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선언

良心宣言

〔영〕conscientious procla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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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사회의 성숙으로 양심 선언의 주체가 다양해지고, 선언의 이유도 정치 상황에서 조직 내부의 비리 폭로로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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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사회의 성숙으로 양심 선언의 주체가 다양해지고, 선언의 이유도 정치 상황에서 조직 내부의 비리 폭로로 변화되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거슬러 자행되는 집단 또 는 조직의 불의에 저항하여 공동선을 위해 개인 또는 소집단이 조직 내부의 불의와 부정을 외부에 고발 또는 폭로하는 행위. 선언 대상을 공격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명 리(名利)를 추구하지 않고, 특정 집단을 이롭게 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정략적 차원의 흑색 선전과는 다르다. 〔배경〕 양심 선언은 외국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한국적인 현상이다. 양심과 관련 지어 외국에서 발견할 수 있 는 단어는 "양심적인 병역 거부"(consientious objector) 정도이다. 이것은 초대 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에도 그리스도교 전통에 영향을 받은 서유럽 사회에서는 일반적이다. 그러면 왜 한국에 서는 양심적 병역 거부가 드물고, 양심 선언의 빈도가 높은가?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적 이유에 따른 병역 거부나 이 들의 대체 근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종교상의 이유로 무기 소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병역을 거부할 뿐, 나머지 종교들은 종교인의 무기 소지나 군대 복무를 의무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사 회의 분단 현실과 동족 상잔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특 히 동족 상잔의 과정에서 남한의 종교인들이 받은 피해 와 북한 지역에서 종교의 자유가 억압되어 받은 고난이 종교인들의 이러한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남북의 군사 적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까닭에, 병역과 관련한 논쟁은 서양 사회와 달리 금기시될 수밖에 없다. 양심 선언의 등장 배경은 한국 사회의 굴절된 역사와 관련이 있다. 조선 말기 봉건 왕조의 부적절한 위기 관리 와 이로 인하여 초래된 외세의 침탈, 36년에 걸친 일제 식민 통치, 외세에 의한 광복과 분단, 냉전 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치러진 전쟁, 이후의 냉전 질서 안에서 형성된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주의의 지체 등 거의 1백 년에 이 르는 사회 모순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5 · 16 군사 쿠데타로 등장한 군사 정권이고, 더 직접적 인 것은 이들의 장기 집권 음모에서 찾을 수 있다. 박정 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소위 유신 헌법을 선포하 고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다. 그러자 종교계 · 대학 · 언론 을 중심으로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저항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유신 체제 등장 이전부터 소위 개발 독재로 말 미암아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 고, 일반 국민들의 불만도 고조된 상황에서 장기 집권 음 모를 노골화하였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국민적 저항이 고조되면서 수많은 학생과 종교인, 시민들에 대한 납치 · 투옥 · 고문 · 사형 등이 자행되었다. 그럼에도 소수만이 이에 저항할 뿐 대 다수 국민들은 침묵을 지켰다. 지성을 자처하는 대학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언론도 권력을 대변할 뿐 사회적 약자들과 저항하는 소수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대학생이던 젊은이들이 비분 강개하며 대학 사회와 국민들의 윤리적 자각과 실천을 촉구하게 된 것이다. 〔기원〕 양심 선언의 정확한 기원을 찾기는 어려우나, 1970년대 중반이 가장 유력하다. 