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 본당
彥陽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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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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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언양 성당 전경(왼쪽) 및 델랑드 신부와 함께 성당 터를 둘러보고 있는 보드뱅 신부.
부산교구 소속 본당. 경남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422 소재. 1926년 12월 5일 부산(현 범일) 본당으로 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그리스도 왕. 관할 구 역은 언양읍, 상북면, 삼남면, 두서면, 두동면 전 지역과 양산시 하북면, 삼동면 일부 지역. 공소는 삼정, 배내, 두동, 전업, 미호, 사촌, 내와, 봉계, 임보, 하선필, 상선 필, 직동, 길천, 순정, 궁근정, 살티, 소호 등 17개소. 〔교 세〕 1957년 1,438명, 1963년 2,188명, 1970년 1,984명, 1976년 1,500명, 1982년 1,729년, 1989년 1,950명, 1994년 2,535명, 1999년 2,916명. 〔역대 신부〕 초대 보드뱅(E. Beaudevin, 丁道平) 에밀리오(1926. 12~1939. 5), 2대 코르데스(M. Cordesse, 公) 마리오(1939.5~1940. 4) , 3대 프루아드보(R. Froidevaux, 趙文道) 라이 문도(1940. 4~6) 4대 정수길(鄭水吉) 요셉(1940. 6~1943.2), 5대 유흥모(柳興模) 안드레아(1943. 2~1947), 6대 이 성만(李性萬) 이냐시오(1948. 8~1952. 9) 7대 최병선(崔 炳璇) 요한(1952. 9~1953. 11), 8대 김재석(金在石) 요셉 (1953. 11~1956. 4), 9대 김영제(金永濟) 요한(1956. 4~ 1962. 6), 10대 이돈우(李敦雨) 레오(1962. 6~1967. 1), 11 대 신윤우(申允雨) 갈리스도(1967. 1~9), 12대 배상섭(裴 尚燮) 요한(1967. 9~1971. 1), 13대 이동훈(李東勳) 안토 니오(1971. 10~1972.4), 14대 김성도(金成道) 모세(1972. 11~ 1976. 11), 15대 최영철(崔榮喆) 알로이시오(1976. 11~1979.2), 16대 권지호(權支浩) 프란치스코(1979. 2~1980. 2) , 17대 김승주(金承柱) 요한 그리소스토모(1980. 2~1981.2), 18대 하용달(河龍達) 안드레아(1981. 2~1983. 2) 19 대 염봉덕(廉鳳德) 프란치스코(1983. 2~1986. 2), 20대 김 영곤(金英坤) 안드레아(1986. 2~1991.2), 21대 김창대(金 昌大) 임마누엘(1991. 2~1992. 2), 22대 김영규(金永圭) 안셀모(1992. 2~1993.2), 23대 황태웅(黃泰雄) 요셉(1993. 2~1994.2), 24대 김정욱(金正旭) 바오로(1994. 2~1996. 2) 25대 강호성(美豪星) 바오로(1996. 2~1998. 2), 26대 박 상운(朴相云) 바오로(1998. 2~현재). 〔전사 및 공소 시대〕 일설에는 이 지역 출신 오한우(베 드로)가 1790년에 영세한 뒤 신유박해 때 충청도 지역 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백지사(白紙死)를 당했으며, 오한우와 같이 영세한 김교희가 박해를 피해 내간월 불당골(佛堂谷, 현 울주군 상북면 登億里)로 숨어 들어 교우촌 을 형성하였고, 그리하여 언양 지역에는 이미 1800년대 초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교회측 자료에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또 백지사가 병인박해 때 와서야 비로소 시행된 사형의 한 방법이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그 근거는 매우 희박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경상도 남부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언양 지역은 그보다 훨씬 더 늦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지역 에는 경남 최초의 공소인 내간월 불당골 공소가 있었는데, 불당골은 김재권(金在權, 프란치스코)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 온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신앙 공동 체를 형성했던 곳이다. 불당골은 선교사들을 맞이할 무렵 공소로 변모하였으며,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가 방문하여 차례로 공소를 치르던 1850년대 말에는 언양 일대가 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변모되어 간월, 죽림(대재, 죽령, 죽림 골), 탑곡, 예씨네골, 진목정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 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다.