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모 (1921 ~ 1992)

梁漢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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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모.

양한모.

평신도 신학자.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1921년 8월 12 일 황해도 봉산군 서 종면 추진리에서 양 승호와 김화영의 아들로 태어나 봉산군 초하면 대청리에서 성장하였다. 심상소 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 제2 공립고등보통 학교(현 경복고등학교) 에 재학하던 중 엥겔스의 《공산에서 과학으로》를 읽고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36년에는 이재유(李載裕)의 지도를 받으며 조선 공산당에 입당하여 박헌영(朴憲 永)이 주도한 경성콤 그룹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1월 10일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2년 간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3년 10월 출옥한 뒤에도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5년 5월 다시 체포되었고 광복과 함께 석방되었다. 광복 후에는 조선 공산당 재건파에 가입하였고 경성사범대학(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편입하였으나 1946년 6월 '국대안(國大案) 사건' 으로 자퇴하였다. 그 해 여름 남로당 용산 · 마포구당 선전부로 복귀 하여 당 활동을 재개하였고, 1947년 봄 서대문구당부 선전부책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용산구당과 동대문구당의 책임자와 서울시당 부위원장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러나 폭력 혁명을 준비하던 그는 당 노선이 광복을 위해 투쟁하던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갈등하다가, 1949년 9월 16일 체포되자 9월 22일에 폭력 혁명을 위해 제작하였던 모든 무기를 경찰 당국에 내놓고, 남로당 서울시당 지도부와 함께 집단 전향하였다. 그 리고 그 해 9월부터 1951년 4월까지 경찰에 있으면서 군 · 검 · 경(軍檢警) 합동 수사 본부 활동을 통해 공산당 타도에 앞장섰다. 이때 남로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김삼룡(金三龍) · 이주하(李舟河)와 북로당의 남반부 공작책 성시백(成始伯) 등을 검거함으로써 남로당을 와해시키 고, 북로당의 프락치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일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1950년 봄 치안국 경감으로 승진하였으 며, 이듬해 4월 경찰을 사직하고 잠시 장면(張勉, 요한) 국무 총리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그 후 한국기업 부사장 과 태양신문사 부사장을 거쳐 세계 통신사 부사장(1953), 평화신문사 부사장(1958~1961), 그리고 대양증권 사장 (1959~1966)으로 활동하면서 재계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였다. 1960년 4월 이후 장면의 막후 비서로 민주 당에서 활동하였으며, 1962년에는 대한 증권 협회 부회장이 되었다. 1968년 6월 3일 양한모는 현석호(玄錫虎, 요한)를 대부로 정의채(鄭義采, 바오로)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가 톨릭에 귀의하였고, 1971년부터 1975년까지 평신도로 서는 최초로 가톨릭대학 신학부(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에 청강생으로 등록하여 전 과정을 이수하였다. 1971년 가을 가톨릭출판사 부사장을 맡은 그는 쇠퇴일로를 걷고 있던 《가톨릭 청년》을 《창조》(創造)로 개편하여 혁신적 인 기획으로 한국 최고 지성지로 발돋움시켰다. 또한 그 해 9월 25일 크리스찬 사상 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72년 3월 《창조》 4월호에 김 지하의 시 <비어>(蜚語)가 발표된 것이 문제가 되어 중 앙 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양한모는 평신도를 대상으로 강좌와 세미나를 개최하며 연구소 일에 전념하였으며, 신학 신도론의 탐구와 공산주의 비판 및 통일 사목 운동을 펼쳐 나갔다. 1972년부터는 평신 도 사도직 협의회 활동에 투신하였으며, 1975년부터 1978년까지는 한국교회사연구소 후원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80년에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사 업위원회 기획위원회 위원장을, 1982년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기획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88년에는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평화의 날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 등 평신도 대표로 크게 활약하였다. 1990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에도 《신도론》의 증보판을 준비하는 등 열성을 보였으나, 채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92년 10월 8일 사망하였다. 1997년에는 미망인 홍 윤숙(洪允淑) 등 유족들이 고인의 유지에 따라 가톨릭 신학 연구와 교회 내 학문 발전을 위한 기금을 가톨릭신 문사에 기탁함으로써 가톨릭 학술상이 제정되었다. "사회 한복판에서 행동하는 신도야말로 하느님의 선교를 대 표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던 양한모는 현실이라는 핑계로 종교와 생활을 분리하는 평신도들에게 자신의 전 삶의 과정을 통하여 신앙의 실천을 보여 주었다. 저서로는 《제3 세력의 본질론》(1968) · 《복음과 사회와 교회》 (1974) · 《신도론》(1982) ·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생각한다》(1984) · 《교회와 공산주의》(1987) · 《민족 통일 과 한국 천주교회》(1990) · 《조국은 하나였다?》(190) · 《신도, 그 하찮은 존재인가》(1990) · 《마르크스에서 그리 스도에로-양한모 회고록》(1992) 등이 있다.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184호(1990. 9) ; 304호(2000. 9), 한국 교회사연구소/ 오태순 신부 외 엮음, 《오늘을 사는 신도- 양한모 선생 유고집》, 기쁜소식, 1993/ <가톨릭신문>, 1992. 10. 18 ; 1998. 11. 29.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