이 시기에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하는 종 교계의 민주화 · 인권 운동과 학생 운동이 본격적으로 불 붙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종교계와 학생 운동 단체들이 단체의 선언문 형태 특히 시국 선언문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전 시기에는 폭압적 인 통치에 짓눌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의사를 표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고, 설사 가능하였다 하더라 도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 시기에 앞서 등장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물론 이전 시기에도 현 재의 양심 선언과 같은 형태로 의사를 표현하는 일이 없 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행동의 주체가 '양심 선언' 이라고 명명하거나, 주장하는 경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 단어가 등장한 것은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과 대학생이었던 김상진이 할복할 때였는데, 그는 할복 전에 <양심 선언문>이라는 글을 읽었다.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양심 선언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문서 형태로 등장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일부에서는 김지하 시인이 이보다 먼저 양심 선언을 하였다고 주장하나, 그의 양심 선언은 문서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시대적 구분] 기원을 1975년으로 볼 때, 제1기는 1975년부터 1987년 6 · 10 항쟁 때까지, 제2기는 6.10 항쟁부터 현재까지로 구분할수 있다. 제1기는 주로 대학생들이 정치 상황에 대하여 개인의 소견을 밝히는 형태로, 제2기는 주체가 다양해지고, 선언의 이유도 정 치 상황에서 그가 속한 조직 내부의 부정 부패와 비리들 을 폭로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것은 시민 사회의 성 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6 · 10 항 쟁은 국민적인 저항으로 국가 권력에 대한 시민의 힘을 과시한 사건이고, 형식상으로만 보면 이 시기 이후에 점 진적으로 민주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 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 이후에 양심 선언자들이 국가 권 력이나 해당 조직의 압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를 받 을 수 있을 만큼 시민 사회가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제1기 : 1975년 4월 11일 김상진이 할복 전 낭독한 양심 선언문은 주로 시국에 대한 비분 강개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 부의 대변자가 되어 가고, 이미 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우 리들은 반응 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 우리를 대 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고 있다.····일체 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 국가가 도래 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그의 선언문 에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선포된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와 저항하는 이들에게 자 행되는 무자비한 고문과 폭력, 민청학련 사건을 통해서 무죄한 젊은이들에 대한 사형, 엄혹한 사회 현실에 대한 대학 사회의 침묵 등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이 들의 대응과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 이처럼 제1기에 나타난 양심 선언(다른 사례들은 문서로 발견되지 않음)들은 김상진의 <양심 선언문>과 같이 사회를 고발하고, 이러한 사회에 대한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 는 말 또는 글의 형태가 지배적이었다. 제1기 중후반에 는 학생 운동 조직에서 발표하는 시위의 이유와 주장을 담고 있는 선전 문구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조직의 입장 을 개인이 발표 또는 선전하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따라 서 개인의 도덕적 성찰을 통해, 자신의 심정과 입장을 토 로하는 양심 선언 형식은 퇴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 기의 특징을 정리하면 선언의 주체는 개인, 그리고 그들 의 신분은 주로 학생들이다. 또한 이러한 개인 선언이 주 로 시국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다른 이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성격을 띠었다. 제2기 : 이 시기는 선언의 주체가 학생 · 회사원 · 군 인 · 공무원 · 군무원 · 교사 · 교수 · 의사 등으로 다양해 지고, 선언의 이유도 정치 상황에서 그가 속한 조직 내부 의 부정 부패와 비리들을 폭로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 권력 내부에서 양심 선언자들이 속 출하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공권력의 핵심을 이루는 군 대 · 경찰 · 검찰 · 안기부에서 조직 내부의 부정 부패와 비리를 폭로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또한 그 동 안 성역으로 여겨져 왔던 학계 · 의료계에까지 범위가 넓 어지고 있다. 