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통념적 확실성"이 요구된다. 제2 원리 : 의심을 극복한 확실한 양심은 비록 불가항 력적인 오류의 상태에 있을 지라도 반드시 추종되어야 한다. 불가항력적인 오류를 가진 양심은 객관적 당위와 실제로 부합되지 못한 양심이다. 그 양심이 구속력을 갖 는다면 그것은 양심의 내용, 즉 객관적인 법에서 오는 구 속력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확실성 때문에 오 는 우유적(偶有的)인 구속력이다. 당위는 선을 행하라는 자연법의 제1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은 자신이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선이라고 확신하는 것 을 행동에 옮길 의무가 있다. 소신에 찬 양심의 판단은 우리가 갈 수 있는 최후의 상소 법원이다. 우리가 심판을 받는 것도 이 양심에 준해서이며, 상벌도 이 양심에 의거 한다. 신념에 기초를 두지 않는 행위는 모두 다 죄가 되 기 때문이다(로마 14, 23). 그렇기에 해악을 막기 위해서, 오류에 빠져 행동하는 사람들을 깨우쳐 주거나 그 행동 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의무도 있다. 제3 원리 : 실천적 의심이나 또는 가항력적 오류를 가 진 양심에 따라 행동해서는 절대 안된다. 자신의 양심 판 단이 옳은지 그른지 의심스러울 때, 그 의심스러운 양심 판단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된다. 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 른지 의심을 하면서도 그 행위를 하는 것은, 그 행위가 비록 그른 행위라 할지라도 감행하겠다는 것이므로 중죄 가 된다. 가항력적인 오류를 가진 양심은 진리와 선을 성 실히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오류적 양심 판단이 다. 행위자는 이러한 자신의 무책임한 양심 판단과 그 판 단의 오류의 가능성을 스스로 의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러한 양심 판단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된다. 의심하는 양 심이나 가항력적인 오류를 가진 양심은 의심이나 오류를 극복하고 확실한 양심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잠정 적으로 행동을 유보해야 한다. 〔양심 판단의 의구 해소〕윤리적 의무의 중대성과 책 임성에 비추어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면, 자기 양 심 판단에 있어서 최소한 통념적 확실성에 도달해 있어 야 한다. 이러한 통념적 확실성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직 접적인 방법은 사변적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윤리 지식을 총동원하여 심사숙고하는 것이다. 이 러한 성찰을 통해서도 사변적 의심이 풀리지 않으면 관 련 서적이나 법률들을 연구해 보고, 전문가들이나 현자 들의 조언을 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의심이 극복되지 않을 경우, 그러나 당장 어떠 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경우에는 "현려(賢慮)의 일반 법칙" , 소위 "반성의 원리"들에 따라 판단함으로써 통념적 확실성에 이를 수 있다. 반성의 원리에 있어서 모든 원리를 포괄하는 가장 기 본적인 원리는 "의심스러운 경우, 추정되는 쪽을 선택하 라" 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심스러울 때는 "더 옳은 쪽" · "더 안전한 쪽"으로 추정되는 것을 선택하라는 것 이다. 이러한 경우, 추정되는 쪽은 그 반대가 증명되지 않는 한, 따라야 할 행동 규범이 된다. 이 기본 원리를 보완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법칙들이 있다. 첫째, 소유 문제로 시비가 있을 경우에 소유자의 조건 이 우선적이다. 둘째, 범죄의 진상이 불분명할 경우에 피 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라. 셋째, 권리 문제를 두고 갈등 이 생길 경우에는 공동선을 개인의 선익보다 우선 시키 라. 넷째, 장상과 의견이 충돌될 경우에는 장상에게 유리 하게 추정하라. 다섯째, 법의 타당성이 의심스러울 경우 에는 의심스러운 법은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여섯째, 사 실이 의심스러울 경우에 사실은 추정되어서는 안되고 증 명되어야 한다. 일곱째, 사실의 타당성이 의심스러울 경 우에 일반적인 통례를 따라 추정하라. 여덟째, 행위의 유 효성이 의심스러울 경우에 이미 수행된 행위는 그 반대 의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 한 유효한 것으로 추정하라. 아 홉째, 어떤 행위의 이행 여부가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각 자 평상시의 습관에 따라 추정하라. 이러한 원리들을 응용한다면 양심 판단의 의심을 극복 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양심 판단의 의 심을 극복할 수 없을 때는 '개연성의 원리' 를 응용할 수 있다. 개연성의 원리는 법과 개인의 양심이 맞서 어느 쪽 을 선택해야 할지 의심스러운 경우, 그 의심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응용되는 것으로 다섯 가지 이론이 있다. 우선 법을 우대해야 한다는 통념적 확실성도 없고, 자유 편에 우선권을 줄 건전한 이유가 있을 때, 자유로이 행동 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개연론' 이 있다. 두 번째로, 자유 행동을 선택하는 이유가 법을 편드는 이유만큼의 무게만 있어도 자유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동등 개연론' 이 있다. 세 번째로, 법을 편드는 이유보다 자유를 편드는 이유가 더 개연성이 높아야만 자유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 는 '가상 개연론' 이 있다. 그리고 미약한 개연성만 있어 도 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완주의' 와 완전한 확실성이 있어야 자유 행동이 허용된다는 '엄격주의' 가 있다. 이러한 이론 중 개연론 · 동등 개연론 · 가상 개연 론은 모두 건전하고 타당한 주장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이완주의는 알렉산데르 7세 교황(1689~1691)에 의해, 엄 격주의는 알렉산데르 8세 교황(1655~1667)에 의해서 교 회의 배척을 받았다. 〔법과 양심〕 법과 양심은 동일한 윤리 규범이지만, 서 로 다른 차원의 윤리 규범이다. 법이 보편 안에서 사변적 으로 실천적인 윤리 규범이라면, 양심은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실천적으로 실천적인 행동 규범이다. 보편적 행 동 규범으로서의 법은 일반적인 상황을 전제로 추상적인 원리나 이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회적이고, 특수 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이러한 법의 한계성 때문에 양심은 법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특수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행동 규범을 스스로 식 별해야 한다. 