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이 지역 최초의 순교자는 김사집(필립보)으로, 그는 1866년 11월 진영 포졸에게 체 포되어 이듬해 5월(음)에 순교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이어 언양 대재〔竹嶺〕교우촌에 살던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루가), 이양등(李陽 登, 베드로) 등 3명이 1868년 9월 14일(음 7월 28일)에 체포되어 울산 장대(將臺)에서 순교하였다. 박해가 끝난 뒤 교우촌이 재건되면서 1882년 대구(현 桂山洞)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가 1883년에 살 티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때의 신자수는 38명이었다. 이듬해에는 언양읍 공소도 설립되었다. 이 지역은 조조 (M. Jozeau, 趙得夏) 신부가 1890년 초 부산 절영도에 정 착하여 부산(정식 명칭은 초량) 본당을 설립하게 되면서 새 본당 소속이 되었다. 그 후 1898년 1월경 명례 임시 본당(현 밀양 본당)으로 잠시 이관되었다가 1901년에 부 산 본당 관할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1904년 6대 주임 르 장드르(L.LeGendre, 崔昌根) 신부 때에는 살티 공소 · 언 양읍 공소 외에 순정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이 세 공소의 신자수는 153명에 달하였다. 〔본당 설립과 발전〕 언양 지역의 신자들은 이미 1888 년부터 본당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박우양(朴遇陽, 가브리엘) · 김문익(金文 益, 안드레아)을 비롯한 이 지역 신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1926년 12월 5일 언양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 로 보드뱅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듬해 4월 4일 정식 임 명을 받고 5월 14일 본당에 부임한 보드뱅 신부는 부임 즉시 성당 신축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929년 봄 공사 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 하고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 을 거행하였다. 1940년 10월에 성가대, 1952년 8월에 는 성모회가 조직되었다. 1954년 1월에 '소화유치원' 을 개원하였으며, 1956 년 4월에는 울산(현 복산) 본당을 분리하고 356명의 교 적을 이관하였다. 1957년에 강당을 마련하였고, 1962 년에 성모상을 건립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삼정 · 유 촌 · 중리 · 소호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다. 1974년 8월 25일 '안나유치원' (옛 소화유치원) 건물을 완공하였으며, 1976년 11월 5일에는 수녀원을 완공하고 축복식을 거 행하였다. 1979년 11월 18일 세 명의 동정녀가 기증한 부지에 기증자의 이름을 따 '안나 데레사 회관' 을 건립 하였으며, 1981년 5월 24일에는 신용 협동 조합을 창립 하였다. 그리고 1986년 11월 9일에는 죽림굴 사적지를 발견하였으며, 1989년 7월 20일에는 사제관을 완공한 뒤 이듬해 12월 4일 옛 사제관 자리에 '신앙 유물 전시관' 을 개관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임 신부의 잦은 이동으로 본당 공동체 역시 활성화되지 못하고 다소 침체했었다. 이에 따라 1998년 2월 26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상운 신부는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 부산교구 ; 밀양 본당 ; 범일 본당 ; 보드뱅, 에밀)
※ 참고문헌 金九鼎, 《천주교 경남 발전사》, 대구문화출판사, 1967/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大邱本堂百年史(1886-1986)》, 계산 본당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위원회, 1986/ 마백락, <경상도 교 회와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 교회사연구소 편, 《教區三十年史》, 천주교 부산교구, 1990/ 부산교 구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教區年報》, 천주교 부산교구, 1984/ 《경 향잡지》 843호(1936. 12. 12), pp. 727~730/ 한국교 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신앙 전래 이백년사- 彥陽天主敎會史》, 彥陽天主敎會, 1993. 〔편찬실〕