정치 일변도였던 그 동안의 폭로와 고발이 사회 전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문옥 감사관의 재벌 기업 비업무용 부동산 소유 실 태 폭로(1990), 보안사 이병이었던 윤석양의 보안사 민 간인 사찰 폭로(1990), 백골단과 전경 해체를 주장한 박 석진(1991), 이지문 중위로 대변되는 군 부재자 투표의 부정에 대한 폭로(1992), 한준수 전 연기 군수의 관권 선 거 폭로(1992), 대선 시기 여당 후보의 병역 비리에 대한 손대희 전 중령의 선언(1997), 안기부 내부의 야당 대통 령 후보에 대한 북풍 조작 의혹 폭로(1998), 국방부 조달 본부 군무원 박대기의 무기 부품 구매 실태 폭로(1998) , <중앙일보>의 재벌 편향 및 비리 사장에 대한 옹호 보도 에 대한 오동명 기자의 선언(1999) 사학 비리에 대한 서 울미술고등학교 김학경 교사의 선언(2000) 등 수많은 양심 선언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선언의 주체들은 그들이 속한 조직이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가 어려울 정도로 억압적이고, 내부에서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찾기가 불가능하여 언론이나 시민 단체의 협력을 토대로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특징을 보였다. 또 한 선언의 의도도 부정과 비리들이 국민들의 공동선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의 명리를 위해서 가 아니라 철저히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임을 밝히고 있 다. 이로써 양심 선언이 폭로 대상의 도덕적 권위 실추를 통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이 시기에 주체가 다양해지고, 영역도 광범위해진 것 은 시민 사회의 성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6 · 10 항쟁 은 저항의 대상을 국가 권력에서 사회의 각 부문으로 확 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이전에 종교계와 대학생 중심의 민주화 · 인권 운동에서 사회의 각 부문 운동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 한 것이다. 또한 사회 각 부문 운동의 성장은 국가 권력 에 대응할 수 있는 시민 사회의 형성을 촉진하면서 국가 권력 내부에서 이탈하는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수준까 지 성장하였다. 이로써 사회 각 부문의 양심 선언이 가능해졌다. 이 시기의 양심 선언의 주체와 내용을 살펴보면 국가 권력을 포함하여, 한국 사회 내 대부분의 조직들이 가부 장적 집단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집단주의는 혈연 · 지연 · 학연으로 얽혀 개인의 양심적인 자유를 억 압함은 물론, 개인적인 의사 표현 자체를 봉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한국 사 회는 개인주의 · 집단주의의 대립항에서 집단주의에 속 하는데, 자신이 속한 내집단(in-group)과 자신이 속하지 않은 외집단(out-group)을 구별 짓는 공고한 사회적 틀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체면 · 인간 관계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적 특징을 보인다. 상하 관계에서 수직적 관계 양식 도 매우 엄격하다. 효(孝)와 순종(順從)이 미덕이라는 관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합리적인 관계보다는 온 정주의(patenalism)가 지배하고, 항시 제도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양상을 보인다. 지연과 학연의 결합이 공공연 하여, 타집단에 대하여 극도로 배타적인 성격을 띠는 것 이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될 정도이다.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가 이런 집단주의 문화에 속하기 때문에 양심적인 개인들은 생존을 위해서 조직에 맹종할 수밖에 없다. 조직에서 이탈하기는 거의 불가능한데, 그 가 조직을 이탈하여 다른 조직으로 옮겨 갈 경우 과거 조 직에서의 행태가 전력으로 남기 때문에, 전 사회적으로 집단 내에서 개인적인 행동은 근본적으로 억압된다. 따 라서 개인이 조직의 의사에 반하여 그가 속한 조직의 문 제를 지적하는 것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준의 위험한 행동이 된다. 그런데도 사회 각 분야에서 이런 이탈자들 이 발생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 주의 사회로 이동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개인주의 사 회로의 이동은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압력이 약화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회의 분화를 통한 다원화 경향도 개 인의 행동 범위를 넓히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엄격 한 조직 사회 안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회사 인간, 또 는 조직 인간보다는 개인의 솔선과 창의력을 기반으로 하는 직종들의 탄생, 한국 사회 각 부문의 부정 부패에 대한 해결 의지가 높아지면서 내부 고발 또는 이탈자들 을 배신자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의 고양도 양 심 선언자의 출현을 조장하고 있다. 