물론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어 축적된 지 혜의 절정이며, 이기적인 성향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강제적 규범이고, 윤리 생활의 하한선을 제시해 주 고 있는 법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양심이 최종적 · 실천적 판단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빛을 비추어 주며 객관적인 기준을 설정해 줄 수 있다. 따라서 양심은 법을 백안시해 서는 결코 안된다. 만일 양심이 법을 배척하면서 자신을 절대화한다면 스스로 엄청난 정신적 빈곤을 초래할 것이 며, 이기심의 횡포에 쉽게 희생됨으로써 바른 판단을 위 한 방향 감각을 상실해 버릴 것이다. 법 역시 자신을 절대화함으로써 양심을 법의 시녀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한다. 법은 그 법이 적용되어야 할 모 든 상황을 고려해서 제정된 것도 아니며, 인간의 인식 능 력과 표현의 한계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제시해 주지 못한다. 이렇게 법 역시 그 본성상 한계와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이 예상하지 못한 특수한 상황이 나 법을 자구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법의 근본 정신에 부 합되지 않을 때에는 양심의 창조적인 법 해석, 곧 에피케 이아(epikeia)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따라서 만일 법이 양심을 부정하면서 자신만을 절대화한다면 양심의 자유 를 유린하고, 더 나아가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역동적으로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 의지 마저 구속해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법과 양심의 바람직한 관계는 단순히 수동적인 적용의 관계가 아니라, 지혜의 중재를 통한 창 조적인 해석의 관계에 있다. 지혜는 법의 근본 정신과 구 체적 상황에 처해 있는 인격의 요청을 주도 면밀하게 고 려하면서 양심과 법 사이에서 해석학적인 중재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지혜의 현실적인 특성을 통해서 보다 심원한 형태로 법의 근본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바람직 한 행동 규범이 신축성 있게 창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법 과 양심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혜의 중재를 통한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따라서 법과 양심 사이 에 상호 배타적 형태로서의 율법주의나 상황 윤리는 모 두 다 단호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법이 희생되고 양심 만이 강조되면 무법주의를 낳게 될 것이며, 반면에 양심 이 희생되고 법만이 강조되면 율법주의를 낳게 될 것이 다. 법과 양심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 안에서 지혜의 중재 를 통하여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정의와 선의 실현을 위한 윤리 규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의 형성〕양심은 인간 행위의 최종적 윤리 규범 으로서 모든 행위에 있어서 양심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 야 하기 때문에 바르고 선한 양심을 형성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른 양심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양심 교육이 필요하다. 권위 있는 가르침을 거부하도록 죄의 유혹을 받고 있는 인간에게 양심 교육은 절대적으로 필 요한 것이다. 양심 교육과 양심 형성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하느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하느님 말씀 은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이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의 권위 있는 윤리적 가르침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계시된 구원의 진리에 근거하고 있는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을 성실히 배우고 따라야 한다(교회 25항 ; 사목 50항 ; 종교 자유 14항). 셋째, 윤리적 진리를 탐구함으로써 바른 윤 리 지식을 체득해야 한다. 바른 윤리 지식 없이 양심의 올바른 판단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올바른 양심 판단 을 위해서는 해박하고 심오한 윤리 지식이 요청된다. 넷째, 하느님과 이웃과의 깊은 친교 안에서 진리와 선을 성 실히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상호 인격적 친교가 결여된 양심 판단은 주관적 · 상대적 · 자의적 양심 판단이 될 수밖에 없다. 다섯째, 사회의 윤리 규범들을 존중해야 한다. 사회의 윤리 규범들은 일시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기에 걸친 체험을 통해서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축적된 유산이다. 이를 부정하거나 간과한다면 윤리적 방향 감각을 잃고 엄청난 정신적 빈곤을 초래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섯째, 양심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양심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한다면 양심의 기능이 약화될 뿐만 아니라 습관의 힘이 점차 커지면서 둔감한 양심이 되거나 윤리적 불감증에 빠지게 된다. 일곱째, 끊임없이 양심을 성찰해야 한다. 자신의 양심 판단이 과연 바르고 선한지 인식 부족이나 오류에 빠져 있지 않는지를 항상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 양지양능, 윤 리 신학에서의 ; → 개연론 ; 양심법 ; 양심 선언 ; 양심 성찰 ; 엄격주의 ; 에피케이아 ; 이완주의)

※ 참고문헌  X. Leon-Defour, 《성서 신학 사전》, 광주 가톨릭대학교, 1984, pp. 384~386/ C. Coppens, Catholic Encyclopedial Bernhard Haring, La legge di Cristo, Morcelliana, 1972/ -, Liberi efedeli in Cristo, Edizioni Paoline, 1980/ K.H. Peschke, Christian Ethics- Moral Theology in the Light ofVatican Ⅱ, C. Goodliffe Neale, Alcester · Dublin, 1986(김 창훈 역, 《그리스도교 윤리학》 1, 분도출판사, 1992)/ F. 뵈클 레, 《기초 윤리 신학》, 분도출판사, 1975/ 최창무, 《윤리 신학》 1, 가 톨릭대학교 출판부, 1989. 〔劉永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