제2기는 이러한 여 러 가지 사회적인 영향들이 커진 시기이다. 따라서 양심 선언 주체들의 다양화와 빈도의 폭발적 증가는 우연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유 형〕 구속 이전에 사실을 공개하는 경우 : 그 동안 한국 사회 안에서는 각종 조작 사건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조직 사건인데, 정보 기관들이 냉전 현실을 악용하 여 정부 정책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학생과 인사들을 용공 세력으로 몰아 간첩 또는 체제 전복 세력으로 조작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조직 사건은 정보 기관에서 미리 각본을 짜고, 해당자들을 고문하여 허위 자백을 받아 간 첩이나 체제 전복 세력으로 매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 이다. 이외에도 사회 각 부문 운동 참가자들에 대해서도 사실이 왜곡되고, 사건을 조작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작의 가능성이 있는 사건의 연루자들이 체포 후에 고문을 통하여 허위 자백을 하게 될 경우를 대 비하여, 그가 속한 조직원들 앞에서 사건의 전말을 밝히 는 경우이다. 개인이 사회 전체의 불의와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입 장을 밝히는 경우 : 양심 선언은 대체로 개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집단이 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한국 사회 의 경우 대부분 개인이 주체가 된다. 김상진의 경우처럼 당시 사회에 대한 개인의 판단과 이 판단에 기초하여 당 시 사회와 대학의 침묵에 대해 관심과 행동을 촉구하는 것처럼, 초기 양심 선언의 형태들이 이와 같은 유형이다. 조직에 속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이 조직의 비리와 부 정을 외부에 공개하는 경우 : 제2기에 해당되는 대부분 의 사례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집단이나 조직에 속한 개 인이 조직의 목표 실현을 위해 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는 것임에도 불의를 저지르라는 강압을 거부하고, 외부의 힘을 빌려 이를 시정하고자 하는 경우에 자주 행해진다. 일종의 내부 고발이다. 그렇다면 내부 고발을 자체 내에서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정과 비리의 대부분이 조직 내부의 최상 급자, 또는 다수의 조직원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들은 이해 당사자로서 현재의 부패 구조의 원인 제공자 이며, 이를 지탱시켜 나가는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내부 에서 제기되는 비판이나 고발을 수용하기란 거의 불가능 하다. 실제 양심 선언자들은 내부에서 시정을 건의하거나 직접 시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각종 불이익을 당 하는 것은 물론 조직에서 영원히 퇴출당하는 위기를 맞 았다. 또한 폭로자들은 조직을 위해(危害)한 반역자로서 역공을 당하고, 이러한 역공은 조직 내의 이전 투구로 비 치게 만들어 양심 선언을 통하여 밝히고자 하였던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 경우가 허다하였다. 국가 권력을 상대로 하는 경우, 공권력은 권위를 옹호한다는 명분으 로 사실을 은폐하고 내부 고발자들을 부당한 명분으로 구속함으로써 조직으로부터의 이탈을 원천적으로 차단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조직의 이러한 속성과 이 해 당사자들의 공모(共謀)를 통한 사실 왜곡은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 어, 결국에는 내부 고발자들이 외부의 힘을 빌리게 만든 것이다. 물론 내부 고발자들이 양심의 자유에 입각하여 조직 외부에 진실을 밝히는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외부의 여건이 이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실현이 불가능 하다. 이것은 목숨을 건 행위가 되고, 불의한 국가 권력 일 경우 개인의 불법적 구금 · 납치 · 살해 등으로 정보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할 수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양심 선 언이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우선적 조건은 시민 사회 의 성장이다. 시민 사회가 성장하지 않을 경우, 어떠한 형태든 매장되기 쉽고 그 피해는 전적으로 당사자가 짊 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내부 고발자가 살아 남기 위해 정치적인 가치가 높은 정보일 경우 정략 적으로 이를 이용하려는 집단을 움직여 보호를 받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나 대부 분 시의성이 떨어지면 보호를 받지 못한다. 결국 선언자 들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시의성 · 대중 매체의 이 용 가능성 · 후속 조치의 가능성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양심 선언이 기자 회견이나 시민 단체의 지원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다. 사태의 진실도 진실이지만 행동의 결과가 당사자에게 불이익으 로 돌아오는 경우를 방지할 수도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현준희 전 감사원 주사가 1996년 4월 양심 선언을 할 당시 감사원 4국의 주사였다. 그는 효산 그룹 이 수도권 정비 심의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경기도 행정 심판위원회의 결정으로 사업 허가를 받아 지가 상승과 부대 시설 사업 수익으로 수백억 원대의 부당 이득을 취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내었다. 그러나 상급자의 지 시로 감사가 중단되자 이 사실을 폭로하였다. 그는 관련 공무원들에 대한 징계 방침을 확정하고, 이들의 예금 계 좌와 외압 여부 등을 추적하려던 단계에서 갑자기 사건 이 다른 국(局)으로 이송되고, 여러 국을 떠돌다 감사가 중단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이에 대하여 여러 번 감 사 중단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건의를 올렸으나, 번번이 거부당하고 오히려 내부에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하 였으며, 하극상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래서 그는 양 심 선언이라는 마지막 방법을 택하였다. 사실 이 사건 배 후에는 현직 대통령 아들의 최측근과 뇌물을 받은 청와 대의 고위층이 있었다. 이 사건은 대통령의 도덕성에 심 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건은 축소 되고 결국에는 감사 중단을 통하여 유야무야되었다. 게 다가 그는 양심 선언 직후 국가 공무원법의 성실 의무와 복종 의무 등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고, 급기야 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 훼손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의 양심 선언은 국가 권력의 핵심부를 겨냥하고 있 었기에, 오히려 그가 피해를 받았다. 이처럼 국가 권력을 상대로 하는 개인은 높은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큰 시련 을 겪게 되었다. 고발자의 내용이 사실에 근거하고, 실제 진실이라 할지라도 국가 권력은 고발자를 처벌함으로써 조직의 와해를 막고, 국가 권력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하 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국가 권력에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였다. 자신의 과오를 사후에 고백하는 경우 : 이러한 경우에 는 1980년 5 · 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진압군으로 참가하여 시민들에게 발포한 공수 부대 군인이 오랜 뒤에 이 사실을 반성하며 정부와 군이 은폐하고 있는 사실을 공 개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월남전 때 베트남 민간인 학살 에 대한 의혹을 군과 정부가 부인하고 있을 때, 당시 참 전 당사자가 사실을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이 명백히 존재하였던 역사적 사실들을 은폐하고자 하는 국가 나 조직에 대항하여 진실을 밝히는 방식이다. 한국 사회 의 경우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사건으로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경우는 미국 · 영국 · 독 일 · 일본 등 선진국들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 예 로 일본은 731부대를 통하여 중국인 · 한국인 · 만주인, , 심지어 억류한 백인들에게도 인체 실험을 하였다. 피해 자들은 많은데, 정작 가해자들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렇게 수십 년 간을 은폐해 오다, 당시의 가해자였던 일 본군 출신이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사실을 일반에 증언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외에도 피해자는 존재하는데 가 해자가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 명백한 사실임에도 그 가 담자들이 진실을 은폐하기로 공모하여 사실을 밝힐 수 없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러한 경 우는 빈번하게 나타날 것이다. 〔구 조〕 제2기에 나타난 양심 선언의 구조는 다음의 여섯 가지 단계로 구성된다. 이 구조는 폭로자의 전술과 전략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폭로 대상 자들의 비정당화 전략이기도 하다. 제1 단계 : 양심 선언을 단행할 개인이나 소수 집단은 조직이나 집단 내에서 양심의 자유를 거스르는 행위들에 대하여 회의를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불의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와 단절할 결심을 한다. 제2 단계 : 발견된 또는 목격한 불의에 대하여 시정을 요구하거나, 본인이 직접 해결을 도모한다. 이 경우 대부 분 문제의 원인이 하급자에게 있지 않고 상급자에게 있 거나, 조직의 성원들 대부분이 서로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문제의 구조적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 다. 또는 자신이 속한 조직은 더 상위의 조직에 단순히 봉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부패의 사슬을 인지하게 되 면서 공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조직의 구성원들에 게 따돌림을 당하게 되면 갈등을 체험한다. 대부분 따돌 림을 당하고, 심지어 가까운 동료들에게서도 배신을 당 한다. 제3 단계 : 공동선을 위하여 본인 자신과 조직의 희생 이 따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선언의 준비에 들어간다. 이때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증거 자료의 수집과 역공에 대 비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한다. 제4 단계 : 행동에 옮긴다. 제5 단계 : 폭로 대상의 역공이 시작되어 사태의 본질 이 흐려진다. 대체로 이때 역공의 주체들은 본체가 아니라 주변적인 인물이나 조직이다. 폭로 대상이 국가 기관 일 경우 폭로자를 어떤 명목으로든 구속하여 비정당화를 시도한다. 이때 폭로자는 본격적인 시련을 겪는다. 일반 대중들은 진실을 가늠할 수 없게 되고, 그의 행위의 정당 성은 약화된다. 제6 단계 : 대중의 관심이 사라진 상태에서 진실 규명 전쟁이 시작된다. 설사 진실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폭로 자에게 남는 것은 상처뿐인 영광이다. 이렇게 정의로운 행동은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비열 한 행위로 매도되고, 용기는 객기로 치부되기에 이후에 나타나게 될 양심 선언자들의 동기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양심 선언을 하는 이들이 소수에 불과한 이유와 부패 의 구조가 지속성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적 영향〕 제1기의 선언은 양심적인 지식인들에 게 윤리적 의무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다. 개인의 불이 익을 감수하고 공동선을 위해서 시국에 대한 입장을 밝 히는 행위는 건전한 고발과 비판이 존재하지 않았던 당 시에 언론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선언 대상은 전체 한국의 정치 상황이었다. 민주화의 초기 단 계였던 까닭에 일상 영역에까지 관심이 미치지는 못하였 다. 그리고 성격도 양심의 가책을 유발하고, 윤리적 책임 을 요청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제2기는 선언의 빈도와 영역의 광역화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성숙을 반영하고 있다. 국가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고, 고발하는 것은 사회 전 영 역에 걸쳐 시민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인간의 기본권 을 침해하는 구조악들로 초점이 넓혀진 것이다. 이렇게 관심 영역이 광역화되면서 한국 사회 내에서 부당한 특 권을 누리던 성역들이 점차 붕괴되었고, 인권의 보장 수준도 점차 상승해 왔다. 내부 고발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 으로 권력의 치부는 물론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부정과 비리의 고리들이 폭로되고, 감시받지 않는 권력 들도 시민들의 시선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권력 은 시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부패 구조의 청산을 거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양심 선언이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한국 사회의 부패와 비리의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양심의 자유를 거스르는 행동이 가항력적(可抗力的)인 것이었음에도, 불가항력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부패와 비리에 공모자가 되는 것이 결국 양심 선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일깨 워 준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양심 선언은 한국 사회 의 도덕적 수준, 시민 사회의 성숙을 매개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한편 한국 사회 의 부패 구조가 폐쇄적인 집단주의 · 유사 가족주의 · 온 정주의 등으로 얽히고, 그 누구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다는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오히려 절망감을 심어 주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발전과 투명 성 제고를 위하여 내부 고발 행위들을 제도적으로 보장 하고, 당사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법률 제정을 서두르 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사회의 비정상적인 구조악들 을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고하였다는 측면에서는 큰 의의가 있다. 〔의의 및 평가〕 양심 선언은 사회의 민주화 정도가 낮 고 투명성이 떨어지며, 폐쇄적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의사 표현 양식이다. 구조적 불의의 발 단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이미 존재하는 불의에 대하 여는 적극적인 해결을 도모할 때 각 개인의 인권이 보장 되고, 바른 언론이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을 옹호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 모든 지역에서 사회적 약자와 주변화된 계층들은 가혹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리고 국 가 · 기업 · 지배 집단의 비리를 폭로하고, 이들의 사적인 음모를 고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국익을 명분으로 의 사 표현을 제한하고, 오히려 이들을 비정당화하는 경향 을 노골화한다. 정치 선진국들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양심 선언의 상황과 조건은 어느 사회든지 존재하는 것 이다. 그러나 확률적으로 볼 때 개인주의 문화권보다는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이런 현상들이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난다. 한국 사회에서 양심 선언은 사회 정의의 실현과 사회 적 투명성의 실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내부자들이 아니면 밝혀지지 않았을 사회의 어두운 면, 부패와 비리 의 구조를 폭로함으로써, 부패의 고리를 끊게 만들고 근 본적인 해결은 아니더라도 국민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함 으로써 범죄를 줄이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여전히 양 심 선언의 대상은 산적해 있고, 선언자들에 대한 오해와 박대도 여전하다. 그들의 용기는 치기와 소영웅주의, 명 리를 쫓는 기회주의자의 약삭빠른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밝혀 진 사실에 분노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는 손쉽게 망각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태도가 나타나 는 것은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는 공모 의식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심 선언이 특정 시기에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양심 선언은 윤리의 제도화 필요성을 공감하게 만들었다. 서울시에서는 1995년에 전국 지방 자치 단체 의회로는 처음으로 공익 정보 제공자를 보호하는 조례를 청원하였다. 시민 단체들에서도 양심 선언자 보호법을 입법 청원하는 등 한국 사회의 부패 구조를 청산하기 위한 시도를 활발히 벌이고 있다. 이와 같은 윤리의 제도화 시도들은 양심 선언이 일회적이고, 개인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해당 사회의 투명성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제고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양심 선언의 주체들 가운데 신앙인이 적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신앙 생활과 사회 생활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고, 사회 생활과 관련된 윤리적 가르침에도 무지하기 때문에 소속 집 단 내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다할 수 없는 것이다. 신자들의 소극적인 자세도 문제이지만, 교회 전체적으로 예언자적인 역할을 기피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예언직 수행에 충실하였던 것이 선교는 물론 교회의 사회적 위상을 높인 수단이었던 점을 기억한다면, 양심 선언과 같은 현상에 교회가 무관심 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양심 선언은 한국 교회의 사명 수행에 중요한 차원임을 자각하고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가톨릭 사회 운동 ; 사회 문제 ; 사회 정의 ; 양심)
※ 참고문헌  B. Haring, Free and Faithful in Christ : Moral Theology for Clergy and Laity, vol. 3, Light to the world, The Crossroad Publishing Co., 1981(소병욱 역, 《자유와 충실-사제와 신자들을 위한 윤리 신 학》 3, 바오로딸, 1996)/ K.H. Peschke, Christian Ethics-Moral Theology in the Light of Vatican II , C. Goodliffe Neale, Alcester and Dublin, 1986(김 창훈 역, 《그리스도교 윤리학》 1, 분도출판사, 1992)/ 안명옥, 《윤리 신학의 단편적 이해》,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89/ 명동 천주교회, 《한국 가톨릭 인권 운동사》, 분도출판사, 1984/ 천주교 정의 구현 전 국 사제단,《한국 천주교회의 위상》, 분도출판사, 1985/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인권위원회 편, 《1980년대 민주화 운동》 Ⅵ~VIII,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인권위원회, 1987/ 한국정치학회 편, 《한국 현 대 정치사》,법문사, 1995. 〔朴文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